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와 삼국시기의 중요서가에 관한 원고
본 원고는 월간서예에 연재한 내용을 보내 드리는 것입니다. 혹여 서예사등 아래 내용과 같은 것을 알고자 한다면 월간서예를 참조 하시면 도움이 되실런지.... 열심히 하세요
옛날옛적에/8 杜操와章草
松民 李周炯(경기대학교 미술학부 강사)
지금으로부터 1900여년전, 경조(京兆) 두릉(杜陵)(지금의 섬서성 서안동남)에는 날이 어둑어둑하여 조금 있으면 사방의 사람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인데 장안(長安) 동쪽 강가에서는 한 어린아이가 한 손에는 장대를 들고, 또 한 손에는 빈 통을 잡고는 땅 바닥에서 무언가 열심히 찾고 있었다. 그리고는 얼마 안되어 찾던 것을 발견했는지 호주머니에서 집게를 꺼내서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재빨리 잡아서 그가 가지고 온 통 속에 넣고는 뚜껑을 단단히 덮어 가지고 사라졌다. 그는 소년 두조(杜操)였다. 두조는 동한(東漢)초 장제(章帝)(76-88)때의 사람인데 서예가이다. 그의 생졸년도는 자세히 알 수가 없고 건초(建初)중에는 그의 글씨가 세상에 알려지자 장제는 그를 중용 하였으며 조정의 글씨는 모두 그가 썼다고 한다. 후에 그의 이름이 위(魏)나라 무제(武帝) 조조(曹操)의 이름과 같다고 해서 “도(度)”로 이름을 바꾸어서 사람들은 두도(杜度)라고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곧잘 곤충들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전갈(蝎)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였다. 전갈은 앞쪽에 가재나 게와 같이 집게발이 있고 몸의 양쪽에는 대(對)를 이루며 세 개의 발이 있으며 꼬리는 매우 길다. 꼬리에는 독침이 있어 조심하지 않으면 쏘일 수가 있다. 그 독침으로 사냥을 하는데 만약 곤충이 그에게 쏘이면 그 자리에서 기절하여 죽게 된다. 이 전갈은 주로 중원대지의 강가에서 주로 사는데 오래된 토담 아래를 손전등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아마 거미를 잡아 갉아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이것은 사람들이 한약재로도 아주 귀하게 쓰인다고 한다. 아무튼 두조는 이렇게 무시무시한 곤충을 가지고 노는 이유가 무얼까? 하루는 두조가 전갈을 통속에 넣고는 긴 나뭇가지를 가지고 건드려 약을 올리면서 놀다가 대단한 것을 발견했다. 전갈은 자신의 몸을 건들면 재빨리 꼬리에 온몸의 힘을 보내 독침을 적에게 쏘게 되는데 그때는 아무리 큰 적이라도 불굴의 정신으로 대항한다. 독침을 쏘기 위해서 꼬리에 힘을 준 모양은 마치 성난 파도와 같았고 제비가 먹이를 발견하고 비행하기 직전 긴장하면서 꽁지깃을 바짝 세운(연미(燕尾)) 형상 같기도 하였다. 어디에서인가 본 듯 하였다. 두조는 곰곰이 생각 해 보자 글씨에 그러한 형상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장초(章草) 책(磔)의 형상이었다. 이 때만 해도 진나라 때 이사가 정리한 소전 체가 주로 쓰이고 또 한편으로는 정막이 정리했다고 하는 예서가 주로 쓰였기 때문에 아직은 전형적인 팔분 예서가 정착되지 않았을 때이다. 동시에 또 죽간이나 목간에서는 일의 급급함과 문서의 사용이 늘어나 획과 획을 연결하고 생략하면서 생긴 장초가 이미 유행되기 시작했었고 두조는 파책이 있는 이 장초를 매우 좋아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동한 시기에는 일대 장초의 붐이 일게 되었다. 바로 두조는 그 전갈의 형상에서 영감을 얻어 더욱 힘찬 갈미(蝎尾)의 장초체를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장초(章草)에 대해서는 꼭 알고 넘어 가야 할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사유(史游)이다. 사유는 서한(西漢)시기의 원제(元帝)(B. C33-49)때 사람인데 두조보다는 대략 80-100여년전 앞의 사람이고 서한시기의 손꼽히는 서예가이다. 장초는 또 다른 이름으로 “급취장(急就章)”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서한시기 예서의 보조 서체이면서 일상의 사용범위가 넓어지게 되었다. 이 장초는 자못 사람들이 자주 쓰는 서예 중에서 사랑 받는 한 떨기의 꽃과 같았다. 당대의 서예가 우세남은 “사유(史游)가 급취장을 만들었다”고 하였고 장회관(張懷瓘)도 말하기를 “장초라는 것을 살펴보면 한나라의 황문령(黃門令)인 사유가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도 적잖은 사람들이 사유를 장초의 창시자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정막 이후 예서가 통용된 후 사람들이 서사의 간편함과 신속함으로 인하여 초서는 이미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초서의 출현이 서한초기 이후로 볼 수는 없다. 다만 그 때의 초서는 글자와 글자의 연속성이 없고 필 획이 나뉘어져 있던 것을 원제(元帝)시기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온 것을 사유는 그것을 정리하여 장초의 기본을 정형화시킨 것이다. 사유는 또 이렇게 정리 한 것을 가지고 학동들의 교과서와 같은 “급취편(急就編)”을 만들었는데 그 머릿구에는 “급취”라는 두자가 있어서 “급취”라는 편 명을 쓰게 된 것이며 이것을 “급취장”이라고 한다. 후대에 “장초”라고 불리는 것도 바로 장초의 “장(章)”자를 붙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또 “초서”라고 하는 것은 초창(草創)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이를 합쳐 장초라 불려지게 되었다. 송대의 서예가 황백사(黃伯思)는 “무릇 파책이 있는 것을 장초라 하고 이런 것이 아니면 초서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사유의 급취장의 묵적은 이미 실전되었고 다만 번각본만 전하여 지고 있다. 이 장초는 후에 삼국시기 오나라의 황상(黃象)이 “급취장”을 임서 하였고, 한대의 두조(도), 최원, 삭정 원대의 조맹부, 명대의 송극, 등이 모두 이 글씨를 잘 썼다.
한대의 초서출현은 마땅히 서예술의 영역에서 일차적인 중요한 돌파라고 말 할 수 있다. 초서의 용필과 결체등의 방면에 있어서는 전서와 예서체에 비교하여 볼 때 다양성과 자유로움은 전예(篆隸)에서의 한자서사의 고정적 격식과 제한을 타파하고 비교적 충분한 표현 서예술과 다양한 미적 요소 등을 많이 가지고 있다. 초서 하면 우선 장초이다. 서한 초에 발전하기 시작하여 동한 초. 중기에 두조와 최원등이 장초의 선봉역할을 하였고, 특히 두조가 장초를 잘 쓰게 됨으로 말미암아 조정내외 에서는 모두 이러한 영향을 모두 받아서 일시에 모든 문장은 모두 장초체로 쓰게 되었다.
두조가 쓴 장초묵적 역시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다만 전대(前代)의 서예가 중에 그의 작품을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인색하지 않다. 당대의 장회관은 <서단(書斷)>에서“ 두조는 장초를 잘 썼다. 비록 사유가 초서를 시작하였지만 전하는 것에 능함이 기재되지 않고 또 그 자취도 끊어졌다. 그 신묘함을 나타냄은 오직 두공(杜公)이 된다.”라고 하였고, 장회관보다 더 진일보하게 서예술의 품격과 성취에 대해서 평한 삼국시기 위나라 서예가 위탄의 말을 들어보면 “두씨는 뛰어난 골력을 가지고 있어서 글자의 필 획은 가늘고 살이 없는데 최씨(瑗)은 이를 법으로 삼고,... 장지(張芝)는 기뻐하면서 이를 배웠다”라고 하였고, 또 “서의 귀함은 수척(瘦瘠)하면서도 굳세어야 바야흐로 신운(神韻)이 있게 된다.”라고 하였다. 고대의 서예가들이 서를 평함에 적잖은 사람들이 “수(瘦)”가 “비(肥)”보다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특별히 강조하는 서예의 작품은 “골력(骨力)”을 요구한다. 동진(東晋)시기 왕희지의 스승이었던 여류서예가 위부인의 <필진도(筆陣圖)>에서도“ 필력이 좋은 사람은 골(骨)이 많고 필력이 없는 사람은 육(肉)이 많다”라고 하였으며 “필력이 좋은 사람이 비로소 훌륭한 서예가가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두조의 서예작품 안에는 바로 뛰어난 골력이 있어서 이러한 모든 조건을 잘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장회관은 그의 작품을 더욱이 “장초신품(章草神品)”으로 분류하여 놓았으며 명대(明代) 항목(項穆)의 <서법아언(書法雅言)>에는 “사유, 이사, 채옹, 두조, 는 모두 서조(書祖)이다.”라고 하였다. 중국사람들이 서예사에서 서조(書祖)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많았는데 두조의 평가에 대해서는 아주 높다. 당대의 위속(韋續)은<묵수(黙藪)>에서 전인(前人)의 말을 인용하여 두조는 “초성(草聖)”이 된다라고 하였다. 두조의 서예가 후대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저명한 장초 서예가 최원과 장지, 황상등의 사람들은 그의 서예작품 중에 보귀(寶貴)한 것을 잘 섭렵하여 스스로 장초 서예술의 고봉에 오르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주로 쓰고있는 금초의 전신은 바로 장초이다. 이러한 장초의 좋은 점을 우리도 다시 한번 섭렵해 봄으로써 법고창신(法古創新)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지 않을까?
