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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越窯기물 감정의 요령> 도자기의 감정은 새로운 과학으로 기물과학의 한 부문이다. 발굴된 월요자기를 감정할 경우에는 반드시 5대요령 즉 월요자기의 조형, 문양, 유약과 태토, 지소공예支燒工藝, 관지를 장악해야 한다. 이들은 상호 보충되므로 한 편으로 치우치면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이 다섯 가지를 연계하여 감정하면, 기물의 시대판정과 산지에 대한 판단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게 된다.
1. 조형과 문양 조형과 문양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월요감정의 관건이다. 이 두 점을 장악하면 감정의 신뢰지수가 이미 50%에 도달하게 되며, 다시 유약과 태토와 지소공예 및 관지를 결합시키면 더욱 정확해진다. 당연히 시대별로 개별적인 예외도 존재한다.
초기청자(109-447년)와 당대唐代(618-907)의 월요자기에 대한 기년紀年자료는 모두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고, 각 종류의 기물마다 조형과 문양에 따라 이미 구체적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러한 연대가 정확한 기물이나 상대적인 연대의 기물은 감정에 관건이 되는 전형적인 표본이다. 문양의 제재에 따른 시대구분은 제일기 중당시기中唐時期, 제이기 만당시기晩唐時期, 제삼기 오대시기五代時期, 제사기 북송시기北宋時期로 나눌 수 있다.
당대唐代 월요의 조형은 전체적으로 윤곽선이 명쾌하고 수려하며 단정하다. 완은 육조시기의 심복형평저기(深腹型平底器-속이 깊고 바닥이 평평)에서 점차 창구사복敞口斜腹(주둥이가 밖으로 벌어지고 복부가 비스듬한 형태)로 변화되었다. 초당初唐시기의 평저平底나 가권족假圈足은 중당中唐시기에 이르러서는 가권족의 중앙에 작은 구멍을 하나 파내어 옥벽저玉璧底라고 불리는 형태로 변화되었으며, 동시에 낮은 권족에 고리형태의 굽(환저環底와 대환저大環底)을 가진 기물이 출현하였다. 또 단정하고 아름다운 화구완(花口碗-구연부가 꽃잎 모양) 혹은 하화완荷花碗이 출현하였다. 그 특징은 구연부가 사결(四缺-오목한 부위가 네 곳, 즉 꽃잎이 네 개)이나 오결五缺이며, 복부와 결부缺部가 서로 대응되는 위치에 돌근(突筋-기물의 내면으로 볼록 튀어나온 선)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규구(葵口-해바라기 꽃잎모양의 구연부)'라고 칭하는 학자도 있었다. 종합하자면, 굽의 변화에서 구연부의 변화로 발전하면서 완을 정교하고 아름답게 제작하여 활짝 핀 연꽃과 비슷한 모양이 되었다. 이러한 완의 내벽에는 연꽃, 나비, 꽃송이 등의 문양을 대칭으로 각획刻劃하였다.
호류壺類 : 초당시기에는 육조시기의 반구호盤口壺를 연용하였으나, 선명한 특징은 크고 풍만한 기형으로부터 날씬하고 수려하게 변했다는 점이다. 중당中唐의 원화元和시기에 이르러 호의 반구盤口가 치구侈口로 대체되는 동시에, 육각형의 주둥이와 끈모양의 손잡이가 출현하였으며, 바닥은 여전히 평저平底였으나 이후에 평저에서 왜권족矮圈足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호는 이 시기부터 ‘주자注子'라고 불리워졌으며, 바로 후대에 말하는 집호執壺이다. 집호는 원래의 호의 면모를 일변시켰다.
만당晩唐시기의 집호는 조형상으로 기본적인 격조는 변하지 않았으나, 구체적인 선의 변화가 다양해져서 기형이 풍부하고 다채롭게 느껴진다. 이 시기에는 주둥이에 구멍이 있는 과릉호, 통구쌍계권족대형집호(筒口雙系圈足大型執壺- 통형의 입구, 두 개의 고리, 권족의 대형집호), 나팔구喇叭口에 과릉형이면서 권족인 집호 등이 있었다. 이러한 집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유색釉色은 청취색靑翠色이거나 미미하게 황색이 번득이는 청색, 다각형의 주구注口에 편평한 띠 모양의 손잡이, 과릉형태의 복부와 키가 작은 왜권족, 청수하고 단아한 윤곽선, 아름다운 유색釉色으로 품질의 우수성을 경쟁하였다.
