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구독자 명단은 40,000명까지 늘어났다. 그것은 문맹률이 70퍼센트에 이르던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발행되는 어떤 잡지보다도 큰 발행 부수였다.” ~ 왕대아 선교사의 시조 편집장으로서, 안교부장 및 교사로서, 지역사회 봉사자 및 조언자로서의 왕성한 사역이 엿보이는 글입니다. 연재 제6호. Youth’s Instructor, 1965년 9월 21일자, 15-17쪽: https://documents.adventistarchives.org/Periodicals/YI/YI19650921-V113-3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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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휴가를 떠나기 몇 주 전, 화재가 출판소와 조선연합회 사무실을 모두 태워 버렸다. 내가 없는 동안 그것들은 다시 세워졌고, 길 건너편에는 아름다운 교회도 건축되었다. 돌아온 뒤 나는 출판소의 편집장으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다.
그 일을 감당하기에 전적으로 부족하다고 느끼며, 나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새 임무를 맡았다. 믿음으로 내 손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인도하심을 구했다. 그해 동안 조선 시조와 교회지남, 안식일학교 교과는 시내에서 인쇄되고 있었지만, 문서전도자들을 위한 문서는 전혀 출판되지 않고 있었다.
“우리에게 구독용 서적을 주십시오!” 문서전도자들이 외쳤다.
“구독을 받으러 다니며 함께 팔 수 있는 작은 책들과 소책자들을 주십시오!” 젊은 문서전도자들의 군대가 외쳤다.
“우리 선교 활동에 사용할 전도지와 값싼 문서들을 주십시오!” 평신도들이 외쳤다.
“우리에게 찬미가를 주십시오!” 교사 전도자들이 외쳤다.
얼마나 큰 도전인가! 인쇄물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문서가 전혀 없었다. 당시 출판소 지배인이었던 W. A. 길리스 목사는 경험 많고 훌륭한 조언자였다.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고, 문서들이 인쇄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었다.
그 뒤 5년 동안 수많은 복음 문서가 인쇄기에서 나왔다. 시조의 구독자 명단은 40,000명까지 늘어났다. 그것은 문맹률이 70퍼센트에 이르던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발행되는 어떤 잡지보다도 큰 발행 부수였다.
그 잡지는 영혼을 얻는 위대한 도구가 되었다. 때때로 흥미로운 간증들이 들어왔고, 구독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시조 편집자들과 이야기하기 위해 먼 거리를 여행해 오기도 했다.
한 사람은 이렇게 썼다. “시조를 읽으면 곧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말했다. “시조를 읽다 보면 제칠일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사람은 이렇게 증언했다. “시조는 여러 해 동안 참된 선지자였습니다. 예고한 일들이 우리 눈앞에서 이루어집니다.”
원고를 조판실로 넘겨야 할 마감일이 되었는데도 기대하던 글들이 들어오지 않을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곤경에 빠졌다. 충분한 원고를 마련하고, 그것도 제때 마련하는 일이 내 책임이었다.
동역자들이 시간이 없어 글을 보내지 못할 때면, 나는 펜을 들고 책상에 앉아 기도하곤 했다. “오 주님! 제가 처한 이 난처한 상황을 주께서는 다 아십니다. 저는 이미 이번 호를 위해 여러 편의 글을 썼습니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주님, 백성을 위한 또 하나의 기별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고 나면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기 시작했고, 그것들을 다시 정리하여 그 호에 실을 또 하나의 글을 완성했다.
