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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이야기

양심선언 (박문수)

작성자유니갤러리|작성시간08.08.09|조회수34 목록 댓글 0

양심선언 (박문수)

박문수 묘에 설치된 무인석상의 양심선언
  

  여기는 천안에 있는 은석산으로 저는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 1691~1756) 선생의 묘를 지키는 용감한 장수랍니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는 긴 칼을 짚고 서 있지만 사실 저는 돌로 만든 무인 석상이어요. 하지만 못된 석수장이가 술에 취해서 만들었는지 눈망울은 커다랗게, 입을 헤하고 벌려놓아 장군으로써 체면이 "그라운드 제로(WTC붕괴 현장)"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배꼽을 잡고 웃어싸니 속이 상해 죽겠어요. 돈만 벌면 그 즉시 성형수술을 할랍니다. 두고 보세요. 눈은 길게 찢어 매섭게, 입은 꼭 다물어 위엄을, 얼굴 윤곽은 광대뼈를 깎아 덕장(德將)으로, 코는 큼직하니 오뚝 세워 변강쇠같은 정력 넘치는 사나이로 만들 겁니다. 그런데 있잖아요. 수술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간다고 들었어요. 어떻해요. 여기는 산꼭대기라 입장 수입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한꺼번에 얼굴 전체를 뜯어 고치기보다는 부분수술을 한 뒤에 경과를 보면서 다른 부분을 고칠 예정입니다. 그 방법이 수술비 부담도 덜고 또 건강에도 좋다며 의사가 충고했어요.

    얘기가 삼천포로 빠졌네요? 미안, 미안해요. 제가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은 박문수씨가 과거에 급제해 암행어사가 된 뒤에는 귀신이 시험문제를 가르쳐주었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건 비밀취급인가증이 있어야만 취급할 수 있는 일급 비밀이지만, 역사를 바로 세우려면 진실을 밝혀야 된다고 생각해 양심을 선언합니다. 용기에는 언제나 책임과 고통이 따르지요. 하지만 그로 인해 세상은 더 밝아질 수 있다는 사명감이 저를 역사의 현장에 서게 했습니다.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아들 정연씨의 병역비리 의혹을 제기한 김대업씨를 보세요. 공개한 육성 테이프가 증거물로 "긴가 민가"하다고 검찰이 발표하고, 한나라당이 자신에 대한 국감증인채택을 거부키로 방침을 정하자, "나는 국감장의 증인으로 서고 싶습니다. 한나라당은 무엇이 두려워 나의 국감증인채택을 반대하는가? 김대업"이라 쓴 피켓을 들고 2002년 9월 9일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잖아요. 의혹 제기에 대해 의문은 있지만 저는 그 사람을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양심 선언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주인의 미움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할 각오는 이미 서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선언은 박 어사를 시기하는 반대파의 계략에 매수되었거나 아니면 정략적으로 이용당해 한 일은 절대로 아니며, 사실대로만 말할랍니다.

   과거를 보러 한양을 가던 박 어사가 하루는 어느 집에서 묵게 되었어요. 나라에 경사가 있어 특별히 관리를 뽑는다(증광시)라는 방(榜)을 보고 부리나케 올라가던 참이었지요. 당시 박 어사는 33세의 늙은 나이였어요. 머리는 굳어지고 먹여 살릴 식구들은 줄줄이 섰으니 공부라고 제대로 했겠어요. 오직 한 마음이었지요.

    "내가 살 길은 오직 미달뿐이다. 빨리 가 접수부터 하자.”

    그런데 밤이 되자 갑자기 집 주인이 죽었다며 곡소리가 났어요. 재수에 옴이 붙었다고 생각하며 사태가 수습되고 나니 새벽이 가까워졌어요. 하지만 갈 길이 바쁜 몸이라 억지로 눈을 질끈 감았지요. 잠깐 풋잠이 들었는데 꿈에 풀로 만든 갓을 쓴 젊은이가 나타나더니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 시작했어요.

    "선비님, 저는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훗날 높은 사람이 되어 저의 원수를 갚아주십시요. 그러면 제가 과거에 급제하도록 도와드리겠어요.”

    "예, 어떻게요?”

    "이번 과거의 시제(詩題)는 ‘낙조(落照)’가 날 것입니다. 제가 일러주는 대로 써내면 틀림없이 급제할 겁니다.”

    “예? 제가 급제를 한다고요.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빨리 불러 주세요. 곧 날이 샐 것만 같아요.”

    귀가 솔깃해진 박 어사는 목을 길게 빼 내밀며 귀를 쫑긋했습니다. 사내의 얼굴은 희미한 채 분명치 않았으나 목소리만큼은 카랑카랑했습니다.

