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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 소식들

7부 징용

작성자변영기|작성시간26.06.10|조회수50 목록 댓글 0

"일본 당국은 조선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본 제국을 향한 강한 충성심을 심어 넣기 위한 목적으로, 신토 신사에 가서 전사한 전쟁 영웅들의 영혼에게 향을 피우며 절하도록 강요했다. 양심상 그 명령에 따를 수 없었던 그리스도인들은 투옥되고 고문당했다. 조선의 교회는 역사상 큰 위기와 마주하고 있었다." -- 왕대아 선교사의 <사십년의 한국 여정> 시리즈의 제7호는 왕 여사의 아름답고 즐거운 유럽 및 아시아 기행문으로 시작되지만, 일본 제국의 조선 기독교인 탄압과 선교사들의 피신으로 마칩니다. 
 
Youth's Instructor, 1965년 9월 28일자, 15-16쪽:
https://documents.adventistarchives.org/Periodicals/YI/YI19650928-V113-39.pdf

* * *

미국에서의 휴가를 시작한 지 여섯 달이 끝나갈 무렵, 조선으로 돌아가 나의 일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열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돌아가서 시조사에서 편집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이미 넓은 태평양을 여덟 번이나 건넜고, 시애틀과 밴쿠버와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유럽을 거쳐 동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독일에 있는 아버지 쪽 친척들을 방문하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들을 둘러보며, 조선 시조를 위한 자료를 모으려는 생각이었다.

새로운 길로 여행하고 새로운 장소를 보는 일은 언제나 나를 매료시켰다. 1936년 여름에는 임박한 전쟁에 관한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전쟁이 맹렬히 벌어지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상하이와 중국 내륙에서 홍콩과 마닐라로 철수한 상태였다.

“하지만 전쟁이 임박했어요.” 친구들은 내 계획을 듣고 조심하라고 말했다. 

“적국에 고립되거나 심지어 억류될 수도 있어요.” 다른 이들도 경고했다.

“혼자 여행하시면 안 됩니다.” 친척들도 덧붙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시며 예수님께서 내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나는 계획대로 동양을 향해 떠났다.

“혼자요?” 누군가 묻곤 했다. “혼자 여행하는 것이 두렵지 않으세요?”

“아니요.” 나는 대답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솔로 여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내 곁에는 누군가 계셨습니다. 그리고 여행 중에 재미있는 사람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다섯 번째 여권과 건강증명서, 곧 천연두와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콜레라, 파상풍 예방접종을 받았다는 사실을 적은 노란 카드, 그리고 교통편 티켓들을 손에 쥔 나는 1936년 11월 초, 딸이 교사로 일하고 있던 캘리포니아 중부의 아르모나에서 기차로 떠났다.

나는 미시건 주 배틀크릭에 들러 대총회 추계 회의에 참석하고, 재림운동과 관련된 옛 유적들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뉴욕으로 갔고, 유럽에서 중간 체류할 수 있도록 여러 대사관을 찾아가 비자를 받았다.

함부르크-아메리카 증기선 회사의 브레멘호를 예약했다. 그 배는 대서양에서 가장 빠르고 호화로운 “떠다니는 호텔” 중 하나였다. 그리고 3,000마일에 이르는 대서양을 나흘 만에 건넜다. 영국 사우샘프턴에 도착한 날, 나는 조선에서 만난 영국인 친구 애나 블라이스 부인에게서 전보를 받았다. 자기 집에 머물라는 초대였다.

나는 그 초대를 받아들였고, 런던에서 즐거운 한 주를 보냈다. 친구는 내게 런던 지도를 마련해 주었고, 매일 아침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장소들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 주었다. 매혹적인 “튜브,” 곧 지하철과 2층 버스, 지붕이 열린 버스를 혼자 타고 다니며, 나는 아주 적은 비용으로 대부분의 명소를 볼 수 있었다. 저녁에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벽난로의 따뜻함을 누리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그 한 주가 끝나갈 무렵, 나는 세계 각지에서 온 선교사들이 여행 계획을 세우기 위해 도움을 구하러 들르는 교통 사무소를 방문했다. 다음 날은 영국연합회 본부가 있는 왓퍼드의 스탠버러 파크에서 영국 형제자매들과 함께 보냈다. 안식일 아침에는 런던에 있는 우리 교회 중 한 곳을 찾아갔다.

