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할 수 있는데2001년 10월21일 성경 : 왕하20:1-7, 눅11:5-10 제목 : 기도 할 수 있는데 1998년도에 한국 갤럽이 기독교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여러 항목 중에 "하루에 기도를 얼마나 하느냐" 라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응답은, 먼저 남성을 보면 43.1%가 기도하지 않는다고 대답했고, 17.3%가 10분 이하, 그리고 27.3%가 10분에서 30분까지 한다고 답했고, 1시간 이상 하는 사람은 전체의 4.5%였습니다. 여자성도는 어떠냐 하면 27.7%가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고 10분 이하가 23.2%, 10분에서 30분 정도하는 사람이 32%, 30분 이상이 9.9%, 한 시간 이상 하는 사람은 7.2 % 라고 답했습니다. 여자 성도가 조금 더 기도하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는데 전체적인 추이를 보면, 전체의 절반 이상이 기도를 전혀 하지 않고, 기도를 하는 사람도 그다지 오랫동안 기도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이 통계를 들으시면서 내가 어디쯤에 속하나 생각하셨을텐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치고 기도에 부담을 갖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나 저나 왜 기도생활다운 기도생활을 못할까요? 거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을 겁니다. 아마도 중요한 원인은 우리들의 조급함 때문일지 모릅니다. 현대의 문화가 자꾸만 우리를 급하게 하는 거예요. 우리 모두가 컴퓨터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직접 다루든 안 다루든 우리는 생활 전반에서 컴퓨터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 은행이나 철도나 관공서에서 갑자기 컴퓨터가 다운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전쟁같은 난리를 치루게 될 겁니다. 늘 인터넷을 하다가 하루 이틀만 못하게 되면 굉장히 답답하지요? 그 컴퓨터 세대의 특징이 뭐냐? 한 마디로, 클릭하면 바로 떠야 되는 겁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거기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잘 기다리질 못합니다. 오죽하면 컴퓨터 주기도문이 나왔을까요? 여러분 들어보셨어요? 소개해 드리죠. "하드디스크에 계신 우리 프로그램이시여. 패스워드를 거룩하게 하옵시고 운영체계에 임하옵시며 명령이 키보드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모니터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데이터를 주옵시고 우리가 프로그램의 오류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오타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바이러스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불시의 정전에서 구하옵소서. 엔터. 이런 시대적 경향에다가 그 흐름이, 은연 중 기도에 대한 오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치 컴퓨터의 클릭처럼, 기도란 것도 내가 딱 기도하면 즉각적으로 응답이 와야 하는데 기도해 보아도 응답이 없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걸까? 기도가 정말 필요한 것일까?" 이런, 기도에 대한 본질적인 회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급해지는, 컴퓨터 클릭시대의 영향이 우리 기도생활에 적잖게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컴퓨터와는 다릅니다. 컴퓨터에서는 정보만 얻으면 됩니다. 그러나 기도는 인격의 대화입니다. 기도하는 자신과 그 기도하는 대상이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도 가운데 즉각, 응답하는 정보를 얻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대화는 기다림의 과정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대화가 깊어지려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계속 얘기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충분한 시간을 통해서 나와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더해지고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기도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 아마도 여러분 중에 기도를 많이 하시지 못하는 분들은 상당한 부담감과 어쩌면 죄책감을 가지고 이 시간을 대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먼저 여러분께 권합니다. 그런 마음 갖지 마시고 오늘부터라도 새 마음을 가지시면 됩니다. 마귀들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리는 최고의 작전이 뭐냐하면 바로 이 부담감과 죄책감을 주는 겁니다. "나같이 기도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게 무슨 신자야? 평소에는 몰라라 하면서 어려울 때만 기도하는 게 얼마나 치사한 짓이야?"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이 생각이 바로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기도 안 한 것 때문에 우리를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1:18) 그래서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의 부담감과 죄책감을 자극하는 마귀의 작전에 말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 어느 때 기도를 시작하더라도 그건 늦은 게 아닙니다. 그러면, 기도하면 어떻게 됩니까? 정말 들어주시나요? 먼저 오늘 말씀의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반드시, 꼭 들어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유명한 히스기야왕의 기도를 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치적을 기록해 놓은 열왕기 상하를 읽어보면 정말 괜찮았던 왕은 손가락을 꼽기도 어렵습니다. 하나같이 하나님과 백성들을 우습게 알고 악행을 저지른 왕들의 이야기로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 히스기야 왕은 그 많은 악한 왕들 중에서 보석같이 빛나는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히스기야 왕에게 큰 일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죽게 될 테니까 일찌감치 집 정리를 하고 죽을 준비를 해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시면 사람은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습니다. 그 계획에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겐들 안 그렇겠습니까만은 히스기야왕에겐 이 소식이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이제 겨우 앗수르의 대군을 물리치고 좀 안정이 되어갈 때였는데 이렇게 사형선고를 받고보니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히스기야왕은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자기의 생명도 생명이지만,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고 보니,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데 이대로 죽자니 너무나 애닯았습니다. 그래서 벽을 향해 돌아서서 통곡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구하기를, 자기가 과거에 하나님 앞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것을 보시고 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히스기야가 기도하는 것은 하찮은 자기 생명 하나 때문에 간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강국인 앗수르가 유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죽게 되면 여러 가지 정황을 봐서 분명히 나라는 멸망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되니까 그걸 어떻게 해서든 면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 가운데 히스기야 같이 막다른 골목까지 다다를 수 있습니다. 이미 경험하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아직 그런 일이 없으셨다면 앞으로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기술문명의 효율에 젖어있는 우리들에게 기도는 어쩌면 대단히 느리고 비효율적인 방법일지 모릅니다. 기도하는 대신 다른 대안을 찾는 게 더 빠를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기도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이 세계에 이미 다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찾으면 찾아집니다. 빨리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경우가 옵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오직 기도 밖에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고난을 주시기도 하신다는 겁니다.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생명을 15년 더 연장시켜주시고 병도 깨끗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한신대 신학과 교수님 중에 오영석 교수님이 있습니다. 원래 그 분이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는데 너무 가난해서 다른 친구들은 다 중학교에 가는데 자기는 중학교도 못가고 날마다 풀이나 베러 다니고 지게 지고 나무나 하러 다녔습니다. 하루는 자기 신세가 하도 처량해서 나무하러 갔다 오면서 이런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도 중학교에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때 이런 감동이 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상서를 올려라." 이 분이 이런 감동을 받고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써서 봉투에 "하나님 아버지 전상서" 라고 쓰고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우체부가 우편물 분리를 하는데 주소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 전상서"라고 써 있는 편지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망설이다가 '그래 하나님 아버지를 좋아하는 사람은 목사밖에 없으니까 목사한테 갖다 주자' 해서 그때 당시에 해남읍 교회에 계시던 이준묵 목사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그 목사님이 편지를 읽고 감동을 받아서 그 소년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불러다가 그 목사님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같이 지내면서 중학교, 고등학교 공부를 시켰습니다. 한신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계속해서 한신대학을 졸업하고 나중에는 유학을 가려고 유학 준비를 하는데 나라에서 어떻게 조치를 취했는지 여권이 안나오는 거예요. 그도 그럴 것이 이 분이 유신 정권 때 유신 반대 데모를 하다가 요주의 인물로 찍혔거든요. 아무리 여권 신청을 해도 여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유신시대 때 가장 데모를 많이 했던 학교가 고대와 한국신학대학이었습니다. 그래서 갈 길이 막막해서 유학가는 것을 잠시 접어두고 경기도 어느 시골에 있는 교회에 가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교회 근처에 있는 골프장에 경찰 제2국장이 골프를 치러 왔습니다. 그래서 경찰 국장과 친분이 있는 그 교회 장로님이 경찰 국장에게 "우리 전도사가 외국 유학 준비를 하고 있는데 여권이 안나와서 유학을 못가고 있으니 여권 좀 나오게 해 주십시오." 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경찰 국장이 장로님의 부탁을 받고 여권을 받게 해주려고 알아봤더니 요주의 인물로 붉은 줄이 쳐 있더랍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장로님에게 전화를 해서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아예 갈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전했습니다. 실망한 이분이 어느 날 수유리 언덕을 넘어오는데 동쪽에서 빛이 비취는데 너무 찬란하게 비쳐서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그때 마침 성령의 감동이 오더랍니다.그래서 눈밭에 엎드리고는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오 주님, 내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이 밝은 햇살같이 내 앞길도 밝아지게 하옵소서." 하고 눈물 뿌려 기도했답니다. 그날 밤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지프차를 타고 와서는 문을 열고 "영석군 나와" 하더니 지프차를 타고 중앙정보부로 데리고 들어가더랍니다. 들어가면서 철커덩 하고 문이 닫히는데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진짜로 중앙정보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영석씨입니까?" "예, 그런데요?" "빨리 와서 여권받아 가시오."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그분이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서 교수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그 분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요주의 인물에서 해제되고 여권이 나왔는지 모른답니다. 이 얘기는 한신대 교수님들이 신입생 채플시간에 꼭 들려주시는 얘기입니다.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때, 사방팔방이 다 막혀 있을 때, 방법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제가 군복무할 때, 한 번 사단장 표창을 받으러 사단 본부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들어가기 전에 우리 사수가 얼마나 치장을 시키는지요, 군화를 며칠을 광내고, 손이 베이도록 군복 - 물론 방위복이죠. 그 옷에 다림질을 해서 줄을 세우고, 모자하고 계급장도 다 새 걸로 달으라고 하고... 하여튼 며칠 동안 시집살이 하느라고 혼났습니다. 그래서 그때 생각에 "이거 사단장 한 번 보는 것도 이렇게 치장을 시키는데 참모총장이나 대통령을 본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 해야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러 갈 때 우리 하나님 앞에는 아무 치장이 필요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나가시면 됩니다. 죄가 있으면 죄가 있는대로, 괴로와 죽겠으면 죽겠는대로, 그대로 나가시면 됩니다. 오늘 히스기야의 모습을 보십시오. 왕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한 인간의 나약한 모습 그대롭니다. 체면도 차리지 않고 벽을 향해서 무릎을 끓고 통곡합니다. 왕의 체통을 지키면서 점쟎게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린애처럼 떼쓰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이 설득 당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변경시킵니다. 히스기야를 그만 살게 하려고 했는데, 그 계획을 바꾸시고 십오년을 더 살게 해 주시기로 작정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말씀을 드릴 때 우리 하나님은 부성과 모성을 동시에 가지신 분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부성과 모성 둘 다 합한 속성의 가장 큰 특징이 뭐냐하면, 눈물에 약하다는 겁니다. 그 통곡 앞에서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손드셨습니다. 간절한 소원에는 약하시다는 겁니다. 결국 들어주고 마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우리 아이들이 대하는 엄마나 아빠와 똑같습니다. 누가 우리들 아이 중에서 "존경하는 부모님! 기체후 일향만강하옵신지요? 바라옵건데 소녀의 필통을 하나 사주시면 망극하겠나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아이가 있습니까? 만약 이렇게 얘기하는 아이가 있다면 "이 놈이 돈거 아냐? 너 정신분석 좀 해보자" 그럴겁니다. 다급할 때는 아무런 수사가 필요없는 것입니다. 자식도 여럿 두다보면 그 중에 더 예쁘고 덜 예쁜 자식이 있나봐요. 저희 어머니는 8남매를 두셨는데 어머니가 좀 거치세요. 그래서 늘 하시는 말씀이 "이눔들아 너희 중에 누구 하나 죽어 봐라 내가 눈 하나 깜짝하나" 그러시면서도 그 중에 더 이뻐하는 형님이 있더라구요. 그런데 보면 평소에 그 형님이 어머니한테 잘 하세요. 잘 하니까 맘이 더 가시는 모양이예요. 아무래도 당신한테 잘 하는 자식이 더 예쁠 겁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인격체십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의 기도는 더 잘 들어주십니다. 아마도 히스기야왕이 다른 왕들처럼 바알을 섬기고 타락해서 하나님 떠난 삶을 살았다면, 아무리 통곡을 하고 야단법석을 떨어도 하나님의 마음은 요동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왕은 다른 왕들과 달랐습니다. 분열왕국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의 암흑기였습니다. 일어나는 왕들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온나라에 우상을 들여와서 백성들을 타락시키는 일들을 왕들이 도맡아 했어요. 그런데 히스기야왕은, 왕이 되는 즉시로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나라안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철폐했습니다. 여러 산당들을 때려부수고, 주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렸고, 놋뱀을 다 부숴 버렸습니다. 그리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통치했습니다. 히스기야왕은 위기 때에, 바로 이것을 자신의 히든카드로 사용했던 것이었습니다. . 기억하십시다. 우리 신앙의 삶이 바르지 못하다면 그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히스기야 왕처럼 하나님앞에 바르고 정직히 행하고, 신앙의 바른 모습을 보여야 하나님은 그 눈물을 통해서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평소의 신앙입니다. 평소실력이 진짜 실력인 것처럼, 평소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내 놓을 수 있는 히든카드인 겁니다. 이제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평소에 믿음생활을 잘 안하게 되니까 기도하지 않게 되고, 기도하지 않으니까 믿음생활도 잘 안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위기가 올 때도 감히 기도할 엄두를 못내게 되는 그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겁니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사는 겁니다. 그때야 여러분의 기도는 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해하지 마셔야 할 게 있습니다. 그럼 평소에 제대로 살지 못하면 우리의 기도를 안들어 주시냐? 그건 또 아닙니다. 또 자식과 부모 사이를 생각하면 됩니다. 부모는 미운 자식에게 떡 하나 더 줍니다. 하나님께서도 모처럼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는 잘 들어 주십니다. 또 부모는 어린 자식의 부탁은 차마 거절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믿음이 연약한 사람의 기도는 또 거절 못하십니다. 교회 다닌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의 기도는 꼭 들어 주십니다. 또 부모는 장남들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 줍니다. 집의 대들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믿음생활 오래 한 사람들, 이런 분들의 기도는 거절 못하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부모는 이래저래 거절 못하고 자녀들의 부탁을 다 들어 줍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 자녀들의 기도를 결국은 다 들어 주십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 일과 방법을 예수님께서 직접 예를 들어 주셨습니다. 어느 날 집에 친구가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식사 때가 훨씬 지나서 왔습니다. 보니까 밥도 못 먹은 거 같습니다. 대접을 해야 할 텐데 대접할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시간을 보니 자정이 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할 수 없이 친구의 집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친구가 자다가 목소리를 들어보니 누구라고 하지 않아도 알만한 친굽니다. 친구 좋아해도 그런 시간에 찾아오면 누가 반기겠습니까? 하지만 반갑지는 않아도 소리치는 것을 듣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여보게, 갑자기 친구가 지금 찾아왔는데 구워 놓은 빵 있으면 세 덩이만 빌려주게!'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칩니다. 계속 소리치니까 대답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자는 척하고 누워만 있을 수가 없어요. "귀찮게 하지 말게, 문은 이미 닫아걸었고 아이들은 나와 함께 이불 펴고 누웠으니 일어나 도와줄 수가 없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2000년 전 형편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때 주거 환경은 요즘과 달랐습니다. 조그만 방 하나에 온 식구들이 다 누워 잠을 자던 시절입니다. 한 50 년, 100년만 해도 방들이 아주 작았습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공통입니다. 그러니까 자다가 바깥에 나갔다 들어오면 누울 자리가 없어져 버립니다. 형편이나 기분을 가지고 말하면 친구고 뭐고 청을 들을 상황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내버려뒀다가는 온 식구 잠을 다 깨우고 말 것입니다. 그 날밤 잠 농사는 다 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요청을 들어주고 돌려보내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 예화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이 결론적으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보십시오. 체면이고 예의고 집어 던져 놓고 바깥에서 소리치는데 어쩌라는 겁니까? 옛날 사회는 그랬습니다. 찾아오는 손님을 홀대하면 그것은 사람 축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동네 전체가 망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중대사입니다. 그래서 계속 두들깁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매달립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여서가 아니라 그 강청하는 것에 못 이겨서 결국 일어나 빵을 주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강청(强請)함! 달라고 떼쓰는 겁니다. 이것은 부끄럼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믿음 생활이 뭡니까? 부끄러움을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드리러 나왔지만 흐뭇한 분이 얼마나 되십니까? 항상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요, 그것을 마귀는 이용합니다. "니가 지금 무슨 기도야? 너나 정신차려!" 그런 마음을 줍니다. 부끄러움은 우리의 가장 큰 적입니다. 부끄러움을 이겨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끄러움은 우리의 힘을 약화시킵니다. 그러나 기도는 부끄러움 없이 하는 것입니다. 자격은 없습니다. 옆집 두드리는 것처럼 미안하지요, "이런 모습을 가지고 왔는데 기도해도 됩니까?"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강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의 의미고 방법입니다. 저는 오늘 서두에서 우리가 기도하면 어떻게 되느냐?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씀은 정말입니다. 주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셨죠? "너희들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사실이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응답받아야 될 기도는 두 가지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와 평소의 문제가 있을때입니다. 히스기야처럼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눈물의 기도, 통곡의 기도, 간절한 기도를 해야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 죽음의 장막을 거둬 주십니다. 또한 산 넘어 산이라고, 문제 뒤에 또 다시 오는 문제들을 계속 응답받기 위해서는 평소에 기도해야 합니다. 안 들어 주시면 들어주실 때까지 끝까지 기도하는 겁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절대로 팽개쳐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의 하나가 로마서 8:26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없을 때 성령께서 친히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별 일없이 잘 되나가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은 직접 하는 게 가장 호소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말씀드릴 때 가장 효과가 큰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여러분과 직접 대화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까지 남겨두실 지도 모릅니다. 성령님이 아무리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하신다 하더라도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성령님은 우리가 꼭 해야 될 기도는 생략하실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건 우리 몫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것을 이미 다 주셨습니다. 얻지 못한 것은 여러분이 아직도 찾지 않고, 구하지 않고 두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고 실망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일년 이년만 붙잡고 늘어지면 안 들어 주시는 일이 없는데 왜 기도 안하십니까? 결국은 기도하는 사람이 이깁니다. 제가 우리 인터넷 카페 오늘의 묵상 란에 혜수 이야기를 쓴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 처음 왔을 때, 한참 스쿠터가 유행했습니다. 그걸 본 우리 혜수가 그게 무척 타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걸 사달라고 조르길래 알아봤더니 1000실링 쯤 되야 쓸만한 걸 살 수 있었습니다. 그때 형편으로는 사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혜수한테 제가 말하길 "알았어 돈 생기면 사줄께" 그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애매하게 얘기한 건 사실은 안 사줄려고 그랬던 겁니다. 사 달라고 하면 "돈이 아직 안 생겼어!" 그렇게 대답하면 간단하니까요. 그런데 얘가 잊어버릴 만 하면 또 말을 합니다. "아빠 돈 생기면 사 주는거야" 시간이 지나가면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애의 믿음은 약해지기는 커녕 점점 더 강해지더라구요.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가니까 혜수의 믿음이 저에겐 굉장한 부담으로 오더라구요. 그런데 그런 약속을 한지 6개월 만에 뜻밖의 돈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떼고, 제일 먼저 혜수의 스쿠터를 사줬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혜수의 끈질긴 요구와 아빠가 분명히 사주신다는 그 믿음이 제가 스쿠터를 사 준 요인이더라구요.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기도하는 걸 거절하실 만큼 강심장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우리 욕심따라 구하는 게 아닌, 마땅히 구할 걸 구하는 기도에는 하나님은 꼼짝 못하고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하나님, 그분이 우리보다 우리에게 더 주시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핸디를 갖고 계시죠? 핸디는 어디서나 직통연결이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연결된 Heaven Phone 입니다. 하늘과 직통으로 연결됩니다. 수화기를 들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는 게 기도입니다. 여러분! 이 Heaven Phone을 드시고 하나님과 자주 통화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날엔가는, 여러분이 구하지 않은 것까지 받은 사실을 아시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끊임없이 줄기차게 대화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데도 걱정하고 근심하며 살았습니다. 기도는 우리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인데 우리는 그것을 팽개쳐 버리고 있었습니다. 이시간 우리로 다시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즐거울 때나 기쁠 때나 언제든 주님과 기도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연결된 이 끈을 절대로 놓치지 않게 하시고 이제는 기도하기를 즐거워하는 저희들로 훈련시켜 주옵소서.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그 모든 보화를 캐내어 가질 수 있는 저희들 다 되도록 우리 성령님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
