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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과학자

볼쯔만[Ludwig Boltzman]

작성자임중명|작성시간05.09.08|조회수396 목록 댓글 0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이 기술한 열역학 제2법칙 또는 엔트로피(entropy) 법칙은 이렇다. "바다에 큰컵 한 잔의 물을 부으면 그 한 잔만큼의 물을 다시 얻지는 못한다." 사실 이것은 물질계에 심대한 결과를 낳았다. 증기 기관(steam engine)의 작동, 기체 확산뿐만 아니라 화학적이고 생리적인 과정과 시간의 정의 등이 엔트로피에 의해 명확해졌다.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발견하고 정식화한 것은 19세기 과학자들의 개가였다. 거기에는 사디 카르노(Sadi Carnot, 1796-1832), 켈빈 경(William Thomson Lord Kelvin, 1824-1907), 조지아 깁스(Josiah Willard Gibbs, 1832-1903), 루돌프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1888)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고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통계 역학(statistical mechanics)의 시조인 루트비히 볼츠만이다. 그는 선견지명으로 자연에서 엔트로피가 하는 역할을 간파했다.
  막스 플랑크(Max Planck, 1858-1947)는 볼츠만을 최후의 위대한 고전 물리학자로서, 맥스웰을 옹호하고 새로운 원자론을 지지했으며 "엔트로피의 의미를 실로 깊이 있게 이해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볼츠만은 분자 수준의 열역학 제2법칙에서 그 거시적인 의미를 파악했고, 통계적 접근으로 20세기 물리학으로 가는 결정적인 디딤돌을 마련했다. 에이브러햄 페이스(Abraham Pais)가 쓰기를, "19세기 물리학 이론의 위대한 진보인 이 발전은 주로 볼츠만의 공이다."
  볼츠만은 1844년 성회일 전날인 2월 20일 빈 교외의 에르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트비히는 세무 공무원이었고, 어머니 카타리나 파우에른파인트는 잘츠부르크 출신이었다. 처음에는 가정 교사한테서 교육을 받았다. 소년 볼츠만은 나비나 풍뎅이를 수집하러 교외로 소풍을 떠나곤했다. 또 시계 만드는 일을 한 할아버지처럼 훌륭한 기술자였다. 그는 빈 대학에 들어가 1866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시절부터 볼츠만의 관심은 전자기와 역학, 열역학(thermodynamics)에 있었다. 볼츠만은 영문법 서적과 사전을 뒤적거리며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electromagnetic theory)을 공부했다.
  젊었을 때는 나이 많은 동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1870년경 분젠(Robert Wilhelm Bunsen, 1811-1899), 키리히호프(Gustav Robert Kirchhoff, 1824-1887), 그리고 베를린 대학의 헬름홀츠(Hermann Helmholtz, 1821-1894) 등과 함께 작업했고, 1873년부터 1876년까지 빈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 뒤 그라츠 대학에서 실험 물리학 교수가 되었고 나중에 부총장이 된다. 1894년 슈테판(Josef Stefan, 1835-1894) 교수가 죽자 볼츠만은 빈 대학의 물리학 교수 자리에 앉게 된다. 제럴드 홀턴(Gerald Holton)은 볼츠만이 비범한 강사였다고 썼다. "정확한 준비, 면밀하게 짜여진 언변에다 탁월한 유머 감각과 인간미까지 더해져 그의 강의실은 언제나 학생과 참관인들로 넘칠 지경이었다."
  19세기에 열역학으로 알려진 열(heat)과 온도(temperature)에 관한 중대한 연구가 발전하여 다음과 같은 공리가 확립되었다. 물질계에서 에너지의 한 형태인 열이 운동이라는 다른 에너지 형태로 전이될 때 에너지는 새로 생성되거나 소멸하지 않고 보존된다. 이 물리법칙은 후에 증기 기관과 같은 발명품의 운용에서 확증된다. 이 열역학 제1법칙에 제2법칙이 추가된다. 고체든 액체든 기체든 모든 계(system)는 극대의 무질서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에너지는 열적 평형 상태 (thermal equilibrium state; 전체적으로 균일하게 에너지가 분포된 상태)라는 한 가지 방향으로만 흐른다.
  이 개념은 1824년 프랑스 물리학자인 카르노로부터 시작된 이래 수십 년간 발전하여, 1850년 독일인 클라우지우스에 의해 엔트로피로 명명되고 정교화되었다. 이제 맥스웰의 기체 연구에서 영감을 받은 볼츠만이 열역학 제2법칙을 통계적 접근과 연결했다.
