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이어서 저도 사발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제가 팔십년대 후반 일본 문부성 초청 선발에 운좋게 뽑혀 한 2년간을 교토(京都)대학에 연구학자로 유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새도 이 시험은 매년 있다고 합니다.
의무는 별로 없었고 권리는 상당히 많은 데다 시간도 여유롭고 다달이 장학금도 아주 풍족하게 타서 쓴, 이제 다시는 오기 힘든 그런 황금시기와 같은 상황이었지요.
저는 기어자전거를 한 대 사서 타고 다니면서 고도 교토의 이곳저곳을 구석구석 돌아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추억도 제법 많이 만든 셈이지요.
한번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요시야마(吉山)'로 상호가 기억됩니다만 옛물건을 많이 진열해 놓은 가게를 지나면서 그곳을 들르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온지 몇달이나 지났기 때문에 제법 의사표현을 할 수 있을 때라서 말 연습도 할 겸 이것저것 많이 물으면서 구경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조선물건은 없느냐고 물어보았는데 주인은 고개를 내젓다가 문득 윗층으로 가보자며 인도하였습니다.
먼지가 잔뜩 쌓인 물건더미 속에서 뭘 꺼내 보여주는 것이 흙이 덜 빠져 노른색이 많이 도는 아담한 밥사발 하나와 약간 작아 보이는 하얀색의 국사발 네 개였습니다.
이게 조선 물건으로는 다라고 하면서 별로 대수롭지 않은 투였습니다.
저는 그때 물건을 별로 잘 모를 때였지만 어디서 본 듯한 형태였고 우리것은 틀림없겠다는 느낌은 왔습니다.
나중에 값을 물어보니 다섯 점에 만 오천엔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타국에서 많이 깎는 것만이 버는 것이란 생각이 배어 있었던 터라 유학생 처지를 강조하여 한참을 흥정한 끝에 결국 삼분의 일을 깎아 사서 돌아왔습니다.
원래 일본사람들은 이렇게 깎고 하는 습관이 없다고 하는 소리를 후에 들은 적이 있지만요.
숙소에서 정성들여 흙과 때를 씻어내었더니 그제서야 제법 때깔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 이게 뭔지 어떻게 되는 건지 때로 교토대학 도서관에서 참고서적을 찾아서 궁리도 하였는데 한참 뒤에 밥사발은 분청인화문완으로 기면에는 국화문과 우점문 그리고 초문띠가 둘린 평범한 공기형태이나 안쪽은 오로지 하얀 귀얄문만이 기막힌 자국을 남기며 바닥에서 위로 힘차게 뻗쳐돌려진 꽤 괜찮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국사발 넉점은 전부가 조선 초기의 연질백자 느낌이 드는 죽절굽의 백자발이었는데 땅속에 오랜 세월 묻혀 있었던 때문인지 잔금에 황토빛이 배이고 안바닥에 유약의 박락(剝落)이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나중 일이지만 이 중 국사발 한 점은 효당(曉堂)을 계승한다는 취지로 '강우차회(江右茶會)'를 결성하여 이끌고 있는 제 아우에게 찻사발로 쓰라고 주어 버렸습니다.
이 그릇들이 시대로 추측컨대 혹시 같은 데서 출토 수습된 일괄유물일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판단을 하려고 시도해본 적도 없고 어느 누구한테도 보여 자문을 구한 적도 없었습니다.
이들이 설사 이른바 명품과는 거리가 한참 많이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한적한 여가에 어쩌다가 꺼내보면 이것을 만든 이름없는 도공의 욕심없는 기식(氣息)이 정말 내 가슴속으로 그대로 전해오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이 그릇들은 어릴 때부터 집에 있어서 손으로 익히 만져오던 것은 아니지만, 제가 일본에서 처음 만난 우리 것이었고 옛것으로는 난생 처음으로 돈을 주고 산 물건이어서 갈수록 더욱 정이 도탑게 느껴진답니다.
또한 이 사발들로 인해 저의 취미가 도자 쪽으로 옮겨오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만 쓰겠습니다.
제 컴퓨터가 인터넷을 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기는 하나 워낙 성능이 뒤떨어지는 고물이어서 이들 사발 사진을 첨부하지 못하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진주에서
정 헌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