옛날옛적에/9 師宜官과 梁鵠의 팔분예서
松民 李周炯(書藝大展招待作家)
지금으로부터 1800여년전, 이 때는 동한 말기로 한나라도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데 영제(靈帝)(168-189)시기에는 외척과 환관들의 전횡에 의하여 정치가 극도로 부패 혼란 되고 일반농민들의 빈곤과 고통은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이 같이 농민들의 불안과 절망 그리고 좌절된 심리는 결국 황건란(黃巾亂)(184)이 일어나게 되었다. 황건란은 중국 문명의 개조라고 불리는 황제(黃帝)와 춘추전국시기에 무위지치(無爲之治)를 주장한 노자(老子)를 신격화한 황노(黃老)신앙을 가진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도(五斗米道)가 주축이 되어 황건(黃巾)을 두르고 관청, 도시와 마을을 약탈하여 전국이 일시에 소란에 빠지게 된 사건을 말한다. 정부는 전국에서 병사를 징발하여 토벌군을 편성하고 특히 전군교위(典軍校尉)인 조조는 황건적 토벌에 공이 컸다. 이로 인해 영제는 그를 대장군으로 임명하였고 조조는 ‘한제국재건’ 이라는 명목으로 주변세력을 평정하기 시작하였는데 가까이 있는 여포 원술 장소를 병합하여 세력을 확장하여 갔다. 한편으로 한의 종실출신이며 탁군(𣵠郡)에서 의병을 일으켜 황건적의 토벌에 공이 컸던 유비는 의형제인 관우 장비와 함께 형주자사였던 유표(劉表)에게 의탁하여 대세를 관망하면서 제갈량을 삼고초려(三顧草廬)끝에 군사로 기용하여 중국은 다시 삼국시대가 이어지게 된다.
중국 남양(지금의 하남성에 속함)의 어느 주막에는 평범한 복장을 한 두 사람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기개가 범속에 뛰어나 보였고 눈빛은 일순에 사방을 꿰뚫는 것이 보통사람은 아니었다. 그중 한 사람은 바로 서예가 사의관이며 원술의 부하장군이었다. 그는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여 령기(靈氣)가 피곤한 모양을 하고는 주모를 불러 한말의 술과 양고기를 시켰다. 주인은 혼자서 한말의 술을 시키는 것이 의아했지만 그리 싫지는 않았다. 술이 앞에 놓이자 달려들더니 한번에 한 되의 술을 벌컥벌컥 마셔버리고는 양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술집은 새로이 단장하여 벽면은 백회를 발라 깔끔하였으며 옆자리에는 둘 셋씩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보아하니 이 술집은 그리 많은 사람들이 머물다 간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미래가 없는 듯 서로 몇 마디 주고받을 뿐 별 말이 없었다.
사의관은 술 한잔 마시고 손바닥에 무언가 열심히 젓가락으로 쓰고 다시 한잔 마시고 또 쓰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대여섯 잔을 마시게 되자 정신이 몽롱해 지면서 피곤했던 령기(靈氣)는 주선(酒船)을 타고 영활(靈活)한 세상으로 옮겨졌다. 한조(漢朝)가 아무리 혼탁 해 졌지만 사의관 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제 사의관은 만족하였으나 집으로 가려면 술값을 내야 되지 않는가? 그러나 그에게는 몇 푼의 돈도 없었다. 사의관은 주인을 불러 필묵(筆墨)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붓에 먹을 훔뻑 찍어 가지고는 벽면에 두어 글자를 쓰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일시에 주막은 꽉 찼고 사람들은 서로 어깨를 비비면서 서로 보려고 발꿈치를 들었다. 다시 한잔을 마시고는 서너 글자를 다시 쓰자 술과 안주가 마구 팔려나갔다. 주인은 신이 났고 일시에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주인은 사의관에게 술값을 면해주었다. 이후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났는데 만약 주인이 술값을 속이거나 대접이 부족하면 붓을 놓고 그냥 일어서 옷을 털고 가버리기도 하며, 어떤 때는 글씨를 써놓고 그것을 감상하는 자에게 돈을 내게 해서 술값 계산하기에 족하면 그것을 지워버렸다고 한다. 사의관은 벽뿐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부(柎)(종이나 북등 기물받침대)를 부숴서 거기에다 글씨를 썼는데 쓰고 지우고 또 쓰면서 사의관은 무전유주를 즐겼다고 한다.
한나라 영제(168-189)는 천하의 명서(名書)자 수백 명을 낙양(洛陽)의 홍도문(鴻都門)(여기에 설립된 학교에서는 오로지 사부(辭賦)와 서화(書畵)를 전문으로 하여 주군(州郡)의 삼공(三公)이 천거한 천여명에서 뽑았음)에서 뽑았다. 그 중에서 사의관의 ‘팔분(八分)’서가 가장 뛰어났다. 이로 인하여 사의관은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이다. 사의관은 일찍이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영제에게 총애를 받았고 원술의 부하장군으로 있었다. 그 후 조조가 황건란 후 주변세력을 평정하면서 조조에게 원술이 패하자 조조에게 있게 되었다. 동한 말 서단에서는 사의관의 서예술은 아주 뛰어난 존재였다. 서진(西晉)의 저명한 서예가 위항(衛恒)의 <사체서세(四體書勢)>에는 “영제는 글씨를 좋아하였고 그때에 능한 사람이 많이 있으나 사의관이 최고가 된다”라고 하였다. 위항이 생활했던 시기는 사의관과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이니 이러한 논단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사의관은 여러 서체를 잘 썼으나 특히 “팔분”서를 가장 잘 썼다. 남조(南朝)의 양(梁)나라 서예가 유견오(庾肩吾)는 찬탄하면서 말하기를 “사의관은 홍도에서 가장 으뜸이 되고 대자(大字)와 소자(小字)에 능하다.”라고 하였다. 또 송대의 진유陳槱<부훤야록負暄野錄>에는 진의 위항이 논한 것을 인용하여 “그 글씨의 대자는 지름이 열자나 되고 세자는 한 개의 터럭을 수용하기 어려워서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면 마음과 눈이 현란해진다.” 라고 하였다. 당시 조조도 사의관의 글씨를 좋아하여 그의 글씨를 장중(帳中)에 걸어놓고 종일토록 감상하면서 싫증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시대에 또한 사의관과 같은 시기의 서예가로써 양곡(梁鵠)을 빼 놓을 수가 없는데 양곡의 자는 맹황(孟皇)이며 안정(安定)(지금의 감숙성 평량시 서북)사람이다. 처음에는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으며 한 영제는 양곡이 사의관과 함께 홍도문하에서 글씨를 공부 한 사람으로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양곡은 사의관의 글씨를 법으로 삼았는데 그의 글씨를 얻고 싶어서 사의관이 술집에 갔다는 소문이 나면 종종 달려가서 부(柎)를 더욱 많이 만들어서 사의관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는 술이 취하기를 기다렸다가 그것을 몰래 훔쳐 가지고 열심히 사의관의 서법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양곡은 후에 형주자사였던 유표(劉表)에게 달아났다가 조조가 유표를 물리치자 양곡은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결박하여 용서를 구하였다. 조조는 양곡의 글씨를 매우 좋아하였으므로 그를 처벌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나중에 양곡의 관직은 선부상서(選部尙書)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위항의 <사체서세>에는 “위무제(조조)는 장중에 못을 박고 걸어놓고서 그것을 감상하였으며 사의관보다 낫다.”고 하였다 후대사람들도 그의 평가에 대하여 인색하지 않다. 이로써 양곡의 글씨가 한, 위 시기에는 많이 있었지만 유구한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은 양곡의 글씨를 볼 수 없다. 당대의 사람들은 <번성표(繁城表)>가 양곡의 글씨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공선비(孔羨碑)>가 양곡이 쓴 것이라고 하는데 청대의 대 서예가 강유위는 두 가지 모두 양곡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일찍이 고증된 <공자묘비(孔子廟碑)>가 사실 양곡의 글씨라고 하였다. <예석(隸釋)>에도 <修孔子廟碑>는 산동에 있는데 삼국시기 조식(曹植)이 글을 짓고 양곡(梁鵠)이 쓴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상으로 살펴 본 것처럼 사의관과 양곡은 한대의 팔분서에 대단히 능하였음은 짐작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한예라고도 하며 팔분서라고 불리는 한대의 예서가 이렇게 아름답게 변화하기까지 글씨의 발전과정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은 관(官)에서 국민들이 통용할 수 있도록 관방(官房)에서 정리하여 왔는데 이를 ‘관방서체(官房書體)라고 하고 또 한가지는 문자가 점차 국민들에게 익숙해지고 서사가 자유로워지면서 민간인들은 자유롭게 글씨를 사용해 왔다. 우리는 그것을 ‘민간서체(民間書體)’라고 부른다. 이렇게 관방과 민간의 창작과 정리를 통하여 새로운 서체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서예사에서 눈 여겨 볼 일이다. 갑골문, 금문, 소전등이 진대에 이르기까지 관방서체로써 유지되어왔고 춘추전국시기에 유행했던 ‘간서(簡書)’는 민간서체로써 사용되어오다가 진대에 이르러 정막이 이것을 정리하고 시황제가 예서를 관방서체로 인정함으로써 한대에 이르러서는 예서가 또 하나의 서체로써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옛날옛적에/10 張芝와今草
松民李周炯(書藝大展招待作家)
서기 150년경 동한 시기의 일이다. 만물이 기지개를 펴면서 대괴(大塊)를 뚫고 소생하려는 봄날, 홍농(弘農)(지금의 河南城 靈寶北)의 장환(張煥)이라는 태상경의 집에는 다듬이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대문 밖에는 회색 장삼을 입은 아이가 양손에 신발을 들고 살금살금 살짝 대문 틈을 살피고는 기둥 옆으로 숨었다가 다시 고개를 쭉 빼고 살펴보고... 아무래도 무언가 엿보는 것이 매우 수상하였다. 한참 동안을 그러다가 양지쪽에 쭈그리고 앉아서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무언가 낙서를 하였다. 보아하니 이 아이의 옷은 흠뻑 젖어있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다듬이 소리가 멈추고 대문이 열렸다. 이 아이는 낙서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다듬이 소리가 멈추고 대문이 열리는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땅바닥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누구냐?”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아이는 깜짝 놀라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소리를 지른 사람도 그 아이 얼굴을 보고 입을 막고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였다. 다름 아닌 그의 아들 장지(張芝)였기 때문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아침에 표백(漂白)을 하여 깨끗하게 갈아입은 옷이 회색 옷으로 변했으니 말이다. 장지의 어머니는 젖은 옷을 입고 있는 아들 장지를 보자 한편으로는 속상했지만 자초지종은 들어가서 듣기로 하고 손을 이끌어 들어갔다. 장지가 집에 들어서자 또 아버지가 문을 열고 대청에서 바라보고 계시는 것 아닌가? 아버지 장환은 짐작하는 듯 싫지 않은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 가면서 부인을 불렀다. “백영(伯英)이를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백영이는 뜻이 있는 아이오. 우선 옷을 좀 갈아 입히시구려.” 백영은 장지의 자(字)이다.
