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릴레이의 연구에 대해 알게 되다. >
'보일 -샤를의 법칙'으로 잘 알려진 로보트 보일은 영국 아일랜드의 백작 집안에서 태어났다.어릴때부터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배우고, 형과 함께 잉글랜드로 가서 명문학교인 이른교에서 4년간 공부하였다. 그 후 부친에게로 돌아가 프랑스인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하였다.
1638년에는 이 가정교사와 함께 함께 외국을 여행한 다음, 1644년에 귀국하였다. 여행중에는 네덜란드의 라이덴, 프랑스의 리옹, 스위스의 제네바, 이탈리아의 피렌체 등을 방문하였고, 피렌체에서는 갈릴레이(1564-1642)의 연구 내용을 알게 되어 이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또 이 여행중 그는 갈릴레이의 제자 토리첼리(1608-1647)가 한 '토리첼리의 실험'에 대해서도 알게되었다. 그것은 길이 1m의 유리관에 수은을 채우고 이것을 수은 용기 속에 거꾸로 세우면 관 속의 수은주가 76cm 높이까지 내려간 곳에서 멈추어 그 윗부분에 '토리첼리의 진공'이 생긴다는 실험이다. 토리첼리는 '이처럼 관 속의 수은을 떠받치는 것은 아래 용기에 담겨진 수은의 표면을 밀고 있는 대기의 압력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광산 발굴의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하다.>
토리첼리의 생각은 옳았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이 숭배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가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라고 말한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간단히 진공이 만들어질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토리첼리의 실험에 대해 반대하였던 것이다. 토리첼리의 실험에는 이에 앞선 이야기가 있다. 17세기 초 무렵부터 대포와 화폐가 활발히 만들어지게 되어 금속의 수요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에 맞추어 금속광산의 아주 깊은 곳까지 채굴하게 되어 지하수 배출용 펌프가 쓰이게 되었다. 그런데 지하수의 깊이가 약 10cm 정도되면, 거기서 갑자기 펌프가 멈추는 사태가 일어났다. 곤경에 빠진 펌프입자들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은 갈릴레이는 심사숙고한 끝에 '그 문제는 자연이 진공을 얼마만큼 싫어하느냐에 달려있다.'라고 대답하였다.
갈릴레이의 생각에 기초를 두고 제자인 토리첼리는 물대신 물보다 13.6배나 무거운 수은을 실험에 사용하기로 하였다. 수은을 사용하면 1m도 안되는 짧은 관으로 실험할수 있기 때문이다. 수은을 76cm의 높이까지, 그리고 물을 10cm의 높이까지 밀어 올리고 있던 것은 대기의 압력 또는 무게이다. 공기 1리터의 질량은 1.293g이다. 그러므로 이 공기와 밀도가 같은 공기가 어디까지나 이어져 있다고 하면 약 7.3km 높이의 공기 무게와, 76cm 높이의 수은 또는 10cm 높이의 물의 무게가 균형을 잡게 된다. 요컨데, 천칭(저울의 하나)의 오른쪽 접시에 7.3km 높이의 수은 또는 10m높이의 물을 올려 놓았을 때 이들 양자는 균형을 잡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토리첼리의 실험 또는 배수 펌프의 실험에 대한 설명이다.
대기압의 존재를 명확하게 보여준 것은 프랑스의 파스칼(1623-1662)이다. 그는 1648년에 높은 산의 정상과 중턱, 그리고 기슭에서 수은주에 의한 실험을 통해,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토리첼리의 실험에 있어서의 수은주가 짧아지고, 진공 부분이 길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산을 높이 오르면 오르수록 그것보다도 위에 있는 공기가 그만큼 꺽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실험의 결과는 당연한 일인 것이다.