오대五代시기의 집호는 두 종류이다. 하나는 염구斂口, 과복瓜腹, 평저平底에 기다란 주둥이와 두 줄의 둥그런 손잡이를 조합한 것으로, 전체적인 조형이 거꾸로 매달린 청과靑瓜와 유사하였다. 다른 하나는 직구直口, 호복弧腹, 길고 둥그런 주둥이, 권족圈足이다. 주둥이와 어깨부위에 운기문雲氣紋을 선각線刻하였으며 복부의 사방에는 꽃송이와 쌍학문雙鶴紋 등을 선각하였다.
북송 北宋시기 집호의 특징은 복부에 개광開光을 만들고 개광의 내부에 꽃송이를 각화한 점이다. 더욱 주목을 끄는 것은 995년이라는 기년紀年의 무덤에서 출토된 ‘인물좌음도人物坐飮圖' 집호執壺로서 상대적인 연대가 확실할 뿐만 아니라 집호의 복부에 앉아서 술마시는 인물도가 각화되어 있어 서화書畵의 화면을 집호의 복부로 옮겨온 최초의 사례에 속하는 기물이었다. 이러한 인물좌음도는 신선활동 등의 도안이 상림호上林湖 요지에서 출토된 파편에 나타나므로, 북송전기 비색자秘色瓷의 전형기물로서 감정의 표본을 제공해준다. 북송후기北宋後期에는 집호의 제작이 투박해졌으며, 특히 통형경(筒形頸-원통형의 목)과 어깨부위의 접합 및 권족의 접합부의 처리가 매끄럽지 않아, 소성된 뒤에 왕왕 갈라터져서 폐품으로 되었다.
잔盞과 잔탁盞托은 만당晩唐시기에 가장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대중大中연간에 생산된 잔과 잔탁이 가장 아름답다. ‘대중이년大中二年' 이라는 명문의 완과 함께 전해지는 하화잔荷花盞은 내벽에 하화荷花를 각화하였으며, 유색釉色이 산뜻하다. 잔탁은 말려 올라간 연 잎 모양의 탁반托盤으로, 권족은 미미하게 밖으로 벌어져 있다. 이러한 조형은 활짝 핀 연꽃이 연 잎의 위에 놓인 듯하며, 극히 정교한 비색자의 명품이라 할 것이다. 오대五代시기의 탁대와 탁반에는 문양이 없는 기물이 많으며, 잔은 화구花口에 권족圈足으로 유색은 청록유靑綠釉가 다수이다. 북송시기의 잔은 꽃잎모양 입구의 내면에 하나의 연화문이나 네개가 고리처럼 연속된 연화문을 선각하였으며, 잔탁의 탁대托臺가 높이 돌출되어 있고, 탁반의 가장자리를 따라 나비와 구름문양을 선각하였다. 화통和統13년 묘에서 출토된 잔탁구盞托具는 하나의 전형기이다.
초당에서 북송초기까지 쟁반의 조형은 천복형淺服形이다. 초당시기에는 주로 평저에 문양이 없으며, 유색은 청황유靑黃釉가 대부분이다. 중당시기에 왜권족과 옥벽저의 쟁반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만당시기에 품종이 증가하여 자주 보이는 기물로 옥벽저각화반玉壁底刻花盤, 권족각화반圈足刻花盤, 위각권족반委角圈足盤, 화구반花口盤 등이 있었다. 법문사지法門寺址에서 출토된 비색자반이 표준기이다. 오대시기에는 방형위각질반方形委角迭盤이 출현하였으며, 반의 몸체에 누공鏤空이 있다. 북송시기의 기년이 있는 화구목단문반花口牡丹紋盤, 화구쌍접문반花口雙蝶紋盤, 앵무문반鸚鵡紋盤, 귀하문반龜荷紋盤, 정자관반丁字款盤 등은 모두 월요자기를 감정할 때에 대조하는 대표작품이다.
