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전자(靑磁辰砂蓮花文瓢形注子, 국보 제133호)
이 주전자는 높이가 32.5센티미터나 되는 당당한 크기이다. 조롱박 모양 혹은 피기 직전의 연꽃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는데, 생활 주변에서 작품 소재를 찾은 고려 사람들의 높은 예술 감각과 심미안이 전해진다. 주전자는 1963년 경, 강화도에 있는 최항(崔沆, ?~1257)의 무덤에서 묘지석(墓誌石)과 함께 출토되었다고 전하며 장식 수법도 진사와 상감 그리고 양‧음각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명품이다. 주전자를 장식한 갖가지 장식 의장이 조형적으로 매우 창의성이고 아름다우며, 나아가 제작 년도까지 추정할 수 있어 고려청자의 발달 과정을 연구하는 시금석이 된다. 특히 동체(胴體) 전면에 피어오르는 연꽃 봉오리를 조각한 것이나, 병목에 연꽃 봉오리 줄기를 안은 동자 인형을 배치한 점은 고려청자 중에서 가장 경허하고 청정한 분위기를 전해 준다. 주전자를 들여다보면 도자기가 갖추어야 할 때깔, 문양, 형태에서 눈이 부시도록 완벽하여 세계 10대 도자기의 하나라는 극찬에 머리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자연과 호흡하는 순수 미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은 바탕을 숨기지 않는 순수함에 약간의 파격을 준 자연과 호흡하는 미이다. 때깔을 보면, 파란 가을 하늘이 맑은 계곡 물에 어린 듯한 비취색이고, 형태를 보면 조롱박, 참외, 죽순 등 생활 주변의 자연 소재에서 따와 고향의 풋풋한 정감이 느껴진다. 또 문양은 청록색이 엷게 감도는 몸체에 보일 듯 말 듯한 신비한 상감 문양이 조화롭다.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은 보고 또 보아도 눈에 거슬리지 않은 순수한 미(美)이다. 그럼 어떻게 하여 고려 청자가 현대에 전해지게 되었을까? 20세기 초, 일본인들이 ‘고적 조사’라는 명분으로 강화도․ 개성에 있는 고분을 도굴해 전리품처럼 나누어 가지기 전에는 한 점의 고려청자도 이 세상에 나돌지 않았다. 조상의 무덤을 파헤쳐 부장된 유물을 꺼내어 감상한다는 것은 이 땅의 사람으론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상에 죄를 짓는 일은 고사하고 귀신 붙은 물건이라 생각하여 집안에 들이지도 않았다.
1905년 굴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그는 대단한 한국 고미술품 애호가로 일본 천황과 귀족들에게 선물한다는 명목으로 무수한 고려자기를 일본으로 실어 갔다. 골동상으로 곤도(近藤)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개성 근처에서 도굴된 고려청자를 모조리 쓸어 모아 통감부로 보냈고, 때를 맞추어 서울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골동상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다. 일본에서 거지 생활을 하던 사람도 이 땅에 넘어와 일본 순사를 앞세우고 무덤만 파면 일약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고 살았다. 당시 일본에선 고려청자 한두 점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귀족 행세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자 이토가 부임한 2~3년 사이에 개성과 강화도의 고분은 모조리 도굴되어 바닥이 드러날 지경이었다. 청자가 귀해지자 급기야 석탑까지 들어올려 부장품인 사리함과 불상을 꺼냈고, 시골 구석구석까지 헌병까지 동원한 도굴꾼이 들어가 오래된 무덤이 있으면 모조리 훑어 갔다.
도굴에 가담한 하수인은 대부분 이 나라 백성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하고 무지하여 돈 몇 푼에 매수되거나, 혹은 총을 맨 일본인에게 협박 당해 어쩔 수 없이 도굴에 가담했을 뿐이다. 조상의 무덤을 판 뒤는 액운이 덮칠까 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던 선량한 백성들이다. 집에 전해 오는 백자 항아리나 접시만 보았지 청자가 이 나라 도자기인지도 몰랐다. 이런 사정은 왕실도 마찬가지였다. 고종 황제 역시 이완용(李完用)이 창경궁에 지은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을 관람하고는 처음으로 청자가 무엇인지를 알았다고 한다. 이왕가박물관은 이토의 사주를 받은 이완용이 고종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1908년에 지은 것이다. 이 박물관은 이 땅에 들어 온 일본인 도굴꾼과 골동상이 도굴품을 한국 왕실에 합법적으로 팔아먹는 통로 구실까지 했다.