주님의 사랑이 의심될 때2001년 11월11일 성경 : 요11:1-11 말씀 : 주님의 사랑이 의심될 때 저는 지난 10주 동안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꼭 알고 있어야 될 사실들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부터 시작해서 성찬까지 말씀을 드렸는데 그 모든 말씀을 몇 줄로 요약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 누구라도, 또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과 성령님을 통해서 이어져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받은 우리도 마땅히 할 일이 생겼는데, 그것은 우리 쪽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어떻게 들으면 막연하고 추상적인 얘기같이 들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말씀들이 실감나려면 구체적인 체험을 해야 될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먼저 우리 주님께서는, 우선은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고 권유하십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되고 믿겨지지 않더라도 때가되면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고 마침내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살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적으로 알게되고, 그 사랑에 감격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이미 그런 아름다움 모습으로 사시는 분들도 있고, 그 수준에 올라가도록 노력하고 계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보면 바로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때가 옵니다. 성경전체의 말씀이, 그리고 예배 때마다 듣는 모든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친히 제물로 십자가에 달리셨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일대일로 오셔서 우리의 전 생애를 살펴주신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울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기다려도 오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때가 온다는 겁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될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오늘 저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나사로의 이야기로, 여러분과 함께 그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먼저 이 나사로의 가정은 우리가 얼핏만 봐도 예사 가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집엔 어른이 살지 않고, 과년한 삼남매가 결혼도 하지않고 함께 살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그 사연에 대해서는 성경에 자세히 나와있지 않습니다. 부모가 계시지 않지만 그렇다고 가난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향유가 가득 들은 옥합을 깨뜨렸던 마리아가 이 집의 막내입니다. 적어도 우리 돈으로 1000만원 가까이 하는 패물을 수중에 넣고 있는 사람은 지금도 찾기 쉽지 않습니다. 이 가정이 또 특이하다는 게 삼남매 모두 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믿음의 가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여유있는 사람들이 예수믿기란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예수님 시대에 살기가 넉넉하다고 하면 아마도 아쉬운 게 없어서 에수를 더 안믿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이 삼남매는 예수님을 잘 믿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크게 세 지방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맨 북쪽이 갈릴리, 가운데가 사마리아, 그리고 남쪽이 유대지방로서 수도 예루살렘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사역의 거의 대부분을 갈릴리 지방에서 하셨는데 때로는 유대 지방으로 올라오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에 오실 때마다 거의 묵으셨던 숙소가 어디였냐 하면 바로 이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삼남매의 집이었습니다. 이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오리쯤 떨어져 있는 곳이어서 예루살렘에서 일을 하시다가 오시기도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집엔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용으로 쓸 수 있는 방이 따로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주 오시다보니 이 가정과 예수님 사이는 아주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이나 그 삼남매나 나이차이는 얼마 나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오시면 예수님은 그 집의 어른으로서 아버지같은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이 집에 오기만 하면 그 자매들이 식사를 준비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누가복음10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 집과 예수님의 사이는 각별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도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적어도 이 집에서만큼은 편히 쉬셨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이 집에 먹장구름이 드리워졌습니다. 이 집에 가장인 두 자매의 오빠 나사로가 덜컥 병에 든 것입니다. 처음에는 저러다 말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루 이틀 사이에 상태가 악화돼서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사람을 보냈는데 예수님은 오시질 않았습니다. 결국 오빠 나사로는 죽고 말았습니다. 장례도 이 두 자매가 치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도 안 계신데 하늘같이 믿던 오빠가 죽었으니 두 자매는 얼마나 상심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 자매 들 중에서도 오빠가 있으신 분들은 오빠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 아실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는 오빠를 생각하면 "에유, 지겨워! 부모 속이나 썪이지 말지!" 그럴 분도 계시겠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오빠는 여동생을 무척 사랑합니다. 이 두 자매의 상심은 보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선은 오빠가 죽은 것이 상심이 됐겠지만, 오셔서 오빠를 고쳐주실 줄 알았던 예수님이 오시자 않자 거기에 상처는 더 커졌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가장 큰 상처를 받을 때가 언젠고 하니,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입니다. 돈으로 손해본 것은 당장은 큰 타격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복구가 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당하면 그것은 평생을 따라 다닙니다. 이 자매들이 나중에 오신 예수님을 보자마자 말하죠. "왜 좀 더 일찍 안 오셨나요. 예수님이 계셨다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텐데" 그렇게 원망하는 걸로 봐서 예수님에게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믿었는데, 그 사랑을 의심해 본 적이 없는데 어느 날엔가 갑자기 그 사랑에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엔가 예수님의 그 사랑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건가? 사랑하신다면서 이럴 수 있으신건가?" 그렇게 의심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어떨 때,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할 위험에 빠지게 되는지, 그리고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몇 가지만 나누기를 원합니다. 우선, 우리는 나사로의 경우에서처럼 갑작스런 불행을 당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는 젊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아주 고매한 인품을 소유하고 있었던 젊은이였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두 자매를 보호해줘야 할 기둥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제자처럼 크게 쓰임받아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인데, 이렇게 젊고 선하고, 전도유망한 청년을 데려가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이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은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믿을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이런 일이 비단 나사로 삼남매네 집에만 닥치는 것이겠습니까? 제가 아는 성악가 한 분이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서 좋은 자리를 얻어서 귀국했는데 - 아주 열심히 예수를 잘 믿는 분이었습니다 - 돌아온 지 얼마 안돼서 샤워를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 부인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나사로 삼남매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씨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앞에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이 닥치더라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사로가 병이 든 배후에는, 사람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예수님의 심오한 뜻과 목적이 숨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4절에 보면, 두 누이동생들이 보내온 전갈을 듣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쉽게 말하면 "안 죽는다.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 오빠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실 것이고, 나는 찬송받게 될 거다. 나를 믿는 사람이 많아질 거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아라" 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얘기를 다 압니다. 실제로 이일 뒤에 나사로는 장사지낸 지 나흘이 지났는데도 무덤에서 베를 두른 채로 살아서 걸어나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놀라고 예수님을 믿게 된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작스런 불행은 그 이면에 하나님의 깊고 넓으신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 살을 의심하는 것은 안될 말입니다. 윌리엄 캐리라는 인도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인도 최초의 선교사였죠 이분은 굉장히 부지런했던 분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전기를 읽으면서 제일 머저 배울 수 있는 것이 이분의 부지런함이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안에 인도의 여러 지방방언들의 활자를 만들어서 성경으로 찍어낸 분입니다.또 중국어 활자를 제작하고 중국어로 성경를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인도문법책을 만들고, 산스크리스트어로 구약을 번역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뱅갈어로 신약을 번역하고 그리고 지방마다 다른 말들의 문법책들을 정리해서 집필해냈습니다. 그런데 1812년 3월12일, 이분의 집에 불이 났습니다. 한 순가에 잿더미가 됐습니다. 20년 동안 해놓은 일이 하루아침에 다 날라갔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그런 경험이 있으신 분들이 계실텐데 밤새도록 작업한 걸, 키보드 한 번 잘못 눌러서 날아갔을 때 그 애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20년 동안 작업해 놓은 것이 하루 밤 새에 다 무위로 돌아갔을 때 거기서 오는 허망함은 얼마나 클 지 우리는 쉽게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잿더미에서 윌리암 캐리는 다른 선교사들과 모여 예배를 드려습니다. 그리고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분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우리는 모르지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 그렇게 고백한 뒤 헤어졌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캐리의 조국인 영국까지 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영국 젊은이들 사이에 각성이 일어나고 그 결과로 3000명이나 되는 선교사 지원자가 나왔습니다. 그 중에서 500명의 선교사와 전문가가 가서, 윌리암 캐리가 20년 동안 했던 일을 단 이년만에 다 복구를 시켜놨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는 인도 도처에서 이 사람들이 중심으로 일하게 됐을 때 놀라운 성령의 불길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급작스런 불행도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을 기다릴 때 거기는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우리에게도 오늘 나사로의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지고 갈 수 없는 불행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속에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럴 때 조용히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내게 있는 고통을 떠올리면서 우리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다. "이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인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 너의 실패는 망할 실패가 아니다. 그 마지막에 된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 위한 것인 줄 네가 믿기 바란다. 끝장 난 게 아니고 더 큰 승리의 전주곡이다" 그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든지 주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둘째로, 응답이 지체될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나사로의 병세는 호전되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어 갔습니다.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렇게 급한 기별을 보냈건만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오빠를 살려 주세요." "예수님, 빨리 와 주세요." "안 오시면 우리 오빠 죽어요" 이런 얘기를 한 게 아닙니다. 그저 상황만 알렸을 뿐입니다. "오빠가 병들었습니다" 그 말 한 마디만 전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자매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다급한 얘기를 안 하더라도 예수님이 다 알아서 가장 좋은 것으로 해결해 줄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믿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전에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말씀 한 마디로도 병을 고치셨는데 이번에도 오시지도 말고 그저 말씀만 하셔도 오빠는 날텐데, 그렇게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오빠는 점점 혼수상태에 빠져서 깨어날 줄 모릅니다. 그 즈음에 예수님은 요단 강 부근에서 사역하고 계셨는데, 요단강에서 베다니까지는 하루면 충분히 올 수 있는 거리입니다. 10분이 멀다고 , 예수님이 오시나 안 오시나 집 안팎을 들락날락 했을겁니다. 하루가 1년 같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습니다. 결국 오빠는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될 때 자매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흘이 지난 뒤에야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때 마르다가 한 첫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 마리아도 똑같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자매가 예수님께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이 기사에서도 또 메씨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응답이 늦어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분이 계시면 오늘의 본문을 끝까지 읽고 그 의심을 떨쳐내시기를 바랍니다. 좀 늦긴 했지만 예수님은 그 두 자매의 소원을 응답해 주셨습니다. 늦은 응답이 아니라 최상의 응답, 적시의 응답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사로가 살아났고, 살아 난 나사로를 통해서 주님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사건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생겨났습니다. 바로 이 사건 뒤에 가야바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는 것을 보면 이 사건이 당시 유대에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는지 알고도 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늦은 응답인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가장 적시에 보내주시는 응답인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을 보세요. 하나같이 믿을 수 없는 그때에 믿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밖에 없을 때에도 믿고 기다렸습니다. 결과는 다 선했고 충분한 복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더 크게 체험했다는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저는 어떤 책에서 한 유망한 청년의 간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주 믿음도 좋고 꿈도 많고, 머리도 좋은 대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졸업 무렵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했지만 병명을 알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정확한 병명을 알았는데 근육무력증이라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근육에 힘이 빠져서 나중엔 말라서 죽게 되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아직 새파란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치료불가능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나중엔 연필 들 힘조차 없게 되고 늘 누워있는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물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침묵을 지키셨읍니다. 1년이 지나고 2년, 3년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없었습니다. 소식이 없었습니다.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투병생활이 기어지면서 새로운 취미가 생겼습니다. 조금이라도 기운이 날 때면 책을 읽고 신문을 읽고 스크랩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5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5년이 지나갈 무렵,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그 청년의 병을 고쳐주셨읍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 10년이 지난 후에 그 사람은 그 캄캄했던 5년간의 세월에 대해 간증하는 글을 이렇게 썼습니다 " 왜 하나님께서 이런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어려운 상황을 주셨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 대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그 일을 위해 준비시키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성공적인 기업경영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준비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기업을 하나님의 뜻대로 정직하게 경영할 수 있는 신앙적 준비요, 다른 하나는 다방면에서 많은 사람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광범위한 지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병석에 있을 때 저에게 이 두 가지를 준비시켜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5년 동안 읽었던 책과 모든 자료들이 그 뒤 10년 동안 회사를 경영하는데 꼭 필요한 기본적인 재산이 된 것입니다. 질병도 그것이 죄로 말미암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귀한 은혜인 것을다시 한 번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귀한 것입니다. 질병이든, 실패든, 성공이든, 하나님이 주신 것이면 그것은 귀한 것입니다. 장애물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훌륭한 기회가 됩니다." 이렇게 글을 끝맺고 있었습니다. 참 감동이 되지요. 이 분이 누구냐하면 이랜드의 박성수 사장입니다. 제가 이곳으로 올 때, 이랜드의 연매출액을 보니까 천억 단위를 오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고 부르짖지만 1년, 아니 3,4년이 지나도 대답을 안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결국은 가장 선하게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 주님은 당신께서 택하신 때에 임하십니다. 누구의 강요나 권유에 의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너무나 빈번하게, 예수님이 우리들의 방식으로 일해줄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최상의 방식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님이 주님의 방식으로 일하실 수 있도록 맡겨야 됩니다. 이것이 참 믿음있는 자녀들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붙잡고 있었던 말씀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한 번 같이 추측을 해 보십시다. 심부름 갔던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더냐 ?" "예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던데요. 이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구요" "아 그래 죽을 병이 아니라니 다행이구나. 감사하구나"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나사로는 죽고 말았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시체를 앞에 놓고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니 죽을 병이 아니라면서. 영광을 위해서라면서..." 이런 생각이 들면서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그러나 또 우리는 다른 메씨지를 읽을 수 있어야됩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말씀이 현실과 동떨어졌다 하더라도, 말씀이 아무리 허황된 말씀같이 관계가 없는 것 같아도 그 말씀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리아와 마르다가 처음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만, 그래서 시험받지만 지나고 보니 그 말씀은 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말씀대로 나사로가 살아났으며 "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씀대로 그를 통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했던 말씀이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말씀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꼭 이루어질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오늘 또 다시 이사야서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내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여러분! 우리의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사실을 알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우리에게 해되는 일은 일으키시지 않으십니다. 그 사실을 믿으십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럽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세요? 그러나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다. 그런 의심의 순간은 사실은, 우리 주님께서 더 맹렬히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중이라는 사실을 아십시다. 지내놓고 보면 바로 그 암흑같고, 원망스러웠던 그 때에 우리 주님께서는 가장 열심히 우리를 위해 일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유익이 되고, 우리를 높이시기 위해 좀 시간을 늦추셨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앞으로 우리 생애에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되는 순간은 생각보다 더 자주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오늘의 이 말씀을 기억해 내시면서 다시 한 번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여러분 모두가 조금만 더 기다림에 익숙해지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도 무수히 많은 나날들을 여러분들은 기다리시면서 살아오셨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기다림에 지칠 때도 있습니다. 우리 함께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우리가 그 기다림에 지쳐서 포기했을 즈음에야 급히 옵니다. 반 체념하고 있을 그때에야 비로소 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조금만 더 참으시고 기다리십시오. 우리의 웬만한 일들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일입니다. 그러니 기다림을 친구로, 또 우리주님의 열심을 믿으시면서 조금만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선하신 우리 주님은 멀지 않은 때에 우리의 그 기다림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가 때때로 주님의 사랑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간절히 불러도 침묵하시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결국은 우리의 간구를 응답하시는 주님을 믿고 그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하옵소서. 아울러 우리로 더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에수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설교에 참고한 자료> 두란노 성경 : 하용조 바클레이 주석 : 바클레이 요한이 쓴 복음 : 옥한흠. 153 (요한복음 강해서): 전병욱 |