수우水盂는 초중당시기에 대부분 염구斂口에 평저平底 혹은 가권족假圈足으로 모두 문양이 없었다 . 만당시기에 다리가 네 개 달린 수우가 출현하였으며, 오대시기에는 기형이 작아지고 또 아주 작은 네 개의 다리가 달려 있다. 북송시기의 수우는 사방에 개광을 하고 개광의 내부에 모란 등을 새겨넣었다.
세류洗類는 초당시기에 형체가 커졌으며 소면(素面-문양이 없음)이 다수이다. 중당시기에는 세의 구경이 35cm에 달하는 대형이 출현하였으며, 유색은 청취색으로 월요의 대표작이다. 영해寧海 와요산요瓦窯山窯의 발굴에서 외벽에 연화문을 새겨넣은 북송시기의 세가 출토되었다.
만당시기 월요에서 생산된 합의 품종은 극히 풍부하였다. 중소형의 조를 구성하는 개합蓋盒과 유합油盒 및 인합印盒이 있었으며, 주문양은 각화를 위주로 하였다. 오대시기에는 운학문질합雲鶴紋迭盒이 출현하였다. 북송시기에는 분합粉盒이 성행하였으며 봉황문, 모란문, 쌍호접문, 앵무문, 국화문 등이 문양으로 사용되었고, 각화, 각획화, 모인模印, 인각결합법印刻結合法이 사용되었다.
기년재료의 연구를 통하여 977년 전후에 제작된 기물의 주요한 문양은 다음과 같다 : 용문, 쌍봉황문, 마갈문摩蝎紋, 수관봉황문水款鳳凰紋, 단앵무문, 쌍학문, 四荷鳳凰紋, 작문雀紋, 화취조문花翠鳥紋, 비안문飛雁紋, 쌍호접문雙蝴蝶紋, 접련화문蝶戀花紋, 귀하문龜荷紋, 정자관귀하문丁字款龜荷紋, 연자연판문蓮子蓮瓣紋, 용비봉무문龍飛鳳舞紋, 황화훼문凰花卉紋 등이 있다.
2. 장소방법 1) 월요기물의 장치와 소성에서는 먼저 갑발장소匣鉢裝燒인지 명화질소明花迭燒인지를 판별해야 한다. 갑발을 사용하여 소성한 기물은 내면에 지정흔이 없으며 굽의 외면에 니점인흔泥點印痕 만 나타난다. 내면에 니점인흔이 없는 기물은 그 시대가 중당 원화元和(806-820)보다 빠를 수가 없다. 내면과 굽의 외면에 모두 니점지소흔이 있는 기물은 명화질소한 것이라 인정할 수 있으며, 그 시대는 초성당시기로 올라가고 뒤로는 북송 원우元祐((1086-1093)와 정화政和(1111-1117)시기에 이른다.
2) 갑발장소법인지 명화질소법인가를 판단한 다음에 상대연대를 판별해야 한다. 상대연대에 더욱 접근하기 위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질소단迭燒段 혹은 가소단枷燒段에 대한 구체적인 공예기술을 연구해야 하며, 이 경우 기물에 남겨진 지소니점인흔이 극히 중요한 역학을 하며, 니점인흔의 배열형식과 니점인흔의 형식은 그 관건이 된다. 초성당시기, 사람들이 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는 방식에서 점차 탁자를 놓고 의자에 앉는 방식으로 생활습관이 발전하였으므로, 많은 자기의 조형이 비교적 대형에서 점차로 단정하고 교묘한 조형으로 변화되었다. 시유도 반유半釉에서 만유滿釉로 발전하였다. 지정을 받쳐 소성한 기물의 경우, 완류는 왕왕 콩모양의 점토를 사용하여 기물의 내면에 배열하였으며, 그 숫자가 일반적으로 4-6개였으며, 완성품에 남겨진 니점인흔을 육안으로 관찰할 수가 있다. 완의 굽에도 4-8개의 콩모양의 분홍색의 인흔이 남아 있다. 관류罐類과 호壺類류의 바닥에는 회백색의 콩모양의 니점인흔이 남아있다. 이러한 콩모양의 니점은 제작연대가 초성당시기라는 점을 알려주는 것이며, 기년기물에 나타난 표준에 근거하여 상대연대나 절대연대를 확정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당唐 원화元和 14년 앵罌의 굽에 나타나는 니점은 전형적인 표준이다.