이토의 안내를 받은 고종이 박물관에 방문했을 때이다. 진열장에는 푸른 광기가 도는 고려청자가 형태별로 진열되어 있었다. 고종은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에 마음이 이끌렸다. 하나같이 때깔이 곱고, 형태도 아름다웠던 것이다. 진열된 고려청자를 관람하며 고종이 이토에게 물었다. “이 청자는 어느 나라에서 만든 물건이요?” “이 나라의 고려 시대 것입니다.” 이토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고종이 다시 말했다.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 없어요. 본 적이 없습니다.” 이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이 땅에 고려청자가 나오게 된 사연은 일제 시대 일본인끼리 서로 거금을 주고 도굴된 청자를 사고 파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찾아 오시오
1970년 초, 일본에 있는 오사카시립박물관에서 경매를 겸한 특별한 전시가 열렸다. 전시 규모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 작품이 출품되어 개막도 하기 전에 메스콤이 떠들썩했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 중에서 백미는 단연코 청자연화문표형주전자였다. 그런데 이 주전자가 어떻게 일본으로 반출되었는지는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었다. 주전자는 윗도리가 꽃봉오리 모양이고 아래위가 조롱박 모양으로 비록 주구(注口)와 손잡이 위 부분이 수리되었으나 걸작 중에 걸작이었다. 일본 내에서도 100만 불을 호가해 살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전시회에 대한 정보가 중간 책을 통해 삼성 그룹을 이끌던 이병철에게 들렸다. 그러자 이병철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라도 우수한 문화재를 되사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진만 보고서도 중간 책을 내세워 경매에 임하고자 작정했다. 이병철은 신임하는 중간상과 얼굴을 맞댄 채 사진을 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는 정기가 번뜩였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이병철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지요?”“일찍이 고려 청자의 우수성에 눈을 뜬 일본인은 장총을 들이대며 고려 고분을 모조리 도굴했지요. 대략 6만여 점에 이르는 고미술품이 해외로 반출되었고, 일본에만 3만여 점이 넘게 있어요.” 일본인들은 천성적으로 고미술품을 즐기는 민족이다. 특히 한국의 고미술품이라면 사족을 못쓰고 좋아한다. “일본을 다녀오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찾아오시오.” “알겠습니다.”
중간 책은 즉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며칠 동안 정황을 살핀 그는 시간을 맞추어 경매장으로 들어섰다. 입구에서부터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돈을 많이 준다면 쉽게 살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국익에 위배되는 행위다. 가장 적당한 값으로 되찾아야 했다. 오사카박물관은 일본 내의 굵직한 수집가와 관람객들이 몰려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경매장 중앙에 자리를 잡은 중간 책은 주전자가 책상 위에 올라오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경매 분위기가 한참 고조되었을 때 사회자의 책상 위에 신광이 번뜩이는 청자 주전자가 올려졌다. 세계 10대 도자기에 속하는 명품으로 청자 중 제일로 치는 주전자이다. 비록 미국 후리아 갤러리에 크기와 형태가 같은 청자가 또 있지만 그것은 뚜껑이 없는 불완전품이고, 사회자의 책상 위에 있는 주전자는 온전한 것이다. 중간 책은 땀을 닦으며 경매에 임할 마음자세를 가다듬었다.
