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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 소식들

8부-사십년의 한국 여정

작성자변영기|작성시간26.06.10|조회수42 목록 댓글 0

<사십년의 한국 여정> 시리즈의 마지막호 -- "6월의 마지막 일요일 늦은 오후, 서울 동쪽 산꼭대기 너머로 어둡고 무거운 전쟁의 구름이 나타났다. 중포 포격 소리가 산들 사이로 메아리치고 또 메아리쳤다. 저녁 무렵에는 전투의 연기와 굉음이 공기를 가득 채웠다." -- 1940년에 미국으로 철수했던 왕대아 선교사는 광복 후 1947년에 서울로 돌아가서 시조사 사업을 재건하는데 힘썼으나, 곧 한국 전쟁을 경험하게 되고 일본으로 다시 철수하게 됩니다. 그 후, 왕 여사는 은퇴를 했지만 여전히 한국을 향한 끊임없는 사랑이 담긴 글로 이 시리즈를 마칩니다.

Youth's Instructor, 1965년 10월 5일, 9-11쪽: https://documents.adventistarchives.org/Periodicals/YI/YI19651005-V113-40.pdf

* * *

나는 1940년 12월 중순 프레지던트 클리블랜드호의 승선권을 얻었고, 조선을 떠난 마지막 미국 여성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요코하마에 도착해 보니, 떠나는 모든 승객의 짐이 이슬비 내리는 갑판 위에서 검사되고 있었다. “세관 관리들이 내 선박용 트렁크 안의 물건을 모두 꺼내라고 한다면, 내 신문 스크랩 자료들과 메모, 원고들은 어떻게 될까?” 나는 걱정했다.

세관 관리들을 자세히 살펴보던 중, 나는 성격이 달라 보이는 한 젊은이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내면의 빛이 비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제 짐을 검사해 주시겠습니까?”

그는 곧바로 응답했다. “선교사이십니까?” 그가 물었다. 그는 내 가방들을 열어 보지도 않고, 책 상자를 포함한 모든 짐에 검사 표시를 붙였다. 그러고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제게 읽을 만한 것을 좀 주실 수 있습니까?”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도 그리스도인입니다. 선교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요즘 일본에서 젊은 남자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선생님도 저만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 주님을 섬기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게 도움이 될 만한 읽을거리가 있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내가 말했다. “분명히 제 서류가방 안에 드릴 만한 것이 있을 겁니다. 선실에 두고 왔습니다.” 나는 서둘러 탑승교를 올라가 선실로 내려갔고, 『정로의 계단』 한 권을 찾았서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그가 간절히 손을 뻗어 받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여객선은 동양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로 정원까지 가득 찼다. 나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위층 갑판의 다실에서 자리를 얻었다. 태평양을 건너는 그 여행은 내가 경험한 것 중 가장 폭풍이 심한 항해였다. 많은 여성들이 히스테리를 일으켜 침대에서 기어 나와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하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폭풍이 지나가자 그들은 주님을 잊어버렸다.

전쟁으로 인해 다섯 번째 휴가는 길어졌다. 워싱턴 D.C.의 신학교에서 두 학기를 보냈다. 나중에는 두 차례의 전도 집회를 도왔다. 하나는 캔자스시티에서 포다이스 데타모어 목사와 함께한 집회였고, 다른 하나는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밥 휘트셋 목사와 함께한 집회였다. 그곳에서 나는 예언의 소리로 부름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1945년 8월에 끝나고 2년 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받은 첫 여성 선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허가와 교통편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성경학교 통신 교과를 한글로 번역했다.

당시 세인트 헬레나 병원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던 둘째 딸 도로시와 함께 있던 어느 아침,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몹시 난감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성경을 집어 들고 읽었다. “성으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일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나는 샌프란시스코의 교통 사무소로 가서 우리 여행 담당자인 W. A. 레일리를 만나 보았다. 대화 중에 그는 헤이워드에 있는 아픈 조카딸이 방문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그녀를 보러 가실 수 있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나는 그 조카딸을 찾아갔다. 방문이 끝난 뒤, 한 개인 가정에서 모이고 있던 선교 정신이 강한 침례교 여성들 모임에서 말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곳에서 나는 안식일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한 여성을 만났다. “제 집에 와 주실 수 없습니까?” 그녀가 물었다. “안식일이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습니다.”

며칠 뒤 나는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바로 그날, 우리가 안식일 진리를 더 깊이 공부하던 중 그녀는 그 진리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나는 주님께서 내 발걸음을 그녀에게로 인도하셨다고 확신했다.

마침내 앨러미다 육군 기지의 처리 센터로 가서 보고하고, 많은 부양가족들을 한국으로 싣고 가는 병원선 컨포트호의 출항을 준비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인천으로 향하는 병원선을 타고 여행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여성과 아이들이 작은 배에 옮겨져 해안으로 가는 동안 들려온 노래와 환호, 그리고 해안에 있던 남자들의 외침은 감동적이었다. 오랜 이별 뒤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 껴안을 때의 기쁨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 있을 엄청난 재회의 한 작은 맛보기에 불과했다.

