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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 소식들

3부

작성자변영기|작성시간26.06.08|조회수44 목록 댓글 0

“남편이 예수 안에서 잠들기 전날 밤, 두 어린 딸에게 남긴 그의 작별 인사는 아직도 내 귀에 울린다. ‘잘 자거라, 내 작은 사랑들아. 아침에 다시 보자.‘ 그가 마지막 가쁜 숨을 내쉴 때 내 손을 붙잡았던 그의 손길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하다.” — 왕대아 선교사의 제3부 회고담은 여전히 가슴을 저리게 합니다. 남편인 왕아시 목사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날때 33세였고, 그녀는 28세였습니다. 남편과 사별 후, 왕대아 선교사는 교회 안팎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린 두 딸을 데리고 한반도로 돌아갑니다. 

이 글은 Youth’s Instructor, 1965년 8월 31일자, 9-11쪽에 있습니다: https://documents.adventistarchives.org/Periodicals/YI/YI19650831-V113-35.pdf

* * *

남편의 건강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름 더위와 장마철이 곧 다가오고 있었다. 위원회가 모였다. 그들은 인도하심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 끝에 우리가 미국으로 돌아가도록 결정했다. 3주 뒤 우리는 조선인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이 잠시 중단되었을 뿐이라고 느꼈고, 주님께서 남편을 고치시고 우리를 위해 개입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우리가 예약한 기선은 예정일보다 일주일 늦게야 출항했다. 우리는 고베의 작은 일본식 호텔에서 여드레를 기다렸다. 그해 7월의 그 한 주는 기록상 가장 더운 주간 중 하나였다. 달러 증기선 회사의 차이나호에 승선할 무렵, 우리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그 기선에는 북중국의 옛 독일령이었던 칭다오에서 온 독일 여성들과 아이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일본은 독일 남자들을 억류한 뒤 여자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배는 앞뒤로 요동치고 좌우로 흔들렸다. 선실은 덥고 답답했다. 많은 승객이 밤을 갑판에서 보냈고, 구명정 안에서 잠을 잤다. 아이들은 선실에서 노는 것에 만족했다. 우리도 대부분의 시간을 따로 지내며 선실에 머물렀다. 갑판으로 올라가 보려는 시도조차 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저 바다를 건너가는 일만으로도 우리가 가진 모든 시간과 기운이 다 필요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친구들이 우리를 오클랜드의 작은 집으로 데려가 쉬게 해 주었다. 우리는 신선한 과일과 유제품, 그리고 반갑게 맞아 주는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즐겼다.

1916년 7월 29일 안식일 오후, 오클랜드 교회에서는 아시아로 향하는 많은 선교사들을 위한 송별 예배를 포함하여 큰 선교 집회가 열렸다. 북캘리포니아 합회장이었던 J. E. 맥엘헤니 목사가 예배를 주관했다. 그는 남편에게도 몇 마디 해 달라고 권했다. 후에 맥엘헤니 목사는 남편의 설교에 대해 이렇게 썼다.

“특별히 감동적이었던 것은 웽거린 형제의 말씀이었다. 거룩한 전투의 흔적과 상처가 그의 몸에 뚜렷이 보였기 때문이다. 병에 걸려 목소리조차 겨우 들릴 정도였지만, 그는 조선 남부에서 수년 동안 수고한 일과 그곳에 남겨 두고 온 200명의 신자들에 대해 말했다. 그는 속히 건강을 회복하여 자신의 선교지로 서둘러 돌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전선에서 쓰러진 이들에게 모든 존경을 바친다! 그들이 잠시 쉼과 건강을 구하러 우리에게 돌아올 때, 우리는 그들의 희생이 가르쳐 주는 교훈을 깊이 배우고, 그들의 수고에 함께 참여하기를 힘써야 한다.”

일주일 뒤 우리는 밀워키로 향했다. 어린 시절의 고향에 가까워지며 오래전 익숙한 풍경들을 지나치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7년 동안 떨어져 지냈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루퍼스의 어머니가 시력을 잃어 손녀들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는 슬픔이 어려 있었다.

그럼에도 즐거운 2주가 빠르게 지나갔다.

건강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우리에게 난감한 문제들을 가져왔다. 우리는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확신했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았다.

루퍼스는 위스콘신주 워와토사의 결핵 요양소에 들어갔다. 선교사 출신 친구 프랭크 밀스는 콜로라도의 높고 건조한 기후 속에서 같은 병과 성공적으로 싸우고 있었는데, 우리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적으로 회복하고 있는 콜로라도 스프링스로 오는 것이 어떻습니까? 기후가 좋습니다. 잠잘 수 있는 베란다가 딸린 작은 집들도 적당한 가격에 구할 수 있습니다. 미시간호 근처의 춥고 습한 기후보다 여기에서 훨씬 나을 것입니다.”