경매가 시작되고, 처음부터 천문학적인 거금으로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경매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천문학적인 거금에 연실 마른 침만 삼켜 댔다. 서로 가격을 치고 받는 사이에 어느새 3,000만원이 넘어 섰다. 경매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3,500만 원” 조용. 땅! 땅! 땅! 낙찰을 알리는 경락봉이 힘차게 울리고, 이곳저곳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3,500만 원(圓). 비록 우리 것을 거금을 주고 다시 산 격이나 그일에는 돈보다 더 중요한 사명감이 숨겨져 있었다. 이 청자 주전자는 1970년 12. 30일 국보 제133호로 지정되고, 지금은 용인 호암 미술관에 소장되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골동계에 떠도는 비화는 상기의 「문화의 향기 30년-삼성문화재단 발행」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 청자연화문표형주전자는 1963년경에 강화도에서 도굴된 것을 김재숭(金載崇)이 5천만 환에 매입했는데, 화폐개혁으로 5백만 원으로 얘기하기도 한다. 그는 비밀리에 10년 가까운 세월을 소장했는데, 이는 도굴품으로 문화재보호법의 법적 시효를 넘기기 위해서였다. 법적 시효가 지나자, 김재숭은 먼저 이 주전자의 수리를 안동호에게 맡겼다. 안동호는 도자기 수리 전문가로 손잡이의 위쪽과, 주구(注口) 부분을 보름이나 걸려 수리하였다. 며칠이면 충분한 일인데, 오랜 시일이 걸린 것은 워낙 명품이라 원매자를 찾기 위함이었다는 말도 있다. 이 주전자에 눈독을 드린 사람은 차명호였다. 수리가 끝나갈 무렵, 그는 이 사실을 이화여대 김활란(金活蘭, 1899~1970) 박사에게 알렸고, 주전자를 본 김 박사는 무척 탐을 내며 사고 싶어하였다. 그런데 미국 후리아 갤러리에 같은 모양의 청자가 있다고 하자, 결심에 앞서 그 주전자를 먼저 보러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사이에 이병철이 장형수를 중간 책으로 내세워 3,500만원이란 거금을 주고 구입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김활란은 대단히 아깝게 여겼다고 전하며, 김재숭은 감옥살이를 면하려고 그때 받은 돈 거의 전부를 탕진했다는 풍문이 있다. 이 청자 주전자에 대해 굳이 현재의 값을 매긴다면 2백50억원은 호가한다고 모 고미술 잡지가 발표하였다. 당시 20만원 하던 청화백자필통이 현재 10억원을 호가하니, 거래 가격인 5백만 원과 또 국외 전시 출품 때에 산정된 보험료 등을 감안하면 그 정도는 족히 된다는 것이다.
우째 이 도자기를 아는 사람이 없나
청자연화문표형주전자를 소장하게 되자 감개가 무량해진 이병철은 주전자에 걸맞은 연구 자료가 필요했다. 그래야만 이 명품을 세계에 내놓아도 떳떳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한국에는 이병철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줄 만한 학자가 없었다. 우리 나라 고미술계 학자처럼 자신의 나라 문화재에 대해서 학문적 업적이나 감식안을 인정받지 못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유명 모미술관은 매년 위대한 문화유산을 찾겠다는 주제로 시대별로 테마를 정해 국보급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장에는 선조의 예술 혼이 흠뻑 배인 명품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향연을 벌린다. 그렇지만 전시회의 도록을 펼쳐 보면 전시 문화재에 대한 중요한 평론은 거의가 일본인이 쓴 것이다. 고려와 조선의 나전(螺鈿)에 대한 논문은 일본 테즈까야마 대학(帝塚山大學)의 가와다 사다 무(河田貞)가, 고려 불화에 대해서는 나라국립박물관(奈良國立博物館)의 가와하라 유끼오(河原由雄)가 썼다. 참으로 개탄스러기 짝이 없다. 아마도 국내에는 일본인에 버금가는 문화재 전문가가 없다고 판단 내렸거나, 아니면 많은 원고료를 주면서까지 일본 학자의 글을 게재해야만 전시의 권위가 선다고 믿는 문화사대주의적 발상의 결과일 것이다.