2001년 10월28일 성경 : 고전11:23-26 제목 : 주님의 초대. 성만찬 사람들이 가장 엄숙하고 심각할 때가 언제냐 하면 장지에서 드리는 하관예배 때입니다. 이때만큼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죽음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합니다. 평소에는 죽음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다가도 언젠가는 자기도 죽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대단히 심각해지고 진지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때가 가장 복음을 전하기 좋을 때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영생이나 천국을 믿지 않지만 장지에서만큼은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때 복음을 전하면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는 그 누구도 심각하지 않을 수 없고 슬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0년 전 어느 날, 예수님과 그의 열 두 제자가 한 조그만 다락방에 둘러 앉았습니다. 만약 그 다음 날이 예수님이 죽는 날이란 것을 알았다면 제자들은 아마도 모든 태도가 달라 졌을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들의 발을 씻기시기 전에 자 기들이 먼저 예수님의 발을 씻었을 것이고 누구든 슬픔 속에 잠겨 있으면서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을 정말 소중하게 들었을 겁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밤, 제자들에게 오랜 시간 동안 상당히 많은 말씀을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내가 너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겠다. 너희는 포도나무요 나는 가지다.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조금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조금 있으면 다시 볼 것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등등 정말 생명같은 귀한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이 유언인 줄 몰랐습니다. 만약 유언인 줄 알았다면 어디다가 말씀을 베끼든가, 어떻게 할 텐데 제자들의 행동을 보면 예수님의 죽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장차 자기들에게 돌아올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관심사는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오늘 따라 왜 저런 얘기를 하시는 지 이해 못했을 겁니다. 인자가 나무에 달릴거라는 둥, 너희가 나를 다 떠날 거라는 둥,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배반할 거라는 둥, 뭐 이런 말씀을 왜 하시는지 이해못했을 겁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가슴아프셨을 겁니다. 이제 내일이면 자기가 이 세상에 온 진짜 목적을 위해 죽는 날인데도 제자들은 전혀 그 심각성을 모르고 있으니 무척 답답하셨을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십니다. 떡과 포도주를 나눠 주시면서 떡을 가리켜서는 "이것은 너희를 위해 찢긴 내 몸이니 이 떡을 먹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그렇게 말씀하시고 포도주를 가리키면서는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해 흘린 피니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서야 제자들은 이 만찬의 깊은 뜻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셔서 본격적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되면서 또한 얼마되지 않아 말로 다 할 수 없는 핍박을 받으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만찬의 깊은 뜻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 계셔도 언제나 예수님을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베푸신 그 향연에 참여하는 그 자리가 바로 성만찬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신 자리입니다.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모진 시련과 핍박이 올 때라도 초대 교인들은 이 성만찬을 하면서 그때를 이겨 나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성만찬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밤의 그 엄숙함과 진지함까지야 재현할 수 없겠지만 우리는 오늘, 성찬에 들어가면서 여태껏 나누지 못한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간 우리들의 삶을 돌이켜 보면, 지금은 사라졌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기억들이 있습니다. 저는 6.25를 경험해보진 않았지만 그 전쟁의 언저리를 체험한 세대입니다. 미군들이 주는 꿀꿀이죽과 우유가루를 구워 먹어 본 세대입니다. 쵸코렛이나 껌을 달라고 찦차를 따라갔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어려웠습니다. 전쟁으로 나라는 페허가 되고 여기저기 "재건"이라는 깃발이 나부끼는 때였습니다. 모두가 먹고 살기 너무 힘든 때였지만 인정이 있었습니다. 조그만 거 하나라도 서로 나눠 먹으려고 했던 때였습니다. 국민학교 때, 소풍을 가면 도시락을 싸올 형편이 안돼서 소풍을 안 오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저랑 아주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아주 성실하고 착한 친구였습니다. 소풍가는 날 도시락을 들고 나란히 줄을 서서 즐겁게 갔는데 막상 점심시간이 돼서 보니 이 친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는데요. 그래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다 보니 까 어느 숲 속에 혼자 있더라구요. 그래서 "너 왜 여기 있었니 얼마나 찾았다구. 우리 점심 먹자." 그런데도 얘는 도시락을 풀을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제 도시락을 풀고 그 친구의 도시락가지 제가 풀었는데, 도시락 뚜껑을 열어 보니까 속에 아무것도 없는 빈 도시락인 거예요. 그래서 그 친구랑 도시락 하나로 같이 울면서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국민 학교 2학년 땐가, 3학년 땐가 일이었는데, 그때가 시간이 갈수록 생각이 나는 겁니다.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때. 절대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죠. 분명히 우리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잊혀져 가고 사라져 가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억 속에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기억들이 있습니다.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지만 그때를 생각해보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아주 맑은 꿈이 솟는 그런 기억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성만찬입니다. 가장 엄숙하고 거룩하고, 은혜스러운 시간인데 이 시간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이 성만찬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드리듯이, 이 성만찬 역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베풀어주시는 초청의 자리인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성만찬의 뜻을 함께 나누면서 초대교회의 성만찬처럼 큰 위로와 감격과 은혜의 시간이 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초대교회 때 예배의 중심은 설교나 찬양이나 기도가 아니고 성만찬이었습니다. 그것은 예배가 찬양과 말씀으로 시작이 되어서 예수님의 임재하심과 다시 나타나시는 시간이었던 성만찬에서 절정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모든 예배의 주제는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시고 부활하셔서 성만찬의 현장에 임재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성만찬이 있는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요.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이 현장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사람이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스카 쿨만이란 사람은 이 성만찬을 가리켜 "새 계약의 재다짐"이요 "그리스도를 다시 뵙고 경험하는 예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드리는 시간이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배 중에 가장 고대해야 할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시간이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성만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 중에서 쯔빙글리가 그 아름다운 예전을 일년에 4회정도만 할 것을 국한해 버렸습니다. 물론 성만찬 속에 있는 그 정신이 중요한 것이고 횟수는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또한 현대로 올수록 성만찬을 하는 시간과 준비 등 모든 것들이 번거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누구의 편의를 위한 것인지 물어봐야 합니다. 성만찬은 예배의 핵심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매 미사시간마다 영성체라고 해서 아직도 그 성만찬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의 성만찬은 전통과 형식에 치우쳐 의례적으로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만찬은 다시 매 예배시간마다 초대교회 때의 그 엄숙하면서도 은혜로운 시간으로 부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는. 그래서 사람이 베푸는 잔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베푸는 잔치를 생략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이 성만찬을 해야할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분쟁이 많은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성찬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찬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 성찬은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합니까?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대속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십자가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체험한다면 우리는 성만찬을 할 때 눈물을 흘리지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그 고난에 동참하고, 또한 그것을 우리 대신 홀로 담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감사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의 의미를 많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만큼은 예수님은 저주를 받으신 겁니다. 사람의 한 일을 보면 갈 길은 지옥 밖에 없습니다. 그 지옥의 문턱까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가 주신 겁니다. 하나님께 버림받고, 오직 자기 밖에 없는 그 고독의 시간을 홀로 견디셨던 겁니다. 하나님의 본체이면서도 이 땅에 오셔서 일생동안 가난한 자, 죄인들, 버림받은 사람들, 병자들 이런 사람들과 지내면서 머리 둘곳 없이, 안식을 누릴 따뜻한 둥지 하나 없이 몸으로 고생만 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제자들에겐 배신당하고, 가족들에게까지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듣기에는 좋았지만 믿고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몸과 마음에 다 상처를 심하게 받으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받은 상처 때문에 몸부림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받으신 그 마음의 상처에 비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결국은 당신이 하신 말씀 때문에 재판에 회부되어서 사형을 선고받고 가장 못된 흉악범들에게나 집행하는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십자가형은 사람이 만들어 내 가장 잔인한 처형방법입니다. 무엇보다 공개재판입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죽어가는 모습을 다 봅니다. 사형당하는 곳까지 자기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갑니다. 자기가 묻힐 무덤을 자기가 판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보다 비참한 게 어디 있을까요?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얼마나 절망스럽겠습니까? 죽이려면 바로나 죽이지 서서히, 극도의 공포를 느끼게 하면서 죽이는 것이 얼마나 잔인합니까? 그리고 수치스럽습니다. 옷은 다 벗기웁니다. 아무 것도 걸치는 게 없습니다. 요즘도 걸려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성상엔 천으로 가려 있지만 실제로 죄수들은 아무 것도 입지 않습니다. 발가벗기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죽을 때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겁니다. 사람이 죽이지 않고 자연사할 때가지 빠르면 일주일이 걸리고 때로는 40일, 50일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때까지 죄수는 그대로 십자가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체처리는 독수리나 이런 새들이 파먹게 해서 처리를 합니다. 죽어서도 장사지낼 수 없는 게 십자가 사형입니다. 다행히 예수님은 얼마나 약하셨는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고통 중에서 정신적인 고통과 육체적 고통 중 어떤 고통이 더 클까요?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고통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병원에 입원해서 한 삼일 동안만 육체의 고통을 느끼게 되면 거기엔 견딜 장사가 없습니다. 저는 가능한 대로 십자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체험하기를 원했습니다. 도대체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처형에 대해서만큼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데까지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여러분께도 말씀을 드렸지만 말씀을 드릴 때마다 번번이 느끼는 것은 도대체 말로 얼마나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끼게 할 까 그게 저의 고민이었습니다. 저부터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피상적으로밖엔 느낄 수 없습니다. 먼저 십자가형을 견뎌내려면 그 고통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사전에 적당한 고통을 줘서 대비를 시켜야만 됐습니다. 그래서 처음 하는 일이 채찍질입니다. 로마인들이 쓰는 채찍은 특수하게 고안됐습니다. 길이는 3m 정도 되는 긴 채찍에다 마디마디마다 동물의 뼛조각을 달아놨고 채찍 끝엔 납덩이를 달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한번 채찍을 날리면 그 채찍이 몸을 휘감아서 다시 나올 때는 살점이 묻어나왔습니다. 등짝을 한 번 치게 되면 등에는 금방 피의 이랑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런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머리엔 가시관을 쓰셨는데, 유대지방의 가시는 우리나라나 유럽의 가시와는 다릅니다 사막지대에서 서식하는 가시는 가시하나의 크기가 어른의 엄지만 합니다. 그것으로 가시관을 만들어서 머리에 쓴다고 하면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머리는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는 통증이 옵니다. 그것은 둔기로 맞을 때보다 훨씬 강한 통증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 고통을 당하시면서 골고다까지 가셨습니다. 죄수를 십자가에 다는 방법은 먼저 십자가를 바닥에 눕힙니다. 그리고 그 위에 죄수를 눕힙니다. 그리고 못으로 손과 발을 고정시킵니다. 그 손과 발에 못을 박을 때는, 살에다가 못을 박게 되면 살이 찢어지고 말기 때문에 못이 뼈를 뚫고 지나가게 합니다. 사람의 고통 가운데 가장 심한 고통은 뼈를 깎을 때, 뼈에 손상이 생기는 경우에 가장 심한 고통을 겪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눕힌 십자가를 세우게 됩니다. 십자가를 세우게 되면 몸은 아래로 쏠리게 되는데 그 쏠리는 몸을 못이 고정시키고 있기 때문에 뼈에 계속 자극이 옵니다. 이때의 고통이야말로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죄수들은 죽을 때까지 비명을 지른다고 하는데 그 비명소리는 짐승 소리처럼 높고 날카로운 소리라는 겁니다. 너무 통증이 심해지면 기절을 하게 되는데 그 기절한 것이 통증에 의해서 다시 깨어나게 되고 통증을 느끼면 다시 기절하고 또 다시 통증에 의해서 깨어나는 그런 고통의 순환을 죽을 때 까지 겪는 게 바로 십자가 처형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죄수의 가장 큰 소망은,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친지들의 가장 큰 소망은 빨리 숨이 끊어지는 것, 그게 가장 큰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출혈이 계속되기 때문에 멀리서 바라보는 십자가는 그저 붉은 핏기둥으로만 보인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이 십자가의 고통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성만찬에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떡은 우리를 위해 찢기신 살이고, 그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인 것을 알며 먹고 마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대신 고통당하신 그 십자가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고통의 십자가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순간, 하나님과 우리의 끊겼던 관계는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숨어계시거나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길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승리요, 희망이요, 회복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지막 날에 주님처럼 다시 부활하리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다시 예수님처럼 부활해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계를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만찬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과 다시 오심을 영원히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이해하면서 참여해야만 성만찬은 의미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죄가 모두 사해졌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살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내게 찾아오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2:25의 말씀같이"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하신 것처럼 우리 육체의 질병도 다 나을 것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로 성찬의 의미는 하나됨에 있습니다. 주님과 연합하고 모든 형제 자매들이 하나로서 지체가 되는 예식이 바로 성만찬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 만찬엔 누구든지 참여해야 합니다. 성만찬 때 빠지게 되는 것은 우리가 다 한 지체임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다양한 계층의 성도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방인으로 믿음에 들게된 사람들과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노예가 있었고 사회의 하층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문벌 좋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린도는 성적으로 대단히 타락한 도시였는데 혹시 매매춘에 종사하던 사람과 그 손님이 회개하고 교회에서 함께 예배 드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바울파, 그리스도파, 아볼로파, 게바파, 파벌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환경과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친한 분도 있지만 서로 서먹서먹한 사이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이 만찬에 초대하면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진정한 주안에서 하나가 연합입니다. 그 주님의 뜻을 우리는 오늘 이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주의 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공동체를 이룬 것처럼 우리도 이 성만찬을 통해서 진정한 비엔나감리교회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한 떡과 같은 포도주를 먹으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됨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은 두 번 나오시게 될텐데 두 번째 분잔(粉盞)을 한 후에는 모든 형제 자매들이 서로 허깅을 해 주시면서 하나됨을 서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형제를, 자매를 사랑합니다" 하는 말로서 인사하고 서로 지체됨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모든 형제 자매들이 주안에서 하나로 묶인 것을 체험하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초대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는 귀한 자리 앞에 나왔습니다. 이 시간 십자가에서 우리를 취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생각하면서 성만찬에 임하오니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완악함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 성만찬을 통하여, 에수 그리스도를 다시 뵙게 해 주시고, 병이 치유받으며 위로받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우리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하시고 서로하는 사랑의 고백을 통해서 진정한 연합됨과 지체됨을 확인하게 하옵소서. 이 시간 모든 형제 자매들의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은혜와 거듭남과 사랑의 만찬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
2001년 10월21일 성경 : 왕하20:1-7, 눅11:5-10 제목 : 기도 할 수 있는데 1998년도에 한국 갤럽이 기독교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여러 항목 중에 "하루에 기도를 얼마나 하느냐" 라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응답은, 먼저 남성을 보면 43.1%가 기도하지 않는다고 대답했고, 17.3%가 10분 이하, 그리고 27.3%가 10분에서 30분까지 한다고 답했고, 1시간 이상 하는 사람은 전체의 4.5%였습니다. 여자성도는 어떠냐 하면 27.7%가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고 10분 이하가 23.2%, 10분에서 30분 정도하는 사람이 32%, 30분 이상이 9.9%, 한 시간 이상 하는 사람은 7.2 % 라고 답했습니다. 여자 성도가 조금 더 기도하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는데 전체적인 추이를 보면, 전체의 절반 이상이 기도를 전혀 하지 않고, 기도를 하는 사람도 그다지 오랫동안 기도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이 통계를 들으시면서 내가 어디쯤에 속하나 생각하셨을텐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치고 기도에 부담을 갖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나 저나 왜 기도생활다운 기도생활을 못할까요? 거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을 겁니다. 아마도 중요한 원인은 우리들의 조급함 때문일지 모릅니다. 현대의 문화가 자꾸만 우리를 급하게 하는 거예요. 우리 모두가 컴퓨터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직접 다루든 안 다루든 우리는 생활 전반에서 컴퓨터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 은행이나 철도나 관공서에서 갑자기 컴퓨터가 다운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전쟁같은 난리를 치루게 될 겁니다. 늘 인터넷을 하다가 하루 이틀만 못하게 되면 굉장히 답답하지요? 그 컴퓨터 세대의 특징이 뭐냐? 한 마디로, 클릭하면 바로 떠야 되는 겁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거기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잘 기다리질 못합니다. 오죽하면 컴퓨터 주기도문이 나왔을까요? 여러분 들어보셨어요? 소개해 드리죠. "하드디스크에 계신 우리 프로그램이시여. 패스워드를 거룩하게 하옵시고 운영체계에 임하옵시며 명령이 키보드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모니터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데이터를 주옵시고 우리가 프로그램의 오류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오타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바이러스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불시의 정전에서 구하옵소서. 엔터. 이런 시대적 경향에다가 그 흐름이, 은연 중 기도에 대한 오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치 컴퓨터의 클릭처럼, 기도란 것도 내가 딱 기도하면 즉각적으로 응답이 와야 하는데 기도해 보아도 응답이 없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걸까? 기도가 정말 필요한 것일까?" 이런, 기도에 대한 본질적인 회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급해지는, 컴퓨터 클릭시대의 영향이 우리 기도생활에 적잖게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컴퓨터와는 다릅니다. 컴퓨터에서는 정보만 얻으면 됩니다. 그러나 기도는 인격의 대화입니다. 기도하는 자신과 그 기도하는 대상이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도 가운데 즉각, 응답하는 정보를 얻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대화는 기다림의 과정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대화가 깊어지려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계속 얘기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충분한 시간을 통해서 나와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더해지고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기도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 아마도 여러분 중에 기도를 많이 하시지 못하는 분들은 상당한 부담감과 어쩌면 죄책감을 가지고 이 시간을 대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먼저 여러분께 권합니다. 그런 마음 갖지 마시고 오늘부터라도 새 마음을 가지시면 됩니다. 마귀들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리는 최고의 작전이 뭐냐하면 바로 이 부담감과 죄책감을 주는 겁니다. "나같이 기도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게 무슨 신자야? 평소에는 몰라라 하면서 어려울 때만 기도하는 게 얼마나 치사한 짓이야?"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이 생각이 바로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기도 안 한 것 때문에 우리를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1:18) 그래서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의 부담감과 죄책감을 자극하는 마귀의 작전에 말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 어느 때 기도를 시작하더라도 그건 늦은 게 아닙니다. 그러면, 기도하면 어떻게 됩니까? 정말 들어주시나요? 먼저 오늘 말씀의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반드시, 꼭 들어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유명한 히스기야왕의 기도를 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치적을 기록해 놓은 열왕기 상하를 읽어보면 정말 괜찮았던 왕은 손가락을 꼽기도 어렵습니다. 하나같이 하나님과 백성들을 우습게 알고 악행을 저지른 왕들의 이야기로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 히스기야 왕은 그 많은 악한 왕들 중에서 보석같이 빛나는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히스기야 왕에게 큰 일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죽게 될 테니까 일찌감치 집 정리를 하고 죽을 준비를 해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시면 사람은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습니다. 그 계획에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겐들 안 그렇겠습니까만은 히스기야왕에겐 이 소식이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이제 겨우 앗수르의 대군을 물리치고 좀 안정이 되어갈 때였는데 이렇게 사형선고를 받고보니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히스기야왕은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자기의 생명도 생명이지만,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고 보니,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데 이대로 죽자니 너무나 애닯았습니다. 