장지의 집 앞에는 연못이 있고 연못가에는 커다란 돌이 하나 있다. 그 옆으로는 봄물이 연못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한참이나 물고에 흘러 들어오는 물을 따라 연못으로 향하다가 연못 속에서 물고기가 자유스럽게 노는 것을 보고는 서법을 생각 해보았다. ‘그래! 저 물고기처럼 좌우로 막힘이 없어야 된다. 그리고 저 흘러 들어오는 물줄기처럼 막힘이 없어야해!’ 장지는 갑자기 글씨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종이가 없지 않는가? 장지는 고개를 숙이고 쪼그려 앉아서 물고기를 희롱하다가 문득 자신이 입고 있는 흰 명주 장삼 옷을 보고는 집으로 달려가 필묵을 가져와 돌 위에 장삼을 깔아 놓고는 써내려 갔다. 원래 장지는 서역(西域)의 주천(酒泉)에 살 때부터 글씨에 관심이 많았고 이러한 장지를 보자 아버지는 하북성의 문장가이며 서예가인 최원(崔瑗)의 글씨를 보여 주었고 장지보다는 80-100여년 앞선 두조(杜操)의 글씨를 구해다 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법으로 하여 공부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장지는 필묵을 꺼내어 양쪽 소매에 빽빽하게 두조와 최원이 잘 썼던 장초(章草)를 써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쓰기를 한참 지나자 집에 돌아가야 할 것 아닌가? 두조는 정신차려 보니 집에 가면 부모님으로부터 혼줄이 날것 같고...... 그래서 얼른 연못에 옷을 담그고는 꺼내서 돌 위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들기고 빨았다. 그러나 이 옷이 깨끗하게 씻어지겠는가? 그래서 회색 옷이 된 것이다.
장지의 어머니는 남편이 시키는 대로 태연하게 그 옷을 뜨거운 물에 삶아 가지고는 다시 표백을 하였다. 이것을 본 장지는 다시 신이 났다. 왜냐하면 글씨를 쓰고 표백하고 표백한 옷에 다시 글씨를 쓰고.... 그 이후로 장지는 매일같이 해가 뜨면 연못가의 돌에다 옷을 펼쳐놓고 글씨를 쓰고, 그 옷을 연못에 또 빨고 집에 와서는 어머니께 드리고 이렇게 하기가 오래되자 연못의 물이 새까맣게 변해 버렸다. 이것이 바로 지수진묵(池水盡墨)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공력을 들여 공부하여 장지는 드디어 두조와 장지의 장초를 더 다듬어 형(形), 기(氣), 운(韻)의 세가지관계의 처리에 있어서 대단히 공교하게 하였다. 앞서 말한 바가 있지만 송대의 서예가 황백사(黃伯思)는“무릇 초서에 파책(波磔)이 있는 것을 장초라하고 이것이 아니면 초서라 한다”라고 한 것처럼 두조와 최원은 파책이 있는 장초를 썼고 장지는 파책이 없는 초서를 썼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 장지가 이렇게 공력을 들여 정리했던 파책이 없는 초서를 “금초(今草)”라고 부른다. 이 금초의 체세는 일필(一筆)로써 이루어지며 우연히 획이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 혈맥은 끊어지지 않으며 다시 이어진 곳에 이르러서는 그 기맥(氣脈)을 통하게 된다.
장지에 대한 기록은 많은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남조의 송대 서예가 양흔(羊欣)은 “장지(張芝), 황상(黃象), 종요(鍾繇), 삭정(索靖)은 당시 ‘초성(草聖)’이라고 하였고, 장지는 굳센 골력과 풍부한 살집이 덕으로 갖추어져 제현(諸賢)의 으뜸이 된다” 라고 하였다. 당대(唐代)의 손과정(孫過庭)은 “대저 예로부터 선서자(善書者)는 한(漢), 위(魏)에 종요와 장지가 절륜(絶倫)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남조의 제나라 서예가 왕승건(王僧虔)은 <우론서(又論書)>에서 “백영(장지)의 필의는 정신을 막다른 곳까지 몰아 생각을 고요하게 하여, 물상에는 묘함이 멀고 (이 묘함은)아득하여 가히 쫓을 수가 없다.” 라고 하였다. 당대의 서예가 장회관(張懷瓘)은 <서의(書議)>에서 “(장지는) 최(원), 두(조)의 법을 배워 그것을 변화시켜 금초를 만들었고 한층 더 절묘하다”라고 하였으며 동진(東晋)의 대 서예가 왕희지(王羲之)는 우러러 탄복하면서 장지에 대하여 이르길 “마음을 기울여 여러 명서자(名書者)를 찾았으나 종(요), 장(지)이 진실로 절륜하다. 그 나머지는 보존하기 부족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금초서체의 출현이 비록 장지 한사람의 공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만 그의 역할은 초서예술 발전중의 큰 돌파가 되었고 비약이었다.
장지가 태어난 주천(酒泉)이라는 곳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실크로드에 있는데 실크로드는 섬서성 서안(西安)에서 출발하여 서역으로가다보면 감숙성 난주(蘭州)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酒泉) 돈황(敦煌)이나온다. 또 돈황을 지나 유원이라는 곳에서 열차를 타고 10시간쯤가면 신강자치구의 투루판(吐魯番)이 나오고 또 버스로 7시간 이상을 달리면 우루무치(烏魯木齊)가 나오면서 유럽으로 통하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이 실크로드이다. 한조(漢朝) 이전부터 중국 서역에서는 이미 잠업(蠶業)이 성행하여 실크(사조)를 제조하여 서역과 무역을 하고 있었다. 한무제 초에는 흉노족 협공을 위하여 월지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장건이 뜻밖에 흉노족에게 억류되어 13년여만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장건은 서역지리가 익숙해 졌고 무제는 자주 장건을 불러 서역의 정세를 물었다. 이로 인하여 실크로드는 장건이 개척한 길 이라고 한다. 또 원수2년 (B.C121)에는 전설적인 대장군 곽거병이 서역정벌에 나서 거연(주천, 장액, 돈황등 10개현)을 넘어 소월지를 지나 기련산을 공격하여 서역은 한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흉노족과의 잦은 전쟁은 계속되었다. 이후 무제는 이 서역개발에 힘써 주천과 무위에 양군을 설치하고 그후 기원전 111년에는 주천의 서쪽으로 돈황군을 설치하고 무위의 서쪽지역에 다시 장액군을 설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나라는 서역에 그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이렇게 한초의 대외 정세는 북방의 이민족과의 잦은 전쟁으로 병부(兵符), 병서(兵書), 병물부(兵物符)등이 봉수대(烽燧臺)및 군영지(軍營地)로 오갔는데 당시 이렇게 오갔던 죽목간서(竹木簡書)는 대단히 많다. 이 돈황지역에서는 1907년 영국의 고고학자가 최초로 봉수유지(烽燧遺址)를 발견하고 죽목간서 700여매를 발견하였다. 또 1990년부터 93년까지는 돈황의 안돈공로(安敦公路) 첨수정도(甛水井道)의 삼위산(三危山)기슭에서는 수 만개의 죽목간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 많은 분량은 지금도 감숙성 고고문물연구소에서 정밀하게 조사중이라 우리는 이 당시의 죽. 목간을 한눈으로 살펴 볼 수 없으며 우리가 지금 볼 수있는 것은 그 중에 일 부분이다.