영국에서 나는 독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3주 동안 친척들과 재림 신자들을 방문하고, 흥미로운 장소들을 둘러보았다. 독일 사촌들을 만나는 것은 하나의 모험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출생지인 슐레스빅-홀슈타인의 프레츠에 들렀다. 함부르크에서는 고등학생들에게, 베를린에서는 우리 교인들에게 말씀을 전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마르틴 루터가 갇혀 있었던 바르트부르크 성을 방문한 것은 가슴 벅찬 일이었다.

다섯째 주에는 스위스에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 교단 사업과 관련된 장소들을 방문했다. 나는 칼뱅의 도시인 제네바에서 하루를 보냈다. 칼뱅의 교회를 방문했고, 젊은 종교개혁자가 말씀을 전했던 강단에 서 보았으며, 사람들이 그의 힘있는 설교를 들었던 오래된 교회 의자에도 앉아 보았다.

취리히에서 나는 로마행 국제 특급열차를 탔다. 암흑시대 동안 성경을 유일한 신앙의 규칙으로 여긴 그리스도인들이 피난처를 찾았던 왈덴스인들의 지역을 지나갈 때 내 마음은 뜨거워졌다. 나는 밀라노에 내려 유명한 대성당을 방문했고, 피렌체에서는 위대한 이탈리아 종교개혁자 사보나롤라가 1498년에 화형당한 광장을 찾아갔다.

로마에서는 즐거운 나흘을 보냈다. 내가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정해진 며칠 동안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보고 싶어, 나는 곧장 호텔로 가서 직원에게 물었다. “오늘 밤 특별히 볼 만한 일이 있습니까?”

그는 번뜩이는 검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 무솔리니가 발코니에 나와 사람들에게 연설할 것입니다.”

“저 같은 미국인도 참석할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곳을 어떻게 찾아갈 수 있습니까?”

그는 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넓은 대로에 이르면 군중을 따라가기만 하십시오. 모두 일 두체[Il Duce; 이탈리아어로 지도자]가 사람들에게 연설할 광장으로 가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비가 내리고 있었으므로 나는 우산을 들고 대로를 따라 흘러가는 군중에 합류했다. 광장에 도착하니 검은 우산의 바다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솔리니가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자 우산들이 내려갔다. 나는 그 나라의 관습을 몰랐기 때문에 내 우산을 내리지 않았다. 그때 내 우산을 함께 쓰고 있던 멋있는 젊은 남자가 내 손에서 우산을 가져가 접었다.

독재자가 나타나자 군중에게서 귀를 찢을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주의 깊게 들었고, 때때로 박수를 보냈다. 때는 1936년 말, 에티오피아 정복과 로마-베를린 추축 형성 이후였다. 미국을 반대하는 감정은 삼엄했다.

모든 일이 끝난 뒤 나는 왔던 길을 되짚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혼란스러워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낯선 사람이 나타나 내 팔을 단단히 붙잡고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대로까지 이끌어 주었다. “이 사람이 낯선 땅에서 나를 지키도록 보내진 천사였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로마에 있는 동안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보겠다고 결심한 나는 역사적 명소들을 보기 위해 안내 관광에 참여했다. 바티칸 시국을 방문하는 데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어느 오후에는 시골길을 달려 대추야자나무가 늘어선 길을 지나 카타콤에 이르렀다.

지하에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살았던, 다섯 층으로 된 길고 긴 회랑들이 수없이 이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피난처를 찾았고, 예배를 드렸으며, 이교도들의 박해로 죽은 이들을 묻었다.

마지막 관광이 끝날 무렵, 나는 우리가 바울이 갇혀 있었던 마메르틴 감옥을 지나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을 방문하지 않고는 로마를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한 나는 기원전 400년에 로마의 포럼 뒤편에 세워진 그 감옥으로 찾아갔다. 안내자는 나를 축축한 지하 감방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이끌었다. 위쪽의 작은 창문으로 몇 줄기 빛이 들어왔다.

