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꽃 인생
누렇게 물들기 시작하는 보리밭.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농가. 모심기를 위하여 물을 가두어놓은 논. 푸른 들과 맑은 시냇물.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일본 규슈의 전원풍경은 우리나라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대지(大地), 그 깊은 뱃속에서는 부글부글 끓는 용암과 불기둥이 종횡무진 굴러다니고 있어 언제 어디로 분출될지 모르는 불안한 땅이 일본이고, 괭이로 쿡 찍기만 해도 온천수가 솟아오를 만큼 온천이 흔한 곳이 규수다. 때문에 규수 여행을 온천여행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온천휴양지 유후인에 잠시 들린다. 냉천과 온천이 같이 흘러든다는 긴린코호수 주변은, 있는 그대로의 환경을 보전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전통을 지키며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서란다. 그래선지 그 흔한 아파트 한 채, 요상하게 지은 모텔하나 보이지 않는다.
푸른 잎이 돋아난 생나무가 울타리를 대신하고 있는 옛 구조 그대로의 이층집들, 작은 고기가 헤엄치고 있는 맑은 시냇물, 그리 넓지 않은 호수 위에는 오리 떼가 한가롭게 유영하고 있다. 그러나 황혼 무렵의 긴린코 호수는 수천마리의 비단잉어가 물 위로 뛰어올라 호수 전체가 금빛으로 반짝인단다.
자연 그대로의 풍광, 그 속에서 온천과 휴식을 즐기려는 여행객들로 유후인은 늘 북적거린다. 나그네는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옛 마을을 둘러보며 개발만이 능사가 아님을 새삼 느낀다. 우리나라 같으면 산을 깎고 논을 메운 자리마다 호텔이나 콘도부터 먼저 들어서지 않았을까.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뱃부의 온천 탐방에 앞서 묘반의 유노하나(유황)재배지부터 방문한다. 차에서 내리자 계란 먹고 뀐 방귀냄새처럼 구리터분한 냄새가 우리를 영접하고, 돌항아리에서 넘쳐흐르는 온천수가 일단 손이나 넣어보라고 유혹한다.
시배단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자락 여기저기에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모두가 온천공에서 내뿜는 증기란다. 이곳 사람들은 짚으로 만든 움막 속에 그 증기를 가두어 유황을 생산한 뒤, 각종 약품과 건강식품을 만들어 수익을 올린다.
묘반 온천을 떠나 간나와 온천지구로 들어간다. 여덟 가지 주제로 나누어져 있는 간나와는, 한 울타리 안에서 솟구치는 9개의 온천 모두가 색깔이 다르고 성분이 다르단다. 요란하게 치솟는 온천수와 하얀 증기가 어우러진 풍경이 마치 지옥 같다고 해서 이곳 온천은 귀신산지옥, 스님지옥, 용암지옥, 백야지옥 등등, 모두 지옥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샤머니즘이 규슈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시절, 온천지역은 신의 저주를 받은 땅이었다. 그들은 배교자와 범죄자, 심지어는 선교사들까지 뜨거운 온천물에 빠트려 삶아 죽였단다. 그쯤 되면 지옥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지옥 아닌가. 그래서일까. 다 자랐을 때는 잎의 지름이 1m를 넘어 아이들이 올라앉아도 가라앉지 않는다는 연꽃 이름도 대귀련(大鬼蓮)이다. 그러나 지옥의 공포는 옛 이야기일 뿐, 지금은 수백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지옥을 순례하기 위해 찾아오고, 뱃부 사람들은 지옥을 팔아서 생활하고 있다.
호텔 방을 배정받은 후, 온천욕을 즐기려 갈 때 가이드가 부탁했다. 다른 건 다 그만두더라도 목욕문화만큼은 일본 풍습에 따라달라는 것이다. 즉 목욕을 하면서 때는 벗기지 말라는 요청이다. 일본 사람들이 보면 질색을 한단다. 우습다. 몸에 낀 때를 벗겨내면서 마음까지 씻는 게 목욕 아닌가.
가이드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목욕탕에 들어갔을 때 우리를 맞은 것은 ‘매너를 지키는 즐거운 목욕’이라는 한글로 쓴 안내문이었다. 하지만 이건 손님을 맞는 태도가 아니다. 자존심이 상한 우리는 여봐란 듯이 때를 빡빡 밀었다.
일단의 학자들은 오늘의 시대상을 일컬어, 남존여비에서 남녀평등의 시대를 지나 여성상위시대에 들어섰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여행 중 꼭 먹어봐야 한다는 특식의 선택, 일정에 없는 여행지를 추가로 둘러본다거나 면세점에서 선물을 구매할 때 주도권을 잡는 것은 언제나 부인들이었다. 부풀려 말하자면 아내는 안방마님이고 남편은 마당쇠로 전락한 느낌을 받는다. 그 이론을 피부로 느낀 것은 노천탕에서였다.
목욕탕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가면 노천탕이 있다. 별만 반짝이고 있는 어두운 밤이지만 조명등조차 없다. 하는 수 없이 별빛을 빌려 탕 속으로 들어간다. 검푸른 물이 물뱀이라도 헤엄쳐 다닐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노천탕 둘레를 장식한 조경석에 부딪쳐가며 손과 발로 더듬어 겨우 자리를 찾은 남자들은 엉덩이를 물속에 집어넣은 채 별만 반짝거리고 있는 하늘만 본다. 조금 떨어진 여성용 노천탕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아마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쪽 노천탕의 분위기는 남탕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은은한 조명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노천탕에는, 갓 딴 것처럼 향기로운 수백송이의 붉은 장미를 물 위에 띄어 놓았더란다. 우리가 들은 환호성은 환상적인 분위기에 감동한 여인들이 지른 탄성이었다. 아마 호텔 경영진에서도, 떠난 손님이 다시 돌아오게 하는 비법은 남편보다는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점을 터득한 모양이다.
어디 그뿐이랴, 당당하기는 일본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탈의실 문이 열리더니 호텔 여종업원이 들어왔다. 깜짝 놀라 아랫도리를 가리느라 수선을 떠는 한국 아저씨들과는 달리 그 여인, 벌거벗은 남자 사이를 유유히 돌아다니면서 제 할일 다하고 나간다.
그랬다. 이번 규슈여행의 특징은 장미들의 잔치였다. 여성들이 향기 그윽한 붉은 장미라면 남자들은 오래된 다다미같이 찌든 냄새만 풍기는 시든 장미였다. 그래서일까. 시원찮은 우리 사내들, 어느 전직 대통령의 탄식처럼 “우째 이런 일이”하고 한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