서예가 장지는 한 무제가 이쪽 서역을 개발한 후 대략 250년 후에 이곳 주천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장지가 서예에 대하여 대단한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이해가 간다. 그후 아버지를 따라 동한 말에 하남성 홍농으로 이사갔는데 사람들은 장지를 홍농인(弘農人)이라고도 하였다. 또 장지는 덕이 많은 사람이라 조정에서는 그를 유도정소(有道征召:덕있는 사람을 불러 임용하는 것)하려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아 사람들은 장유도(張有道)라고도 불렀다.
蔡邕과 熹平石經
옛날옛적에/11 松民 李周炯(韓國書藝學會會員)
1천8백여년전 어느 날, 동도(東都) 낙양(洛陽)의 전국 최고 학부인 태학(太學) 문전(門前)에는 마차가 끊임없이 다니고 사람들은 여느 때와 달리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떠드는 것이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몇몇은 깨끗한 관복차림에 수염을 쓰다듬는 것이 꽤나 관직이 높아 보였다. 보아하니 한쪽에서는 커다란 돌을 세우고 있었고 몇 개는 이미 세워져 있었다. 마차는 돌을 싣고 끊임없이 들어오고 사람들은 분주하게 돌을 내려 땅을 파고 그 돌을 모두 세웠다. 세워놓고 보니 돌이 46개나 되었다. 세워진 돌 뒤에는 사람들이 머리를 들이밀고 서로 밀치면서 눈동자에 힘을 잔뜩 주고 주시하였다. “와- 이게 누구의 글씨인가? 정말 공력(功力)이 심후(深厚)하고 기개(幾個)가 범상치 않다” “또 다른 사람이 있겠는가? 바로 명성이 세상을 덮고 있는 채낭중(蔡郎中)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다름 아닌 “희평석경(熹平石經)”인데 채옹(蔡邕)이 쓴 것이다. 사람들의 탄성은 끊이질 않았고 여기저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태학문전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정교하고 완벽한 글씨를 볼 수 없었으니 그 글씨를 모사(摹寫) 하느라 또한 정신이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장관(壯觀)이었다. 이 때만 해도 문자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러한 서체를 처음 본 사람도 있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아름답게 쓰여진 글씨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본다는 것은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이때는 세속이 흐트러지고 서체가 혼란해져 갔다. 거기에다 글이나 좀 읽었다는 저속한 선비들은 경서(經書)를 나름대로 억지로 끌어다가 해석하여 경서의 내용이 잘못 전해지는 일이 많았다.
채낭중은 바로 채옹이다. 채옹은 박학다재(博學多才)하고 문채(文彩)가 탁월하여 한 영제(靈帝)는 그에게 경서를 바로잡아 천하에 글 읽는 사람들에게 배포 할 통일된 교과서를 만들도록 하였다. 채옹은 황제의 중요한 부탁을 받고 헛되이 할 수 없어, 그의 깊은 학문과 엄숙하고 진지한 태도로 경서가 잘못 전해져 오는 많은 부분을 대담하게 바로잡아 갔다. 이때 채옹의 나이는 채 마흔이 되지 않았을 때이다. 몇 년의 노력 끝에 채옹은 <육경(六經)>을 정리하여 완성하였다. 그러나 당시 종이는 채륜(蔡倫)(?-121)에 의하여 발명이 되어 있었으나 인쇄술이 아직 저조하여 이 수정한 교과서가 전국에 배포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문제였다. 이렇게 되자 채옹은 돌에 새겨 비로 세울 것을 생각하고 영제에게 상소를 올려 허락을 받고 직접 글씨를 써서 석공(石工)을 시켜 새기게 하였다. 그러나 채옹이 이러한 이 일을 주관하였고 당시에 명성이 제일 높아 채옹이 썼다고 전해지는 것이지 모두 쓴 것은 아니고 <공양전>, <논어>등의 끝에는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 여럿 보인다. 이렇게 하여 태학의 문 밖에 이 비를 세운 것인데, 이것은 한(漢) 희평4년(서기175년)에 채옹이 주관하고 아울러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 당계전(堂谿典), 광록대부(光祿大夫) 양사(楊賜), 간의대부(諫議大夫) 마일제(馬日磾), 의랑(議郞) 장순(張馴), 태사령(太史令) 단양(單颺) 등이 참가하여 고문과 전서, 예서의 3체로써 서로 검토하면서 <육경(六經)>의 문자를 쓰고 돌에 새겨 비를 세우고 이를 <삼체희평석경>이라고 불렀다. 이 시기는 중국 고대 서예미학의 맹아기인 동시에 발단기로 미학발전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채옹은 바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채옹이 또 하루는 홍도문(鴻都門)을 지나다가 성문(城門)을 수리하는 수리공이 어찌나 바쁜지 왔다갔다하면서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런데 돌연 그 수리공은 푸른색의 색료(色料)를 가지고 담장벽에다가 글씨를 쓰는데 이때 채옹은 정신을 집중하였다. 서법을 모르는 수리공이 쓰는 글씨가 의외로 기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필획중에 희끗희끗 나타나는 것이 마치 고필(枯筆)을 사용한 것 같이 보였다. 채옹은 여기서 “비백서(飛白書)”를 계발해냈다.
채옹(서기133-192)의 자(字)는 백개(伯喈)이고 진류어(陳留圉)(지금의 하남성 기현(杞縣))사람이다. 영제(靈帝)시 관직이 의랑(議郞)에 이르렀으나 직언으로 상소를 올려 화를 당하여 귀양보내졌다가 다시 사면되었다. 또 환관(宦官)들의 핍박을 받아 강호(江湖)에 떠돌기를 10여년이나 하였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일을 살펴보면 아주 애석하다. 한번 이야기 해 보자.
후한의 영제는 3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여러 명의 황자(皇子)가 있었으나 모두 요절하였고 도축업자의 딸인 하씨(何氏)로부터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이름은 변(辯)이다. 황자를 낳은 하씨는 태후(太后)가 되었고 그의 오빠 하진(何進)은 대장군이 되었다. 또 5년후 후궁 왕씨(王氏)로부터 또 하나의 황자를 낳았는데 이름은 협(協)이다. 영제가 죽고 하진은 하씨 소생인 변을 즉위 시켰는데 이가 바로 소제(少帝)이다. 이후 하진은 환관들을 모두 주살(誅殺)하려다 오히려 환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이러한 환관들의 횡포가 심하자 명문출신인 원소(袁紹)와 그의 사촌동생 원술(袁術)은 궁궐로 쳐들어가 수염이 없는 자는 환관으로 간주하고 모두 주살해 버렸다. 이때 주살된 환관은 모두 2천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때 십상시중에 장양과 단규는 나이 어린 소제와 그의 이복동생인 협과 함께 도망가다가 보좌하던 장양과 단규가 강물에 투신 자살하자 소제와 협은 하는 수 없이 다시 낙양으로 돌아오다가 흉폭 하기로 이름난 동탁(董卓)을 만나 함께 입성하였다. 그 후 동탁은 14세인 소제를 폐위시키고 왕씨 소생인 진류왕 협(당시 9세)을 즉위 시켰는데 이가 바로 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이다. 동탁은 헌제와 함께 수백만의 백성들을 강제로 이끌고 장안으로 옮겨서 전권을 휘두르고 부(富)를 축적하면서 악명을 높여 갔다. 이때에 동탁은 채옹의 명성을 흠모하면서 그를 불러와 강제로 시어사의 관직을 주고 측근에 있게 하였다. 채옹역시 동탁의 악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권세에 눌려 어찌할 수가 없었다. 동탁의 이러한 악명은 오래 가지 못하고 사도 왕윤(王允)과 그의 부장 여포(呂布)에게 죽임을 당하여 효수(梟首) 되었는데 행인이 그 동안 호식(好食)으로 몸이 비대하여 진 모습을 보고 배꼽에 커다란 심지를 박고 불을 붙였는데 기름이 지글지글 끌며 며칠을 탔다고 한다. 이때 동탁의 밑에서 좌중랑장(左中郞將)을 지냈던 채옹도 왕윤의 무리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거기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렇게 재주가 많은 사람도 시운을 타지 못하면 뜻을 다 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애석한가?
