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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 소식들

5부

작성자변영기|작성시간26.06.08|조회수42 목록 댓글 0

1925년에 자녀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영구히 돌아갔던 왕대아 선교사가 어떤 기이한 경로로 조선에 다시 봉사하러 돌아가게 되었는지를 얘기하는 <사십년의 한국 여정>의 제5부 회고담입니다.

Youth’s Instructor, 1965년 9월 14일자, 9-11쪽:
https://documents.adventistarchives.org/Periodicals/YI/YI19650914-V113-37.pdf

* * *

두 번째 7년 봉사 기간이 끝나갈 무렵, 내 마음은 조선에 대한 사랑과 내 자녀들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찢어지고 있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 믿지 않는 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는 말씀이 계속 내 귀에 울렸다.

하나님을 동역자로 모시지 않은 채, 나는 영구히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거트루드는 고등학교 1학년을 마쳤고, 도로시는 7학년을 마쳤다. 아이들의 교육 문제가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조선을 떠났다. 밴쿠버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곧바로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그곳에는 부모님이 자리 잡고 살고 계셨다. 2주 뒤 학교가 다시 시작되자, 부모님은 아이들을 근처 공립학교에 보내라고 제안하셨다. 아버지는 덧붙이셨다. “한 푼도 들지 않을 거다.”

그때 부드러운 음성이 속삭였다. “너는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인 교육을 주려고 미국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냐?”

그 음성은 다시 속삭였다. “아이들을 공립학교에 보내는 위험을 감수해서는 안 된다. 네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구원받는 것을 보고 싶다면, 그들을 교회학교와 그리스도인 환경 안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글렌데일로 가서 아카데미에서 한 블록 떨어진 차고를 빌려 그곳으로 이사하고, 딸들을 학교에 등록시켰다. 아이들은 다른 젊은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리며 기뻐했다. 삶은 그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다. 그들은 안식일학교와 청년회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나는 글렌데일에서 조선에 있을 때보다 더 외로움을 느꼈다. 때때로 내 눈길은 많은 목회자들과 은퇴한 일꾼들, 유능한 안식일학교 교사들에게로 향했다. 그러던 어느 때, 조용한 예배당 안에서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네 자리는 조선에 있다.”

일주일 뒤에도 같은 경험이 반복되었다. “너는 이곳에 필요하지 않다. 네 자리는 일꾼이 그토록 많이 필요한 조선에 있다.”

처음에 나는 그 작고 조용한 음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내 마음에서 이미 지워져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 집에 머무는 것이 내 의무가 아닌가?” 나는 마음속으로 따졌다. 그러나 안식일이 지날 때마다 그 음성은 점점 더 강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나는 기도했다. “사랑하는 주님, 제 마음이 조선에 있다는 것을 주께서는 아십니다. 저는 그 사역과 그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제가 돌아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가겠습니다. 그러나 부디 아주 분명한 방식으로 그것을 알려 주십시오. 제가 돌아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조선에서 한 통, 원동지회에서 한 통, 제가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 두 통을 보내 주십시오.”

2주도 채 되지 않아 그 편지들이 도착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이사야 65:24)라는 약속이 성취되었다.

원동지회장 I. H. 에번스 목사는 중국 남부를 순회하던 중 문득 떠오르는 영감을 받아 편지를 썼다. 내 주소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글렌데일의 해로어 박사의 연구소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조선에서의 당신의 사역은 크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당신은 언어를 알고 있으며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있습니다. 당신은 조선에 필요합니다.”

두 번째 편지는 조선연합회 회장 H. A. 오버그 목사에게서 왔다. 그는 일이 잘 풀려 내가 돌아올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적고 있었다.

선교사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머지않아 나와 비슷한 자녀 교육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을 인식한 에번스 목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연합회는 자녀들의 교육 문제를 고려했습니다. 그래서 상하이에 원동지회 아카데미를 열 계획을 세웠습니다. 선교사들은 그곳으로 자녀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역지에 계속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을 마음에 두시고 돌아올 길이 열리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내가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이 들자, 나는 에번스 목사와 오버그 목사에게 답신을 썼다. 일이 진전되기 시작했고, 우리는 세 번째로 엠프레스 오브 러시아호를 타고 항해하도록 예약되었다. 이제 글렌데일 아카데미 졸업반이 된 거트루드는 자기 반 친구들과 함께 졸업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문제는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나는 딸을 두고 떠나는 데 동의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조선에는 그녀를 위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마침내 나는 그해 한 해 동안 그녀를 라일리 러셀 의사 부부와 함께 머물게 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선교사 친구들로, 그해 동안 거트루드를 돌봐 주겠다고 제안해 주었다.