이병철은 여러 경로를 통해 청자연화문표형주전자에 대해 논문을 쓸 학자를 찾았다. 그때 그의 머리에 떠오른 사람이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大阪市立東洋陶磁美術館)의 이토 이토타로(伊藤那太郞)관장이었다. 이 미술관은 동양의 도자기를 다수 수장한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곳에 소장된 한국의 도자기는 약 1백 여점이 넘는데, 하나같이 명품에 속하는 걸작들이다. 그 중에서 청자진사목단문학수병(靑瓷辰砂牧丹文鶴首甁)과 청자동녀형연적(靑磁童女形硯滴)은 대단한 명품으로 1995년 ‘대고려국보전’에 출품되기도 하였다. 필자는 호암미술관 소장품관리팀장으로 근무하면서(1993~1996)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전자에 대한 이토타로 관장의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에 대하여」라는 글을 사무실 내에서 접할 수 있었다. 그 글은 이토타로가 영어로 쓴 글을 이 회장에게 보고하기 위해 한국어로 번역된 것의 복사본이었다. 필자는 그 논문의 탁월함은 알 수 없으나, 이 명품 주전자에 대한 유일한 국제적 학술 논문이란 생각이 들어 주목했고, 학계에 논문의 전문을 알리고 싶어졌다. 이 논문의 소유권은 물론 호암미술관에 있지만 그 내용만큼은 여러 사람이 공유했으면 하는 필자의 또 다른 욕심때문이다. 호암미술관의 용서를 구합니다.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에 대하여 이토 이토타로(伊藤那太郞)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관장)
1. 서언
진사 청자(辰砂靑磁)의 가치에 대하여 언급한 것으로는 고히야마 후지(小山富士夫)씨가 그 효시라 할 것이다. 고히야마는 ‘세상 희귀의 지기(珍器)’라고 할 만한 고려청자진사의 유물 중에서 「국립중앙박물관」소장의 청자진사초화운학문도판(靑磁辰砂草花雲鶴文陶板)과 포도당초문주자, 승반(葡萄唐草文注子, 承盤)을 ‘고려 진사 중의 절품’이라고 한 다음 ‘후리아 박물관 소장의 진사연화문주자도 이에 비견할 만한 ’희유(稀有)의 우수품’이라고 간단하게나마 소개했다. 그러나 이 주전자는 뚜껑이 없어서 완전품이라고는 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최대급의 칭찬을 보냈던 것이다.
1970년, 고히야마씨는 다시 고려청자진사표형주자에 대해서 소개하게 되었다. “세부에 이르기까지 후리아 주자와 분별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주자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번에 발견된 주자는 신통하게도 뚜껑까지 갖춘 완전품이다. 또 다행스럽게도 거기에 따른 묘지(墓誌)까지 발견되었다 한다.“ 고히야마씨가 ’전후의 발견에서 가장 중요한 것’ 의 하나로서 소개했던 것도 이유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공예 작품으로서도 편년자료으로서도 그것은 뛰어나게 귀중한 세계적 재보(財寶)라 할만 것이었다. 이어서 1971년,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되었던 「호암 수집, 한국미술툭별전」에서 처음으로 신비의 베일을 벗고 그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어 온 세계의 도자 애호가, 연구자의 눈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현재 호암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가 바로 그것이며, 한국 국보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다.
2.제작 년대와 기법및 조형적 특징
가)편년 자료로서의 의의와 상한 문제
호암 미술관의 고려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이하 ‘호암 주자’‘라 약칭한다)는 경기도 강화도에서 묘지와 함께 출토되었다고 전해진다. 묘지는 가로 152cm, 세로67cm, 두께 5cm의 石製이다. 발견 당초 이 묘지는 최충헌(崔忠獻) 혹은 그의 아들 최이(崔怡)의 묘, 혹은 최이의 서자인 제3대 최항(崔沆)의 묘라고 하는 이설이 있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묘지 명문의 해명에 따라 최항의 묘라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최항은 고려 고종 44년 丁巳(1257) 4월에 사망하고, 같은 해 진양공(晉陽公)에 추증되었으므로 호암 주자가 이 묘지와 함께 나온 것이 사실이라면 주자의 제작 연대의 하한을 1257년이라고 확정할 수 있다. 그러나 상한의 문제에 대해서는 종래의 통설에 따르면 1231년 이후 청자는 몽고군의 침략으로 인하여 쇠퇴기에 들어감으로 호암 주자는 당연히 그 이전의 제작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1231년 이후에도 청자의 질적 수준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천도 후, 강화도 왕궁 내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즉, 청자의 쇠퇴기의 개시를 종래의 통설인 1231년 보다 1250년 전후까지 늦출 가능성을 유념해 두고 싶은 것이다.