채옹은 전서와 예서를 특히 잘 썼다. 그의 서예술 풍격의 특징은 결구가 엄정하고 점획이 부앙(俯仰)하며 법도가 충실하면서도 변화된 서체를 얻었으며 “골기(骨氣)가 통달(洞達)하고 출중한 신기(神氣)가있다” 라는 평을 한다. 중국의 섬서성 서안(西安)의 비림(碑林)에는 아직도 <한석경잔자(漢石經殘字)>예서 한비(漢碑)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채옹이 직접 쓴 잔적(殘迹)이다. 이 하나의 작품에 대해서 후세의 어떤 사람들은 지나치게 격식화 된 것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기도 하는데 이는 후학자 들의 손과 발을 속박하였다는 것이다. <한노준비(漢魯峻碑)>, <서악화산묘비(西岳華山廟碑)>등의 적지 않은 거대한 비들도 모두 채옹의 손에서 나왔다. <한노준비>는 산동제령에 있으며 한 희평2년(서기 173년)에 세웠다. 비석에 쓰여져 있는 글자의 결체는 호방하며 기운은 자연스럽고 엄숙하며 자태는 넉넉하게 자못 귀골을 지녔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지나 지금은 글씨가 매우 희미함이 심하다.
채옹은 서법이론의 방면에 있어서도 공을 세웠다. 정사(正史)에 실린 그의 저서<필세(筆勢)>가 있고 현존하는 것에는<필론(筆論)>과<구세(九勢)>등이 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서법이론서중의 하나이다. 그의 필론에 “夫書, 先黙坐靜思, 隨意所適, 言不出口, 氣不盈息, 沉密神彩 如對至尊, 則無不善矣.-무릇 글씨를 쓰는데는 우선 조용히 앉아 생각을 고요하게 하고 뜻에 따라 알맞게 하여 말은 입밖에 내지 말고, 기(氣)는 밖으로 넘쳐나지 않게 하고 신채(神彩)를 침밀(沈密)하게 하여 지존(至尊)을 대한 것 같이 하면 선(善)하지 않은 것이 없다 ”라 하였다. 또 채옹의 딸 채염(蔡琰)은 자(字)가 문희(文姬)인데 아버지로부터 문학, 음악등 많은 방면에서 그의 학식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대의 여성서예가로 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의 명필가이다. 그는 그의 저서<술석실신수필세(述石室神授筆勢)>에서 “저의 부친께서 팔분(八分)을 쓸 때 귀신에게서 전수 받은 필법을 말하길 ‘글씨에는 두 가지의 법이 있으니 첫 번째가 질(疾)이요 두 번째가 삽(澁)이다. 이 질과 삽이라는 두 가지의 법을 얻으면 글씨의 묘(妙)는 다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채옹은<구세>에서 질삽에 대하여 말하길 “질세(疾勢)는 탁획(啄畫)과 책획(磔畫)의 가운데에서 나오고, 또 수획(竪畫)을 그으면서 긴박하게 하는 적획(趯畫)의 내에 있다. .....삽세(澁勢)는 긴박하고 신속하게 전투에 나가는 법과 같은 이치에 있다” 라고 하였다. <다음호 正書之祖 鍾繇> 필자 E-mail : maobi@hanmail.net
正書之祖 鍾謠
옛날옛적에/12 松民 李周炯(韓國書藝學會會員)
지금으로부터 대략 1750년전 중국의 경조(京兆)(지금의 서안(西安) 북쪽) 교외에서는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해가 기울고 점점 날이 어두워지면서 서너명 쯤 되는 사람들이 삽과 괭이를 들고 몸을 숨기면서 쏜살같이 내달리고 있었다. 얼굴엔 긴장감이 돌았고 눈동자는 한치의 오차 없이 주위를 살폈다. 만약 이들과 약속 없이 마주친다면 큰 봉변이라고 당할 것 같았다. 이들이 이렇게 몸을 낮춰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무덤 앞이었다. 그들은 서로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받은 후 무덤은 그들에 의하여 파 헤쳐졌다. 보아하니 이 무덤은 시신을 안장(安葬) 한지 얼마 안된 신묘(新墓)였다. 잠시 후 그들은 시신 옆에서 무언가 뭉치를 꺼내더니 삽과 괭이를 내동댕이치고 그것을 가지고 달아나 버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이 무덤은 다름 아닌 후한 대 서예가 위탄(韋誕)의 묘였다. 이것은 위탄이 죽으면서 가지고 간 채옹(蔡邕)의 묵적(墨蹟)을 이 시대의 서예가 종요(鍾繇)가 사람을 시켜 도굴 해 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무덤을 파헤치면서 까지! 위탄은 누구인가? 위탄은 후한과 삼국시기의 위(魏)나라 사람인데 직책은 광록대부(光祿大夫)에 까지 이르렀다. 그는 여러 가지의 서체를 다 잘 썼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대자의 현판 글씨를 잘 썼다. 당시 위나라 궁(宮)의 현판은 거의 위탄이 쓴 것이다. 위탄의 전서(篆書)는 조희(曹喜), 한단순(邯鄲淳)에게서 배웠고, 예서(隸書)는 어려서 채옹의 법을 배웠으며 초서는 특히 장지(張芝)의 글씨를 흠모하여 제자 중에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위탄은 성격이 고집스럽고 한편으로는 담력이 적어 겁이 많았던 것 같다. 이왕 위탄의 말이 나왔으니 간략하게 하나의 고사를 이야기 해 보자. 위(魏)나라 명제(明帝)는 높은 집을 하나 져 놓고 이름을 “능운대(凌雲臺)”라고 지었다. 그런데 일 하는 사람들이 잘못하여 아무 것도 쓰지 않은 현판을 25장(丈)이나 되는 높은 누대에 못질하여 놓고는 그냥 내려와 버렸다. 명제는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아래로부터 그 현판 있는데 까지 도르래를 이용하여 줄을 잇고는 아래에서 망태기를 달아 놓고 당시 대자(大字) 현판을 잘 쓰는 위탄을 불러 붓을 가지고 올라가서 쓰고 내려오라고 하였다. 망태기에 담긴 위탄은 아래에서 줄을 당기자 현판에 도착했다. 위탄은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쓰고 내려와서는 붓을 땅바닥에 집어던지고 다시는 현판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그 짧은 시간에 위탄의 머리는 하얗게 변하여 버렸고, 이후 그는 가규(家規)를 정하고 손자들에게는 절대로 대자제서(大字題書)는 배우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위탄은 채옹의 필법을 잘 전하여 왔으나 이러한 필법은 또 남에게 잘 전하여 주지도 않았다.
한번은 종요가 당시 광록대부인 위탄의 집엘 갔던 적이 있는데 우연히 전대(前代)의 서예가 채옹의 서법책 한 권을 보게 되었다. 글씨를 보는 순간 임서(臨書)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위탄에게 빌려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남에게 자신의 서법을 좀처럼 가르쳐주지 않는 위탄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리고 죽어도 남에게 빌려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종요는 크게 실망하여 집에 돌아와서는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종요는 몇 번이나 위탄을 찾아가 집에 있는 귀한 보물을 갖다주면서 빌려 달라고 해 보았으나 위탄은 “죽어도 안 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종요는 채옹의 그 글씨가 보고 싶어 결국 병이나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곧 당시의 승상이었던 조조(曹操)가 보내준 오령단(五靈丹)을 먹고 깨어났으나 채옹의 묵보에 대한 집착은 강했다. 종요는 위탄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 괘씸했다. “죽어도 빌려 줄 수가 없다고?” “그래 어디 두고 보자” 위탄이 죽자 종요는 사람을 시켜 위탄이 죽으면서 함께 매장한 채옹의 묵보를 도묘(盜墓)하라고 시킨 것이다. 종요가 이 채옹의 서법을 손에 넣게 되었으니 위탄의 “죽어도.... 하겠다”는 이 말은 결국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이후 종요는 채옹의 서법을 손에 넣게 되자 폐침망식(廢寢忘食)하고 불분주야(不分晝夜)하면서 이 서법을 공부하였다. 잠을 잘 때도 손가락으로 이불에다가 그 서법을 공부하여 그렇게 하기를 오래하자 이불은 구멍이 났고, 또 측간(厠間)에서도 앉아서 손바닥에 글씨를 쓰다가 나오는 것을 잃어버려 한나절을 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종요가 위탄의 묘를 도묘 했다고 하는 것은 전해오는 이야기는 이치에는 맞지가 않다. 기록에 의하면 종요(150- 230년)와 위탄(179-253)의 생졸년대로 보면 그 말은 모순이 된다. 어쨌든 종요는 이렇게 열정을 가지고 공부를 하여 유명한 대 서예가가 된 것이다.