곧 나는 서울의 연합회 구내로 돌아와 있었다. 한국인 신자들은 돌아온 사랑하는 선교사들을 다시 보게 되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돌아오도록 허락받은 우리는 선교 기관들을 복구하기 위해 긴 시간 일했다. 나는 1947년 여름만큼 열심히 일한 적이 없었다. 닦고, 페인트칠하고, 집과 사무 공간을 사람이 살고 일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돌아온 지 하루나 이틀 뒤, 나는 문서 준비를 돕도록 초청된 두 사람의 일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얽히고 까다로운 세관 규정들을 통과해 종이를 들여오고, 활자와 식자공을 찾고, 그러한 큰 일을 감당하기에는 겨우 갖추어진 인쇄소에서 거듭된 교정을 거쳐 문서를 인쇄하는 일은 얼마나 큰 씨름이었는지 모른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문서는 인쇄기에서 나왔고, 문서전도자들은 그들의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 뒤 3년은 큰 모험으로 가득했다.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독립을 승인받았다. 사람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투표장에 나갔고, 그 결과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했다.

짧은 몇 해 안에 참으로 많은 일이 몰려 있었다. 1950년 초에는 그 해에 대한 전망이 매우 희망적이었다. 비록 우리는 언제든 폭발할 준비가 된 화산 가장자리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이전 어느 때보다 복음을 듣고 싶어 했다. 교회와 학교들은 훌륭한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복음 문서에 대한 수요도 많았다. 성경 통신학교에는 10,000명 이상의 학생이 등록되어 있었고, 1,500명 이상이 수료증을 받았다.

6월 말, 북한 무장 병력이 남한을 침공하면서 사역은 중단되었다. 6월의 마지막 일요일 늦은 오후, 서울 동쪽 산꼭대기 너머로 어둡고 무거운 전쟁의 구름이 나타났다. 중포 포격 소리가 산들 사이로 메아리치고 또 메아리쳤다. 저녁 무렵에는 전투의 연기와 굉음이 공기를 가득 채웠다.

미국 시민들은 철수 준비를 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다음 날 새벽 3시, 여성들과 아이들은 미군사령부에 모였고, 그곳에서 인천으로 이동해 작은 노르웨이 화물선에 올랐다. 화요일에는 맥아더 장군이 남아 있던 2,000명의 미국 시민을 철수시키기 위해 일곱 대의 육군 수송기를 한국으로 보냈다. 명령은 “첫 비행기에 여성들을 태워 내보내라”는 것이었고, 나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헌병들이 오토바이로 호위하는 육군 버스 행렬이 우리를 김포비행장으로 데려갔고, 우리는 그곳에서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가 일본으로 날아가는 동안 전투기들이 우리를 호위했다.

우리가 철수한 뒤 소식이 끊겼다. 한국에 있는 동역자들에게서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한 채 석 달이 지났다. 9월 말, 유엔군이 서울에 들어가 침략군을 몰아냈을 때 편지들이 도착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사람들과 함께 슬퍼했고, 그토록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많은 이들이 사역 곁에 충실히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대총회의 형제들은 선교사들에게 일본에 머물며 전쟁의 결과를 기다리라고 조언했다. 여섯 가족과 나는 고베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나는 언어를 공부하고 있던 우리 선교사들을 위한 한글학교를 감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또한 고베와 오사카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을 위한 전도 사업도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며칠 전, 엘렌 G. 화잇의 『가정과 건강』이 인쇄되어 나왔다. 문서전도자들은 구독용 서적이 생긴 것을 기뻐했다. 120개의 성경 읽기 주제를 담은 『성경 독본』 5,000부 중 4분의 1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여섯 권의 책이 번역되어 있었다.

편지들은 북한군 장교들이 선교사 주택과 기관들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그들은 도서관과 창고에 들어가 책 표지를 뜯어 자기 군복의 옷깃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귀중한 원고들과 성경 통신학교 교과, 그리고 다른 문서들이 창밖으로 던져져 사무실 주변 길들이 복음 문서로 어지럽게 뒤덮였다. 그중 절반 이상이 쓰레기 더미에서 회수되어 내게 보내졌다.

현지 부장은 이렇게 썼다. “이 땅에는 큰 기근이 있습니다. 영적 양식의 기근입니다. 사람들은 집과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위로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 문서에 대한 큰 수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출판한 모든 문서를 한 권씩 사고 싶어 하며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에게는 문서가 없습니다.”

어느 날 밤, 번개처럼 한 생각이 내게 떠올랐다. “일본에서 문서를 출판해 한국으로 보내면 어떨까?”