<독일에서 극적인 실험이 있었다.>
더욱 극적인 실험이 1634년 독일 마그데부르크의 시장폰 게리케(1602-1686)에 의해 행해졌다. 그는 구리로 된 2개의 반구를 맞추어서 만든 공 속의 공기를 펌프로 빼냈다. 요컨데, 이 공에는 외부로부터의 대기의 압력만이 걸려 있는 셈이다. 이것을 원래의 두 반구로 떼어 내는 데 얼마만큼의 힘이 필요한가를, 그는 여러 사람 앞에서 실험해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양쪽에 말 8마리씩을 끌게 함으로써 겨우 이 공을 떼어 낼 수가 있었다. 이 실험은 '마그데부르크의 반구실험'이라 하여 당시 굉장한 화제거리였다. 쇼트라는 사람이 1657년에 쓴 '수압의역학'이라는 책에 의하여, 이 실험의 소문이 유럽전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보일도 이 책을 읽고 흥미를 가지게 되어, 우선 토리첼리의 실험을 직접해 보았다. 그들 연구를 정리하여 1660년에 보일은 '공기의 탄성과 그 효과에 관한 물리학적 역학적 신실험'이라는 저서를 출판하였다. 이것이 그의 처녀작이었다. 그의 책에 대한 반대론이 다음 해 예수회의 선교사 리누스에 의해 출판되었다. 보일이 행한 토리첼리의 실험에 대하여 리누스는 다음과 같이 반대론을 폈다. 즉 '공기처럼 가벼운 것이 압력이 수은주를 76cm나 밀어 올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수은주는 공기의 압력으로 밀어 올려진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꾼이 관 위에 매달려 있어서, 그것이 수은주를 위로 잡아당기는 것이다. 유리관의 열린 부분을 손가락으로 막고 관을 거꾸로 세우면 손가락이 관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께게 되는 것에서, 그 끈의 존재를 확인할수 있다.'는 것이었다.
<공기의 부피와 압력은 반비례한다.>
대기의 압력이 76cm높이의 수은주를 위로 끌어올릴 만큼의 힘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려면, 압축된 공기의 압력이 상식적으로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제일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보일은 곧바로 새로운 실험에 착수하였다. 즉, 공기의 부피가 2부느이 1,3분의 1,.....이 되도록 차례로 압축했을 때, 공기가 얼마만큼의 수은주를 떠받칠수 있는가를 실험을 통해 알아보려고 하였다.
그는 이 실험을 위해 먼저 J자 형의 유리관을 준비하였다. 그 긴 쪽 관의 길이는 3m나 되었다. 이관 위로부터 수은을 유입시켜, 그 압력으로 짧은 쪽 관 속에 갇혀 있는 공기를 압축한 것이다.처음에는 J자의 양쪽 관을 연결하는 수평 부분만을 꼭 채울 정도의 작은 양의 수은을 유입하였다.이것으로 왼쪽 짧은 관 부분에 있는 양만큼의 공기가 가두어진 것이 된다. 이때의 관속의 수은면을 기준면으로 하여 양쪽의 관에 눈금을 매긴다. 이렇게 하여 긴 관 위로부터 수은을 들어가게 하여, 짧은 관 속의 공기를 압축해 나간다. 보일은 그 공기의 부피를 꼭 절반으로 하느데, 어느정도 높이의 수은주가 필요한가를 조사하였다. 그 높이가 토리첼리의 수은주의 높이와 같은 76cm임을 확인했을때, '이것을 보고 기쁘고, 또 만족해하지 않을수가 없었다.'라고 보일은 말하고 있다.그는 이러한 실험을 반복하여, 공기의 부피와 압력은 반비례한다는 '보일의 법칙'에 도달하였던 것이다.이렇게 말로 해버리면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그는 이 실험을 하기 위하여 대단한 고생을하였다. 우선 3m나 되는 관은 너무 높아서,보통의 방에서는 세워 놓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천정을 뚫은 방에서 이 실험을 하였다. 3m의 유리관을 채울 수은을 준비하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보일은 부유한 백작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재산을 이 실험을 위해 쓸수 있었다.
3m높이의 유리관에 수은을 채워 놓으면 그것만으로도 유리관에 큰 힘이 걸리고, 공기를 압축하면더욱 큰힘이 걸린다. 그래서 유리관이 터지는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그러한 경우마다 새로운 유리관을 만들어야 했고, 또 흩어진 수은을 다시 모아야만 하였다.이 실험에서 보일의 조수로 있었던 사람이 바로 '훅의 법칙'으로 유명한 로버트 훅(1635-1703)이다. 그의 재능을 인정한 보일은 이 실험에 필요한 장치를 그에게 일임하였다. 훅 자신도 보일의 신임에 힘입어 그의 재능을 더욱 연마해 나갔다.