    낙조는 붉게 푸른 산을 물드리고
    해(금오)는 흰 구름 사이를 자로 재듯 넘어 가는구나
    소치는 동산엔 소의 긴 그림자 띠를 둘렀고(소그림)
    망부산 꼭대기엔 아낙네의 머리쪽이 낮아졌구나(고개 숙임)

    강 건너는 나그네는 말채찍이 급해지고
    절로 돌아가는 중의 지팡이는 바쁘기만 하다


    실로 천하의 명시였어요. 박 어사는 귀신이 한 구절 한 구절을 읊을 때마다 침을 꼴깍하고 넘기고 절로 무릎을 쳤습니다. 그런데 8구 중 6구까지 읊을 때에 별안간 닭 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꼬끼오, 꼬끼오."

    "선비님, 이제 저는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어요.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탈영 귀신이 되어 저승의 희망대로 보내져요. 그곳은 인정사정도 없는 곳이어요. 그러니 제발 제 소원을 꼭 들어주세요. 예?”

    “여보시오 젊은이, 아니 귀신 아저씨. 7~8구가 뭔지를 알아야 과거에 붙을 거 아니요?”

    “아, 죄송해요. 그럼 꼭 제 소 소원을 들-어- 주--세-- 요.”

    기분을 잡친 박 어사는 하는 수 없이 투덜대며 과거장으로 들어섰어요. 그런데 난리가 났어요. 전국에서 몰린 취업 희망자들이 과거장 밖까지 몇 킬로미터나 줄을 서 북새통을 이룬 거여요. 사상 최악의 취업난으로 접수증 조차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특히 박 어사는 지방에서 공부한 선비라 과거정보에도 어둡고, 시험관의 지방 선비에 편견 등, 불리한 점이 많았어요.

    미달을 물 건너 간 일이 되고, 접수증이라도 받을려고 몸싸움을 벌렸어요. 시험관의 눈치를 보니 지방 선비에게 기회를 준 것이 마치 과거의 형식을 갖추기 위한 양념처럼 보였어요. 실망은 이만 저만이 아니였지요. 접수를 마치고 주막에 와 누우니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어요.

    급제만을 손꼽아 기다릴 식구들을 생각하니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어요. 주막에서도 과거를 둘러싸고 절망적인 소문만 무성했어요. (2002년 올 하반기, 벼슬자리는 약 7만 9천 명. 그러나 처음 응시 선비만 17만 2천명, 재수 선비 20만명을 감안하면 올해 과거합격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한다.’)

    드디어 시험 날이 닥쳤어요. 사활을 걸고 컨닝하기 좋은 자리를 선점한 박 어사는 나름대로 비장한 원칙을 정했어요.

아는 문제는 스스로 해결한다(知).
초지일관 컨닝으로 밀고 나간다(勇).
적발이 돼도 진원지를 밝히지 않는다(義).
상대방보다는 낮은 점수를 받도록 한다(禮).
상대방이 틀렸어도 그대로 베껴 쓴다(信).
쫒겨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불쌍히 여긴다(仁).
감독관의 위치와 눈초리를 면밀히 살핀다(智).
스스로를 부끄럽게 생각한다(恥).

    마침내 시제가 걸리고 두루마기가 펼쳐지는 순간, 박 어사는 기절초풍을 했어요. 문제는 귀신이 가르쳐 준대로 ‘낙조’였어요. 야호! 박 어사는 쾌재를 부르며 일필휘지로 6구(句)까지 써 내려 갔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7~8구(句)는 직접 지어야 하는데 도대체 시상이 떠오르지 않는 거여요. 몇 번이고 앞뒤를 살핀 뒤에야 겨우 덧붙였습니다.

    깊은 마을 늙은 나뭇가지엔 석양이 비꼈는데
    더먹머리 초동은 피리를 불며 돌아오는구나


    박 어사는 뒤가 몹시 챙기었으나 마땅히 더 쓸 실력도 없어 첫번째로 답안을 제출했어요. 그런데 박 어사의 시를 본 시험관은 눈이 휘둥그래져 글자마다 비점(批點:글에서 가장 잘 된 글자 위에 찍는 점)을 찍고, 구절마다 관주(貫珠:잘 된 글이나 시․문 위에 그리는 고리점)를 찍으며 여러 시관(試官)에게 장원급제에 붙이자고 주장했어요. 그러자 한 시관이 말리며 말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지은 시가 아니라 귀신이 지은 시입니다. 불합격시켜야 합니다.”

    “무슨 말이요. 이 시는 이태백이나 두보를 능가하는 시요. 장원에 붙여야 합니다.”

    시관끼리 옥신각신하며 입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한 시관이,

    “1구에서 6구까지는 귀신의 냄새가 나지만, 7구와 8구는 사람 냄새가 나니 장원은 안되겠지만 병과로는 합격시킵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박 어사는 3등인 병과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간 겁니다. 박 어사가 암행어사의 귀감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지만 과거급제 만큼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시험은 당연히 무효이며 재시험을 치뤄야 합니다. 이상으로 양심선언을 마치겠습니다.

    [사진 : 박문수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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