1939년 가을, 출판소가 창립 30주년을 기념했을 때, 영향력 있는 조선인과 일본인 관리들, 그리고 선교사 친구들이 많이 와서 우리와 함께 하루를 보냈다. 축하 메시지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 정치가였던 고 윤치호 남작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에서 새 잡지의 첫 호가 발행될 때, 그것이 곧 마지막 호가 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그러나 시조는 30년 동안 중단 없이 발행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보기 드문 경험입니다. 시조가 소설 잡지가 아니라 종교 잡지라는 점을 기억할 때, 이는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한 신문 편집자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30주년은 조선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기록할 만한 사건입니다. 특히 조선의 출판 분야에서 한 사업을 30년 동안 성공적으로 이어 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은 보통 서른 살에 자신의 평생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또한 30년은 한 세대의 길이로 여겨집니다. 중국의 공자는 서른 살에 자신의 평생 사업을 결정했습니다.
”인도의 성자 석가모니 부처도 서른 살에 자신의 교리를 널리 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서른 살에 자신의 평생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존경받는 여러분의 잡지도 이제 그 존재의 가장 중요한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이 잡지가 앞으로도 사람들의 육체적, 영적, 지적 필요를 계속 섬기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일로 바빴지만, 생각은 늘 아이들에게 가 있었다. 떨어져 지내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도로시가 초등교육 교사 자격증을 받은 지 며칠 되지 않아, 맹장 수술을 받기 위해 세인트헬레나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다. 그 소식이 내게 전해졌을 때, 나는 딸 곁에 있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친절하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께서 도로시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 한 친구가 도로시가 회복되는 동안 자기 집으로 데려가 보살펴 주었다.
1, 2년 뒤, 도로시가 장차 자신의 인생의 반려자가 될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딸의 장래 행복에 대해 어머니로서 당연한 염려를 느꼈고, 딸 곁에 있고 싶었다. 다시 나는 그 문제를 주님께 기도로 가져갔다. 그날 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꿈속에서 나는 그분의 위로하는 음성을 들었다. “도로시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지켜보고 있다. 모든 일이 잘될 것이다.”
1935년 초, 필리핀의 여름 수도인 바기오에서 열리는 안식일학교 대회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은 가서 여러 곳을 볼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해 여름, 큰 딸 거트루드와 사위 마빈은 중국에서 선교 봉사를 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들을 위해 프레지던트 계열 여객선 중 하나에 임시 예약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언제 출항할지 전혀 알지 못했고, 그들 역시 내가 바기오에 갈 계획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선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항해 일정을 조정하셔서, 우리는 같은 배에 예약되어 있었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선에 올랐고, 나는 요코하마에서 승선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며칠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고 확신한다.
조선에서의 생활은 고되었다. 편집자로 봉사하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 안식일학교 부장으로 일했다. 또한 출판소 길 건너편 교회 부속 공간에서 모이는 신학교 학생들에게 교단 역사를 가르쳤다. 성경 사업을 위해 훈련받고 있던 젊은 여성들은 마을의 개인 가정들에 머물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사감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어느 금요일 오후, 한 학생이 사역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던 젊은 여성 김 씨에게 교사 중 한 사람이 쓴 편지를 가지고 우리 집에 왔다. 방문자의 짧은 말은 이러했다. “왕 선생, K 선생님이 이 젊은 여성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그녀의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했습니다.”
그날 저녁 집회가 끝난 뒤, 나는 그 이야기를 신학교 교장과 연합회장에게 전했고, 편지를 그들에게 넘겨주며 그 문제를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일요일 아침,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 위원회가 모였을 때, 조선인 위원들은 그 교사를 선교부 고용에서 해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 사람을 위해 간청했다. “K 선생님이 신중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그가 부도덕한 행동을 했다고는 확신하지 않습니다. 그는 좋은 사람이고 훌륭한 가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교훈을 배웠다고 믿습니다. 그가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주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K 교사는 복직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존심은 상처를 입었고, 한동안 나에 대해 쓰라린 원한을 품었다. 그것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시간이 지나 그 교사는 마음이 바뀌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40년 우리가 철수하기 며칠 전, 그는 내게 와서 사과했다. 우리는 그때부터 줄곧 친구로 지냈다.