나)기념비적인 조형과 대장경 조조(彫造)
호암 주자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같은 모양, 장식, 같은 크기의 유례가 미국 후리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즉 극히 특수한 조형과 기법을 수반한 이 표형 주자가 적어도 3예(他 1例는 함부르크 공예 미술관)가 현존하는 셈이다. 이 사실은 고려청자의 유례(遺例)를 보는 한, 극히 이례적(異例的)인 경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 보아 이 주자는 특수한 용도로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 의하면 최항의 사적 가운데 특필할 것은 다음의 3점이다. 즉, 대장경판 조조의 완성, 강도 축성, 대묘 설치가 그것으로 고종 42년(1255), 왕은 조서를 내려 최항의 공을 포상하고 있다. 최이로부터 최항이 그 사업을 계승하여 이 또한 ‘시재독역(施財督役)’하여 완성하기까지 밀고 나간 것을 ‘고성경찬중외수복(告成慶讚中外受福)’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완성은 고종 38년(1251)의 일이다. 그 해 9월, 고종은 성서문(城西門) 밖에 있는 대장경 판당(板堂)에 행차하여 백관을 이끌고 행향(行香)했다. 「고려사」의 기문에는 ‘왕여군신경립도감십육년이교위(王與君臣更立都監十六年而巧韋)’이라고 쓰여 있는데, 사실상으로는 최이, 최항 2대에 걸친 헌신적 노력에 힘입어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호암 주자가 기념비적 의미를 가졌다면 비로 최이, 최항에게 있어서의 필생의 대사업, 대장경조조에 관련을 가진 것은 아니었을까. 이 가설이 성립한다면 호암 주자의 제작 시기를 대장경조조 년(1236)에서 완성한 해 (1251)까지의 기간에 비정(比定)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다)호암 주자의 조형적 특질
①복고주의적 경향 주자의 진사단독부채(辰砂單獨賦彩)는 상감 기법의 도도한 흐름의 한가운데서 상감 기법을 거절하고 제작되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무언가 명확한 제작 의도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상감 기법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해명되지 않고 있지만 12세기 중엽 무렵부터 크게 성행하여 14세기말에 이르기까지 청자의 제식기법의 왕좌의 위치를 계속 점하여 왔다. 이 상감 기법에 의하여 추구된 조형 표현의 목적은 첫째로 문양장출(文樣長出)의 균질한 선명화(鮮明化)와 둘째로 필묘로는 얻을 수 없는 문양의 경질적, 구축적 의장화였다. 문양을 보다 효과적으로 표시하려고 하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유질의 투명감의 향상에의 노력에 이어져 간다. 12세기 전반에 있어서의 유색[비색(翡色)]에의 추구는 보다 선려한 문양 표출에의 노력으로 바뀌어졌다. 그런데, 13세기의 어느 시기에 있어서 이러한 유색 경시에의 경향에 크게 브레이크가 걸리고 한 것이 호암 주자에서 볼 수 있는 상감 기법의 기피가 아니었을까. 호암 주자에서는 일부에 소성 얼룩은 있지만 전체로서는 담녹색을 띤 밝은 청자색을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유덩어리에 있어서는 유색의 아름다움은 일찍이 비색 청자를 연상케 하는 깊은 투양감(透亮感)을 지닌 것이다.