당시 원동지회 총무부장 C. P. 소렌슨 목사가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내가 그 생각을 그에게 말하자, 그는 말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원동지회장 V. T. 암스트롱 목사가 하루 이틀 안에 이곳에 올 것입니다. 그에게 그 문제를 말씀해 보십시오.”

며칠 뒤, 우리 선교사들과 암스트롱 목사와 소렌슨 목사, 그리고 대총회에서 돌아오는 세 명의 한국인 대표들이 그 문제를 논의했다. 모두가 일본에서 한글 문서를 준비하는 데 동의했고, 일본의 형제들은 기꺼이 협력하고자 했다.

이 일을 돕기 위해 세 명의 편집 일꾼을 부르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사탄은 즉시 강한 반대를 나타냈다.

당시 미군은 한국인들이 일본에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연합군 최고사령부로부터 특별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 요청은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전달되었다. 일본에 있는 우리 자매 출판소에서 한국을 위한 복음 문서를 준비한다는 생각은 그의 마음에 호소력을 가졌다. 그는 우리의 경우를 예외로 인정하고 허락을 내주었다.

일본에서 첫해를 마칠 무렵, 나는 요코하마에서 10마일 떨어진 호도가야로 옮겼다. 그곳에는 우리 일본 출판소가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한글 문서를 편집하는 일에 전적으로 시간을 보냈다. 출판 사업은 참으로 믿음과 기도와 기적의 사업이었다.

사탄은 언제나 우리의 뒤를 따라다니며 일을 방해하려 했다. 화가가 준비한 시조의 첫 표지는 분실되어, 다른 표지를 준비할 때까지 지연을 가져왔다. 시조 첫 호는 운송 도중 어딘가에서 지체되었다. 쓰레기 더미에서 회수되어 형제 중 한 사람이 일본으로 가져온 번역 원고 한 묶음은 하네다공항에 남겨졌다. 누군가 그 꾸러미를 주워 분실물 센터에 맡겼다. 그러나 다음 날, 미군이 특별 전령을 통해 그것을 내게 보내 주었다.

문서들은 한국으로 발송되었고 빠르게 팔려 나갔다. 그러다가 반일 감정이 커지면서 한국은 일본에서 인쇄된 문서를 더 이상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또다른 번의 5년 봉사 기간이 끝났을 때에도 나는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의료 선교사들만 돌아가도록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마지못해 1952년에 미국으로 돌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한국을 위해 일하고 있다.

선교지에서 봉사한 것은 가슴 벅차고 보람 있는 경험이었다. 그림자들이 나를 압도하는 듯할 때, 기도의 제단에서 믿음과 용기가 다시 타올랐다. 하나님께서는 늘 더해진 짐을 감당할 힘을 더하여 주셨다.

시편 기자와 함께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도다. …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1961년, 나는 10년 만에 한국을 다시 방문했다. 어려운 전쟁의 세월 동안 한결같고 진실하게 서 있던 이들을 만나는 것은 가슴 뛰는 경험이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굳게 붙든 젊은이들을 만나는 것도 그러했다. 오늘날 그들이 횃불을 들고 나아가고 있다. 최근 몇 해 동안 진리 안으로 들어온 이들을 만나는 것도 보람있는 일이었다.

한국 전역에 큰 부흥이 휩쓸고 있다. 수천 명이 교회에 더해지고 있으며, 수만 명이 안식일학교에 더해지고 있다. 하나님의 영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계신다. 15,000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의 군대가 여름과 겨울 방학 동안 전도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안식일학교 분교와 여름성경학교를 운영하고, 성경 통신학교 등록자를 모집하고 있다.

문서는 사람들이 기별에 응답하도록 준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해 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시조에서 읽은 내용에 크게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제 성령의 부어주심 아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 걷고 있다.

나는 작은 친절의 행위들이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한 중년 여성이 내게 와서 물었다. “제가 불신자와 결혼하지 않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려고 제 집에 오셨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기도했기 때문에 그 특별한 경우는 기억나지 않았다.

또 다른 사람은 물었다. “제가 낙심했을 때 선생님께서 제 손 위에 손을 얹고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여러 해 동안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이와 같은 경험들이 많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다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작은 친절의 행위들을 기억하며, 그것들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내가 들은 가장 감동적인 경험은 하동의 나병 환자 정착촌에서 접한 일이었다. 이 정착촌은 부산에서 약 100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고, 500명의 나병 환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안식일학교 교인이었다. 정착촌을 둘러보는 동안, 나는 나병 환자들이 부산위생병원의 루이스 R. 에리히 의사를 사랑한다는 말을 거듭거듭 들었다.

나는 물었다. “왜 나병 환자들이 에리히 의사를 그렇게 사랑합니까?”

한 사람이 외쳤다. “오, 그분은 그들을 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에게, 자기들 위에 손을 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의 건강에 개인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눈물의 시간을 보내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손길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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