종요는 삼국시기 위탄과 함께 위나라 서예가이다. 자는 원상(元常)이고 영천(潁川) 장사(長社)(지금의 하남성 장갈(長葛)) 사람이다. 그는 매우 영민(英敏)하고 학식이 깊어 동한 말 효렴(孝廉)으로 관직은 상서랑(尙書朗)에서 상서부사(尙書仆射) 동무정후(東武亭侯)가 되었다. 삼국시기에는 위나라에서 정위(廷尉)를 맡았고 정릉후(定陵候)에 봉하여 졌다. 명제가 즉위하자 태부(太傅)로 올라갔고 사람들은 종태부(鍾太傅)라고 하였다. 종요는 중국고대의 유명한 서예가이며 동한의 장지(張芝)와 더불어 “종(鍾),장(張)”이라고 하고 동진의 왕희지와 더불어 “종(鐘),왕(王)”이라고 하였다. 그의 전, 예는 동한의 조희(曹喜)를 스승으로 삼았고 팔분(八分)은 동한의 채옹에게, 행초서는 당대의 행서 대가 유덕승(劉德升)에게 배웠다. 유덕승은 중국고대서예사에서 행서지조(行書之祖)라고 칭하여져 왔으며, 행서예술의 선구자로써 지혜와 심혈을 기울여 후대 동진(東晋)시기 “이왕(二王)”과 같은 걸출한 서예대가가 출현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준비한 사람이다. 종요는 이렇게 당시의 각 명가를 사승(師承)하여 또 다른 일가(一家)를 이룬 것이다.
종요는 전서와 예서, 진서, 행서, 초서를 두루 두루 잘 썼다. 남조의 송나라 양흔(羊欣)은 그에 대하여 말하길 “글씨에 세 가지 서체가 있는데 하나는 명석지서(銘石之書)라고 하는데 가장 묘한 것이다. 두 번째는 장정서(章程書)인데 이는 비서(秘書)에 전하여 소학자 들을 가르쳤고, 세 번째는 행압서(行狎書)인데 소문(所聞)으로 전하여 진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였다.” <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畵譜)>의 주(注)에는 명석지서는 바로 정서(正書)를 말하는 것이고 장정서는 팔분서, 행압서는 행서를 말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또 종요의 서법을 “비홍희해(飛鴻戱海) 무학유천(舞鶴游天)-날으는 큰기러기는 바다를 희롱하고 춤추는 학은 하늘에서 노닌다.”에 비유하였다. 그의 중요한 성취는 그가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여 민간인과 각 명가의 장점을 수용하여 혁신을 감행하여 정형 적인 해서를 만들어 사용하게 한 것이 비교적 큰 공헌이다. 삼국시대 이전에 서법은 이미 큰 변혁이 무르익기 시작하여 예서가 해서로 변하여 가는 것이 대세의 물줄기였다. 해서의 이 신흥(新興) 서체는 예서의 정식규구(程式規矩)한 것을 깨고 서단(書壇)에 몸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것은 방정평직(方正平直)하고 간략하게 생략이 되고 쉽게 쓸 수가 있었으며 미관상에도 실용적인 특징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일종의 신흥서체로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종요는 해법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해서의 정형화를 크게 촉진시켰으며 적극적인 작용을 하였다. 남조 양나라 서예가 도홍경(陶弘景)은 <여양무제논서계(與梁武帝論書啓)>에서 말하길 “백영(장지)은 이미 ‘초성’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원상(元常)은 ‘예절(隸絶)’(이때의 예서는 바로 진서(眞書)를 가리킴)하다”라고 하였다. 당대(唐代)의 장회관(張懷瓘)은 종요에 대하여 “ 진서는 절묘하여 스승을 넘었고 강유(剛柔)를 갖추었다. 점획지간이 서로 달라 가히 그윽한 깊이가 끝이 없고 예스러움이 넘친다. 진한(秦漢)이래로 한 사람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평가에 대하여는 지나친 것이 아니다. 그가 일생동안 적지 않은 해서가작을 썼는데 다만 진적(眞跡)은 이미 실전 하였고 다만 후세 사람들이 첩(帖)에 의거하여 모각(模刻)한 것이 가장유명하고 세상에 빛나는 “오표(五表)”가 있다. 이것은 <하첩표(賀捷表)>(또는 융로표(戎路表)), <선시표(宣示表)>, <천계직표(荐季直表)>, <역명표(力命表)>와 <조원표(調元表)>가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진적과는 비교 할 수가 없다고 한다. <하첩표>는 소해(小楷)인데 송대(宋代)의 황백사(黃伯思)가 그 진적을 고증하였다고 하는데, 필법이 견후(堅厚)하고 아울러 고예(古隸)의 뜻이 있었다고 하였다. 송인 들은<선화서보(宣和書譜)>에서 “법도가 모두 갖추어져 있고 正書之祖(정서지조)가 된다”라고 하면서 그에 대한 평가를 매우 높게 하였다. 그의 <천계직표> 또한 소해인데 줄곧 사람들에 의하여 진품을 의심받아왔다. <철망산호(鐵網珊瑚)>에는 그것에 대하여 이르길 “고아하고 순박하며 묘한 입신의 경지를 넘었고.. ”라고 하였다. <상존호비(上尊號碑)>는 그의 대표적인 걸작인데 그의 전통적인 공부의 흔적이 충분히 표현되어 있어서 후세 사람들의 이 비(碑)를 매우 중시한다.
종요는 삼국시기 걸출한 서예 혁신가이고 시대의 조류에 잘 적응하고 민간서체를 학습하여 신 서체를 출현시켰으며 계속하여 연구와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동한의 장지와 비교하면서 장지는 공부(工夫)가 제일이고 천질(天質)이 다음이라 하고, 종요는 천질이 제일이고 공부가 다음이라고 하였지만, 사실 그의 공부하는 정신은 결코 장지에게 뒤진다고 할 수 없다. 종요는 생각을 침잠 시켜 30년동안 글씨 공부를 함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종요는 어렸을 적에 스승을 따라 포독산(抱犢山)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전심(專心)으로 그 뜻을 지키면서 한번 가서는 삼년동안 하산(下山)하지 않아서 그 굳센 의지를 보고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고 한다. 종요가 후세에 해서의 정종(正宗)으로서 그의 영향은 매우 심원(深遠)하였다. 양진(兩晉)시 에는 종요를 배워 서풍을 이룬 동진의 위부인(衛夫人), 왕희지(王羲之), 이외에 당대의 적잖은 명서가 들은 종요를 배우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음호 황상의 천발신참비) 필자연락처 e-mail: maobi@hanmail.net
邯鄲淳과 黃象
옛날옛적에 /13 松民 李周炯(韓國書藝學會會員)
邯鄲淳과 曹娥碑
지금으로부터 1800여년(서기 200년경)전 어느해 여름, 중국 영천(潁川)의 하늘은 매우 맑아 머리를 들어 쳐다보면 마치 우리가 거대한 수정안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또 고개를 내려 먼 강물을 바라보니 맑은 물에는 다시 하늘의 수정이 들어와 있었다. 먼 들판의 곡식들은 햇볕을 사양하고 한낮의 강 새들은 불어난 강물에 뭔가 기대를 하고 낮게 떠서 강물에 눈길을 떠나 보내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몇 일전까지는 크게 가물어 대지가 불덩이처럼 뜨겁고 초목은 말라 더 이상 호흡도 곤란한 지경이었는데 큰비가 내려서 대지는 윤기가 있고 강물은 불어나 이렇게 생동감이 있는 것이었다. 당시 영천에는 매우 영리하고 서예를 무척 좋아하는 소년이 살고 있었는데 성은 한단이고 이름은 순이었다. 한단순은 가끔 사람들을 따라서 강가에 가서 노는 것을 매우 좋아하였다. 이렇게 청명한 날 한단순은 사람들과 함께 절강성 동부의 강 연안에 놀러 갔다가 하나의 비통한 일을 만났다. 사실은 이렇다. 부근에는 14살된 소녀 조아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는데 몇 일전 아버지와 함께 강을 건너가다가 갑자기 큰 바람과 비를 만났다. 조용했던 강물은 갑자기 악마로 변하여 물이 불어나고 바람이 일면서 순식간에 이들이 타고 건너던 배를 삼켜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어찌한단 말인가? 소녀 조아(曹娥)는 그 격렬한 강물과 싸우면서 늙으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였으나 강물은 끝내 그들을 놓아주질 않았다. 사람들은 부녀가 강물에 휩쓸린 것을 알고 강물을 따라 수 십리를 찾아다니다가 5일째 되는 날 움푹 들어간 수만(水灣)에서 부녀의 시체를 발견했다. 왠일인가? 부녀가 여기까지 떠내려오는 동안 소녀 조아는 아버지를 최후의 순간까지 구하기 위해서 두 손으로 아버지를 끌어안고 구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많이 모여들었고 그 마을의 현관인 도상(度尙)도 와 있었다. 현관은 이렇게 감동적인 소녀의 효심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즉시 그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이 강의 이름을 “조아강(曹娥江)이라 하고, 그 옆에 사당을 지을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추모 비를 세워서 그들의 넋을 기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누가 이 비문을 쓴단 말인가? 문장도 좋아야 하겠고 글씨도 아주 좋아야 할텐데... 현감은 난감해 하였다. 그때였다. 여러 사람을 제치면서 현감 앞으로 당당히 나와서 큰소리로 “저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린 소년이 아닌가? 너는 이름이 뭐냐? 한단 순 입니다. “한단순?”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수군거렸다. 보아하니 앞에 나타난 한단 순은 눈빛엔 지혜가 번뜩였고 기세 당당한 그의 말소리는 주변을 사로잡았다. 현감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일전에 한단순 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듯했다. 말하자면 한단순은 모수자천(毛遂自薦)한 것이다. 어떻게 그를 시험해 본단 말인가? “정말 후생가외(後生可畏)로다. 효녀 조아는 소녀이고 이 아이는 소년선생이 아닌가? 좋다 필묵을 가져와라”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한단순은 필묵을 보자 금방 또 달라져 흉중에 격정이 일고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을 다듬는 것이 미래의 대 서예가다웠다. 순은 소매를 부여잡고 일 필로 조아부녀의 제문을 써내려 갔다. 사람들은 감탄을 연발했고 현감은 소년 한단 순이 글씨를 잘 쓰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이후 한단순의 문장과 글씨를 가지고 비를 세웠는데 그 비가 바로 “曹娥碑(조아비)”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씨를 배웠는데 전서는 한대의 조희(嘲戱)의 법을 배웠고 해서는 왕차중(王次仲)의 법을 따랐다. 더욱이 고문의 대소전과 팔분을 정교하게 잘 썼다.
