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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 소식들

4부

작성자변영기|작성시간26.06.08|조회수28 목록 댓글 0

"갑자기 그녀는 방 구석에 놓여 있던 돌을 집어 들고 나를 향해 돌아서더니 외쳤다. '나는 네가 싫다! 네가 싫다! 너를 죽이겠다!'" -- 서울 선교지에서 이러한 경험을 담은 왕대아 선교사의 제4부 회고담은 여전히 감동이 넘칩니다. 이 글에는 함껫 서울에서 살며 선교 사업을 하던 언니 사엄태 선교사과 선교지에서 얻은 병으로 사별하는 이야기와 서울에서의 역동적인 활동을 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Youth's Instructor, 1965년 9월 7일자, 9-11쪽에 있습니다: https://documents.adventistarchives.org/Periodicals/YI/YI19650907-V113-36.pdf

* * *

1917년 12월 12일 밤, 우리는 서울에 도착했다. [원문에는 1919년으로 되어있으나 1917년이 맞는 해이다.] 내가 남편을 묻은 지 여섯 달 뒤였고, 우리가 휴가를 떠난 지 열여덟 달 뒤였다. 언니 미미(한국명: 사엄태)와 나는 함께 살아갈 계획을 세우며 자정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니는 선교사 주택 중 한 채의 위층 방 세 개를 쓰고 있었고, 당분간 우리는 그곳에서 언니와 함께 지내기로 했다.

가정을 꾸리는 것만이 내게 요구된 일은 아니었다. 남편이 내려놓은 일을 계속하고 싶었던 나는 이제 전임 선교부 직원이 되어 있었다.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두 가지 책임을 동시에 감당해야 했으므로, 시간을 매우 신중하게 배분해야 했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내가 일하러 나가 있는 동안 아이들을 맡길 수 있는 믿을 만한 여자 보모를 찾는 것이었다.

미미는 깊은 그리스도인 경험을 누리고 있었고, 무거운 책임을 지고 여러 장애물과 싸우고 있었다. 사랑하는 언니와 다시 만나게 된 기쁨은 오직 언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흐려졌다.

1월과 2월에는 언어를 다시 익히고, 교사의 도움을 받아 조선어로 성경 공부 자료를 준비했다. 이른 봄, 나는 조선인 여성 성경교사 오 훌다와 함께 서울 시내에서 일을 시작했다. 우리는 더위 속에서나 추위 속에서나, 큰길에서나 작은 길을 걸어 다니나, 여성들을 방문하고 복음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공부했다. 우리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집도 방문했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진흙벽에 초가지붕을 얹은 작은 집들도 찾아갔다.

조선 여인들과 함께 바닥에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참으로 가슴 벅찬 경험이었다. 우리는 여러 주 동안 어느 윤 부인의 집에서 모였다. 그녀는 구세군의 영향력 있는 전직 장교였으며, 그 단체의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함께 공부할 여성들이 열두 명 있었다. 마음과 정신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고, 그들 모두가 침례를 통해 주님을 따랐다.

E. J. 어쿼하트(한국명 우국화) 목사와 그의 가족이 서울로 이사 오자, 학령기의 여섯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할 계획이 세워졌다. 우리 아이들의 교육이 소홀히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은 참으로 안심되는 일이었다.

초여름, 내가 열이 나기 시작하고 끈질긴 기침이 생기면서 내 앞길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콜로라도 스프링스를 떠나기 전, 의사는 내게 “당신의 폐는 종소리처럼 깨끗합니다”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이제 다른 의사는 이렇게 진단했다. “결핵 증상이 보입니다.”

“결핵이라니요!” 나는 외쳤다. “결핵!” 그 말을 들었을 때처럼 평생 무서웠던 적은 없었다.

“남편처럼 내가 이 병에 쓰러진다면, 아버지 없는 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나는 눈물 속에서 부르짖었다.

“내가 선교 위원회에 실망을 안겨 주게 될까? 그들이 나를 고국으로 돌려보내야 할까?” 나는 울며 기도했다. “사랑하는 주님, 제가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제가 조선에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주소서.”

고통스러운 기도 가운데 나는 내 삶을 다시 주님께 바쳤고, 내 남편을 빼앗아 간 원수와 싸워 승리하기로 결심했다.

동료 선교사들은 매우 친절했다. 네 가족이 세 채의 집에 비좁게 들어가 살아야 했기에 주거 상황은 어려웠다. 선교위원회는 우리를 위해 수면용 베란다가 딸린 새 집을 한 채 짓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이었다. 새 집은 나뿐 아니라 더 많은 프라이버시가 필요했던 언니 미미에게도 편안한 생활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우리가 함께 살려던 계획은 예상했던 만큼 쉽지는 않았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일정에 따라 움직였다. 열대성 스프루(소장을 약하게 하여 설사를 계속하게 하는 병)와 아메바성 이질로 고생하던 미미는 특별 식단을 따라야 했다. 아이들과 나는 더 영양가 있는 식사가 필요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나는 결핵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내 마음에 그토록 소중했던 사역 곁에 머물 수 있었다. 이 경험을 지나는 동안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셨다. 때때로 그분이 너무 가까이 계셔서, 마치 내가 그분의 손에 내 손을 얹고 있는 듯했다.