8월 중순쯤, 도로시와 나는 동양으로 향하는 많은 선교사들과 합류하기 위해 밴쿠버로 떠났다. 그 무리에는 H. W. 밀러 의사 부부와 가족, 프레더릭 그릭스 교수 부부, 그들의 아들 도널드 그릭스 의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20명 가량의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1925년 9월 초, 우리는 세 번째 봉사 기간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다시 조선에 돌아와 있었다.

거트루드는 학교생활을 즐겼지만, 집이 그리웠다. “어머니, 돌아오셔야 해요. 저는 이 이별을 견딜 수 없어요.” 그녀가 편지를 썼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되돌아갈 수 있었겠는가? 주님께서 그토록 분명한 방식으로 인도하셨다. 근심 가운데 나는 기도했다. “오 하나님, 다시 한 번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 주소서!”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주님께서는 여러 때에 내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분의 음성을 들었고, 꿈속에서 그분이 내 침대 곁에 서 계신 얼굴을 보았으며, 그분의 손이 내 손 위에 있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 이번에는 출판물, 곧 『선데이 스쿨 타임스』를 통해 내게 말씀하셨다. 그곳에는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주님께 맡길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한 어머니에게 주어진 답변이 실려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은 주님께 맡기려 하면서도, 우리 자녀들만큼은 맡기려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의무가 우리를 부를 때, 왜 우리는 그분께서 그들을 돌보시도록 맡기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 절실한 진리를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하늘 아버지께서 내 자녀들을 돌보실 수 있으며, 내가 바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을 그들을 위해 하실 수 있다는 확신을 더 갖게 되었다.

그해가 끝나갈 무렵, 거트루드는 대학에 가고 싶다는 강한 바람을 나타냈다. “내 아이가 조선으로 돌아오도록 고집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한 음성이 속삭였다. “네 아이에게 그리스도인 젊은이들과의 교제를 빼앗을 수 있느냐? 자기 민족의 젊은이들과 어울릴 기회를 빼앗을 수 있느냐?”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하면 할수록, 나는 거트루드가 퍼시픽 유니언 칼리지에 다닐 수 있도록 마련해야 한다는 확신을 더 갖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어려워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동역자로 모실 때마다 그분은 언제나 올바른 결정을 내릴 용기를 주셨다.

도로시는 서울에서 2년 동안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러다가 나도 그녀를 언니와 함께 있도록 PUC로 보내야겠다는 인도를 받았다. 딸들은 대학에서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지냈지만, 친구들이 방학 때 집으로 돌아가면 외로워했다.

조선에 홀로 남은 나는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더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힘을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 몇 해 동안 가정봉사부와 안식일학교 사업을 지도하면서 많은 보람 있는 경험들이 있었다. 나는 여러 차례 지방을 순회했고, 안식일학교 대회와 여성들을 위한 성경 강습회를 열었다.

나는 비와 진창 속에서 시골길을 따라 20마일, 30마일씩 걸어 다닌 적도 있었다. 소달구지, 두 바퀴 달린 말수레, 인력거, 그리고 그 밖의 낯선 탈것들을 타고 여행한 적도 있었다. 동행자들과 함께 바닥에서 잠을 잔 적도 있었고, 자신들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내어 주는 소박한 사람들의 은혜로운 환대를 누린 적도 있었다.

제주도로 간 여행은 참으로 모험이었다. 목포와 제주도 사이를 오가는 작은 기선에서 유일한 여성 승객이었던 나는 선장의 선실을 배정받았다. 배는 해안에서 떨어진 곳에 닻을 내렸다. 승객들이 밧줄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허리까지 차오르는 물을 헤치며 해안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그 사다리를 내려가기가 용기나지 않아 갑판에 서 있는데, 갑판원 한 사람이 외쳤다. “Achu Monie! Achu Monie! [아주머니! 아주머니!] 오세요, 우리가 사다리 내려가시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밧줄 사다리를 기어 내려가는 일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려웠다. 사다리의 마지막 단에 이르렀을 때, 한 인부가 외쳤다. “제 등에 업히십시오! 제가 해안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의 등에 올라탔고, 그는 나를 안전하게 해안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경험을 떠올릴 때마다, 처음 만난 “아주머니”를 돌보려 했던 그 사람들의 마음이 생각나 눈물을 훔치게 된다.

수확운동은 우리로 하여금 조선의 영향력 있는 남녀들과 접촉하게 해 주었다. 서울위생병원을 위한 기금을 요청하면서 우리는 많은 경험을 했다. 돌아가신 고종 황제의 사위였던 한 왕자를 만나기까지 나는 열세 번이나 시도해야 했다. 마침내 그 훌륭한 신사였던 왕자를 면담할 수 있었다.