이후 서기 240-248년사이에는 한단순의 서예가 노련해지고 숙련되었을 때인데 魏王(위왕)은 경서(經書)를 써서 입각하여 세우기로 하고는 한단순에게 책임을 맡겼다. 한단순은 고문과 전서 그리고 예서체의 3체로 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삼체석경(三體石經)>이며 한단순이 우리들에게 남겨준 유일한 서적(書跡)이다. 그러나 <조아비>는 이미 실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黃象의 天發神讖碑
황상(黃象)은 삼국시기 오(吳)나라의 서예가인데 그 생졸은 자세하지가 않다. 자는 휴명(休明)이고 광릉강도(廣陵江都)(지금의강소성양주서남)사람이다. 그의 생평사적(生平史籍)에 관해서는 역사에 기재 된 것이 많지 않지만 오나라에서 관직이 시중(侍中)에까지 이르고 일찍이 청주자사를 지낸 적이 있다는 것은 알 수가 있다.
황상은 어려서부터 글씨를 배웠는데 동한 의 장초서예가 두조(杜操)의 글씨를 배웠다. 황상은 전서와 팔분, 그리고 장초등 각종서체에 뛰어났다. 남조 송나라 양흔의 <채고래능서인명>에는 “오 나라사람 황상은 초서에 능한데 사람들은 ‘침착하고 통쾌하다’ 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후세사람들은 그의 장초를 평함에 자유자재함이 신품에 들어가며, 팔분서는 웅일준수(雄逸俊秀) 하여 묘품(妙品)에 들어가고 전서는 정교하면서도 빼어남이 능품(能品)에 들어간다고 평하였다. 당대의 장회관은 <서의(書議)>에서 한대로부터 동진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서예가는 19인이 있는데 황상도 그 중에 한사람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남조의 서예가 유견오는 일찍이 황상과 동시대의 몇 몇 서예가를 비교하였는데 호소(胡昭)의 글씨는 살이 쪄서 번들번들 윤기가 있고 종요의 글씨는 파리하면서도 굳세다. 그러나 황상은 “두 서가를 짐작하여 매우 절묘하다.”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황상이 호소와 종요 두사람의 장점을 겸하여 “비수(肥瘦)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골육(骨肉)이 적당하다”는 말이다. <서단(書斷)>에는 진대갈홍(晋代葛洪)이 황상의 서예술에 대하여 매우 탄복하고 존경하면서 “서성(書聖)”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중국고대 서예사상에서 많이 볼 수 없는 현상이다 황상의 서예술에 대한 설명을 확실히 “일대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가 있다.
황상의 서예작품은 현재 우리들이 알고 있는 <천발신참비(天發神讖碑)>와 <송강본급취장(松江本急就章)>등이 있다. <천발신참비>는 일명 <천새기공비(天璽紀功碑)>(천새는 吳孫皓(손호)의 년호)라고도 하는데 오손호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며 화핵(華覈)이 문장을 짓고 황상이 쓴 것이다. <강녕부지(江寧府志)>에 실린 것을 보면 이 비는 원래 강소성 남경시 남교(南郊)의 봉황산(鳳凰山)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는 진나라 때에 이미 세 토막으로 잘라져 이를 속칭“삼단비(三段碑)”라고도 한다. 이 비가 세워졌던 부근에 살던 사람들은 이 지방의 명칭을 “단석강(斷石崗)”이라고도 하였다. 후에 이 비는 성내 강녕부학궁(江寧府學宮) 안으로 옮겨졌다가 불행하게도 청대 가경(嘉慶)10년(서기 1805년)여름에 불에 타버려 후에 또 중각하여 세웠다. 비의 글자체는 전서와 예서의 결구가 종합되어 기세는 웅위하며 개장서전(開張舒展)함이 서체에 있어서 일대의 대담한 돌파라 할 수 있다. 장발(張勃)은 <오록(吳錄)>에서 말하길 <천발신참비>는 글자체가 크면서 정방(正方)(대략 한나라 자로써는 4치5푼)이며 전문(篆文)의 서체로써 하면서 예서의 용필을 사용하여 직획의 끝은 첨예하고 모양은 “도해(倒薤)”의 모양을 취하였다고 하였다. 도해는 소전서체의 일종인데 그것은 “칠서(漆書)”로 말미암아 연변 되어 이루어진 것이고 수필시에는 칠이 이미 다하여 진 모양을 취하였다.
황상은 이러한 필법을 사용하여 그로 하여금 써낸 글자는 미감과 역량을 증가시켰다. 송대의 서예가 황백사는 <동관여론(東觀余論)>에서 “황상의 글씨는 세상에 아주 적은데 오직 건업(지금의 남경)에 오나라때의 <천발신참비>가 있는데 전서 같기도 하고 예서 같기도 하며 글자의 세력은 웅위(雄偉)하여 황상의 글씨라고 전한다. 장회관이 이를 보고 ‘침착하고 통쾌하여 정말로 그 필세를 얻었다’고 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서사회요(書史會要)>에는 또 황상이 쓴 오나라<대제비(大帝碑)>가 있는데 이 비의 서법은 “탐기진고(探奇振古)”하다고 하여 <천발신참비>와 더불어 “쌍미(雙美)”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비는 전하여 지지 않고 있다. 어떤 서예가들은 여기에 전하는 두 비는 두개가 아니라 같은 하나의 비라고도 한다.
황상이 남긴 <송강본급취장>은 상해부단대학교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는 원래 송대의 엽몽(葉夢)이 영창본을 얻었는데 모두 2023자가 있고 정말로 거대한 도서(圖書)라고 할 수있다고 하였다. 명대정통4년(1439년)에 이르러서 다시 모각한 것은 이미 650자가 빠져 있었다. <송강본급취장>의 서체는 황상이 가장 득의(得意)한 장초서체이며 전편(全篇)에 모두 정신을 오로지 하여 “진실하면서 내달리지 않았고 본질에 충실하면서 꾸미지 않았다.” 고 하면서 사람들을 그것을 칭하여 “사용확계 신반부행(似龍蠖啓 伸盤復行)- 용이 몸을 굽혔다가 다시 대지에 쭉 펴면서 가는 것 같다.”라고 하였다.
옛날옛적에/14 三國時期의 衛顗 衛瓘 衛恒
松民李周炯(韓國書藝學會會員)
어둠이 낙양의 황궁(皇宮)을 덮을 때 후궁의 처소 대문 앞에는 사람의 배꼽높이에 맞추어 댓잎을 꽂고 땅 바닥엔 소금을 뿌리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잠시 후 서너 마리의 양이 이끄는 황제의 수레가 호위를 받으며 저 만치서 오는데, 양이 지나가다가 땅바닥에서 소금을 보고는 멈춰서 열심히 입술 질을 하며 핥아대고는 또 대문 앞에 꽂힌 댓잎을 먹고있다. 그러자 수레에 타고 있던 황제는 내려서 후궁의 안내를 받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 황제는 다른 사람 아닌 진황(晋皇) 사마염(司馬炎)이다. 이렇게 수레가 멈추면 그곳에서 쉬어 갔다고 하니, 후궁들은 저마다 성은을 입기 위해 갖가지 꾀를 낸 것인데 이 수레를 끄는 양은 댓잎과 소금을 좋아한다고 한다. 오늘밤 지낼 후궁의 처소로 가는 중이었다. 위, 촉, 오 삼국의 항쟁을 끝으로 진(晉)나라를 창립한 사마염은 대체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치와 방종에 흘러 후궁을 1만 여명이나 두었다고 한다. 이에 신하들도 음탕과 호사에 뒤질세라 경쟁을 벌였다. 그 중에 무제의 사위 왕제(王濟)는 사람의 젖을 짜서 먹여 기른 돼지를 요리하여 먹었으며, 또 석숭(石崇)과 왕개(王愷)라는 사람은 백성들을 착취하여 사치를 서로 겨루어 수 십리를 이은 비단으로 장막을 치고 살았다고 한다. 이렇게 부패한 세대 가운데에서도 가장 심한 것은 무제의 아들 사마충(司馬衷)이었다. 사마충은 궁중에서 자라 세상일은 도무지 아는 것이 없었다.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려 죽는다는 말을 듣고는 “쌀이 없으면 고기라도 먹을 것이지 왜 죽는다는 말이오”라고 할 정도라 하니 짐작할 만 하지 않는가? 무제가 죽고 태자 충(衷)이 혜제(惠帝)가 되었는데, 혜제는 무능하였으며 황후인 가남풍(賈南風)은 얼굴은 못생겼고 키도 작으며 피부는 검고 또한 질투심 많으며 권모술수(權謀術數)가 능하였다. 가황후는 정권을 독점하기 위하여 갖은 술책으로 원로 대신들을 주살(誅殺)하였는데, 당시의 원로대신이며 서예가인 태보(太保) 위관(衛瓘)과 그의 아들이며 역시 서예가인 위항(衛恒)도 여기에 희생되었다. 말하자면 위관과 위항 부자는 가황후에 의하여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한 것이었다.
