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이야기
잦은 테러로 입국심사가 한층 더 까다로워졌다는 미국 덜레스국제공항의 입국심사관과 내가 나눈 대화는 염려했던 것 보다는 단순했다.
페어팍스에 누가 사느냐기에 “my daughter"
언제까지 머물 예정이냐는 질문에는 “about one month"
몇 번째 방문이냐는 물음에는 “first"
왜 왔냐고 묻기에 “travel"
그것이 전부였다. 거두절미, 요령부득인 답변이었지만 심사관은 웃으면서 도장을 찍어주었다. 여권을 돌려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Thank you very much"하며 황송해했지만 나는 우리말로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달포 남짓 미국을 여행하는 동안 추가로 사용한 단어는 “Excuse me" "hi" "yes"
"sorry" 등등,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크게 불편한 점은 느끼지 못했다. 미국인들과 전문적인 대화를 나눌 일도 없었거니와 딸과 사위라는 든든한 통역관을 항시 대동하고 다닌 까닭이었다.
딸네 집 앞에서 “에코 탱크 트레일”이 시작된다. 끝에서 끝까지 걷는 시간만 해도 네다섯 시간이 소요되는 그 숲은 “메아리”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울창했다.
우리는 여행 일정이 잡혀 있지 않은 날이면 으레 숲을 산책했다. 숲속에는 좁은 오솔길이 이리 구불 저리 구불 한없이 뻗어나가고 시냇물 소리와 새소리, 바람소리가 산책객들의 마음을 씻어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담소하며 걷는 아낙들, 젊은 연인들, 까불며 뛰는 아이들이 산책로의 주인공이다. 숲이 주는 청량한 기운 탓일까.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도 편안하다. 그래서일까.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하이”하고 곧잘 인사를 나눈다. 자주 걷다보니 아는 얼굴도 생겼다. 그때부터 나는 작은 실험을 시작했다.
“hi"를 반갑습니다”로, “Excuse me"는 “실례합니다”로 바꾸었다. “Thank you" 대신 “고맙습니다”, 또 “sorry"는 "미안합니다"로 인사했다. 그런데 그것이 통했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반갑습니다“ 인사하면 그들은 웃으면서 ”hi" 하고 대답했으니까.
링컨기념관을 둘러보고 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였다. 탑승객은 우리 가족과 유모차를 밀고 있는 젊은 인도인 부부뿐이었다. 문이 열리자 애기엄마가 날더러 먼저 내리란다. 나는 손으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먼저내리세요” 물론 우리말이다. 그랬더니 그 부인 “댕큐”하며 먼저 나간다.
부드러운 음성과 웃는 얼굴, 그리고 미안해하는 표정과 약간의 손짓 발짓만으로도 그들은 내 말의 뜻을 감지하는 것이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단어를 조금 더 익힌 뒤, 단어를 조합하여 문장을 만드는 요령만 터득한다면 미국에 살아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길 정도였으니까.
요즘 영어 열풍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영어 못하면 등신 취급이라도 받는 것처럼 이 땅의 부모들은 자녀의 영어교육에 매달리고 있다. 기저귀를 찬 꼬맹이에게도 영어 단어를 노래하듯이 들려주고 유아원에만 들어가도 영어수업이 빠지지 않는다.
그것도 부족하여 방학만 되면 미국으로 영국으로 또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보낸다. 그들은 짧은 연수기간만으로는 얻을 게 별로 없다는 경험자들의 고백도 못들은 척 한다. 그게 자식사랑인 줄 안다. 하기야 돈 많은 사람이 자식 유학 보내는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가난한 사람이 빚까지 내어가며 따라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미국에서 언어학을 연구하고 있는 딸의 지론에 의하면, 정말 영어에 능통한 인재로 키우고 싶다면 어릴 적부터 영어권 국가에서 살아야 한단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한국에서라도 제대로 배우게 하란다. 그리고 이만하면 되었다 싶을 때 유학을 보내라고 권한다. 어중간할 때 와서 어중되게 공부하는 것은 그야말로 낭비라는 것이다.
장자(莊子)의 ‘추수’ 편에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연나라’의 시골마을 ‘수릉’에 사는 사내아이를 ‘조나라’의 ‘한단’으로 보냈단다. 당시 한단에서 유행하는 멋진 걸음걸이를 배워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조나라의 걸음걸이조차 익숙해지기 전에 한단으로 떠난 그 아이는 예전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린 채 엉금엉금 기어서 돌아왔단다.
어디 걸음걸이만 그럴까. 공부도 마찬가지다. 유학만 보내면 영어도사가 되고 영어만 잘하면 출셋길이 열릴 것이라고 믿는 이 땅의 어버이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어를 등한시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몸이 부실한 아이에게 필수영양분을 챙겨 먹이듯이, 영어도 자녀들의 전공과 희망에 따라 필요한 만큼 맞춤식으로 가르치면 어떨까. ‘맞춤’이란 유기그릇이나 옷을 만드는 데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배움에도 적용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