동양 문화의 전형적인, 매우 시간이 많이 걸리면서도 정중한 의전을 진행한 뒤, 나는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그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15분 뒤 그는 빳빳한 10엔짜리 지폐 세 장, 곧 15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그것은 서울에서의 우리 의료 사업을 위한 그의 헌금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어느 추운 겨울 아침에 일어났다. 내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을 때, 문지기가 들어와 말했다. “왕 부인, 근처 마을에서 온 남자 두 사람이 부인을 뵙고 싶어 합니다.”

“들여보내세요.” 내가 말했다.

몇 분 뒤, 두 남자가 책상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찾아온 목적을 말하기 어려워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를 만나고 싶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자, 말씀해 보세요. 제가 무엇을 해 드릴 수 있을까요?”

두 사람 중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입을 열었다. “왕 부인, 저희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다.

그러자 젊은 남자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일주일 전에 한 가족이 우리 마을로 이사 와서 낡아 빠진 집에 들어갔습니다. 마을 끝에 있는, 초가지붕 위에 키 큰 잡초가 자란 그 무너져 가는 집 말입니다. 그들이 그 집에 들어간 뒤 처음 며칠 동안은 집 주변에서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며칠 동안은 산 사람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고,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잠시 멈춘 뒤, 나이 많은 남자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오늘 아침 그 집 앞을 지나가는데, 집 안에서 어린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우리 관습대로 문 앞에 가서 인기척을 냈습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기에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엇을 보았는지 아십니까?“

”누더기를 걸친 어린아이 둘이 죽은 어머니의 시신 곁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보기에는 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여러 날이 된 것 같았습니다. 집 안에는 한 입 먹을 음식도 없었고, 땔감 한 토막도 없었습니다.”

그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제가 아이들을 제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 아이들을 계속 돌볼 수 없습니다.”

그러자 다른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친척을 찾을 때까지 부인께서 그 아이들을 맡아 주실 수 있는지 여쭈러 왔습니다.”

나는 아이들을 둘 곳을 찾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내 비서 중 한 사람이, 내가 쌀을 제공해 준다면 그 아이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동의했다. 선교사들은 따뜻한 옷을 마련해 주었고, 친척을 찾을 때까지 아이들은 보살핌을 받았다.

몇 달 뒤 나는 세 번째 휴가를 떠났다. 이제 대학 졸업반이 된 거트루드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준비 중인 한 젊은 남학생과 진지하게 교제하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딸들과 함께 있어야 할 때였다.

나는 일본우선회사 증기선인 치치바마루호의 처녀항해에 승선했다. 때때로 우리는 키가 크고 잘생긴 젊은 왕자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진 그 배의 손님이었다. 우리는 호놀룰루에 24시간 머물렀다. 닷새 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로 들어서자 배 전체에 가슴 뛰는 흥분이 감돌았다.

배가 천천히 부두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듯했다. 승객들은 난간에 모여 얼굴들의 바다를 내려다보며 낯익은 얼굴을 찾았다. 모두들 탑승교가 내려지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래야 달려 내려가 사랑하는 이들의 품에 안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트루드와 그의 약혼자 마빈 로웬, 그리고 그들의 보호자로 함께 온 B. P. 호프먼 목사 부부가 나를 맞으러 부두에 나와 있었다. 그것은 기쁜 재회였다. 세관 검사를 마친 뒤, 우리는 피크닉 저녁 식사를 즐기기 위해 골든게이트 공원으로 갔다.

저녁 무렵, 우리는 하웰 마운틴에 있는 PUC 대학으로 올라갔다. 졸업식 전 며칠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런 다음 우리는 대총회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그것은 내가 참석한 첫 대총회였다.

거트루드와 마빈은 총회 기간 중에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는 대총회 모임에 참석하고, 심한 말라리아와 싸우며, 손으로 웨딩드레스를 바느질해야 했던 정신없는 시간이었다! 가까운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젊은이는 금요일 오후 휘트컴 호텔의 예식장에서 B. P. 호프먼 목사의 주례로 결혼했다. 아름답지만 소박한 결혼식이었다.

고국에서 보낸 한 해는 빠르게 지나갔다. 가을에 학교가 다시 시작되었을 때, 나는 도로시와 함께 PUC에 있었다. 1931년 3월, 네 번째 선교 봉사 기간을 위해 돌아갈 때가 될 때까지 나는 거기서 둘째딸과 함께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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