위관의 부친은 위의(衛顗)이며 삼국시기 위(魏)나라 서예가이다. 자(字)는 백유(伯儒)이고 하동안읍(河東安邑)(지금의 산서성하현북(山西省夏縣北))사람이다. 동한 말 그는 관이 사공연(司空掾)을 지냈고 후에는 상서(尙書)로 옮겨졌다. 위나라에 들어가서는 시중(侍中)의 관직을 받았다. 위 명제가 즉위하여서는 원(閿) 제후로 봉하여 졌고, 62세에 죽었는데 죽은 뒤에 시호는 경(敬)이라고 하여 사람들은 위경후(衛敬候)라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위의(衛顗)는 대 서예가였을 뿐만이 아니라 자못 문장에도 유명하였다. <서법청화(書法菁華)>에는 그에 대하여 “초서(草書) 및 고문(古文)을 잘 썼으며 대략 그 절묘함을 다하였고 초체(草體)는 조금 파리하나 필적(筆跡)은 정숙하다.” 라고 하였다. 위의도 또한 위탄(韋誕)과 같이 대자제서(大字題書)를 잘 썼다. <서단(書斷)>에 그의 소전, 예서, 장초는 능품에 들어간다고 설명하였다. 그의 전서는 한단순(邯鄲淳) 문하에서 나온 것인데 아주 공력을 다하여 썼다. 한번은 그가 한단순의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임서하여서 한단순에게 보내어 보여 주었는데 한단순도 자신의 글씨와 위의의 글씨를 잘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이 쓴 것이라고 우겼다고 하는데 그것은 위의가 쓴 것이었다고 한다. 위의는 대담한 돌파로 전통예술 풍격을 직접 북파(北派)서예로 하여금 새로운 혈액을 공급시켰다. <광예주쌍즙(廣藝舟雙楫)>에 실린 것을 보면 위의가 쓴 저명한 서예작품<수선표(受禪表)>는 기상이 넘치며 체재가 응중(凝重)하다. <양대안(楊大眼)>, <시평공(始平公)>, <정장유(鄭長猷)>와 <위령장(魏靈藏)>등의 유명한 비(碑)는 모두 일정한 영향이 있었다. 북비 중에 기타의 유명한 비 또한 어렵지 않게 그의 서풍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강유위(康有爲)도 말하길 “그런즉 위씨의 (서)법은 황제자손과 같이 천만년동안 천지에 흩어져 있는 것 같다.” 라고 하였다.
위씨삼대 서예가 중에 북비서풍 영향이 가장 컸던 사람은 마땅히 북파서예의 기초를 잡은 위의의 아들 위관(衛瓘)이라고 말 할 수있다. 위관(서기 220-291)은 서진(西晉) 서예가인데 자(字)는 백옥(伯玉)이고 삼국시기에 위나라에서 정위(廷尉)를 지냈고, 진나라에 들어가서는 관직이 사공(司空)이 되었다. 위관의 초서는 공교함이 당시 걸출한 서예가 삭정(索靖)과 함께 사람들은 “이묘(二妙)”라고 하였다. 위관은 장지(張芝)의 초법(草法)을 배웠으며, 그의 부친 위의의 필의를 참작하여 또 다른 돌출한 봉우리가 일어나 독자적인 한 파를 이루었다. 후세사람들은 “(위관은)타고난 재질이 특수하여 마치 홍안(鴻雁)이 육방(六方)으로 날개를 분발하여 청풍지상(淸風之上)에서 표요(飄颻)하면서 기분 내키는 대로 운용하여 어렵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당대의 이사진(李嗣眞)은 그와 채옹(蔡邕), 양곡(梁鵠)등을 나란히 서열 하였고 장회관(張懷瓘)도 그와 장지(張芝), 종요(鍾繇),“이왕(二王)”등 다섯 사람에 대한 평가가 대단히 높은 것을 볼 수 있다. <서단(書斷)>에서 그의 장초는 신품(神品)에 넣었고 소전, 예서, 행서는 묘품(妙品)에 넣었다. 위관의 서예발전에 대한 중요한 공적은 그의 창작이 휘황찬란한 북파서풍으로 하여 자신의 독특한 개성을 나타냈다는 점이다. <순화각첩(淳化刻帖)>, <대관첩(大觀帖)>안에는 그의 <돈수주민첩(頓首州民帖)>이 수각되어있다.
위관의 아들 위항(衛恒)은 그의 조부, 부친이 이룩한 예술바탕 위에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영향으로 북파서풍이 더욱 밝게 발전되어졌고 더욱 집중되어갔다. 위항(서기252-291)은 서진 시기의 서예가이며 자(字)는 거산(巨山)이고 관직은 황문시랑(黃門侍郞)에 이르렀다. 혜제시에는 그의 부친 위관과 함께 가후(賈后)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서예는 이미 그의 조부와 아버지 두 사람의 서법을 익혔고, 또 장지(張芝)의 글씨를 익혀서 성취하였다. <서단>안에서 그는 “산필(散筆)로하여 예서를 썼는데 미미하게 그 흰 부분이 드러나서 비백(飛白)과 함께 묶여져서 예서의 소쇄(瀟灑)함이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산예(散隸)는 바로 산필(散筆)로써 쓴 예서를 말하는데. 이것 또한 획기적인 창작이었다. 위항은 장지를 배워서 그 골기(骨氣)를 얻었기 때문에 그 서법은 주경(遒勁)하다. 그의 글씨는 쓴 것이 매우 아름다워 사람들은 “마치 예쁜 꽃을 꽂은 미녀가 춤을 추면서 거울 앞에서 웃는 것 같다”라고 하였다. 그의 글씨는 강하면서도 수려함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된 것이며, 이는 뛰어난 예술의 수양과 기교를 나타냈다. <순화각첩>, <대관첩>에는 그의 글씨<일일유한첩(一日有恨帖)>이 입각되어 있다. 그러나 위씨 삼대의 서풍은 모두 웅경(雄勁)한 것이 주(主)가 된다. 그들의 주창(主唱)과 실천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북파서법은 “근골(筋骨)”을 으뜸으로 삼았다. 이로 인하여 작품 속에 만들어낸 예술의 형상은 바로 중원(中原)의 호한(好漢) 형상과 자태가 늠름하고 씩씩하며 위풍(威風)이 당당하다. 그러나 다만 북파서법은 연미한 아름다움이나 풍운은 남파(南派)에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이다. 위항은 또 <사체(고문, 전, 예, 초)서세>한 권을 저술하였다. 여기에는 사체(四體)의 기원(起源), 그리고 겸하여 사실적인 일을 기록서술 하고 있으며, 이는 중국 고대의 비교적 이른 한편의 서예이론서이다.
남송(南宋)의 조맹견(趙孟堅)은 <논서(論書)>에서 비교적 일찍이 제기하였는데 “진(晋), 송(宋)이후로 (서예)가 남북으로 나누어 졌다”고 하였다. 청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서법이 남북의 양대 맥(脈)으로 나뉘어 설명하는 것이 성행하였다. 대표적으로 북파서풍의 전형적인 작품은 북위 시에 강직웅혼(强直雄渾)함이 그대로 반영되어 다채로운 비각이 풍부하다. 북파는 중국서법에 대한 영향이 매우 깊어 그 일으킨 작용은 잴 수가 없다. 근대 강유위의 <광예주쌍즙>에는 동한, 삼국위, 서진 시대에는 위의, 위관, 위항등은 3대를 거론하면서 북파서풍을 형성작용을 일으킨바가 매우 크다고 하였다. 청대의 서예가 완원(阮元)은 위씨삼대는 북파서풍에 영향이 컸을 뿐만이 아니라 남파서예의 영향에도 홀시(忽視)할 수 없다고 하였다. (지난 호 본란의 119쪽 조희(嘲戱)를 조희(曹喜)로 바로 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