  19세기에 기체 분자의 성질은 원자론이 완전히 확립되기 전까지 점차적으로만 밝혀졌다. 1860년에 맥스웰은 기체 운동 이론(kinetic theory of gases)으로 기체의 전체적인 움직임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요소, 즉 분자의 기능임을 보이고자 했다. 본질상 이것은 뉴턴의 역학적 사고를 분자끼리의 충돌과 관련시킨 것으로서 중요한 발전이었다. 그러나 맥스웰은 기체의 열적 평형 상태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경향만을, 예컨대 방열기로 데워진 공기가 방 안에 고루 퍼지는 경향을 설명했을 뿐이다.  
  1866년 볼츠만은 처음으로 열적 평형을 논의했고, 몇 년 뒤에는 기체 분자의 확산을 측정하기 위한 공식인 '볼츠만 분포(Boltzman distribution)'를 정식화한다. 이는 열역학적 계산의 근본 요점이 된다. 처음에 이 연구는 역설을 낳았다. 기체 분자의 분포를 뉴턴 법칙과 역학에 따라 가정한다면, 자동차가 뒤로 달릴 수 있는 것처럼 거꾸로 뒤집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기체가 플라스크에서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을 되돌릴 수 없으며, 찢어진 기구에서 헬륨을 다시 채취할 수도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1877년 볼츠만은 본질상 통계적인 엔트로피의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볼츠만 원리로 알려졌다. 볼츠만 상수 k를 쓰면, S-계의 엔트로피는 확률 W와 S=klogW의 관계에 있다. 이 유명한 방정식은 특정 기체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평형 상태로 접근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이것은 엔트로피 법칙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간단명료한 표현이 되었다.
  기체 운동론에 기여한 것말고도 볼츠만은 다양한 현상에 관해 기술했다. 그가 쓴 논문들 물리학, 화학, 수학뿐만 아니라 철학에까지도 걸쳐 있다. 그는 시력은 나빴지만 훌륭한 실험가였다고 한다. 경험주의 경향 때문에 쇼펜하우어나 헤겔(G. W. Hegel) 같은 독일 관념론 사상가들과는 반목했다. 그는 일찍부터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이론을 열렬히 지지했다. 다윈설의 영향은 볼츠만에서부터 같은 빈 사람인 슈뢰딩어(Erwin Schrodinger, 1887-1961)에까지 미쳤다. 슈뢰딩어는 DNA 구조의 발견에 발판이 되는 가정들을 발견한 사람이다. 동시에 볼츠만은 원자 구성 입자 세계의 가능성을 인정한 원자론자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다른 가정이 현상을 더 잘 표현하게 된다면, 우리는 흔쾌히 (원자의) 불변성을 포기할 것이다." 볼츠만은 생물학자뿐만 아니라 양자 역학(quantum mechanics)의 세계에서도 편안해했을 만한 19세기 물리학자이다. "프랜시스 크릭과 자크 모노(Jacques Monod) 같은 현대 분자 생물학자들도 볼츠만과 함께 있으면 전혀 불편하지 않을 것"이라고 월터 무어는 썼다.
  그러나 1890년대에 볼츠만은 원자의 존재를 옹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논쟁이 볼츠만에게 죽음을 안겨 준 불씨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가 몹시 싫어한 마하(Ernst Mach)나 오스트발트(Wilhelm Ostwald) 같은 명사들의 도전을 받았고, 볼츠만은 원자론의 편에 섰다. 유레 없이 치열했던 그 논쟁은 어쨌거나 그가 평생 해온 작업의 심장부를 겨냥했다. 설상가상으로 건강까지 나빴다. 말년에 천식과 편두통으로 고통받았고 거의 장님에 가까울 정도로 눈이 보이지 않았다. 엥겔베르트 브로다(Engelbert Broda)가 쓴 성인전의 기록에 따르면 "과학 연구에서의 대단한 성공, 자연과 예술이 지닌 아름다움의 완전한 향유, 낙청주의와 유머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에 시달렸다."
  볼츠만은 1904년 미국을 방문하여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강연하고 캘리포니아에도 갔다. 그가 독일 신문에 기고한 흥미진진한 여행담이 '엘도라도의 독일 교수'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1906년 유럽으로 돌아와 쉬면서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트리에스테를 방문했다. 9월 4일 아내와 딸이 아름다운 뒤노 만에서 수영하는 동안 볼츠만은 스스로 목을 맸다.
  볼츠만은 빈의 중앙 묘지에 묻혔다. 대리석 비석에는 그의 상반신과 방정식 S=klogW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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