중당말기에서 만당시기에 이르기까지, 월요에서는 간격요구(間隔窯具-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하는 도구)의 사용면에 크게 혁신이 일어나, 각종 형식의 간격요구가 출현하였고, 사용한 뒤 니점이 남겨놓은 흔적에도 많은 변화가 발생하였다. 초성당시기에 사용한 간격요구는 굵고 커서 간격을 벌리기 위해 사용한 니점의 크기도 컸다. 중만당시기에 얇은 형식의 간격구를 대량으로 사용하였으며, 니점의 형태도 콩모양보다 더욱 보기 좋은 솔방울 모양의 니점으로 변화되고, 배열도 세밀하고 규칙적이었다. 갑발소성한 기물은 역시 내면에 니점인흔이 없다. 옥벽저완과 반에서 굽의 외면에는 니점의 배열이 비교적 드문드문하고, 소성후에 미미한 분홍색의 과립상顆粒狀이나 솔방울 모양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렇게 기물상에 나타나는 흔적은 태체중에 함유되어 있었던 산화철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공품자기'와 기년기물에 비교적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오대시기의 월요자기는 품종이 풍부하고 유색은 청취靑翠하고 호록湖綠하다. 간격요구의 제작도 기물에 따라 적용하여 극히 규정하였으며, 남겨진 니점지소인흔도 만당시기와 크게 다르다. 사용한 간격요구는 편평하고 넓적한 떡모양이므로 산포된 니점이 대부분 기다란 선형이나 솔방울모양이며, 규칙적으로 드문드문 배열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오대전기까지 지속되었다. 오대후기의 상림호上林湖와 동전호東錢湖 및 상우上虞의 요지에서 출토된 파편과 기년기물의 지소니점인흔은 반류와 완류의 바닥에 있으며, 대부분 3-4조로 중간에 아직 틈이 있었다. 이러한 지소인흔은 오월 開運개운(944-947) 이후 줄곧 연용되었다.
북송전기에 월요의 대형 요장에서는 대량으로 각종 크기가 다른 규격화된 점권 (점환) 및 편평형과 환형의 간격요구를 사용하였으므로, 기물의 내외에 균일하게 기다란 선형으로 분포되어, 소성된 뒤에 남겨진 흔적은 배열이 긴밀하다. 일부 기물은 가마 속에서 서로 이어져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인흔을 기년묘의 표준적인 인흔과 대조해 보면 북송전기에 속한다.
종합하면, 감정할 때에는 니점인흔의 변화와 특징에 주의해야 한다. 지소특징도 모든 요지에 모두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다수의 요지는 모두 자신의 지소특징을 가지고 있다. 호남 장사요長沙窯의 당대唐代 기물 가운데, 지소인흔은 완과 반에 나타나며, 호류에서는 월요와 같은 지소인흔을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은 장사요는 저명한 민요로서, 장사요에서 제작한 호류는 굽에까지 시유되지 않아 유약이 달라붙지 않아 니점 등의 간격요구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물에 어떠한 인흔도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이다. 반류의 내면에도 일부 기물은 시유되지 않아 겹쳐 쌓아 소성해도 유약이 달라붙지 않으므로 지소인흔이 남아있지 않다. 완류는 비록 갑발에 넣고 소성하였지만, 권족부분에 시유하지 않아 간격요구로 인한 인흔印痕이 생겨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점은 감정에 근거를 제공해준다.
3. 유색과 태체 유색과 태체의 화학적인 성분과 소성분위기는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므로, 기물의 색조는 시대감정에 일정한 도움이 된다. 초당시기에는 침유법浸釉法을 사용하여 왕왕 굽에까지 시유되지 않았으므로, 소성한 뒤에 시유되지 않은 복부의 하부에서 굽에 이르는 부위에 태체의 색조가 드러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초당시기에 월요는 비록 가마의 구조가 개선되었지만 소성분위기는 일부의 기물이 환원염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소성되어 유면이 청색을 띠는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약한 환원염 혹은 산화염으로 소성되어 발색이 황색을 띠는 청색이거나 미황색米黃色이다.