대총회 형제들과 의논한 뒤, 우리는 11월 말 콜로라도로 떠났다. 기차 시설은 훌륭했다. 어느 역에서 10분 동안 정차하게 되었을 때, 루퍼스와 다른 여행자 한 사람이 편지를 부치려고 객차를 나섰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그들이 말했다.

그들이 없는 사이, 우리 기차는 급행열차를 통과시키기 위해 측선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급행열차가 출발하는 것을 보고 자기들이 타야 할 기차인 줄 알고 그 열차에 올라타 버렸다.

기적이 울리고 우리 기차가 출발할 시간이 되었을 때, 아이들과 나는 아빠가 우리에게 돌아오기를 애타게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을 달래며 나는 말했다. “아빠는 곧 오실 거야. 아마 이야기할 사람을 만난 모양이야.”

시간이 지나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나는 걱정이 되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나는 그의 난처한 상황을 알리는 전보를 받았고, 목적지까지 계속 가라는 말을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가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도착했을 때, 프랭크 밀스가 역으로 마중 나와 있었다. 두 어린 딸과 함께 역 승강장에 홀로 서 있는데, 한 음성이 속삭이는 듯했다. “너는 남편 없이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왔다. 또한 남편 없이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누가 속삭였는지 보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자 스스로에게 물었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날 늦게 프랭크가 남편을 만나자, 그는 우리를 노브힐에 있는 작은 집으로 데려갔다. 우리는 그곳에서 8개월 동안 살게 되었다. 루퍼스는 휴식 요법을 시작했다. 수면용 베란다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영적인 가치들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참으로 병상에서 마주하는 위기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경험이다.

나는 수많은 집안일로 분주했다. 가장 난감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제한된 예산으로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밤이면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작은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강 위에 있거나 폭풍 치는 바다 위에 있는 듯했다. 언제나 남편은 배 밖으로 떨어졌다.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그는 팔을 뻗어 붙잡을 만한 것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바다는 늘 그를 삼켜 버렸고, 그는 사라졌다.

그림자가 짙어지고 우리 주위를 에워쌀수록 우리는 위로를 얻기 위해 예수님께 매달렸다. 많은 기도에도 불구하고 루퍼스는 날마다 더 약해졌다. 마침내 의사가 내게 남편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이제 지상에서의 삶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대화를 할 날이 왔다.

나는 우리의 여덟 번째 결혼기념일 전날 밤에 그 말을 전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할 일을 쉬고 부활한 성도들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다만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소.”

그러고는 덧붙였다. “내가 죽어야 한다면 행복하게 죽고 싶소.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그리스도인의 소망 안에서 기뻐합시다.”

우리는 아이들을 위한 계획과 내가 조선으로 돌아갈 일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했다. 만왕의 왕께서 즉위하시는 일과 크고 흰 보좌 앞에서 이루어질 위대한 재회는 그가 가장 즐겨 이야기하는 주제가 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부탁한 것 가운데 하나는 내가 프랭크 A. 브렉 부인의, 그가 가장 사랑하던 찬미를 연주하고 불러 달라는 것이었다.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린 주
대면하여 만날때에 나의 기쁨 어떠랴
후일 주를 대면하여 만날때가 오리니
영광 중에 대면할때 나의 기쁨 어떠랴“

마지막 며칠은 더디게 지나갔고, 밤은 더욱 더디게 흘렀다. 구주의 사랑에 대한 남편의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어둠 속의 밝은 별처럼 빛났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그는 자신의 생애를 향한 주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수 안에서 잠들기 전날 밤, 두 어린 딸에게 남긴 그의 작별 인사는 아직도 내 귀에 울린다. “잘 자거라, 내 작은 사랑들아. 아침에 다시 보자.” 그가 마지막 가쁜 숨을 내쉴 때 내 손을 붙잡았던 그의 손길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하다.

내가 그 힘겨운 경험을 지나온 지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때 나는 왜 겨우 서른세 살이었던 남편이 생명을 내려놓도록 부름받았는지, 또 왜 나는 살아 있도록 허락받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머지않아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참되며, 시련의 시간에 그분의 위로의 팔이 우리를 감싸 안는다는 사실이다.

그 뒤로 불확실한 몇 주가 이어졌다. 나는 부모님 가까이에 있으려고 밀워키로 돌아갔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한 채, 나는 낙담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놀라운 경험을 했다. 아주 오래전 그 밤, 내 구주를 얼굴과 얼굴로 뵙고 그분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던 그 밤을 나는 얼마나 생생히 기억하는지 모른다.