그래서 벽을 향해 돌아서서 통곡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구하기를, 자기가 과거에 하나님 앞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것을 보시고 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히스기야가 기도하는 것은 하찮은 자기 생명 하나 때문에 간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강국인 앗수르가 유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죽게 되면 여러 가지 정황을 봐서 분명히 나라는 멸망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되니까 그걸 어떻게 해서든 면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 가운데 히스기야 같이 막다른 골목까지 다다를 수 있습니다. 이미 경험하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아직 그런 일이 없으셨다면 앞으로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기술문명의 효율에 젖어있는 우리들에게 기도는 어쩌면 대단히 느리고 비효율적인 방법일지 모릅니다. 기도하는 대신 다른 대안을 찾는 게 더 빠를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기도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이 세계에 이미 다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찾으면 찾아집니다. 빨리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경우가 옵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오직 기도 밖에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고난을 주시기도 하신다는 겁니다.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생명을 15년 더 연장시켜주시고 병도 깨끗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한신대 신학과 교수님 중에 오영석 교수님이 있습니다. 원래 그 분이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는데 너무 가난해서 다른 친구들은 다 중학교에 가는데 자기는 중학교도 못가고 날마다 풀이나 베러 다니고 지게 지고 나무나 하러 다녔습니다. 하루는 자기 신세가 하도 처량해서 나무하러 갔다 오면서 이런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도 중학교에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때 이런 감동이 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상서를 올려라." 이 분이 이런 감동을 받고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써서 봉투에 "하나님 아버지 전상서" 라고 쓰고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우체부가 우편물 분리를 하는데 주소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 전상서"라고 써 있는 편지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망설이다가 '그래 하나님 아버지를 좋아하는 사람은 목사밖에 없으니까 목사한테 갖다 주자' 해서 그때 당시에 해남읍 교회에 계시던 이준묵 목사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그 목사님이 편지를 읽고 감동을 받아서 그 소년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불러다가 그 목사님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같이 지내면서 중학교, 고등학교 공부를 시켰습니다. 한신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계속해서 한신대학을 졸업하고 나중에는 유학을 가려고 유학 준비를 하는데 나라에서 어떻게 조치를 취했는지 여권이 안나오는 거예요. 그도 그럴 것이 이 분이 유신 정권 때 유신 반대 데모를 하다가 요주의 인물로 찍혔거든요. 아무리 여권 신청을 해도 여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유신시대 때 가장 데모를 많이 했던 학교가 고대와 한국신학대학이었습니다. 그래서 갈 길이 막막해서 유학가는 것을 잠시 접어두고 경기도 어느 시골에 있는 교회에 가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교회 근처에 있는 골프장에 경찰 제2국장이 골프를 치러 왔습니다. 그래서 경찰 국장과 친분이 있는 그 교회 장로님이 경찰 국장에게 "우리 전도사가 외국 유학 준비를 하고 있는데 여권이 안나와서 유학을 못가고 있으니 여권 좀 나오게 해 주십시오." 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경찰 국장이 장로님의 부탁을 받고 여권을 받게 해주려고 알아봤더니 요주의 인물로 붉은 줄이 쳐 있더랍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장로님에게 전화를 해서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아예 갈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전했습니다. 실망한 이분이 어느 날 수유리 언덕을 넘어오는데 동쪽에서 빛이 비취는데 너무 찬란하게 비쳐서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그때 마침 성령의 감동이 오더랍니다.그래서 눈밭에 엎드리고는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오 주님, 내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이 밝은 햇살같이 내 앞길도 밝아지게 하옵소서." 하고 눈물 뿌려 기도했답니다. 그날 밤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지프차를 타고 와서는 문을 열고 "영석군 나와" 하더니 지프차를 타고 중앙정보부로 데리고 들어가더랍니다. 들어가면서 철커덩 하고 문이 닫히는데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진짜로 중앙정보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영석씨입니까?" "예, 그런데요?" "빨리 와서 여권받아 가시오."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그분이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서 교수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그 분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요주의 인물에서 해제되고 여권이 나왔는지 모른답니다. 이 얘기는 한신대 교수님들이 신입생 채플시간에 꼭 들려주시는 얘기입니다.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때, 사방팔방이 다 막혀 있을 때, 방법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제가 군복무할 때, 한 번 사단장 표창을 받으러 사단 본부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들어가기 전에 우리 사수가 얼마나 치장을 시키는지요, 군화를 며칠을 광내고, 손이 베이도록 군복 - 물론 방위복이죠. 그 옷에 다림질을 해서 줄을 세우고, 모자하고 계급장도 다 새 걸로 달으라고 하고... 하여튼 며칠 동안 시집살이 하느라고 혼났습니다. 그래서 그때 생각에 "이거 사단장 한 번 보는 것도 이렇게 치장을 시키는데 참모총장이나 대통령을 본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 해야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러 갈 때 우리 하나님 앞에는 아무 치장이 필요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나가시면 됩니다. 죄가 있으면 죄가 있는대로, 괴로와 죽겠으면 죽겠는대로, 그대로 나가시면 됩니다. 오늘 히스기야의 모습을 보십시오. 왕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한 인간의 나약한 모습 그대롭니다. 체면도 차리지 않고 벽을 향해서 무릎을 끓고 통곡합니다. 왕의 체통을 지키면서 점쟎게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린애처럼 떼쓰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이 설득 당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변경시킵니다. 히스기야를 그만 살게 하려고 했는데, 그 계획을 바꾸시고 십오년을 더 살게 해 주시기로 작정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말씀을 드릴 때 우리 하나님은 부성과 모성을 동시에 가지신 분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부성과 모성 둘 다 합한 속성의 가장 큰 특징이 뭐냐하면, 눈물에 약하다는 겁니다. 그 통곡 앞에서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손드셨습니다. 간절한 소원에는 약하시다는 겁니다. 결국 들어주고 마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우리 아이들이 대하는 엄마나 아빠와 똑같습니다. 누가 우리들 아이 중에서 "존경하는 부모님! 기체후 일향만강하옵신지요? 바라옵건데 소녀의 필통을 하나 사주시면 망극하겠나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아이가 있습니까? 만약 이렇게 얘기하는 아이가 있다면 "이 놈이 돈거 아냐? 너 정신분석 좀 해보자" 그럴겁니다. 다급할 때는 아무런 수사가 필요없는 것입니다. 자식도 여럿 두다보면 그 중에 더 예쁘고 덜 예쁜 자식이 있나봐요. 저희 어머니는 8남매를 두셨는데 어머니가 좀 거치세요. 그래서 늘 하시는 말씀이 "이눔들아 너희 중에 누구 하나 죽어 봐라 내가 눈 하나 깜짝하나" 그러시면서도 그 중에 더 이뻐하는 형님이 있더라구요. 그런데 보면 평소에 그 형님이 어머니한테 잘 하세요. 잘 하니까 맘이 더 가시는 모양이예요. 아무래도 당신한테 잘 하는 자식이 더 예쁠 겁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인격체십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의 기도는 더 잘 들어주십니다. 아마도 히스기야왕이 다른 왕들처럼 바알을 섬기고 타락해서 하나님 떠난 삶을 살았다면, 아무리 통곡을 하고 야단법석을 떨어도 하나님의 마음은 요동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왕은 다른 왕들과 달랐습니다. 분열왕국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의 암흑기였습니다. 일어나는 왕들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온나라에 우상을 들여와서 백성들을 타락시키는 일들을 왕들이 도맡아 했어요. 그런데 히스기야왕은, 왕이 되는 즉시로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나라안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철폐했습니다. 여러 산당들을 때려부수고, 주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렸고, 놋뱀을 다 부숴 버렸습니다. 그리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통치했습니다. 히스기야왕은 위기 때에, 바로 이것을 자신의 히든카드로 사용했던 것이었습니다. . 기억하십시다. 우리 신앙의 삶이 바르지 못하다면 그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히스기야 왕처럼 하나님앞에 바르고 정직히 행하고, 신앙의 바른 모습을 보여야 하나님은 그 눈물을 통해서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평소의 신앙입니다. 평소실력이 진짜 실력인 것처럼, 평소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내 놓을 수 있는 히든카드인 겁니다. 이제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평소에 믿음생활을 잘 안하게 되니까 기도하지 않게 되고, 기도하지 않으니까 믿음생활도 잘 안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위기가 올 때도 감히 기도할 엄두를 못내게 되는 그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겁니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사는 겁니다. 그때야 여러분의 기도는 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해하지 마셔야 할 게 있습니다. 그럼 평소에 제대로 살지 못하면 우리의 기도를 안들어 주시냐? 그건 또 아닙니다. 또 자식과 부모 사이를 생각하면 됩니다. 부모는 미운 자식에게 떡 하나 더 줍니다. 하나님께서도 모처럼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는 잘 들어 주십니다. 또 부모는 어린 자식의 부탁은 차마 거절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믿음이 연약한 사람의 기도는 또 거절 못하십니다. 교회 다닌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의 기도는 꼭 들어 주십니다. 또 부모는 장남들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 줍니다. 집의 대들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믿음생활 오래 한 사람들, 이런 분들의 기도는 거절 못하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부모는 이래저래 거절 못하고 자녀들의 부탁을 다 들어 줍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 자녀들의 기도를 결국은 다 들어 주십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 일과 방법을 예수님께서 직접 예를 들어 주셨습니다. 어느 날 집에 친구가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식사 때가 훨씬 지나서 왔습니다. 보니까 밥도 못 먹은 거 같습니다. 대접을 해야 할 텐데 대접할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시간을 보니 자정이 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할 수 없이 친구의 집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친구가 자다가 목소리를 들어보니 누구라고 하지 않아도 알만한 친굽니다. 친구 좋아해도 그런 시간에 찾아오면 누가 반기겠습니까? 하지만 반갑지는 않아도 소리치는 것을 듣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여보게, 갑자기 친구가 지금 찾아왔는데 구워 놓은 빵 있으면 세 덩이만 빌려주게!'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칩니다. 계속 소리치니까 대답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자는 척하고 누워만 있을 수가 없어요. "귀찮게 하지 말게, 문은 이미 닫아걸었고 아이들은 나와 함께 이불 펴고 누웠으니 일어나 도와줄 수가 없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2000년 전 형편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때 주거 환경은 요즘과 달랐습니다. 조그만 방 하나에 온 식구들이 다 누워 잠을 자던 시절입니다. 한 50 년, 100년만 해도 방들이 아주 작았습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공통입니다. 그러니까 자다가 바깥에 나갔다 들어오면 누울 자리가 없어져 버립니다. 형편이나 기분을 가지고 말하면 친구고 뭐고 청을 들을 상황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내버려뒀다가는 온 식구 잠을 다 깨우고 말 것입니다. 그 날밤 잠 농사는 다 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요청을 들어주고 돌려보내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 예화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이 결론적으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보십시오. 체면이고 예의고 집어 던져 놓고 바깥에서 소리치는데 어쩌라는 겁니까? 옛날 사회는 그랬습니다. 찾아오는 손님을 홀대하면 그것은 사람 축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동네 전체가 망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중대사입니다. 그래서 계속 두들깁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매달립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여서가 아니라 그 강청하는 것에 못 이겨서 결국 일어나 빵을 주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강청(强請)함! 달라고 떼쓰는 겁니다. 이것은 부끄럼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믿음 생활이 뭡니까? 부끄러움을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드리러 나왔지만 흐뭇한 분이 얼마나 되십니까? 항상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요, 그것을 마귀는 이용합니다. "니가 지금 무슨 기도야? 너나 정신차려!" 그런 마음을 줍니다. 부끄러움은 우리의 가장 큰 적입니다. 부끄러움을 이겨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끄러움은 우리의 힘을 약화시킵니다. 그러나 기도는 부끄러움 없이 하는 것입니다. 자격은 없습니다. 옆집 두드리는 것처럼 미안하지요, "이런 모습을 가지고 왔는데 기도해도 됩니까?"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강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의 의미고 방법입니다. 저는 오늘 서두에서 우리가 기도하면 어떻게 되느냐?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씀은 정말입니다. 주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셨죠? "너희들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사실이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응답받아야 될 기도는 두 가지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와 평소의 문제가 있을때입니다. 히스기야처럼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눈물의 기도, 통곡의 기도, 간절한 기도를 해야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 죽음의 장막을 거둬 주십니다. 또한 산 넘어 산이라고, 문제 뒤에 또 다시 오는 문제들을 계속 응답받기 위해서는 평소에 기도해야 합니다. 안 들어 주시면 들어주실 때까지 끝까지 기도하는 겁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절대로 팽개쳐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의 하나가 로마서 8:26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없을 때 성령께서 친히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별 일없이 잘 되나가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은 직접 하는 게 가장 호소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말씀드릴 때 가장 효과가 큰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여러분과 직접 대화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까지 남겨두실 지도 모릅니다. 성령님이 아무리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하신다 하더라도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성령님은 우리가 꼭 해야 될 기도는 생략하실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건 우리 몫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것을 이미 다 주셨습니다. 얻지 못한 것은 여러분이 아직도 찾지 않고, 구하지 않고 두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고 실망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일년 이년만 붙잡고 늘어지면 안 들어 주시는 일이 없는데 왜 기도 안하십니까? 결국은 기도하는 사람이 이깁니다. 제가 우리 인터넷 카페 오늘의 묵상 란에 혜수 이야기를 쓴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 처음 왔을 때, 한참 스쿠터가 유행했습니다. 그걸 본 우리 혜수가 그게 무척 타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걸 사달라고 조르길래 알아봤더니 1000실링 쯤 되야 쓸만한 걸 살 수 있었습니다. 그때 형편으로는 사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혜수한테 제가 말하길 "알았어 돈 생기면 사줄께" 그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애매하게 얘기한 건 사실은 안 사줄려고 그랬던 겁니다. 사 달라고 하면 "돈이 아직 안 생겼어!" 그렇게 대답하면 간단하니까요. 그런데 얘가 잊어버릴 만 하면 또 말을 합니다. "아빠 돈 생기면 사 주는거야" 시간이 지나가면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애의 믿음은 약해지기는 커녕 점점 더 강해지더라구요.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가니까 혜수의 믿음이 저에겐 굉장한 부담으로 오더라구요. 그런데 그런 약속을 한지 6개월 만에 뜻밖의 돈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떼고, 제일 먼저 혜수의 스쿠터를 사줬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혜수의 끈질긴 요구와 아빠가 분명히 사주신다는 그 믿음이 제가 스쿠터를 사 준 요인이더라구요.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기도하는 걸 거절하실 만큼 강심장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우리 욕심따라 구하는 게 아닌, 마땅히 구할 걸 구하는 기도에는 하나님은 꼼짝 못하고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하나님, 그분이 우리보다 우리에게 더 주시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핸디를 갖고 계시죠? 핸디는 어디서나 직통연결이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연결된 Heaven Phone 입니다. 하늘과 직통으로 연결됩니다. 수화기를 들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는 게 기도입니다. 여러분! 이 Heaven Phone을 드시고 하나님과 자주 통화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날엔가는, 여러분이 구하지 않은 것까지 받은 사실을 아시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끊임없이 줄기차게 대화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데도 걱정하고 근심하며 살았습니다. 기도는 우리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인데 우리는 그것을 팽개쳐 버리고 있었습니다. 이시간 우리로 다시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즐거울 때나 기쁠 때나 언제든 주님과 기도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연결된 이 끈을 절대로 놓치지 않게 하시고 이제는 기도하기를 즐거워하는 저희들로 훈련시켜 주옵소서.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그 모든 보화를 캐내어 가질 수 있는 저희들 다 되도록 우리 성령님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
2001년 10월14일 성경 : 삼상22:1-2, 엡5:25-30 말씀 : 교회, 그리스도의 신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자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고, 그 뒤로 전쟁에 나가기만 하면 승승장구하니까 다윗을 두고 여인들이 노래하기를 "사울은 천천을 죽이고 다윗은 만만을 죽였도다" 하면서 그 노래를 입에서 입으로 퍼뜨렸습니다. 사울왕이 좀 배짱있는 사람이었다면 자기가 발탁한 소년이 그렇게 대장부로 장성해 가는 모습을 보면 대견해 하고 뿌듯해야 할텐데 그렇지 않고 질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다윗을 죽이려고 자기의 온 정력을 다 소비합니다. '사울왕!' 그러면 저는 생각나는 게 '불순종 그리고 한 사람 죽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산 사람' 그것 밖에는 없습니다. 왕으로서는 아주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 또한 이스라엘의 2대 왕이 되기까지는 주로 한 일이 뭐냐하면 도망다니는 일이었습니다. 사울을 피해서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데 이골이 난, 피곤한 인생이었습니다. 여기저기 도망다니다 보니 국경을 넘어 원수의 나라 블레셋까지 도망하기도 하고 또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서 침을 흘리면서 미친 척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정착하게 된 도피처가 어디였냐 하면 아둘람 동굴이었습니다. 이곳은 블레셋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이스라엘의 변방으로서 석회암 동굴지대였습니다. 아둘람 동굴의 이 "아둘람"이란 뜻 자체가 '피난처, 보호처'란 뜻입니다. 실제로 이 지역은 동굴이 수백, 수천개가 널려 있어서 여기에 숨으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안전지대였습니다. 다윗이 여기 있다는 소문이 나니까 다윗의 가족 뿐 아니라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사울의 정권 아래서 웬만한 특권층이 아니 다음에야 국민들 대다수가 고통을 겪었을 거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가진 자들의 착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빚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교육기회가 없어서 무식해서 사기를 당하거나, 또 가족 중에 누가 아파서 할 수 없이 도둑질을 하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돈을 빌리고는 갚지 못해서 빚쟁이가 된 사람들 등등 사울왕이나 특권층들이 보기에는 정말 쓰레기 같은, 구제불능의 사람들만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 모여서 얼마나 됐냐하면 사백명 정도라고 했습니다. 400명이라고 하면 보통 무리가 아닙니다. 다윗은 여기에 우두머리가 됐다고 했습니다. 착하고 교육을 잘 받은 사람도 400명 정도가 모여서 같이 살자면 그거, 보통문제가 아닌데 지금 이곳은 난민촌 수준입니다. 한 마디로 제 멋대로입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됐냐하면 이 아둘람 동굴이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인재들은 거의가 다 이 아둘람 출신 중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아둘람 동지들이 다윗왕과 끝까지 생사를 같이 하게 됩니다. 물론 중간에 배반한 사람도 있지만 중심인물들은 끝까지 고락을 같이 했던 것입니다. 오늘 저는 교회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둘람 동굴사람들을 서두로 꺼낸 이유는 아둘람 공동체야말로 아주 좋은 교회의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대 교인들에겐 더 없는 모범이 됩니다. 성경은 아둘람 공동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끌어 갈만한 그룹이 됐느냐 하는 것은 자세히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측하는 수 밖에 없는데 무엇보다 그들은 서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훈련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 사람이 같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 훈련은 정말 어려운 훈련입니다. 오래 전에 제 여자 후배 둘이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난다기에 말렸습니다. 둘 다 개성이 강한 후배들이었는데 결국 방학이 끝나서보니까 서로 상종도 안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두달 예정에 이주일 만에 로마에서 헤어졌다고 하더라구요. 같이 사는 훈련은 그렇게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는 훈련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이 자기를 바르게 본다는 게 어렵지만 힘든 사람과 같이 살아보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얼마나 이기적이고 사랑없고, 참을성없고 교만한가 등을 깨닫게 되지요. 아둘람 사람들은 모두 다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다 상처를 입은 사람이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여기서만큼은 상처를 입지 않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어디 그렇게 됩니까? 아마도 이 사람들은 조그마한 일에도 참지 못했을 겁니다. 식사당번이 다른 사람은 고기 두점을 주는데 자기한테는 모르고 한점을 줬더라면 당장에 팔을 걷어부치고 싸웠을 겁니다. 아마도 서로간에 매일 피터지는 싸움을 했을 겁니다. 공동체 전체가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니 피해를 당하는 기미만 보여도 참지 못하는 겁니다. 현대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만큼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고 교회를 다닙니다. 교회오면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게 어디 그렇게 됩니까? 같이 있다보면 또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그 상처가 깊으면 결국 교회를 떠납니다. 여러분! 상처를 받았다고 교회를 떠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어디를 가든 상처받을 일은 또 있습니다. 또 자기만 상처받은 것 같지만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될 것은 교회는 의인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둘람 동굴에 있는 사람들처럼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서로 비비면서 모난 곳을 다듬어야 될 곳이 교회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매일 사백명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아마도 매일 싸움말리고, 얘기 들어주고, 화해시키는데 자기의 에너지를 다 소모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교회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면서 그 단서를 아둘람 동굴에서 찾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교회 아닌 것을 살펴보십시다. 아둘람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보면 됩니다. 먼저 아둘람 동굴은 지식을 배우는 데가 아니었습니다. 학교라기보다는 훈련장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지식도 배우지 못한 것이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거기서 훈련을 받다보면 스스로 터득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산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을 넣어주기 위해서 아둘람 동굴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현대의 교회도 같습니다. 