중당시기, 특히 원화元和 이후, 월요의 도공들은 갑발을 개발하여 제품의 소성에 사용하였다. 이러한 제품의 유색은 대부분 청색으로, 갑발을 이용하여 소성한 자기의 색조는 초당시기처럼 유약이 반정도 칠해지고 유색이 황색이나 미황색을 띠는 청색인 상황이 절대로 나타날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중당의 월요제품의 유색은 청색이 대부분이다. 다만 요지마다 원료와 가마구조 및 유약배합의 차이로 말미암아 발색도 약간 차이가 나타난다.
만당시기, 월요 도자업이 발전되어, 중심지인 상림호에서는 대량으로 갑발을 사용하여 기물을 소성하였으므로, 이 시기 월요청자의 유색이 크게 개선되었으며, 이 밖에 소성기술의 개선과 향상으로 제품의 발색은 주로 청취색이다. 출토된 비색자는 전형적인 기물이다. 그 가운데 일부 대형기물에서는 황색을 띠는 청색이 나타나는데, 당唐 수구씨묘水邱氏墓에서 출토된 향훈香熏은 하나의 실례이다. 당말에서 오대초기까지 소성한 기물은 대다수가 유약이 기물 전체에 칠해지고 발색은 청취색이나 호록색이며, 유면이 얼음이나 옥 같이 매끄러우면서 윤택하다.
오대와 북송시기, 대량의 ‘공품자기'의 유색은 주로 청록색靑綠色으로 유면이 윤택하다. 일반적인 민용자기는 주로 청색이며, 북송말기에 이르러 유색은 주로 청회색으로 변화되었다.
감정의 각도에서 볼 때 ,초당시기에는 절대로 호록색의 유색이 존재할 수 없으며, 호록색유는 오대 혹은 북송시기에 속하는 기물로 판정해야 한다. 미황색유는 중당시기로 판정해야 하며, 오대북송시기의 제품이기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당연히 일반적인 공통성으로 경우에 따라 극히 개별적인 예도 배제할 수는 없다. 감정할 때에는 항상 기타 조건을 결합하여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월요의 태체는 사용한 자토瓷土에 철분의 함량이 비교적 높았으므로 발색이 회백색이다. 이것은 이미 많은 월요기물에서 증명되었으며, 화학적인 성분의 측정에서도 증명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당, 오대, 북송의 월요제품에서 태체의 발색은 절대로 용천요처럼 하얄 수가 없으며, 장사요와 무주요처럼 성긴 옹기의 태토처럼 될 수가 없고, 태체가 회백색을 띤다. 이것은 우리가 월요기물인가를 감정하는데 일정한 참고가치를 지닌다. 발굴된 청자파편의 유색은 월요제품에 매우 근접하지만, 태체가 백색을 띨 경우, 월요자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러한 실수는 방지해야 한다.
4. 명문과 관지 관지는 자기에 나타나 있는 문자를 가리킨다 . 이러한 명문에는 주로 기년관과 작방관作坊款 등이 있다. 월요청자(갈자褐瓷)의 경우, 어느 종류의 관지를 막론하고 연대감정에 커다란 도움을 제공하며, 경우에 따라 정확한 연대를 추론할 수도 있다. 조대의 경우에는 폭이 넓게 당이나 송이라 단대하면 충분하다.
상대연대나 절대연대가 명기되어 있는 자기는 감정의 표준기가 된다. 예를 들어, 당대의 월요자기 가운데 초당시기에 생산된 발형완(鉢形碗-직구直口, 절복折腹, 평저平底)으로 청유나 갈유를 반정도 시유하였으며 완의 내부에 ‘이기利記'라고 찍혀 있는 기물은, 그 생산연대가 기년묘에서 출토된 기물에 근거하여 초당이라고 판정한다.