꿈속에서 나는 구주께서 내 침대 발치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분은 나를 다정히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내 아이야!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모든 일이 잘될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나를 동정하시는 예수님, 나의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고, 그분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분의 팔이 나를 감싸 안는 것을 느낀 경험은 내가 언제까지나 소중히 간직할 일이다.

며칠 뒤 대총회에서 편지가 왔다. 내가 선교지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가 마련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기쁜 소식을 전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어린 자녀를 둔 젊은 과부를 선교지로 보낸 적이 없지만, 자매님의 경우에는 자매님과 친자매가 함께 가정을 꾸릴 계획이므로 만족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내 언니 미미 샤르펜버그(한국명: 사엄태)는 1906년 말, 스물세 번째 생일이 지난 지 며칠 뒤 조선으로 갔다. 그녀가 부름을 받기 전날 밤,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꿈을 주셨다. 그녀는 그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흰옷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물줄기 건너편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두 손을 뻗어 나를 향해 자기들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대총회로부터 조선에 선교사로 가 달라는 초청 편지를 받았다. 나는 즉시 그 꿈과 방금 받은 편지 사이의 관련성을 보았다. 하지만 조선이라니! 나는 그곳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지도로 찾아보니 바다 건너편에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조선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위스콘신주 오시코시의 공립 도서관으로 서둘러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길고 흰, 흐르는 듯한 옷을 입고 높은 모자를 쓴 사람들의 삽화가 들어 있는 책들을 발견했다. 그림 속 사람들은 꿈에서 본 사람들과 똑같았다.

미미는 말했었다. “내 마음에는 주님께서 나를 조선에서 봉사하도록 부르신다는 데 아무 의심도 없었다.” 그리고 나의 마음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조선으로 돌아가도록 부르신다는 데 아무 의심도 없었다.

아이들과 나는 캐나다 태평양 증기선 회사의 여객선 엠프레스 오브 러시아호에 임시 예약을 해 두었다. 밀워키의 연방 관리들은 내 여권 신청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다. 한 사람이 외쳤다. “그런 곳에 가겠다니요!”

그 관리가 물었다. “조선이 은둔국이며 아직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또 다른 사람은 내가 그곳에 고립되어 국무부의 짐이 되고, 결국 정부가 나를 미국으로 데려와야 할까 두렵다고 말했다.

첫 번째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젊은 여성이 어떻게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조선 같은 곳으로 갈 수 있습니까? 자녀들의 교육 문제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그는 좀 더 부드러운 태도로 물었다. “결정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나는 더듬거리며 몇 마디로 조선으로 돌아가려는 목적을 설명했다. 남편이 내려놓은 일을 이어받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리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대총회가 나의 생계와 교통편을 책임질 것이라고 그에게 확신시켰다.

때가 되어 여권과 필요한 서류들이 도착했다. 아이들과 나는 11월 말 기차를 타고 밀워키를 떠나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밴쿠버로 향했다.

어린 딸들은 침대칸에 포근히 몸을 웅크리고 곧 깊이 잠들었다. 그러나 나는 잠들 수 없었다.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남편이 그리웠다. 그는 늘 여행과 관련된 세세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해 주었다. 이제 그 모든 의무가 내 몫이었다.

아침에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서 기차를 갈아탈 때, 나는 친절한 젊은 여성을 만났다. 그녀가 물었다. “어디로 가시나요?”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짐을 보고 해외로 가시는 분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어요. 궁금해서 여쭤본 거예요.”

잠시 뒤 그녀가 말했다. “저도 조선으로 가는 길입니다. 감리교 선교부 소속으로 첫 선교 임기를 위해 나가는 중입니다.”

다음 날에는 영국 출신의 구세군 여성 장교 한 사람이 기차에 올랐다. 그녀는 두 번째 봉사 임기를 위해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주님께서 이러한 동행을 마련해 주셨다고 믿는다.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누고 경험을 나누며 시간을 빠르게 보냈다.

북태평양을 건너는 여행은 폭풍우가 심했다. 파도는 높이 치솟아 우리 여객선의 갑판 위로 굴러넘쳤다. 배 안은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하던 러시아 승객들로 붐볐다.

우리는 러시아 여성 한 사람과 선실을 함께 썼다. 배가 심하게 흔들리고 요동치는 동안 대부분의 승객들은 선실에 갇혀 지냈다. 선박용 트렁크와 짐들이 선실 바닥을 가로질러 미끄러지고, 나는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난간을 붙잡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폭풍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듯 위쪽 침대에서 놀았다.

2주 뒤 배가 요코하마에 닿고 우리가 탑승교를 내려왔을 때, 나는 폭풍우 치는 항해 가운데 우리를 지켜 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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