교회는 지식을 배우는 데가 아닙니다. 우리도 성경에 관해 일목요연한 지식을 갖고 있다면 참 좋을 것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지식에만 치우치면 실천력이 없습니다. 하나를 배우면 하나를 실천할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둘, 셋이 아니라 열을 배우면 그만큼 실천력은 희박해집니다. 차라리 초대교회 교인들이나 핍박받는 지역의 성도들처럼 몇절을 알더라도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거기에 헌신하고 순종하는 것이 휠씬 낫지 않겠습니까? 또 아둘람 공동체는 친교를 위한 그룹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곳에서 해야 될 일은 친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주역이 되기 위해 자기를 깎아내는 곳이었습니다. 물론 친교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친교를 위해 존재하는 기관은 아닙니다. 친교란 가까운 사이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가까워지면 만족할수 있을까요?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는데 부부가 되면 늘 함께 있어야 하고 늘 함께 일해야하고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부부가 하나라는 것은 서로간의 신뢰가 끊을수 없을 만큼 견고하다는 뜻입니다. 만일 부부가 언제나 붙어 있어야 한다면 이것만큼 고역도 없을 것입니다. 부부약사가 이혼률이 높다는 것이 이걸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매일 똑같은 얼굴을 본다? 이건 보통 고역이 아닙니다. 아무리 예뻐도 가끔 봐야 예쁘지 자주 보게되면 예쁜 것도 그러려니 합니다. 원래 너무 가까우면 마찰이 일어나고 상처를 받습니다. 교회에서 보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강해지면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친하게 지내되 너무 가까우면 신앙에 손실을 가져옵니다. 아둘람 동굴에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보면, 친교는커녕 초창기엔 그곳에서도 여느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싸움과 약탈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훈련을 받다보니 자연스럽게 관계가 생겼을 것입니다. 또 아둘람 공동체는 구제 기관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아둘람 공동체만큼 구제에 힘쓴 그룹은 드물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그렇게 살아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 동족을 도왔을 것입니다. 실제로 블레셋이 유대민족인 그일라의 타작마당을 치자 이 아둘람 동지들이 가서 대신 싸워줍니다. 그래서 일년 농사진 곡식들을 그대로 잘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구제 기관이 아니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구제를 합니다. 구제는 교회에서 빼 놓을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구제 기관은 아닙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가 구제를 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둘람 공동체가 이웃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도와주었지만 그것이 존재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다윗, 개인으로서는 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한 곳이 아둘람 동굴이었고, 사백명의 지명수배자들에게는 이스라엘의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사관학교가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신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아둘람 공동체 역시 이스라엘이라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신부단장하는 곳이 바로 아둘람 훈련소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 에베소서의 말씀은 부부사이의 관계를 말씀하시면서 또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아내를 사랑하듯 이 땅의 교회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그렇게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부된 교회가 어떻게 단장을 해야겠습니까? 교회란 어떤 건물이나 처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그 모임자체가 교회입니다. 더 축소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어떻게 신부단장을 해야겠습니까? 다윗이 오합지졸같은 아둘람 동굴의 동지들을 어떻게 훈련시켰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그것을 눈여겨 봐야할 것입니다. 그 근거는 오순절 후 시작된 초대교회의 모습을 근거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아둘람 동굴의 사람들이 그 훈련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둘람 동굴에서의 훈련 커리큘럼이 어떤 거였는지는 성경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후의 그 아둘람 출신의 면면을 살펴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제일먼저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참는 훈련, 서로 양보하는 훈련을 시켰을 것입니다. 물론 다윗의 희생과 끝없는 인내가 있었겠죠. 그리곤 각론으로 들어가서, 무술을 연마하게 하고, 전쟁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케 하고, 재능에 따라 사람을 배치하고, 무엇보다 팀웍을 이루는 훈련을 쌓았을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모두 겪은 후에는 그들 모두가 용광로에서 새로 나온 정금처럼 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용장(勇壯)이 된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교회에서 그런 훈련을 쌓아야만 합니다. 아둘람 공동체가 겪었을 그 과정을 우리도 다같이 거쳐야 할 것입니다. 모두 다섯가지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기위한 다섯가지의 신부단장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충실하게 준비되어야만 우리교회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흠없고 아름다운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예배하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입니다. 교제하는 것입니다. 봉사하는 것입니다.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 예배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오늘도 찾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서, 이 예배드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예배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이것만큼 큰 특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자 되십니다. 거룩하시고 광대하신 분이십니다. 누가 그분 앞에 나가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예배할 수 있습니까?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예배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자들만이 가능한데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면서 나아오는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입니다. 우리만이 그분을 예배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한 주일의 스케줄을 만들고 우선순위도 정합니다. 여러분,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의 신부된 사람은 한 주 스케줄 가운데서 주일예배를 가장 최우선에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생활을 하는 자라는 증 거가 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예우하는 생활이 됩니다. 우리는 예배에 참석해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경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예배는 끝나는 것 아닙니다. 자기 앞에 나아 온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은 빈 손으로 돌려보내는 법이 절대 없습니다. 하늘에 쌓아 놓은 신령하고 좋은 각 양 은사들을 예배 시간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아 우리 영혼이 소생하게 합니다. 성령의 어루만지심이 우리 가슴에, 우리 심령에 계속 이어질 때에 우리의 상한 마음이 치유함을 받습니다. 예배 시간을 통하여 우리의 침체된 심령 이 다시 활기를 되찾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예배가 살아있는 성도들과 죽어있는 성도들을 밖에 나가서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예배드리기를 기뻐하는 성도들은 그 얼굴이 환합니다. 생활이 비록 어렵고 십자가의 짐이 무겁지만 그러나 그들은 힘을 갖고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릴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가 죽어있는 성도들, 안믿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어둡습니다. 피곤합니다. 그들에게 삶의 의욕이 없는 것을 우리는 자주 느낍니다. 얼마나 예배가 중요한지 모릅니다. 예배의 중요성은 제가 목사이니까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를 안 믿는 학자들도 예배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데이비드 핀크라고 하는 박사는 정신위생학 분야에 세계적인 권위자라고 합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안정을 위한 4박자 균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현대인에게 중요한 것이 심리적인 안정이라는 것이 그 주된 내용입니다. 안정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지요?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사람이 정치를 손에 넣어 보십시오. 나라가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정서 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한 사람이 경제를 주름 잡아 보십시오. 나라의 경제가 곤두박질 치게 돼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사람이 가르쳐 보십시오.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그 내면에 정서적인 평안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이 평안을 우리가 균형 있게 유지하려면 4가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일을 해야 사람이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는 놀아야 된대요. 쉬어야 된다는 겁니다. 적절한 쉼이 없이는 안정을 유지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또 하나는 사랑해야 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랑의 울타리에서 살아야 마음이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번째가 예배를 해야 된다고 합니다. 예수를 안 믿는 불신자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잘 들어 보세요 예배는 다른 세 가지, -일하는 것, 노는 것, 사랑하는 것-을 위한 기본이 되는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배라는 것은 초월자 되신 하나님에게 자기를 기대는 것입니다. '겉으로 자신 있다. 젊다. 실력 있다.'고 아무리 스스로 소리쳐도 우리는 하루하루 살면서 내가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자주 느낍니다. 겉으로는 태연하지만 속으로 얼마나 떨고 있는가를 우리는 자주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절대자가 필요합니다. 가끔, 아니 자주 그분 앞에 나와서 어린애가 엄마 품에 기대듯이 조용히 그분에게 기댈 때에 마음에 안정 이 찾아옵니다. 평안이 내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예배가 이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9세기 신학자인 슐라이어마허가 교회 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묘한 말을 했습니다. '교회는 전적인 의지의 감정이다.' 예배 드리는 자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지할 때 느끼는 감정이 교회라고 말을 하는 것입 니다. 일리가 있는 대답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꼭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지금까지 주일 예배를 얼마나 정성을 다해 드렸습니까? 여러분 가운데는 몸이 아픈 데도 이 시간을 빠뜨리고 싶지 않아서 이 자리에 나온 분들도 계십니다.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예수님의 신부다운 행동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지난 1년을 돌이켜 보십시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예배를 어느 정도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살았습니까? 그것을 등한히 하게되면 여러분의 가슴에는 불안이 있습니다. 공포가 있습니다. 좌절이 있습니다. 예배는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신부 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성도들과 교제를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 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지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혼자 존재하지 못합니다. 신앙은 절대로 혼자 유지하지 못합니다. 교회를 떠나면 우리의 신앙은 살아 남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일컬어서 성도의 공동체라고 합니다. 공동체라는 말은 성경에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공동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교제를 나누며 서로가 살아 야 합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암세포는 혼자 노는 세포라고 합니다. 우리 몸에 수백만개, 수천만개의 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이 세포는 모두가 몸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합니다. 모두가 몸을 위해서 함께 힘을 합하여 건강을 유지하고 생명을 유지합니 다. 그런데 암세포가 몸에 생기면 이것은 혼자 논다고 합니다. 혼자 놀면서 세력을 확대하다가 나중에는 악성종양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몸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있는 자양분을 끌어다가 빼앗아서 자기가 먹는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몸을 망치게 만들고 생명을 앗아간다고 합니다. 혼자 노는 세포가 결국은 몸을 망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교제해야 합니다. 또한 서로 소외감을 받지 않도록 두루 살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몸에는 쾌감을 전달하는 신경은 없다고 합니다. 아픈 고통을 느끼는 신경은 있고, 추위를 느끼는 신경은 있어도, 쾌감을 전달하는 신경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언제 즐거움을 느낍니까? 우리 몸에 있는 세포가 모두 하나가 되어 협력할 때 즐거움이라는 희열이 우리에게 체험이 된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서로 아름답게 교제하면서 모 두가 예수님의 몸된 교회, 예수님의 신부된 교회를 위해서 협력할 때, 교제할 때 거기에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니다. 그 다음,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꼭 해야 되는 일이지만, 더욱이 예수님과 우리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결혼할 그 날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전도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4장14절을 보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어야 하는데, 증거 되어서 온 세상 사람이 복음을 듣게 될 때에 비로소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끝 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불러서 그와 잔치하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그 날을 앞당기기 위해서도 전도를 열심히 해야 됩니다. 이 전도 얘기를 말씀드리니까 저도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전도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전도에 힘써야 하는데 그 동안 여러 사정 상 전도하지 못한 것 저의 불찰입니다. 사실은 크리스챤을 가장 강하게 만드는 것은 전도입니다. 힘은 들지만 그만큼 기쁨도 큰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직접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우리가 그리 할 수 없다면 우리 생활 가운데 믿는 자로서 기쁨을 보여주고 모범을 보여 줄 때 주변 사람들이 교회를 나가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전도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전도해야 됩니다. 어떤 형식으로든지 전도해야 됩니다. 네번째, 우리는 서로 섬기는 봉사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신부된 교회를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자기 눈높이로 남을 내려다 보고 교회 생활하면 안됩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의 눈높이에서 그들을 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혹은 그들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그들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다른 형제들을 생각하며 섬기는 형제자매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한국에는 서비스업소에서 주문을 받을 때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 업소가 많답니다. 처음 그것을 대하는 손님들은 오히려 당황한답니다. "이거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있나?"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 업소 사장의 생각은 분명합니다. 손님과 눈 높이를 같이 하면서 주문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봉사하는 자세를 가지고 고객을 우대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한 번 그렇게 대접받고 싶습니다. 뻣뻣하게 서서 뭐 드실래요? 하는 것 보단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돈 좀 벌려고 하면서도 저렇게 무릎을 꿇고 아우성들인데, 예수님의 신부로서 아름답게 주님 앞에 설 날을 기다리면서 신부수업을 받는 우리가 뻣뻣해서 되겠습니까? 봉사해야 됩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왜 말씀을 배웁니까? 그리스도를 닮는 완전한 자로 성숙하기 위함입니다. 배우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만년 갓난아이로 남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무식한 신부를 좋아하는 신랑이 어디 있습니까? 날마다 철없는 짓만 하는 신부를 좋아할 신랑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열심 히 배우고 주야로 묵상하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제일 골치 아픈 사람이 만년 갓난아이입니다. 날마다 신경을 써 주어야 됩니다. 기저귀가 젖었는지 안 젖었는지 날마다 봐 줘야 됩니다. 기저귀를 갈 때마 다 토닥토닥 베이비 파우다를 발라 주어야 됩니다. 우유가 뜨겁지 않도록 적당한 온도를 잘 유지하면서 젖을 먹여 줘야 됩니다. 만약, 그런 사람만 교회 안에 가득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가 신생아만 가득한 산부인과 병원처럼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교회에서는 자라야 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향해서 주님처럼 닮아가기 위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4절에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보다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성경공부를 여러분들과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자면 여러분들은 바쁜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셔야 될 겁니다. 배우십시다. 그렇게 배워서 남주는 것, 이렇게 배워서 신랑께 바치는 것, 이것이 신부수업인 것입니다. 이상 우리는 5가지를 해야 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이 신부수업 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여러분 가운데는 혼란을 느끼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거 날마다 교회와서 살아야 되겠네.'라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재주로 그 다섯 가지를 다 잘하면서 사회 생활을 하라는 말인가?'라는 생각도 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여러분, 혼동하지 마세요. 제 이야기 잘 들으십시오. 우리에게는 손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른손이고 하나는 왼손입니다. 각 손마다 손가락이 다섯 개씩 있습니다. 오른손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장애자입니다. 왼손만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장애자입니다. 둘을 다 써야 정상입니다. 그러면, 오른손이 무엇입니까? 방금 제가 말씀드린 예수님의 신부 되기 위한 다섯가지입니다. 무엇입니까? 예배하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입니다. 교제하는 것입니다. 배우는 것입니다. 이 다섯 손가락이 있는 오른손이 바로 그런 삶을 사는 삶입니다. 그러면 왼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만 가지고 살지 못하잖습니까? 이 다섯 가지만 하면서 어떻게 삽니까? 만약 이것만 가지고 내내 산다고 하면 그 사람은 가정도 다 포기해야 되고, 사회생활도 다 포기해야 될 것입니다. 날마다 교회만 가서 살아야 될 것입니 다. 오른손의 다섯 가지를 하면서 동시에 왼손이 하는 다섯 가지가 필요합니다. 무엇입니까? 먹고 마셔야 합니다. 일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자야 합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교제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또 뭐가 있습니까? 즐겨야 합니다. 쉬기도 하고 즐거워하는 무엇이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이 다섯 가지를 해야 우리가 건전한 사회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둘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오른손은 전혀 무시해 버리고 왼손만 계속 신경을 쓴다면 그 사람은 불신자와 똑같습니다. 그렇다고 오른손만 쓰고 왼손만 쓴다면 이 사람은 광신자가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단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둘을 다 잘해야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두 손 중에 어느 손을 자주 씁니까? 오른손입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는 왼손잡이도 있습니다. 그래도 오른손을 우리는 자주 씁니다. 하나님도 오른손잡이 입니다. 하나님도 오른 손에 일곱 별을 잡고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오른손잡이 입니다. 오른손을 많이 쓰십니다. 오른손이 왼손 보다 더 힘이 있습니 다. 오른손이 항상 앞섭니다. 오른손이 제대로 제 몫을 감당할 때 왼손 이 따라가면서 다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원리를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 성도로서 오른손에 해당하는 것을 우선에 두십시오. 그리고 이 오른손에 있는 것을 강조하십시오. 그리고 이 오른손에 더 신경을 쓰면서 정성을 다 하십시오. 그러면 왼손은 따라 옵니다. 오른손은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것이고 왼손은 우리의 겉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른손은 우리의 속사람을 예수님의 신부처럼 아름답게 갖추게 하는 것이고, 왼손은 우리의 겉모양을, 인간으로서의 몸을 완전하게 갖추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둘이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른손이 항상 우선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합니까? 교회인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 받는 신부가 되는 것이 유일한 꿈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신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기쁜 일입니다. 아마도 아둘람 동굴에 있던, 세상에서는 범죄집단이요, 쓰레기 같은 인생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그들도 이런 훈련을 다 거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대 제국을 이루는 이스라엘의 영웅들이 다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그러한 훈련받기를 마다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이러한 신부단장을 하는 과정이 힘들지만은 않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기쁨도 있고, 즐거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신부로서 더 아름다워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훈련을 기꺼이 받으시도록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느날 갑자기, 거울을 보고 예뻐진 자기 모습에 황홀해서 덜컥 기절해 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로서 준비를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무엇보다 마땅히 해야 할 교회 공동체에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 할 수 있게 하시되 기쁨으로 그 일들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에배와 친교와 전도하는 일, 그리고 섬김과 배우는 일로 준비를 하게 하시고, 주님의 뜻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그래서 매일매일 우리의 영적인 모습과 외적인 모습까지라도 아름답게 변하게 하옵소서. 주님 오시는 날까지 매일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2001년 10월7일 (추수감사절) 성경 : 합3:17-18, 살전 5:18 말씀 : 감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이 나라에 살면서 이 나라 사람들에게 참 많이 듣는 말이 있습니다. "Danke"와 "Entschuldigung"입니다. 어디를 가나 이 얘기를 듣습니다. 아주 조그만 일에도 고마워 할 줄 알고 아주 조그만 일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합니다. 물론 그 본심은 어떤지 몰라도 일단 말로 표현을 하게 되니까 서로가 기분좋습니다. 아쉬운 건, 우리도 이 나라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하는데, 우리끼리는 그게 잘 안됩니다. 아마 우리 정서 고유의 쑥스러움이 있어서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우리끼리도 서로서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말을 자주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예배를 추수감사절로 드리고 있습니다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의 영향을 받아서 11월 셋째 주에 추수감사절을 드리는데 우리는 이 나라 식으로 오늘 드리게 되었습니다. 동성연애자들이 가끔 자기들을 공식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날을 정해놓고 'coming out'을 합니다. 우리도 오늘 하루만큼은 감사에 대한 coming out 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는 우리의 신앙상태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만약 우리 스스로 불평과 불만이 많고 감사할 조건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 상태는 적신호 입니다. 