중당시기에 생산된 ‘원화元和14년……'이라는 명문의 앵, 만당시기 ‘회창會昌2년'이라는 묘지관, ‘회창7년개위대중원년會昌七年改爲大中元年'이라는 명문의 각화집호, ‘대중이년大中二年'과 ‘수壽'라는 명문의 운학문완, 만당과 오대의 ‘관官'자 관罐, 북송시기의 ‘태평무인太平戊寅'이라는 기년의 계두개집호鷄頭蓋執壺, ‘태평무인太平戊寅'이라는 관지의 각화분합과 ‘정丁'자 관, ‘을乙'자 관 등이다. 이러한 명문이 있는 기물은 조형, 문양, 지소공예, 유색이 모두 월요의 표준기가 된다. 이러한 명문에는 정치가가 적지 않게 나타나 있으므로, 그가 출현하였던 시대와 특징을 이해하여야 비로소 과학적으로 이러한 명문을 이용하여 기물을 감정할 수 있게 된다.
<2. 방품의 특징> 1) 임모조형臨摹造形 : 많은 방품은 출판된 <문물정화文物精華>나 <국보대관國寶大觀> 등에 실린 월요의 사진에 따라 모방한다. 이로 인하여 외관상으로는 유사한 제품이 많지만, 실제로는 매우 졸렬하며, 목적이 임모이므로 세부적인 면에서 결점이 속출한다. 모방자는 진품이 왜 이렇게 제작되고 장식하였는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정할 때에는 국부로부터 착수하여 약점을 찾아내면 확실하게 감정할 수 있다.
2) 유색을 관찰 : 월요자기의 유약배합법과 화학성분을 알 방법이 없었으므로, 모조자가 사용한 유약은 완전히 겉만 유사하며, 더욱이 모방품을 소성하는 가마는 현재에는 일반적으로 전기로를 사용하고 있으며, 비록 땔나무를 사용하여 소성한다 하더라도 고대 월요의 화후와 소성분위기를 파악할 방법이 없으므로, 소성해 낸 제품의 유면은 대부분 짙은 청색으로 변화가 없다. 일부 제품은 화학유化學釉를 사용하여 뜨거운 물이 닿으면 유색釉色에 변화가 발생한다.
3) 태체의 식별 : 태토의 색은 원료와 관련이 있다. 월요에서 사용한 원료는 대부분 해당지역의 자토이다. 절강 동부지역의 자토는 화학성분을 분석한 결과 철함량이 비교적 높았다. 이 점은 유색에 지극히 중요한 작용을 한다. 그러나 모방자는 현대의 고령토를 이용하므로 드러난 태토의 색이 백색이다. 이 점은 구별하기 쉬우며 방품의 한 특징이다.
4) 문양의 임모 : 장식도안은 감정에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대마다 사용한 문양에는 그 당시 사람들의 신앙과 풍속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임모한 도안은 선이 유창하지 못하고, 구도가 원작에 비해 졸렬하다. 이 점도 방품의 공통된 특징이다.
5) 장소공예裝燒工藝 : 제품의 장치와 소성은 시기별로 특징이 있으며, 지소인흔의 형식과 배열규칙은 시대마다 다르다. 모방자는 이 방면의 세부사항을 왕왕 소홀히 한다. 인흔이 나타나지만 그 시대의 특징과 부합하지 않는다. 백색의 자토(석회)를 사용하지만 긁으면 떨어져 나오는 것도 있다. 이로 인하여 태체에 나타나 있는 인흔은 감정의 중요한 표준이 된다.