진사의 부채법(賦彩法)에 대해서는 12세기 전반에 보이던 단독 부채(單獨賦彩)의 예에 따라 연화문의 주록부나 주수구의 지주, 동자의 무릎이나 넝쿨 끝의 새싹 부분 등에 한해서 청자의 소지(素地)에 직접 동홍정색제(銅紅呈色劑)를 바르고 있다. 백상감 위에 겹쳐서 점철(点綴)하면 진사의 발견 효과가 배가하는 것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감히 곤란한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 같다. 동부의 연화문이나 손잡이에 배치된 백퇴화점(白推花點)도 11세기말로부터 12세기 전반에 걸친 작례(作例)에 간혹 볼 수 있던 가식법(加飾法)이다. 이로 볼 때 유색이나 진사부채법에 있어서 호암 주자는 하나의 복고주의적 주장을 수반한 조형인 것같이 생각된다. 호암 주자의 기형적 특징 중에서도 주둥이가 비교적 크고 표형 주자로서는 유례가 없는 단추형 낙하 뚜껑을 수반하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이 단추형 뚜껑은 연화의 봉우리의 끝을 본뜬 것이지만 12세기 전반에 많이 제작된 죽순형 주자에 있어서는 오히려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기형의 면에서 관찰하더라도 거기에는 12세기 전반의 조형에 대한 복고주의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호암 주자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장식 모티브는 연화문이다. 상동부와 하동부의 거의 전면에 복연화문을 양각으로 본뜨고, 잎맥을 가늘게 프리핸드로 음각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자양각연화문표형주자에 그 유형이 인정된다. 또한, 연화문의 양각에 의한 주록부의 표현은 일본 대판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죽순형 주자에 그 유형이 인정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작례는 12세기 전반의 전형적 작례이며, 연화문을 모티브로 한 장식 기법에 있어서는 복고주의적 경향은 분명할 것이다.
②조형적 특징
그러자 호암 주자에 있어서 가장 특색 있는 장식은 상동부와 하동부 사이의 잘록한 곳에 연지를 설치하여 연꽃 봉오리를 안고 있는 동자의 조각을 배치한 사실이다. 약간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굽혀 가슴에 연꽃 봉오리를 안으면서 합장하는 동자의 모습은 그 주변의 조형과 함께 고려청자 중에서 가장 경허하고 청정한 분위기를 풍기며, 불교적 모티브에 근거한 조형 중에서는 고려청자 유일의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 점에 호암 주자의 제작 의도가 깃들인 것이다. 즉, 많은 점에서 12세기 전반의 조형에 대한 복고주의적 표현이 시도되는 가운데서 이 연지 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조망적(彫塑的) 장식만이 돌출하여 고려청자의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참신하고 화려한 조형을 창출했던 사실은 미증유의 국난에 직면하고 있었던 시대 배경을 생각할 때, 실로 놀랄 만한 표현 의욕이며 거기에 호암 주자가 갖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③복고주의의 배경
호암 주자의 조형적 특질 중에서 간혹 12세기 전반, 고려청자 최성기의 조형에 대한 복고주의적 경향이 보여지는 사실을 지적했다. 호암 주자의 제작에 대장경판조조가 어떠한 의미에서 관여하고 있었다고 하면 이 복고주의적 경향의 존재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즉, 요행히 충만한 과거에의 복고 운동을 통하여 현실적으로 덮쳐 온 재난을 제거하려고 했을 것이다. 청자의 제작에 대해서도 과거에 영광이 있었다. 그것은 12세기 전반이라고 하는 시기이며 이 고려청자의 최성기가 대장경조조에 의해서 거란의 침공을 방어할 수 있었던 현종 년간과 시기적으로 어긋났다고 하더라도 영광의 시대였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호암 주자의 발주자는 영광의 시대의 전통적 조형의 재현을 명하고, 그에 의하여 불교 가호를 기원하려고 했을 것이다. 동시에 거기에 가장 참신하고 화려한 장식을 가함으로써 보다 강한 서원의 마음을 의탁했을 것이다.
3.결론
호암 주자는 동형(同形), 동의장(同意匠), 동촌수(同寸數)의 작례가 달리 있고 복수 제작이 계획되었다. 또한 공예적 특질 중에 12세기 전반의 조형에 대한 복고주의적 표현을 엿볼 수 있었고, 그 안에 동시에 참신, 화려하고 그러면서도 불교적 모티브를 살린 조형적 창의를 시도하고 있다. 이들 사실에서 그 제작에는 무언가 기념비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 같이 생각된다. 그것은 최씨 무신 정치의 번영을 기반으로 한 제 2대 최이, 제 3대 최항의 필생의 대장경조조에 관계되는 특주품이 아니었을까. 이 가설이 성립한다면 그 제작의 시기를 대장경판조조 개시년(1236)에서 완성년(1251)까지의 기간으로 추정할 수 있다.(전문 게재)
(참고: 「문화의 향기 30년」-삼성미술문화재단, 「한국고미술 통권 7호」-미술저널,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에 대하여」․이토 이쿠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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