그러나 늘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마음이 있다면 아주 좋은 상태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요즘 상태는 어떠십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데살로니가전서 5:18은 앞의 16, 17절과 함께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바라시는 이상적인 모습이 있는데 그게 바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세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맺어져 있습니다. 기쁨이 없는데 감사하게 되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데 감사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감사가 없으면 기쁨도 없습니다. 그렇게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 모두는 감사할 일이 쌓였다는 것입니다. 감사할 일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감사할 조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불평할 조건에만 초점을 맞춰서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에라도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백지를 한 장씩 나눠드리고 감사할 이유를 번호를 매겨 가면서 써보라 그러면, 아무리 적어도 몇십가지는 될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으시죠? 예를 들면 건강하거나, 공부를 하고 있는 거나, 이렇게 교회 나올 수 있다는 것들 말이죠. 여러분에게는 당연한 일인 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절박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건강해서 제발 교회 한번만 가봤으면, 제발 비엔나 가서 일년만 공부할 수 있다면..."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감사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저는 요즘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매번 거기에 관련되는 자료를 찾아볼 수 있는 데까지 다 찾아봅니다. 이번에도 감사에 대한 책이나 인터넷 상의 자료나 감사에 대한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거의 다 읽어봤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자료나 예화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정작 감사해야 될 사람들은 감사하지 않고 여러 환경이나 조건으로 볼 때,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감사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말씀도 제가 처음 구상한 것하고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됐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제가, 함께 감사할 조건을 찾아보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앞으로는 우리가 끊임없이 감사할 조건을 찾아 나가자. 그리고 기뻐하자. 뭐 이렇게 말씀을 끝맺으려고 했는데, 자료들을 보니까 그런 정도는 너무나 당연하고 저급한 차원인 거예요. 제가 그 모든 자료를 통해서 한 가지 분명히 깨달은 사실은, 감사할 것에 대해서 감사를 생략하면, 받을 축복도 생략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도저히 감사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를 드리면 정말로 감사드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된 청교도들의 이야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긴 항해 끝에 미국 동부에 있는 플리머스에 도착했습니다. 항해하는 동안 44명이 죽었고, 첫 농사를 짓는 동안 풍토병과 인디언의 습격 속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낙심치 않고 이듬해 첫 열매로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 추수한 내용도 아주 빈약해서, 곡식은 거의 추수를 못했고 푸성귀 조금하고 칠면조 몇 마리를 놓고 추수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감사가 해가 갈수록 점점 퍼져가서 1789년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추수감사절을 지키도록 한 것입니다. 역경을 딛고 드린 감사였지 당연히 감사드릴만해서 감사드린 게 아닙니다. 하박국 선지자를 보십시다. 그는 완전히 망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은 말라 비틀어졌습니다.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나 양도 없었습니다. 밭에 아무 소출이 없었습니다. 외형적인 조건만 보면 그는 감사할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기뻐했습니다. 그 기뻐한 이유가 뭘까요? 오직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인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편지의 주인공인 사도 바울을 또 보십시다. 그가 감사할 조건이 뭐가 있습니까? 자녀?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아내? 그에게는 아내가 없었습니다. 재산? 그에게는 재산이 없었습니다. 자유? 그는 걸핏하면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젊음? 그는 늙어 죽을 날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오늘 우리더러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까?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때문에 우리는 감사드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본이 되어야만 합니다. 감사에는 흔히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하면 감사하겠습니다.'하는 감사입니다. 영어의 'if'입니다. 만약 이렇게 이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감사도 아닙니다. 그렇게 안되 면 감사도 하지 않겠다는 조건부 감사입니다. 둘째는 '- 때문에 감사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영어의 'because of '의 감사입니다. 당연한 감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정도 감사하기도 힘겨워 합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미국의 오대호에서 일생동안 300명 정도를 구출한 수상구조대원에게 구조해 준 사람 중에서 몇 사람이나 감사의 뜻을 표하더냐고 물었더니 한 사람도 없었더라는 거예요. 셋째는 '-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입니다. 영어의 'in spite of' 의 감사입니다. 도저히 감사할 조건이 아닌데 감사하는 것입니다. 가장 성숙한 감사의 모습입니다. 바로 우리가 지향(指向)해야 할 감사의 모습이지요. 여기에 대한 예화는 너무나 많더라구요. 그러나 그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들은 지레 감사를 포기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도저히 못해."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감사를 드릴 수 있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역경 속에서도 감사를 드리는 수준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 아 나가야만 합니다. 먼저 작은 것부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별빛을 주시는 은혜를 감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빛을 주실 것이요, 달빛을 감사하면 햇빛을 주실 것이요, 햇빛을 감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햇빛도 필요없는 더 좋은 것으로 인도할 것이니 거기에는 하나님의 빛이 영원히 있을 것이다" 정말 작은 것부터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사를 어떻게든 표시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나 사람에게나 같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하루는 출근길에서 새치기를 하다가 뒷차와 부딪힐 뻔 했습니다. 미안하기도 하고 아침부터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서 빨강신호로 차가 서 있을 때 제 차에서 내려 뒷차로 가서 정중하게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인사를 하면서 사과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정중했는지 잠시 그 운전자가 당황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신호등에서 이번에는 기다리는 동안 뒷 차 운전자가 제게로 와서 윈도우를 열으라는 표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열었더니 목캔디를 한움큼 던져주고 가는 겁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그날 하루는 온종일 신나게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할 것을 감사하고, 역경에도 감사할 수 있는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 오늘 저는 여러분께 여태까지와는 좀 다른 차원의 감사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것대로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금방 역경중의 감사까지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주 쉽습니다. 우리의 마음만 고쳐먹고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면 당장에라도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까지 여러분의 인생이 여러분 뜻대로 되지 않은 것에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감사드리는 내용을 보면 자기 뜻대로 된 것에 감사를 드리고 자기 야망이 충족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이런 감사는 신앙이 없는 곳에서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뜻대로 되지 않은 것에 감사를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그 끝을 알 수 없습니다. 처음의 성공 때문에 끝에 가서 실패하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여러분의 소원대로 되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도 지금보다는 어쩌면 더 유명해져 있을 지도 모르고, 경제적으로 더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또 사회적으로도 좀 더 높은 위치에 있게됐을 지도 모르죠. 또 음악가로서 세계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인생이었다면, 여러분은 지금처럼 인정미 넘치는 사람은 되지 못했을 것이며, 지금처럼 하나님과 친숙한 교인은 되지 못했을 겁니다. 어쩌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잊고, 자기 내키는 대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추락하게 됐을 지도 모릅니다. 생각하면 참 아쉬운 사람이 많습니다. 대우의 김 우중씨. 그분의 책에 보니까 가장 행복했을 때가 언제였냐 하면 대구에서 피난살이를 할 때 신문을 다 팔고 돌아와서는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가정 예배를 드릴 때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그분의 뜻대로 사업은 승승장구했습니다. 만약에 그분의 뜻대로 안됐다면 지금은 훌륭한 신자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지금은 어느 하늘밑에서 쫓기는 몸이 되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저희 선배가 말하기를 "야! 야당총재도 별 수 없더라. 어제는 김영삼씨가 우리 교회에서 헌금위원 하더라" 그러더라구요. 차라리 그 모습이 훨씬 났습니다. 대통령이 안됐더라면 훨씬 보기 좋은 장로님이 됐을 것입니다. 대통령 시절에 단 한번이라도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아마 그것 때문에 믿는 사람이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작년 여름에 정동제일교회의 조영준 목사님이 이곳에 오셨다가 저희 집에 오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김종필 씨가 정동제일교회 집산데 잘 나오십니까?" 물어봤더니 나온대요. 그런데 일년에 딱 한번 나온대요. 언제냐? 신년축하 예배때요. 여러분!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끝이 좋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을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아직 살아있고 지금의 모습으로 있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할 일이 있습니다. 살아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뜻대로 되었다면 큰일났을 겁니다. 여러분 뜻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끌어가시는 것에 감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여러분이 지금까지 고생하신 것에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고전15:10에서 자기가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남보다 더 고생하고 수고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크리스찬은 넓은 길을 두고 한사코 좁은 길로 가는 사람입니다. 예수 때문에 손해보고, 예수 때문에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 예수 때문에 미움을 받는 것은 확실히 축복입니다. 제가 보니까 여러분 중에는 참 사서 고생하시는 분도 많습니다. 고국에 있으면 지금보다는 훨씬 편하게 공부할 수도 있을텐데, 이곳에 오셔서 말에, 돈에, 인간관계에, 공부에 그렇게 시달리는 것을 보면 왜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고생한 것은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역사가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후손에게 들려줄 삶의 스토리가 없습니다. 고생한 사람들은 후손에게 들려 줄 이야기가 있고, 또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용기와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고생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해 본 일도 없지만 아울러 하나님의 은총에 감격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그 고생을 발판으로 해서 누군가가 일어섭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고생은 선구자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사람에게 접근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은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서 푸른 풀 밭, 잔잔한 물가로 가게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고생한 것, 그리고 앞으로 고생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그동안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여태까지, 또는 올 한 해 동안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름대로 봉사했습니다. 집안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봉사할 기회나 터전을 얻지 못했다면 우리의 재능은 녹슬고 말았을 것인데, 이렇게 봉사할 수 있었으니 감사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의무와 봉사가 합쳐진 것입니다. 의무에만 살면 거기엔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봉사하는 사람은 거기서 천국을 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붙드셔서 봉사의 도구로 사용해 주시니 얼 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의 지식을 나눌 수 있게 하셨고, 우리의 음악을 나눌 수 있게 하셨고, 우리의 정보와 노동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봉사를 통해서 세상을 밝히시고 기쁨이 넘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봉사를 통해 열매맺게 하셨고 그 봉사를 당신의 영원한 기억 속에 담아 두셨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이 기회를 빌어서 지난 일년동안, 식사당번으로 봉사하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직접 해 본 적은 없지만, 식사 한 번 준비하기가 얼마나 힘든 지 압니다. 또 찬양으로 봉사하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아침에 찬양드리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이 되는 것인지 저는 압니다. 찬양을 한 번 드리기 위해서 주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한 시간 이상 연습하고, 또 교회 일찍 오셔서 연습하는 그 수고가 얼마나 번거로운 것인지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 반주로 봉사하시는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참 신경쓰이는 일입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으로 함께 봉사하다보면 예배에 집중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배다운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 제가 잘 압니다. 그래도 싫다 하지않고 열심히 자리를 지켜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 동안 속장님과 가르치는 일로 수고하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한 번 모임을 가지려면 여러 수고를 해야 합니다. 전화하는 일에, 장소를 준비하며 간식을 준비하는 일에,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또 예배순서마다 기도와 성경봉독, 그리고 헌금위원으로 수고하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기타를 치시거나 사진을 찍거나 교회 인터넷 카페를 관리하는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얼마나 신경 쓰이는 일인지 모릅니다. 때때로 케익을 만들어 오는 손길도 있고, 오늘처럼 바쁘지만 음식을 만들어 오시는 분들도 있고, 또 이런 저런 개인적인 일까지 봉사하시는 손길도 있습니다. 모두 다 감사드립니다. 또 감사드려야 되는데 빠지신 분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그 동안의 봉사와 헌신에 대해서 서로서로 감사합시다. 그리고 이 모든 봉사를 가능케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다. 서두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감사하면 할수록 그 감사는 은혜와 축복이 되어서 우리에게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축복도 웬만한 축복이 아니라 30배, 60배, 100배의 놀라운 축복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누구냐 하면 감사할 게 없는 사람입니다. 감사할 조건을 찾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가장 위대한 삶을 사는 사람은 누구냐? 끊임없이 감사의 조건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렵고 열악해도 감사할 일이 있는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상태를,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로 측정하십니다. 우리가 때때로 기도 못할 수 있고, 봉사를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까지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사실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모두 받은 사람들입니다. 고전4:7에 보면"너희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네가 이미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받은 것 같이 자랑하느뇨?" 그랬습니다. 우리는 다 받았고,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받은 은혜가 족한" 사람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고생하신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우리의 몸과 재능으로 봉사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가 거둔 추수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앞으로 계속 이 감사를 지키고자 작정하신다면 올해 우리의 추수는 풍년입니다. 감사를 통해서 언제나 기뻐하는 모습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감사를 잊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의 은혜는 족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논밭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더라도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를 돌이켜 보니 그 동안 감사에 너무나 인색했던 것을 고백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오늘 다시 우리의 받은 것을 인해 감사드립니다. 또한 아직 주시지는 않았지만 주실 것을 인해서 감사드립니다. 지난 일년 동안 우리가 원치 않았던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우리를 훈련하시려는 일로 믿고 감사드립니다. 주시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 주님께 의지하며 기도합니다. 감사할 일에 대해서 마땅히 감사드리게 하시고, 혹 감사드릴 수 없는 환경에서라도 감사드릴 수 있기까지 우리의 감사가 자랄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결국엔, 무엇보다 오직 하나님 이름을 인하여 그것 하나로 감사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주님이시여! 붙잡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2001년 9월23일 성경 : 롬8:26-28, 요14:16-20 제목 :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 어제 저는 특별한 체험을 했습니다. 지난 수요일 오후부터 몸이 좀 좋지 않았습니다. 몸살 기운이 슬슬 시작되더니 금요일 오후엔 앓아 누웠습니다. 설교준비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주초(週初)에 줄기는 잡아 놨지만 마무리는 주말에 해야 되는데 이렇게 앓게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됐습니다. 그래서 금요일은 일찍 자고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준비해야겠다 생각하고 약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토요일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아침 일찍 나갔다가 오후 4시가 다 돼서야 들어왔습니다. 집에 들어오니까 다시 몸살 기운이 도져서 그냥 누웠습니다. 그런데 머리 맡에 설교집이 있더라구요. 거기서 설교 한 편을 읽었는데 그 설교에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서 저녁을 맛있게 먹고, 교회로 내려와서 늦게까지 설교준비를 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이쯤 되면 초조와 긴장 속에서 준비를 하게 되지만 어제만큼은 이상하게 설교준비하는 게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뭔가 잘 될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알았습니다. 저의 연약함을 아시고 성령님께서 도우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제목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인 것을 아시고 성령님께서 먼저 저에게 그 사실을 체험케 하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즐거운 마음으로 이 단에 섰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은혜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저는 부흥강사 목사님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서 제일 듣기 거북한 말씀이 뭐냐하면 설교 중에 던지는 시늉을 하면서 "성령 받아라"하는 겁니다. 성령은 무슨 던지고 받는 공같은 게 아닙니다. 성령은 사람이 사람한테 나누어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함께 창조에 참여하셨던 하나님의 영, 다시 말하면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함께 지금도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세 분이시지만 한 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또 한 분이시지만 각자 다르게 일하시는 삼위 중에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란 말씀입니다. 성령은 어떤 징조나 기운이 아닙니다. 감각의 대상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신앙의 대상이십니다. 엄연한 인격자이시며 우리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한 복음을 읽다보면 십자가를 지시기 전, 유언으로 제자들에게 몇 번이나 반복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와 성령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를 읽어보면, 그 석 장 사이에 예수님이 성령에 관한 말씀을 무려 네 번이나 하십니다.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너무 중요해서 그런 겁니다. 한 두번 해서는 이해 못할까봐, 어떻게 해서든지 꼭 알게 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반복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느냐 하면 요14:16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가리켜 '보혜사' 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보혜사라는 뜻은 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데 '돕는 자'(helper)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돕는 자라고 라고 말씀하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마지막까지 하시는 일이 뭐냐하면 돕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외국에 나간 게 필리핀 마닐라였습니다. 그런데 공항에 내려서 어찌어찌 하다보니까 일행을 놓쳤습니다. 정말 아무리 둘러봐도 한국사람 한 명 한 보이고, 어디를 어떻게 가야될지, 땀은 비오듯이 흐르고, 찾는 사람은 안 보이고, 정말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있었는데 어디선가 필리핀 여자가 한 명 오더니 저에게 유창한 우리 말로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하고 물어보더라구요. 그 절박한 가운데 그렇게 도울 사람이 나타나니까 정말 얼마나 좋던지... 그 여자의 도움으로 무사히 일행이 있는 데를 찾았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 필리핀 여자는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도울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 그건 얼마나 큰 힘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를 돕는 분이 계시다는 겁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분의 도움은 사람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잘 돕는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도움은 완벽하십니다. 더 이상 손댈 필요없이 흠없는 도움이십니다. 성령은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케 하셨고, 예수님을 사망권세에서 일으키신 분입니다. 바로 이러한 분이 우리를 돕는 자로 와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이 요14:16 말씀 중에 이상한 말씀이 있는데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면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은 보혜사가 한 분 더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또 다른 한 분의 보혜사는 누구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십니다. 거기에서 보혜사의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요한일서 2;1에 보면 참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죄를 짓지요? 안 지을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가만히 계시냐?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말씀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하신다는 거예요. "얘는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서 살린 아이기 때문에 용서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대언자가 되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원문에 보면 바로 이 대언자나 보혜사가 똑같이 파라클레토스라는 같은 단어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무슨 얘깁니까? 예수님과 성령님이 똑같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8장 뒤쪽에 보면 34절에 보면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아멘.