6) 제작기교 : 제작기교는 주로 물레성형, 다듬기, 퇴소堆塑, 문양의 각획 등을 가리킨다. 그 가운데 물레로 성형할 때에 남겨진 흔적은 감정의 관건이 된다. 당대의 월요제품은 모두 물레성형법을 채용하였으므로, 집호의 내벽과 굽, 관의 내벽과 굽, 병의 내벽과 굽에 모두 물레로 성형할 때의 회전문과 잘라낸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나 모방품은 이 면에 있어 근본적으로 그럴듯하지 않으며, 내벽이 평평하고 굽이 극히 평평하다. 완류의 권족은 시대마다 상이하였다. 즉 당대의 권족은 넓고 키가 작은 점이 특징이다. 오대말기에는 권족이 밖으로 벌어지며 말린 것이 특색으로, 이러한 종류는 비색자기의 작법에 속하며, 권족이 밖으로 벌어진 것은 깎아내지 않고 별도로 제작하여 부착한 다음에 다듬은 것이다. 북송의 완은 ‘태평무인太平戊寅' 관지의 완을 예로 볼 경우, 말끔하고 정교한 키가 작고 크기가 작은 권족이 대부분이며, 키가 큰 권족은 ‘태평무인'이후의 제품이다. 물레성형과 알족(굽을 깎아내기)의 공예과정에서 남겨진 흔적이 묘하게도 방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3. 월요청자의 방고와 변위> 월요청자는 북송시기에 제작이 중단된 이래로, 어떠한 이유로 일찍이 방제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1980년대에 이르러 중국경제의 신속한 발전 및 골동수집열이 왕성해짐에 따라 각지의 고대요지가 분분히 복원되었다. 이들 방고자공장은 수준이 일정하지 않고 뒤죽박죽이었다. 국영도자공장은 전통문화를 선양하고 사람들의 심미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방품에 날인하여 공예품임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폭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영도자공방에서는 혼신을 다하여 의도적으로 고대의 작품을 모방하였다. 이러한 모방품이 시장에 흘러 들어 수장가에게 커다란 손실을 입히므로, 진위감별은 매우 중요하다.
월요자기의 모조품은 제일 먼저 절강성 상우上虞에서 제작되었다. 상우자창이 단기간의 시험을 통하여 1980년대 중기에 육조청자의 모방품제작에 성공하였다. 현대의 과학기술을 사용하여 고대 월요자기의 태토, 유약의 조성성분, 가마의 구조, 소성온도 등에 대하여 정확한 측정을 실시하였하고 고대의 진품을 표본으로 삼았으므로, 모방품의 태토와 유약 및 조형과 문양 등이 모두 지극히 핍진하여 진가를 혼란시킬 정도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상우에서 새로 모방된 서진시기의 청자양형수주靑瓷羊形水注는 언뜻 보면 진품과 거의 일치하였으며, 자세히 관찰해야 비로소 미소한 차이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월요자기의 진위를 감별하려면 ,다음의 사항을 관찰해야 한다. 1. 태토의 질과 색 : 진품의 태토는 세밀하며 청회색이다. 방품의 태토는 굵고 거칠며 회백색이다.
2. 유면과 유색 : 진품의 유면은 균일하고 윤택하며 광택이 부드럽다. 방품은 시유가 균일하지 않고 항상 축유현상이 나타나며 광택이 비교적 반짝인다. 유색은 월요자기 감정의 중요수단으로, 시대에 따라 월요자기의 유색은 서로 다르다.
3. 지소법 : 진품은 니조형의 지정을 이용하여 지소하였다. 지정에 철함량이 높으므로 굽의 지소처에 화석홍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방품은 고운 모래를 받쳐 소성하였으며 굽의 노태처에 화석홍이 없다.
4. 각화공구 : 진품에 사용된 공구는 죽제품과 목제품으로 각화문양의 낙도落刀와 기도起刀가 섬세하고 묵직하다. 방품에서는 철제공구를 사용하여 낙도와 기도 및 운도의 깊이와 굵기가 일치하므로, 문양이 상투적이고 밋밋하다.
당대의 월요자기를 감정할 경우, 왕왕 굽의 서너 곳에 유약이 없는 부분이 나타난다. 일부 대형 기물의 경우 10여 곳에 달하기도 한다. 이것은 당시 소성할 때 보편적으로 점소방법(또는 첩소방법)을 사용하였으며, 가마에 기물을 장치할 때 진흙덩이를 굽에 받쳐 소성한 다음에 진흙덩이가 떨어져 나간 뒤의 흔적이다. 반과 완류의 경우에는 차례로 쌓아서 소성하여 소성수량을 증가시켰다. 이러한 이유로 당대 월요자기의 하부는 현저하게 두터워 하부의 두께는 구연부의 두 배에 이르며, 점소흔적의 주위에 화석홍이 나타나기도 한다. 당대초기의 월요는 갑밥장소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기물의 유면에 모래알갱이가 붙어있다. 만당시기에 이르러, 소요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갑발장소법을 사용하여 기물과 유면이 매끄럽고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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