어느 날 감리교 선교사 친구가 내게 다가왔다. “우리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젊은 여성이 조선인 의사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의사는 교회 장로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영어도 조선어도 하지 못합니다. 낯선 땅에서 외로울 것입니다. 언어 장벽 때문에 우리는 그녀와 의사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독일어를 하시니, 그녀를 방문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젊은 여성은 어느 이 박사의 법적 아내였다. 그녀는 베를린, 취리히, 비엔나의 대학들에서 특별 과정을 밟고 있던 부유한 조선 남성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후 환멸을 겪은 열 명의 젊은 여성 가운데 첫 번째 사람이었다.
어느 안식일 이른 아침, 문지기가 숨을 헐떡이며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왕 부인, 전화가 왔습니다. 급한 일입니다!”
나는 50야드 떨어진 전화 부스로 달려가 수화기를 들고 외쳤다. “여보! 여보!” 수화기 저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독일어로 대답했다. 내가 그레첸이라고 부르려는 한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오, 왕 부인!” 그레첸이 말했다. “제가 곤란한 처지에 있습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제 생명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거기 가서 머물 수 있을까요?”
그녀의 도움 요청에 놀란 나는 그레첸에게 언제든 환영한다고 안심시켰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오, 감사합니다! 오늘 오후에 가겠습니다.”
그녀가 전화를 끊자 수화기에서 딸깍 소리가 났다. 나는 기다렸지만, 그레첸은 오지 않았다. 이것은 이 불행한 여성들이 보낸 여러 도움 요청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어느 안식일 오후, 프리델은 자기 짐을 모두 싣고 택시를 타고 우리 집에 왔다. 그녀는 남편이 데리러 올 때까지 며칠 동안 머물렀다. 남편의 부모는 그에게 조선인 아내를 맞으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프리델은 둘째 자리로 밀려날 생각이 전혀 없었고,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조언을 얻기 위해 내게 왔다.
또 애니도 있었다. 그녀는 세련된 스위스 소녀였고, 둘째 아이를 기다리며 한 여름 동안 나와 함께 지냈다. 그녀는 훌륭한 그리스도인 가정 출신이었다. 그녀의 결혼식은 교회에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녀는 겨우 열여덟 살이었고, 자신이 결혼한 남자에게 이미 아내와 세 자녀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조선 사람들은 이러한 첩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여성들은 유럽인들에게서도 배척당하여 자기 민족과의 모든 사회적 접촉에서 차단되었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 곧 선교사들에게 의지했다.
구세군은 내게 이 젊은 여성들이 유럽의 자기 나라로 돌아가도록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들의 여비를 부담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단 한 명도 그 친절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조선에서의 생활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그레첸은 일본으로 흘러 들어갔다. 일본과 독일의 관계가 갑자기 악화되었을 때, 그녀는 큰 도시 하나에서 친구 없이 홀로 남겨진 자신을 발견했다.
독일 시민들이 어려운 경험을 지나면서, 그들은 어느 정도 서로 뭉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첩자로 고발되어 감옥에 갇혔고, 어떤 이들은 거의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고통받는 동포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바로 이때 그레첸은 한 독일인 선교사를 알게 되었고, 그는 그녀가 위로를 얻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가도록 격려했다.
현대의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그레첸은 이제 그 귀한 책을 읽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그녀는 예수님께 눈을 돌리고 용서를 구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맛보고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자, 삶과 성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얼마 뒤 그녀는 침례를 통해 주님을 따랐다.
네 번째 봉사 기간이 끝날 때, 나는 떠나기를 망설였다. 조선에는 일꾼이 몹시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역시 휴가가 필요했고, 사랑하는 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프레지던트 해리슨호를 타도록 예약되어 있었다. 도로시와 그녀의 남편 워런이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나를 맞으러 나와 있었다. 우리는 과부가 된 어머니와 누이를 만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차를 몰고 갔고, 그 뒤 동부로 가서 친척들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