나는 그 지하 감방에서 바울의 손을 돌에 묶어 두었다고 전해지는 쇠사슬과 죔쇠를 보았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곳에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서, 속히 자신에게 오고, 드로아에 두고 온 “겉옷”과 “책들”과 필기구를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유럽에서의 여섯 주는 너무 빨리 지나갔다. 제노바에서 나는 동양으로 향하는 독일 여객선 포츠담호에 올랐다. 출항 첫날 밤 갑판에 나온 승객들은 시칠리아 북쪽 스트롬볼리 섬의 화산 산비탈을 따라 붉게 흘러내리는 용암의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아프리카 동북쪽 끝에 도착했을 때, 갑판에 있던 우리는 이집트의 포트사이드와 그 등대를 언뜻 볼 수 있었다. 그 등대는 바다 24마일 밖에서도 보인다고 했다. 어느 늦은 저녁 우리는 실론(스리랑카)에 들렀고, 그곳에서 약간의 관광을 즐겼다. 길을 재촉한 포츠담호는 싱가포르, 마닐라, 홍콩에 들렀고, 그곳에서는 반가운 놀라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 딸 거트루드와 사위 마빈이 그들의 어린 딸 마블린과 함께 나를 맞으러 부두에 나와 있었다. 중국에서 선교 봉사를 하고 있던 그들은 중국 일부 지역이 일본군의 폭격을 받았을 때 한커우(지금의 우한)에서 철수해 온 것이었다. 나는 상하이에 있던 내 남동생과 그의 가족이 홍콩에서 임시 피난처를 찾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 자녀들도 홍콩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일정을 조정하고, 그 매혹적인 도시에서 자녀들과 함께 2주를 보냈다. 나머지 여행은 프랑스 기선으로 이어졌다. 그 배는 일본의 폭격 이후 상하이에 처음 기항한 배였다. 기선은 일본으로 계속 가기 전 상하이 항구에 닷새 동안 정박했다. 나는 존 오스 부인과 함께 상하이 주변의 우리 선교 기관들을 방문했고, 폭격으로 인한 무분별한 파괴를 직접 보았다.

고요한 안식일 오후, 세토 내해를 지나 일본으로 향한 여행 구간은 항상 내 기억에 남을 것이다. 고베에서 나는 시모노세키행 기차를 탔고, 연락선을 타고 조선으로 건너와 1937년 1월 첫째 주에 서울에 도착했다. 내 공책들은 메모와 삽화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덟 달의 휴가는 참으로 즐거웠다.

그 뒤 몇 해는 어려운 시기였다. 1940년이 가까워지면서 신사 참배 문제가 중대한 사안이 되었다. 일본 당국은 조선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본 제국을 향한 강한 충성심을 심어 넣기 위한 목적으로, 신토 신사에 가서 전사한 전쟁 영웅들의 영혼에게 향을 피우며 절하도록 강요했다. 양심상 그 명령에 따를 수 없었던 그리스도인들은 투옥되고 고문당했다. 조선의 교회는 역사상 큰 위기와 마주하고 있었다.

선교 학교들은 문을 닫았다. 경찰관들이 모든 연합회 회의에 참석했다. 비밀경찰이 우리 문간에 진을 치고 있었다. 휴지통의 내용물까지 면밀히 조사되었다. 출판물은 검열을 받았다. 어떤 출판사들은 부과되는 징역형을 대신 살게 하기 위해 이름뿐인 편집자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우리가 철수할 때까지 출판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기적이었다.

다섯 번째 봉사 기간은 미국 국무부가 미국 시민들에게 동양을 떠나라고 경고하면서 짧게 끝나고 말았다. 일본과의 전쟁이 임박하자, 미국 정부는 자국민을 데려오기 위해 두 척의 대형 수송선을 중국 북부와 조선으로 보냈다.

어리석게도 나는 내가 억류될 위험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떠나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원동지회 임원들은 내게 조선에서 나가라고 강하게 권했다.

그들은 말했다.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마닐라로 가서 필리핀연합회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 내 사역 곁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필리핀에서 다른 선교사들처럼 억류될 뻔한 일을 간발의 차이로 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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