1661년 9월, 보일은 이 실험 결과를 왕립협회 모임에서 보고하고, 리누스의 비판에 대하여 반박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공기의 압력이 1기압 이하일 때는 '보일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였다. 이 비판에 대하여 보일은 더욱 실험을 거듭한 결과, 그때에도 그의 법칙이 성립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그는 전에 출판한 바 있던 '공기의 탄력과 그 효과에 관한 물리학적 역학적 신실험'에 이를 추가하여 1662년에 채출판 하엿다. 그 후 1676년에 프랑스의 물리학자에듬 마리오트(1620?-1684)가 보일의 법칙을 재발견하엿다. 이 마리오트는 눈의 맹점을 발견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러한 까닭에 이 법칙은 '보일-마리오트의 법칙' 또는 '마리오트의 법칙'이라고 도 불리고 있다.
앞에서 말한 공기 펌프를 사용하여 보일은 갖가지 실험을 해 보았다. 이를테면, 공기 펌프로 공기를 빼낸 관 속에 각기 다른 무게의 물체를 떨어뜨리면, 그들 물체는 도시에 바닥에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칙을 실험적으로 확인하 것이다. 또 뜨거운 물을 진공 속에 넣으면 갑자기 끓기 시작하는 것이 실험되었다. 이것은 물이 끓기 시작하는 온도가 공기의 압력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실험이다. 더욱 그는 놋쇠로 만든 구면과 이것에 꼭 맞도록 움푹팬 빈 구면을 만들어, 이 둘을 한 덩어리로 하여 진공 속에서 마찰시키면 손을 댈수 없을 정도로뜨거워진다는 것도 확인하였다. 이것은 열이 에너지의 일종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중요한 실험이었다.
<'회의적인 과학자'을 출판하다.>
보일은 근대적인 원소의 개념을 개척한 사람이기도 하다. 1661년에 펴낸 '회의적인 화학자'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보일 자신의 입장을 취하는 카르메아데스, 그 친구인 에레우테리스,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을 지지하는 테미스티우스,파라켈수스(1493-1541)의 3원소설을 지지하는 필로포뉴스 등 4인의 대화형식으로 전개된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50년경의 그리스 철학자인데, 그가 말하는 4원소는 불.물.흙.공기였다. 파라켈수스는 스의스의 의화학자로, 그가 말하는 3원소는 수은.황.소금이었다. 파라켈수스의 3원소 중의 수은과 황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원소이다. 더우기 수은이 액체 금속, 황이 고체 비금속, 소금이 전형적인 염임을 생각한다면 그의 3원소설은 상당한 수준의 것이었다고 생각된다.보일은 어떤 것이 원소인가는 이제까지처럼 추상적인 추리에 의하여 결정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불.산.알칼리 등을 사용하는 실험으로 분해되는가 되지 않는가에 의하여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파라켈수스의 3원소설을 믿는 사람은 금을 분해하여 수은.황.식염으로 만들기 바란다. 그 실험에 운 좋게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그 재료와 실험비용을 모두 내가 기꺼이 지불할 것이다. 단 , 실패했을 때의 벌만은 감수할 각오로 있어 주길 바란다.'라는 말을 하였다.
여기에서 보일이 말하고 있는 원소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잇는 '홑소 물질'에 가깝다. 단, 홑소물질은 오직 한 원소로 형성되는 물질이다. 같은 원소로 구성되는 홑소물질은 오직 하나라고는 할 수없다. 예를 들면 산소로 이루어진 홑소물질에는 산소가스도 있고 오존도 있다. 이와 같이 어느 면에서는 분명치 않은 점도 있지만, 보일에 의한 원소의 정의는 그때까지의 것과 비교하면 훨씬 근대적이라는 것이 확실하다.보일의 법칙과 관계된 실험에 의하여 보일은 원자(분자)설 또는 입자설의 입장을 굳혔다. 물질에 대해서는 데보크리토스(기원전 470년경)의 원자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속체설이 있다. 원자설에서는 흩어진 원자가 공허한 공간(진공)속을 날아다니고 잇다고 생각하고 있다. 요컨데, 물질은 빈구석 투성이라고 한다. 이것은 물질이 끊어진 데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연속체설과는 대립되는 생각이다. 원자와 원자 사이의 간격이 압축욈으로써 좁아진다고 생각하면, 보일의 법칙을 설명하는 데는 원자설 쪽이 훨씬 적절하다.