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돕는 보혜사라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을 보내시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라면, 성령님은 땅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이 땅에서 하시는 일이 뭐냐하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26절 "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아멘. 성령님이 이 땅에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이 뭐냐하면 우리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 최고의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인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기도 않하시는 걸 책망하면서 "기도하셔야죠! " 그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이렇게 받아치세요. "그럼요 기도하구말구요. 내 속에서 성령님께서 얼마나 기도하시는데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제가 그냥 넘어 가겠습니다. 사실 성령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의식하고만 있어도 그게 얼마나 큰 믿음인지 모릅니다. 겁날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여러분! 기도하세요! (그럼요. 내 속에서 성령님께서 얼마나 기도하시는데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 사실을 잊지 마시고 꼭 기억하시길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들어도 마음 한 가운데 "그런데 이런 모든 얘기는 성령을 받았을 때 얘기지, 나는 그 흔한 방언도 한 번 못받았는데 성령이 계신 건가?" 이렇게 고민하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고, 사실 하나님이란 분이 계신지 어떤 지도 모르는데 성령은 무슨 성령..."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이런 의문에 대한 결론부터 내립니다. 제가 이번 씨리즈 설교의 첫번 째 말씀인 "하나님은 누구신가?" 라는 말씀을 드릴 때 "'하나님은 사람들이 살아 계시냐, 안 살아 계시냐?' 하는 것에 관계없이 계신다." 그런 말씀을 드렸죠? 갈릴레이가 교황청을 향해 "너희가 아무리 지구가 돈다, 안 돈다 떠들어도 거기에 관계없이 지구는 돈다" 그렇게 말한 것처럼, 여러분들이 믿든지 안 믿든지에 관계없이 여러분은 성령님과 함께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2:3 에 보니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러분 중에 예수를 저주하는 분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미 여러분 속에 성령님을 모신 겁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교회 나오셨습니다. 또는 이 설교를 읽으시고 있습니다. 교회는 아무나 나오는 게 아닙니다. 설교는 아무나 읽혀지는 게 아닙니다. 바로 이렇게 교회 나오시고, 설교를 읽고 계시다는 것이 여러분 속에 성령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아멘.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뒤집어 말하면 성령을 모신 사람만이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모두 이미 성령의 체험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속에 성령님이 함께 계십니다. 이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것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그래도 불안한 감이 없쟎아 있습니다. 함께 계시고, 기도해 주시는데 그 기간이 언제까지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맘에 안 들면 떠나가시는 건 아닌가? 우리 쪽 믿음의 크기만큼, 성령님도 내주하심을 끊임없이 조절하시는 건 아닌가? 이런 불안이 있을 겁니다. 이런 불안에 대해서도 오늘, 우리 주님은 분명하게 답하고 계십니다. 요14:16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언제까지라구요? 영원토록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토록, 이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뭐부터 걱정하십니까? 헤어질 것부터 걱정하게 되지요? 헤어지기 정말 섭섭하지요?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되면 아픔을 동반하게 되는 겁니다. 그 헤어짐이 싫어서 결국은 결혼하게 되는 겁니다. 계속 같이 있어보면 또 지겹지만요... 사람에게는 그런 헤어짐의, 이별의 공포가 누구나 다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언제 떠나신다구요? 떠나시지 않습니다.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기쁠때나 슬플때나, 평안할 때나 고난당할 때나 성령님은 절대로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결정적으로 그 말씀을 뒷받침 해 주시는 말씀이 있는데 요14:18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우리를 부모없는 자식처럼, 절대로 고아처럼 그렇게 두시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것만큼 더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 있을까요? 제가 고등학교 때, 저희 반에는 고아원 원생아이들이 몇 명 같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한 서너명 된 것 같은데 그 친구들은 항상 뒷자리에 모여 앉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업시간에 그 친구들이 갑자기 서로 주먹이 오가면서 싸웠습니다. 모두들 깜짝놀랐죠. 선생님도 물론이구요. 그래서 선생님이 걔네들을 불러내서 혼을 내키고는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어이가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친구들이 부모없이 고아원에 있으니까 얼마나 먹고 싶은 것도 많고 사고 싶은 것도 많았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들끼리 돈 3만원이 있으면 뭐에 쓸까를 놓고 얘기했던 겁니다. 있지도 않은 돈을 가지구요. 그러다가 서로 사고 싶은 게 달랐나봅니다. 그래서 싸우다보니 주먹다짐까지 하게 됐다는 거예요. 돈이 있지도 않는데.. 여러분은 지금 웃고 있지만 얼마나 처량하고 비참합니까? 아, 그때 저는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았습니다 우리도 아마 주님이 우리를 버리면 그것보다 훨씬 더 처량하고 비참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시지 않겠다는 거예요 다시 오시겠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오신다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만 해석할 수 없는 것이 그 다음 19-20절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라. 이는 내가 살겠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세상은 예수를 볼 수 없게되는 날이 올꺼라는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승천하시고는 세상은 예수님을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안 계신 예수님을 우리는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게 돼서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즉, 보내신 성령님을 만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만나는 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누구시냐? 성령님이 어떤 분이냐?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성령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더 이상 고아가 아니야. 내가 가고 나면 이 땅에 성령이 올텐데 그렇게 되면 너희는 훨씬 행복해지는 거야. 내가 육체로 있게 될 때는 너희들이 나를 찾아 다니고, 옆에 없으면 불안해 하고, 너희가 갈릴리를 떠나면 나를 못보게 되는 거야. 그러나 성령이 오면 그럴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내가 항상 너희 속에 있게 될 테니까. 더 이상 나를 찾아다닐 필요도 없고, 불안해 할 필요도 없어. 내가 너희 속에만 있게 되면, 너희들은 내가 한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거야. 왜? 네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일하니까. 그래서 내가 떠나는 것은 떠나는 게 아니야. 영원히 함께 있는 거야. 성령이 너희와 함께 있을 거니까. 너희는 절대로 고아가 아니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시간, 이 말씀에 은혜가 되신다면 여러분은 이미 성령님을 모신 사람입니다. 물론 오늘 깨달았다고 오늘에서야 성령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 시작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에, 여러분이 예수를 믿은 때부터 성령님은 여러분과 함께 계셨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을 모신 사람의 증표가 뭡니까? 성령님을 모신 사람은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능력이 있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내주(內住)하시는 성령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어떤 일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제 설교를 읽다가 어떤 목사님의 25년간 목회하시면서 깨달으신 성공비결의 고백을 읽었습니다. 딱 일곱 글자였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결론은 성령이다" "결론은 성령이다" 내 속에서 뜨겁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믿기만 하면 문제는 끝이라 이겁니다. 이름만 대면 금방 알 수 있는 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 동생이 불놀이를 하다가 불에 타 죽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 다른 동생 하나가 집 근처 벌목 현장에서 나무에 치여 죽는 것을 봤습니다. 그는 어머니와 세 형님들이 차례로 급사(急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6.25 때는 아버지와 가족들이 눈앞에서 공산당에게 학살당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8.15와 6.25의 사선을 수없이 헤매다가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몇 해 전에는 고등학교 교감으로 봉직하던 동생이 10살에서 16살까지 줄줄이 있는 딸 넷을 남겨놓고 간암으로 죽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 후 일년이 지난 후에는 딸이 위암으로 157일 동안 고통을 겪다가 두 어린 딸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죽는 비극을 당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동생과 제수가 죽고, 막내 동생은 지금 간경화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고아원을 차려야 될 정도로, 모두가 자녀들을 맡기고 떠났습니다. 그분이 이 이야기를 글로 썼을 때는 환갑을 맞는 나이였습니다. 얼마나 기막힌 상황입니까? 만약 여러분이나 저나 그분이 겪은 사건을 하나라도 겪었다면 우리는 아마 주눅이 들어서 일어나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런 줄줄이 이어오는 비극을 겪으면서도 놀랍게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정직하게 고백하면, 나는 하나의 얼굴로는 웃고, 다른 얼굴로는 운다. 내 영은 주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깊은 곳에서 샘물같이 환희가 솟는다. 그러나 다른 마음의 하늘에서는 비가 끊임없이 내리고 있다. 옆을 보면 정신착란증에 걸릴 것 같고 위를 보면 현기증이 난다. 내 안을 들여다 보면 죄와 추한 것들이 있고 과거는 회한과 슬픔뿐이고 미래는 안개처럼 불확실하고 불안하다. 나는 주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과거는 아무리 더럽고, 아프고 서러워도 내일과 새해와 미래는 때묻지 않은 순수한 페이지, 무한한 잠재적 가능성, 공주같은 처녀성이 백지같이 열려 있다. 시집가는 처녀처럼 새 날을 맞이하여 새 집에서 새 살림 꾸려 새 사랑을 살자. 한 해 한 해를 사는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를 사는 것도 아니다. 한 발짝, 한 호흡, 주님을 사랑하며 창세기 첫날처럼, 날마다 영원한 첫사랑으로 살자. 내게 깊은 위로와 감사와 찬송과 평안이 있다. 그것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은혜로 내게 주시는 것들이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게 바로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분이 바로 한국대학생선교회의 김준곤 박사님이십니다. 그렇게 험한 눈물 골짜기를 거쳐오면서도 기쁨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늘 향해서 처녀가 새 살림 꾸미듯이 새 인생 바라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옮겼습니다. 이런 초인적인 능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내안에 계신 성령님의 은혜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김준곤 목사님의 경우처럼, 특별히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우리가 문제가 너무 커서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 모를 때, 그때도 우리 성령님께서는 하나님께 대신 기도해 주십니다. 그것도 그냥 건조하게 기도하시는 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간절한 애닯음과 안타까움을 가지시고 친히 기도해 주십니다. 여러분! 지금 힘드십니까? 앞날이 걱정되십니까? 파도처럼 몰려오는 문제들이 겁나십니까? 자신이 없으십니까? 이 모든 걱정 근심에 해답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문제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성령님을 믿으십시오.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셨던 성령님, 우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우리 죄 때문에 끊임없이 빌어 주셨던 성령님, 그 분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늘 노래하쟎아요.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그 누군가가 누굽니까?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절대로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조금만 더 견디세요. 성령이 주시는 열매를 따먹을 수 있습니다. 다만 성령님께서는 인격체시기 때문에 여러분과 함께 일하시고 싶어하십니다. 여러분이 일을 안 하셔도 성령님이 대신 해 주시지만, 여러분이 협조해 주셔야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여러분이 성령이 내 안에 계신 것만 믿으시면 됩니다. 그분이 내 전 생애를 주관하시고 계획하시고 일하신다는 것만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내 전부를 스스럼없이 꺼내 놓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세요.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같이 가 주세요. 내 힘이 아니라 성령님의 끄는 힘으로 그대로 끌려가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성령의 동행하심이 어떤 건지 체험할 것입니다. 성령님은 일생 여러분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여러분의 연약함을 도우실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이 땅에서 우리 연약함을 도우셔서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우리를 위해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여러분 일생 다하도록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크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깊이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이나마의 우리 모습이라도 성령님께서 함께 해 주신 은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와 늘 동행하시고, 앞으로도 함께 하실 성령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위해 지금도 간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고 앞으로도 그 동행하심을 굳게 믿어 의심없이 주님과 함께 이생명 다하기까지 함께 갈 수 있도록 믿음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당신은 하나님의 작품2001년 9월16일 성경 : 엡2:8-10 제목 : 당신은 하나님의 작품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다루고 있던 큰 명제는 "인간은 무엇인가? "였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마다 인간이 어떻다고 한 마디씩 얘기 안 한 철학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고,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 등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인간을 얘기했습니다. 다들 맞는 얘기를 했지만 한 두 마디로 인간을 표현한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오늘 저도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 이런 문제를 가지고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 그래서 저도 이 문제에 한번 생각을 해 봤습니다. 인간이란 뭔가? 생각을 꽤 오랫동안 했는데 생각이 안 나더라구요. 그런데 조금 더 오래 지나가니까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게 뭐냐? "인간은 인간이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다섯째 날까지 다른 것들을 다 창조하시고 여섯째날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해 달 별, 동물, 식물, 이런 걸 다 만들어 놓고 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셨읍니다. 그런데 창1:27-28 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모습을 본 따서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겁니다. 그것은 육체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마음을 우리도 가지고 있도록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한 마디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속에는 사랑이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럼 왜, 창조하셨습니까? 사람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을 보면,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창조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복 주신 일입니다. 다섯째 날까지 해와 달과 바다와 땅, 그리고 동식물을 다 만드신 연후에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모두 인간을 위해, 사람이 불편함 없이 지내기 위해 만드셨던 겁니다. 즉, 우리 인간이 그 창조물을 누리라는 겁니다. 이것 자체가 복입니다. 그런데 또 복을 주시겠다고 하는 얘기는 뭐냐하면, 만약에 뭔가가 잘못되는 경우엔 내가 After Service를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뭔가 고장나면 고치겠다는 것이 복입니다. 원래 그대로 만들어 놓으시겠다는 거죠. 그래서 사실은 인간의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After Service 인 것입니다. 창조 때 얼마나 아름다웠을까요? 때묻지 않은 그 상태말입니다. 만약 모든 것이 창조 때 그대로 유지됐다면, 자연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도 순수한 상태로 유지됐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상태이겠습니까? 더 이상 복받을 게 없습니다. After Service가 필요없는 완벽한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잘못되면 원래대로 After Service를 해 주시겠다는 게 복입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얼마 안 돼서 인간은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로 죄 때문이죠?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유일한 경계가 선악과였는데 그것을 따먹고 말았습니다. 마귀의 꼬임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아담이 어느 나라 사람이냐에 대해 논란이 많은데 적어도 한국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아담이 한국 사람이었다면 뱀을 잡아먹었을 겁니다. 인간은 죄를 짓게 되자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고, 그 후손은 가엾게도 구원을 받아야 될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말을 많이 들으셨을 줄 압니다. 이 말에 반발하실 분이 있을 겁니다. 왜 죄인이냐? 그것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그 속에 죄의 씨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겁니다 . 예비죄인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는 실제로 장성하면 여지없이 죄를 짓습니다. 인간은 복받은 존재에서 구원을 받아야만 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존재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다 구원받아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야 원래되로 회복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의 고향인 에덴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런 상태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수도 없이 들어왔던 이 구원이라는 건 뭘 말하는 겁니까? 보통은 불타는 집에서 구출되거나 물에 빠져 죽어가다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구조돼서 목숨을 건지게 되는 경우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설교시간에 수도 없이 말하는 구원이란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 앞에서 죽어있는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는 죽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철저하게 죽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격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분이 누구인지 모를뿐더러 미워하고 증오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누군데 저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십니까 ? 나는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겠습니다"라는 식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아셔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기간은 전부 다 평가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여기서 뭘 하든지 그것은 그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 평가될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주어진 단 한 번 밖에 없는 시간을 죽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의미하게 한평생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죽어있는 상태에서 다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시고, 그분은 자기 목숨을 담보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지난 주의 설교 요점이 뭐냐? 사도행전 16:31절의 말씀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에베소서의 성경본문에는 그 구원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 구원이 어디로부터 왔느냐? 우리가 잘나서냐? 우리가 제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구원이 온거냐?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 그 믿음 하나보고 구원을 얻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는데도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노파심에서 한 번 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선한 일을 많이 해서, 헌금을 많이 내서, 교회에 많이 봉사한 것 때문에, 어떤 그런 행위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오직 우리의 구원은 위로부터 받은 선물로서 감격할 뿐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일단 구원 받았으니, 천국은 따논 당상이니까 이땅에서 적당히 즐기며 살까요? 한 번 주신 구원은 물리는 하나님이 아니시니까, 그걸 계산해서 적당히 살까요? 백신을 맞았으니 절대로 병에 걸릴 위험은 없을까요? 여러분! 신학적으로는 좀 문제가 있겠지만, 우리가 제대로 살지 않으면 우리의 구원은 취소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사셔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한 일을 놓고 평가받을 때, 우리는 어쩌면 너무 부끄러워서 우리 스스로 구원을 반납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금을 잘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 수 있을까요? 문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사람이 원하는 삶은 서로 상충된다는 겁니다. 서로 부딪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정받기 원하고, 쾌락적으로 살기 원합니다. 선과 악의 개념이 없이 내게 좋은 것은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남에게 사랑받고 싶고 존경받기 원합니다. 안락하게 살기 원합니다. 남이야 어떻든 일단 내가 편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그게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한 쪽도 포기할 수 없으니까 양쪽을 다 걸쳐놓고 사는 겁니다. 즉 우리 편리대로 살다가 아주 위급한 순간이 오면 하나님이 등장해 주기 바라는 겁니다. 해결사처럼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면 또 다음 위기 때까지 "안녕히!"합니다. 마치 타이어가 터졌을 때, 갈아 끼우는 스페어 타이어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취급합니다. 하나님은 그때 어떠셨을까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은 벌써 오래 전에 우리가 반드시 살아가야 할 삶의 방법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제품을 사게 되면 거기에 반드시 사용설명서가 들어 잇습니다. 우리가 그 제품을 잘 사용하려면 그 사용설명서를 잘 읽어봐야 합니다. 완전 숙지를 해야합니다. 그래야 잘 사용할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위해 사용설명서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거기에 보면 사람이란 제품에 대해서 얼마나 잘 나와 있는지 모릅니다. 한권도 아니고 무려 66권입니다. 그것만 보면 언제나 신제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품이란게 시간이 지나가면 점점 더 헌 게 되는데 사람의 사용설명서는 안 그렇습니다. 살 때보다 점점 더 좋아지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용설명서를 거의 안 봅니다. 고장 날 때만 잠깐잠깐 봅니다. 그리고는 또 처박어 둡니다. 그러니까 물건이 오래 안 가고, 금방 고물이 되고 폐품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빚어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을까요? 그 흙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하신 뜻을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흙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모든 생명은 흙에서 나옵니다. 흙이 양식을 제공합니다. 흙이 없으면 동물, 식물은 물론, 사람도 살 수 없습니다. 바닷속도 흙으로 되어 있습니다. 흙이 없으면 고기조차도 살 수 없습니다. 흙이 없으면 모든 생물 존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봄이 되면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죠. 바로 흙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인간을 흙으로 만드셨느냐? 서로 생명을 나누라는 겁니다. 그 다음, 흙은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품어 줍니다. 만약 흙이 쓰레기를 안 품었다면 지구는 거대한 쓰레기장이 되었을 겁니다. 모두를 다 포용하고, 그 흙 속에서 모두 정화시켜 버립니다. 상대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품어 줍니다. 바로 흙은 사랑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흙으로 만드셨느냐? 사랑하라는 겁니다. 서로 품어 주라는 겁니다. 또 흙은 정직합니다. 흙은 어떤 경우에도 속이지 않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사과나무를 심으면 사과가 달리고, 배나무를 심으면 배가 달립니다. 