그해 말, 우리의 남동생 윌리엄 A. 샤르펜버그와 그의 아내 캐서린이 상하이로 선교사로 가는 길에 서울에 잠시 들렀다. 이는 우리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1919년은 조선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해였다. 1월 20일, 조선의 마지막 황제였던 이(Yi) 황제가 의문의 상황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관한 소식은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국장은 3월 3일로 정해졌다. 장례식이 있기 6주 전부터 사람들은 큰 시위를 위해 비밀리에 조직되었다. 3월 1일, 약 20만 명의 조선인들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몰려왔다. 그들은 10년 동안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고, 이때 전 세계를 향해 독립에 대한 열망을 선포했다.

일본군은 조선 깃발을 들고 “조선 만세!”를 외치는 군중 속으로 돌진했다. 수천 명의 애국적인 조선인들이 체포되고, 채찍질당하고,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것은 혼란과 난처함의 시기였다.

이 어려운 시기가 지난 뒤에도 언니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자, 언니에게는 이른 휴가가 허락되었다.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사(Sa) 부인으로 알려졌던 미미는 12년 동안 봉사하며 사람들의 호의를 얻었다. 그녀가 조선에서의 사역에 남긴 마지막 공헌은 『부조와 선지자』를 번역한 일이었다.

가능한 한 빨리 의사의 치료를 받고 싶었던 언니는 워싱턴 요양원으로 서둘러 갔다. 그곳에는 이미 전에 미미의 기력을 갉아먹던 병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H. A. 밀러 의사가 의료 책임자로 있었다.

그러나 미미는 겨우 서른다섯 살의 나이에 최고의 희생을 치렀다. 언어를 알고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헌신적인 선교사가 왜 죽도록 허락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나는 큰 격려가 되는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나는 잘 회복되고 있고 훨씬 힘이 난다. 의사도 내가 가까운 장래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었어.”

언니가 세상을 떠난 날, 나는 특이한 경험을 했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밤이었기에 나는 그 일을 잘 기억한다. 마치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얹은 것처럼, 나는 깊은 잠에서 갑자기 깨어났다. 어둠 속에 누운 채 머리부터 발끝까지 떨고 있을 때, 거룩한 고요가 내 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신적 임재를 의식했고, 한 음성이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네게 사랑하는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다.”

마음이 어지러워 나는 기도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잠이 들었고, 꿈속에서 흰 눈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내 어머니와 닮은 모습이 들어 있는 관을 보았다.

나는 다시 깨어났다. 고향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했고, 어머니가 아프신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그날 하루 종일 이상한 감각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조용한 태도로 일을 해 나가며 그 묘한 느낌을 떨쳐 버리려 했다. 당시 인플루엔자 유행병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우리 주변에서도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죽은 이를 애도하는 울음소리가 밤낮으로 들렸다. 심한 긴장 속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이상한 느낌을 신경 탓으로 돌렸다.

2주 뒤 언니의 죽음 소식을 받았을 때, 나는 예수님께서 “네게 사랑하는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다”고 내게 속삭이셨던 바로 그 밤에 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의 5년은 감격과 승리로 빠르게 지나갔다. 친절하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몹시 필요로 하던 때에 예상치 못한 큰 선물을 보내 주셨다. 내게 그것은 우리에게 오는 경험들의 때를 정하시는 하나님의 또 하나의 기적과 다름없었다.

밀워키 교회에는 외로운 노인이 한 분 살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가난한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가 아는 한 그에게는 살아 있는 친척이 없었다. 생전 나의 남편은 이 노신사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었고, 자주 찾아가 그를 위해 작은 일들을 해 주었었다.

그 노인이 세상을 떠난 뒤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 유언 집행자는 그가 내 남편에게 367달러를 유산으로 남겼다는 것을 알렸다. 그 돈은 고인의 법적 상속인인 나에게 보내졌다.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나는 하늘 아버지께서 과부와 고아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것을 안다. 또한 보상을 생각하지 않고 베푼 작은 친절의 행위들이 큰 배당을 가져온다는 것도 안다.

조선에서의 두 번째 봉사 기간은 수많은 활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안식일학교 반을 가르치고, 가정 집회를 인도하고, 귀신 들린 여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성경 교사들을 훈련하고, 수확운동 모금 활동을 하고, 번역하고, 선교위원회 일을 했다. 비그리스도교 땅에서 주님의 개인 대표자로 일한다는 것은 참으로 귀중한 경험이다.