보일 이후 약 200년 후에 나타난 기체 분자운동론에서는 꼭 이와같이 생각하고 있다. 연속체설로는 설명이 더욱 곤란해진다. 그것은 압축외어 움푹 들어간 곳이 잇으면, 어딘가 다른 곳에 두드러져 나온 곳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압축시켜도 그 부피가 거의 변하지 않는 액체나 고체에서는 원자설과 연속체설의 우열이 판가름하기 어렵다. 그러나 예를 들면 액체의 표면으로부터의 기화에 의한 증발이나, 내부로부터의 기화에 의한 비등(끊음) 따위의 현상은 액체에도 기체의 원자설이 적용됨을 암시한다. 고체를 가열하면 액체로 되고 이것을 더욱 가열햇을때 기체로 된다는 사실에서, 고체에 대해서도 원자설이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요컨데, 보일의 법칙은 물체의 원자설을 지지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학'을 창립하다.>
보일이 살고 있던 무렵의 영국은 동란상태였다. 찰스1세는 내정.외교상의 솜씨가 서툴렀고, 또 프로테스탄트인 청교도를 탄압하였다. 때마침 스코틀랜드에 반란이 일어나, 그것을 진압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소집된 의회가 분규를 일으키는 큼을 타서 청교도혁명이 일어났다.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 왕당군을 격파하고 찰스1세를 처형하였다. 이때 프랑스에 망명한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2세는, 크롬웰이 죽은 다음 왕정복고가 이루어질 때에 다시 영구에 돌와와 즉위하였다.이와 같은 동란의 시대에 보일은 정치적 문제와는 관계없이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기 위한 모임을 만들었다. 1645년에 런던에서 최초로 가졌던 이 모임을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대학'이라 불렀다. 보일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일부러 아일랜드에서 와서 참석하였다. 거리상의 불편으로 인하여 1654년에는 아예 아일랜드에서 옥스퍼드로 이사하였다. 이 무렵 그는 집안에 실험실을 차려 놓고,앞에서 말한 바 있는훅을 또다시 조수로 기용하여 본격적인 과학실험을 시작하였다.
눈에 보이지 않은 대학의 회원들 중에서도 런던을 떠나 옥스퍼드로 이사해 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 무렵의 모임을 대개 보일의 집에서 갖게 되었다. 아이작 뉴턴(1642-1727)도 이 모임의 열성적 회원이었다. 왕정복고 후인 1662년, 찰스 2세의 도움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대학은 왕립협회가 되었다.
이 모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그 회원이 된다는 것은 학자에게 있어서 최대의 명예로 여겨지고 있다.
<외뿔소 뿔의 실험도 하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학에서는 모든 문제가 토의 되었다. 보일이나 뉴턴에게 영향을 미친 토리첼리의 실험,보일의법칙,만유인력의 법칙,행성의 운동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월리엄하비(1578-1657)의 '혈액순환의 원리'나 연금술의 문제도 토의되었다.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처음으로 관찰한 네덜란드의 레벤후크91632-1723)에 대하여 최초로 이해한 것도 이 눈에 보이지 않는 대학이다.
이들은 또 '외뿔소의 뿔을 가루로 만들어서 둥근 테를 만들고, 그안에 거미를 놓아 두면 거미가 둥근 테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말을 확인하기 위한 실험도 하였다. 회원 중에 한 사람이 외뿔소 뿔의 가루를 가져 왔고, 다른 또 한 사람은 거미 한마리를 병에 넣어 가지고 왔다. 등불 밑에 둥글게 모여 있는 회원들 앞에서 실험이 진행되었다. 실험보고서에는 '외뿔소의 뿔을 태운 가루로 둥근테를 만들어, 그 한가운데에 한 마리의 거미를 놓아 두었다. 거미는 즉시 그 둥근 테 밖으로 달아나고 말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실험을 하였다고 해서 그들을 어리석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동란의 소용돌이를 등지고 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하기 위해 모인 이러한 사이 좋은 사람들의 호기심에서, 현대의 자연과학이 발전되었가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