흙은 심는대로 거두게 해 줍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나게 해 주고 적게 심으면 적게 열립니다. 사람을 흙으로 만드신 이유는 사람은 마땅히, 정직하게 살아야 할 존재라는 겁니다. 다음, 흙은 도구가 되어 줍니다 흙은 불에 안타죠. 그러나 물을 부어서 반죽을 한 뒤에 구으면 단단한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흙은 자기 주장을 안 합니다. 오직 토기장이가 빚는대로 자기를 맡깁니다. 기꺼이 맡깁니다. 그리고 도구된 다음에는 절대로 불만을 터뜨리지 않고, 다른 도구와 비교도 안합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우리를 만드신 뜻은, 도구가 되어 주라는 겁니다. 도구가 되어서 유용하게 쓰여지도록 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고 살아가야 할 모습입니다. 물론 짐승 역시 흙으로 빚어졌습니다. 그런데 같은 흙으로 만들어 진 짐승과 사람의 차이가 뭐냐? 창2:7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생령이 뭡니까? 살아있는 영혼이란 겁니다. 짐승은 이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본능에 의해 삽니다 .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도 이 영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짐승처럼, 오히려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모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아마도 이렇게만 얘기하면 너무 막연할 겁니다.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들도 보면 너무나 유약합니다. 왜 그리 시험에 자주 드는지, 왜 그리 자주 쓰러지는지 그 이유가 있습니다. 총론에만 강했지 각론에 약합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것만 알았지 어떻게 하면 더 성화의 단계로 갈 수 있느냐는 대안이 없습니다. 이제는 각론으로 승부를 낼 때입니다. 더 이상 미루시지 말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수도 없이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끝에는 "만약 예수님이 하신 일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 전체라도 그 기록한 책을 두기가 부족할 정도"라고까지 요한사도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은 분명합니다. 공생애 전, 30세까지는 가정에 충실하셨습니다. 공생애 3년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하나님과 남을 위해 사셨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는 이 땅에 유일하게 남겨두신 것이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우리는 가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과 남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셋째,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살지 못하면 이 땅에서 여러분은 절대로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이 방법 외에 하나님이 어떻게 살라고 가르쳐 주신 게 없습니다. 먼저 여러분의 가정을 지상의 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가족을 하나의 정신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모두 예수 믿게 해야 합니다. 예수의 생각으로 차게 하고, 인생 전체를 예수로 각주 달도록 해야 합니다. 가족들을 위해 수고하고, 하나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비단 가장의 일만이 아닙니다. 자녀라도 가정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 갈등이 있으신 분들은 오늘 해가 넘어가기 전에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가족과 떨어져 계신 분들, 행복할 수 있도록 고백해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위인일지라도 할 수 있는데도 가정을 등한히 했던 사람은 헛된 삶입니다. 가정을 지상 천국으로 만드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첫 번째 모습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렇게 재물이 많았어도 평생, 가정에서의 행복은 없었습니다. 패륜아가 생기고, 살인자가 생기고, 유괴된 자가 생겼고 강간당한 딸이 생겼습니다. 가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챙기지 못하고 못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받으려고 그만 노력하세요. 여러분의 은혜가 지금도 충분합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드릴 때입니다. 하나님도 여러분의 사랑을 받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때문에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해결사 노릇하시기 싫어하십니다. 이용당하기 싫어하십니다. 여러분 ! 행복해지고 싶으십니까? 이웃에게 베풀어 보세요. 세상에 많은 기쁨이 있지만 남을 기쁘게 하는 데서 오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능력을 주신 것은 베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능력이 있는데도 자기만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도로 다 하나님께서 회수해 가실 것입니다. 미국은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 나라입니다.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더 겸손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이웃을 돌봐 주어야 합니다. 비행기를 납치해서 빌딩으로 충돌하기까지, 죽음을 풀같이 여기고 뛰어들지 않으면 안됐을 그 이유를 미국은 알아야 합니다. 이웃의 눈물을 닦는 것 없이 보복을 한 번 하라고 해 보십시오. 이제는 시저스 타워나 백악관이 폭발할 겁니다. 공중의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수많은 인명을 희생하시면서까지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경고를 미국은 깨달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교회를 중심으로 사셔야 합니다. 교회는 아버지의 집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이 더 부흥하시기를 원합니다.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십시오. 예배를 잘 드리시기 바랍니다. 모임에 한 번이라도 더 오시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내가 할 일은 없나 한 번 살펴보십시오. 주님은 오늘도 "지나가는 자여 !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가? "물으십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머리되신 교회를 그저 지나가는 존재로 여긴다면 하나님도 여러분을 지나갈 것입니다. 새벽기도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속회도 자진해서 모이시기 바랍니다. 성경공부를 개설하면 모이시기 바랍니다. 다 안다는 자세는 이제 그만 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동안 막연한 총론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각론으로 승부를 거십시오. 기도, 성경읽기, 성경공부, 교회봉사, 모두 다 구체적 계획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좀 더 섬세하게 신앙생활 하십시오. 두루뭉실한 교회생활은 이제 그만 하시기 바랍니다. 일주일에 한 번도 새벽기도 못 오실 만큼 바쁘고 힘드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을 돕고 있습니까 ? 여러분이 신앙인이 되도록 여러분 스스로 돕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도 만족할 만큼, 그런 신앙생활 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마도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혹시 그렇게 신앙생활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러분의 의지박약이나 게으름 때문이라고는 생각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오늘 여러분께 이렇게 호소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이 세상에 나같은 사람은 나 밖에 없는 유일한 작품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시는 비교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그 작품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은 또 우리의 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빚으실 수 있도록 내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윤곽이 뚜렷하고 예술성이 있는 그런 작품이 될 때까지 참아야 합니다.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이 정말 자랑하시는 걸작품으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작품의 완성을 위해서, 떼어내시고, 짓이기시고, 갖다 붙이는 하나님의 손길을 고통이 아니라 기쁨으로 기다리는 참 흙이 되십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만드신 작품으로서 손색없이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계속 만들어 가시는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어가실 때 우리가 더 낳은 하나님의 작품이 되기 위해서 인내하고 수고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 주옵소서. 우리가 보다 구체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예수를 바라보자2001년 9월9일 성경 히12:2-3 제목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최근 우리 기독교 신앙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 약10회에 걸쳐서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기를 원해서 지난 주부터 그 일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에는 첫 번 째 시간으로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제목은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하는 제목이었지만 그 내용은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서 "예수님은 누구신가?"하는 내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연주자들이 제일 연주하기 힘들어하고 싫어하는 곡이 뭐냐하면 잘 알려진 곡입니다. 모두 다 아니까 어디가 틀렸는지 금방 들통이 납니다. 그래서 연주자들이 레퍼터리를 선정할 때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곡'이라는 겁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 성도들이 잘 아는 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오늘말씀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누구신가?" 하는 말씀인데 이걸 모르는 분들은 아무도 없읍니다. 아마도 여러분들 중엔 "오늘도 또 그 얘긴가?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얘기를 하려면 제일 먼저 나와야 되는 얘기가 죄의 문제인데 누구든 죄의 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 예수님을 말씀드리려면 그분이 왜 이 땅에 오시지 않으면 않되었는가? 그리고 왜 그 처참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나가 나와야 되는데, 이미 우리가 너무나 익히 잘 아는 얘기 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의 신앙은 성장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바다에 나가면 누구나 바다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를 바라본다고 우리가 바다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바다를 알려면 배를 타고 바다 한 가운데로 가봐야 합니다. 그래서 거기서 사나운 파도와 폭풍우를 겪어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바다를 조금이라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만약 잘 알지도 못하고 실제 경험도 못해 본 바다가 계속 나온다면 우리는 그 바다가 지겨울 것입니다 . 우리가 예수를 체험하지 않고 예수를 믿게 된다면 예수는 지겨운 예수가 될 것이요 부담스러운 예수가 될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은 점점 멀어져만 가는 예수님이 될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깊이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생각을 우리는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시간 다시 한 번 예수를 체험하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몇 달 전 대도(大盜) 조세형씨가 일본에서 도둑질을 하다가 잡혔습니다. 그분은 오랫동안 감호소에 있었는데 출감할 때는 아주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인정 했습니다. 그래서 간증집회도 하러 다니고 믿음좋은 여성이랑 결혼도 했습니다. 아주 정상적인,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도둑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 또 도둑질을 하다가 잡힌 것입니다. 죄의 뿌리는 우리생각보다 훨씬 더 깊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릴 때 하나님은 결코 두려운 하나님이나 무서운, 겁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모성애를 가지시고 희생적으로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같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 항상 문제가 되는 게 있었습니다. 인간의 죄였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은 죄를 집니다. 일단 죄를 짓게 되면 사람들은 양심 때문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제사였습니다. 레위기는 전체가 제사를 어떻게 드릴 것인가 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제사장에게 예물을 가지고 가서 제사를 드리면 그 죄가 사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제도에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제사장에게 가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예물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 수고가 얼마나 힘겨운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제사는 완전한 제사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그 제물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항상 짐승이나 곡식으로 예물을 드립니다 .완전한 제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제사를 집례하는 사람도 죄를 가지고 있는 제사장입니다. 무릇 제사라는 것은 죄 없는 제사장이, 죄없는 사람을 제물로, 한번 드려야 완전한 제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영원한 제사가 될 수 있는 겁니다. 피흘림이 있어야만 죄사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그 영원하고도 완전한 제사를 드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과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요.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다 아시는 얘깁니까? 어떤 나라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여느 왕과 같았습니다. 모든 신하들이 그 권위 앞에 무릎꿇었고 그 누구도 감히 왕에게 함부로 말을 걸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자기의 정적들을 숙청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몰래 백성들의 사는 모습을 보러 나갔다가 한 비천한 여종을 보고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 날부터 왕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사랑을 고백할까? 그런데 왕이라는 신분이 그 왕을 꼼짝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여종을 궁전으로 데리고 와서 왕관을 씌우고, 왕비 옷을 입힌다면, 어떻게 될까? 그 여종은 이런 제의를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감히 왕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할테니까요. 그러나 왕이 생각합니다 . 그렇게 된다고 해서 그 여종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게 될까? 물론 여종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겠지. 그러나 정말 나를 마음속 깊이 사랑할 수 있을까? 왕은 또 생각합니다 그 여종이 사는 오두막집에 내 부하들을 데리고 화려하게 행차해볼까? 아니야! 그렇게 되면 오히려 겁을 집어먹을 거야. 지금 왕이 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겁에 질린 하인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왕이 원하는 건 종속관계가 아닙니다. 대등한 사랑입니다. 너와 나의 관계를 원하는 것입니다. 왕은 사랑하는 여인을 원합니다. 왕은 여종이 자기가 왕인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도 그 여종이 종인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사랑하기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왕은 그 여종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왕비로 만드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결국 그 왕은 오랜 생각 끝에 결단을 내렸습니다. 왕은 거지 옷을 입고 그 여종이 있는 동네로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단순한 변장이 아니었습니다. 그 거지 옷은 왕의 새로운 신분이었습니다 왕은 그 여종의 사랑을 얻기 위해 왕의 자리를 포기한 겁니다. 이 비유는 키에르케고르의 비유입니다. 그는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고 싶었던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서 2:6-8의 말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하늘의 왕좌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제사장이 되시고, 제물이 되셔서 단 한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 제사는 완전한 제물과 완전한 제사장에 의해 드려진 완전한 제사였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은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고백하면 죄는 다 사해졌습니다. 왕은 더 이상 겁먹을 대상이 아닙니다. 여느 사람과 똑같은 모습의 남자입니다. 신분이 천한 여종과 결혼한 평범한 사람입니다. 왕은 왕의 자리를 버렸지만 사랑을 얻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왕에게 기쁨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여종에게 사랑받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기도 하지만 또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왔을 때,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있은 후 400년 동안, 이 땅엔 어떤 하나님의 사자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등장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습니다. 오신다던 메시야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곧 예수님에 대해서 실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군중들이 원했던 것은 뭐였냐하면, 이스라엘의 깃발과 군대였습니다. 솔로몬 시대의 영화를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 상아와 황금으로 가득 찬 역사의 황금기,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군중들은 기적을 원했습니다. 즉 보이는 왕국을 원했습니다. 권능과, 영광의 왕국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의 왕국을 말씀하셨고, 보이지 않는 천국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분명히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된 사역은 뭐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말씀하시기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했으리라.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나라를 위해 오셨습니다. 없어질 제국을 위해 오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히 있을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들어오기를 소망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이 세상과 같지 않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찬 나라입니다. 영원한 나라입니다. 우리의 본향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지금 잠깐 동안의 괴로움은 그분의 이름으로 간단히 물리치라는 겁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도, 천국에 호적이 있는 천국신분으로 살아간다면, 땅을 기업으로 주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전제가 뭐냐? 예수 이름으로. 오직 예수 이름으로. 그분을 나의 구주로 인정하고 시인하고 믿기만 하면, 당신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빨리 여러 곳에 알리라고 하는 게 예수님의 메씨지였습니다. 그분은 자기의 생각 전하는 방법을 쓰심에 있어서도 강하고 급한 방법을 쓰시지 않으셨 습니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느린 방법으로 할 일을 하셨고 도울 사람을 도우셨습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건 강압적 순종을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예루살렘이나, 로마나, 그 외에 어떤 세상의 권세들을 무너뜨리시면서 쟁취하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무너뜨리지 않으시면서, 인간이 되시고, 사랑하시고, 죽으시기까지 하는, 아주 힘들고 어렵고 느린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바로 내면으로부터의 정복을 시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몰랐던 겁니다. 그러면서 한편에서는 아직도 "왜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놔두십니까? 왜 아직도 침묵일관하 십니까?"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사람들은 그 옛날 바벨탑을 쌓았듯이 하나님께 대항할겁니다. 그들의 태도는 수치심이 아닌, 호전적인 태도로 이렇게 얘기할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지?" "그분이 우리 고통에 대해 뭘 알아?"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재판정에 세울 것입니다 그 중에 어떤 여인은 나치 수용소에서 받은 문신 죄수번호를 보여주면서 "우리는 테러와 구타와 고문과 죽음의 위협을 견뎠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뭘 하셨나요?" 그렇게 얘기할 겁니다. 어떤 흑인 남자는 그의 옷 칼라를 젖히면서, 밧줄 때문에 생긴 추한 상처를 보여주면서 말 할 겁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데 다만 흑인이라는 이유때문에 매를 맞았습니다. 노예선에서 숨이 막혀 질식했고,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지는 고통을 겪었고, 죽음이 안식을 줄 때까지 일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이렇게 외칠 지도 모릅니다. 어떤 백인은 다 쪼그라진 육체를 보여 주면서 또 말할 겁니다 "나는 시베리아의 모진 추위 속에서 30년을 살았습니다. 그 추위와 외로움과 배고픔은 죽음보다 더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어디서 뭘 하셨습니까?" 그러면서 그들은 모두 모여 결론 내릴 겁니다. "친절과 광채만 있고, 애통이나 두려움, 굶주림, 증오가 없는 천국에 사는 것이 하나님께는 얼마나 행운일까? 정말로 하나님이란 분은 이 세상에서 운명적으로 겪어야 되는 것에 대해서 알고나 계실까? 그래 결국 하나님은 아주 보호된 삶을 살고 계시는거야. 저 천국에서" 그러면서 그들은 가장 극심한 고통을 받은 사람들만 뽑아서 지도자를 세울 겁니다. 그들 중에는 유태인, 흑인, 인도의 최하층 천민, 사생아, 히로시마에서 온 사람과 시베리아에서 온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피고로 세우고 배심원과 재판장을 선임하고는 자신들의 고통을 낱낱이 얘기할 겁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말입니다. 곧 판결이 날 겁니다. 그 판결은 무슨 내용이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되서 이 지구상에 살아야 한다" 쾅 쾅 쾅! 이렇게 될겁니다. 덧붙여서 그 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 조항을 부칠 것입니다. "피고는 자신을 돕기 위해 신적인 능력을 쓸 수 없다. 그는 민족중 가장 괴롬이 많은 유태인으로 태어나게 한다. 그리고 그의 출생의 적법성이 의심되도록 한다. 그래야 누가 정말로 그의 아버지인지 아무 도 모를 것이다. 또한, 그로 하여금 급진적으로 어떤 한 가지 사건에 대해 최고가 되게 해서 그로 인하여 미움과 정죄를 받게 하자. 또 전통적이고도 굳게 확립된 종교권위를 무시하게 해서 그들을 몰락시키자. 또 그로 하여금 아무도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고, 냄새맡은 적도 없는 것을 설명하도 록 하자. 또 그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말하게 하자. 그로 하여금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들로부터 배반당하도록 하자 거짓 고발로 해를 받아서 편견에 사로잡힌 배심원 앞에서 재판받고 또 겁많은 판사에게 선고하도록 하자. 모든 살아있는 것들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게 하자. 그래서 철저히 혼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자. 그로 하여금 고문받고 강도들과 함께 죽는 가장 치욕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하자....." 이상은 다 꾸며낸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각자 그 선고에 해당하는 자기부분을 낭독한 후에는 긴 침묵이 흘렀을 겁니 다. 아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그들 모두는, 하나님이 이미 그 선고를 받고 그 형기를 마치셨음을 알겠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른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분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셨으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죄책감에 끌려 다니시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를 바라보세요. 그분의 십자가는 이미 우리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못 믿으시겠습니까? 예수를 바라보세요. 갈보리로 달려가세요. 거기에는 세상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 사랑이 넘치고 있습니다. 고독하신 분이 계십니까? 예수를 바라보십시요. 그분은 우리의 고독을 이해하십니다. 자기도 그랬으니까요. 그분께로 가면 고독은 즐거움으로 변하고야 말 것입니다. 아직도 혼자만이 겪는 아픔이 있습니까? 예수를 바라 보세요. 그분 역시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그분에게로 가면 그분이 여러분의 아픔을 다 품어주십니 다. 예수를 바라보면, 거기에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면, 거기에 인생의 참 의미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그분을 바라볼때야 비로소 인생의 목적이 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아픔과 질고와 슬픔을 다 짊어지신 분, 그리고 참 기쁨과 소망을 선사하실 분, 우리 와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실 분,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친히 우리를 위해 기도 하시는 분,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런 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 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 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 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 아버지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는 하지만 체험이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하시고 더 깊이 만나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세상을 넉넉히 이길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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