선교 사업은 나에게 놀라운 축복이었다. 나는 수행해야 할 임무가 많을 때만큼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모든 임무는 그 다음 임무 하나와 새로운 조선어 어휘를 함께 가져다주었다. 충성스러운 현지인 일꾼들의 헌신적인 협력이 없었다면 그 많은 책임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조선인 동역자들과 손잡고 일하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6월 어느 날, 한 불교 여승이 작은 보따리를 손에 들고 우리 집으로 이어지는 길을 올라왔다. 그녀는 말문이 막힌 듯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미소 지으며 물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며칠 동안 당신과 함께 지내러 왔습니다. 당신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습니다. 또 당신의 예수에 대해, 그리고 영원한 복을 찾는 길에 대해 배우고 싶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동안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머리를 깎은 그 젊은 여인을 내 집에 들여, 우리가 날마다 어떻게 살고 일하는지 보게 하기로 했다. 그녀와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복음 이야기를 읽을 수 있도록 쉬운 한글을 가르치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안식일학교와 교회 예배에 참석하기를 열망했고, 우리는 그녀가 그리스도 편에 서게 될 날을 고대했다.

그러나 오~! 어느 날 그녀는 사라져 버렸다. 몇 달 뒤, 은밀한 소문을 통해 그녀가 금강산의 한 불교 사찰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새벽 시간에 경건한 이들을 예배로 부르는 수석 종지기로서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내 빛나는 기억들 가운데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귀신 들린 여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느 여름 아침, 성경교사 오 훌다가 말했다. “왕 선생님, 악한 영에 사로잡힌 여인을 위해 기도하러 저와 함께 가 주십시오.”

그녀는 곁에 있던 나이 많은 여인을 향해 말했다. “김 집사님께도 그 여인을 위해 함께 기도하러 가자고 부탁했습니다. 어젯밤 한 친척이 제 집에 와서 자기 자매를 위해 기도하러 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분은 매우 어려운 경우입니다. 선생님도 저도 알다시피, 귀신 들린 사람들은 끈질긴 기도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 없이는 자유롭게 되지 못합니다.”

잠시 뒤 그녀가 덧붙였다. “하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여 무엇이든 구하면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기도합시다.”

얼마나 큰 도전인가! 귀신 들린 여인을 위해 기도하다니!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이 도전에 맞설 수 있을까? 내 삶에 주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가로막을 만한 것이 있을까?”

나는 두 여인을 따라 인구가 밀집한 주거 지역으로 갔다. 그 집은 그 동네의 대부분 집보다 나았다. 방 안에 들어서자, 우리는 팽팽하고 적대적인 분위기를 느꼈다. 그 여인은 우리에게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열린 문 너머로 보인다고 주장하는, 나무에 앉아 있는 영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바닥에 앉아 익숙한 복음 찬미와 기도 찬미를 함께 부르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청했다. 갑자기 그녀는 방 구석에 놓여 있던 돌을 집어 들고 나를 향해 돌아서더니 외쳤다. “나는 네가 싫다! 네가 싫다! 너를 죽이겠다!”

나는 조용히 기도했다. “오 하나님! 주께서는 제가 자비의 심부름으로 이곳에 와 있음을 아십니다. 우리를 지켜 주시고 악한 영들을 꾸짖어 주소서. 우리에게 아무 해도 닥치지 않게 하소서.”

그 순간 내 동행자가 재빨리 움직여 그 여인의 팔을 붙잡았고, 그녀는 돌을 떨어뜨렸다. 만일 그녀가 그 돌을 내게 던질 수 있었다면, 내가 살아남았을지 의심스럽다. 나는 다시 한 번 수호천사들이 내 위에 날개를 펼쳐 주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우리가 그녀를 위해 기도할 때 무릎을 꿇도록 설득하려는 모든 노력은 조롱으로 되돌아왔다. 우리가 그녀에게 손을 얹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악한 영에게 떠나라고 명했을 때에야, 그녀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귀신이 떠나가자 그녀는 경련을 일으키며 우리 발 앞에 약하고 떨리는 모습으로 쓰러져 누웠다.

나는 마치 마귀와 얼굴을 맞대고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하루 종일 기도로 주님과 씨름했다. 그날이 끝날 때 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영리하고 총명한 여섯 명의 선교사 자녀들은 공부를 방해할 외부의 유혹이 없었기 때문에 잘 발전해 나갔고 학교생활을 즐겼다. 시간이 지나자 대총회는 아이들을 가르치던 어머니들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교사를 보냈다. 2년이 끝날 무렵 한 가족과 그 교사가 고국으로 돌아가자, 우국화 목사 가족과 나는 우리 딸들을 서울외국인학교에 보냈다. 그 학교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자기 자녀들과 외국 공사관 자녀들을 위해 운영하는 학교였다. 이듬해 내 두 딸은 매일 서대문 근처의 작은 붉은 학교 건물까지 7마일 길을 오갔다.

우국화 목사와 그의 가족이 휴가를 떠나자, 나는 조선 시조 출판소에서 그의 뒤를 이어 편집자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형제들이 어떻게 내가 그런 직책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는 늘 수수께끼였다. 나는 그런 책임을 맡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힘과 하늘의 지혜를 구하며 기도하고, 충성스러운 현지인 일꾼들의 협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의 두 번째 봉사 기간은 감격스러운 경험들과 승리의 순간들, 그리고 놀라운 기도 응답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너무나 어두운 날들도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조선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나는 고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모든 선교사는 자신이 하나님께 부름받았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래야 실망이 찾아올 때마다 용기를 얻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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