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고대 이 땅의 역사에서 ‘기자’의 존재에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에 이익의 ≪성호사설≫을 살피다가 ‘기箕는 우리나라를 가리킨다(箕指我東)’이라는 글을 보면서 이익의 탁월한 견해를 발견하고는 그에 따른 몇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여기에 이익의 견해와 저의 데데한 생각을 풀어 보았어요. 아울러 이익의 원문과 번역문을 볼 수 있도록 열린 민족문화추진회 누리집(http://www.minchu.or.kr/)에 고마움을 전해요. 참고로 오늘날 중ㆍ고등학교 국정교과서 ≪국사≫에서는 ‘기자조선’을 인정하고 있지 않지요.
기자와 교격
이익의 글 첫머리는 다음과 같아요.
맹자孟子가, “기자箕子 교격膠鬲ㆍ미자微子 미중微仲ㆍ왕자王子 비간比干이다.”고 했는데, 분명히 기箕ㆍ미微ㆍ왕王은 땅 이름이고, 자子는 작爵의 칭호요, 교격ㆍ미중ㆍ비간은 이름이다.
이익은 맹자의 말을 분석하면서 ‘기자’의 ‘기’가 성姓이나 명名의 일부가 아니라 땅 이름이라는 견해를 강하게 밝히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익의 견해대로 ‘기자ㆍ미자ㆍ왕자’는 작위명이 되고, 각각의 뒤에 있는 ‘교격ㆍ미중ㆍ비간’은 앞의 작위를 받은 사람 이름이 되겠네요. 곧 기자의 이름이 교격이라는 것인데,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 “기자箕子는 성姓이 자子, 이름은 서여胥餘다.”라고 되어 있고, 민족문화추진회의 옮긴이도 위의 인물을 모두 여섯으로 보고 위의 이름에 ‘ㆍ’을 각각 넣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익의 견해에 모순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작위명과 이름을 각각 섞어서 말한 맹자의 발언 자체에도 모순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맹자의 발언과 이익의 견해를 따르고자 저는 ‘ㆍ’을 교격과 미중 사이에 두고 맹자가 말한 사람은 모두 세 사람으로 보고자 해요. 그리고 ‘기자’라는 작위를 받은 사람으로 ‘교격’과 ‘자서여’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해요. 그래서였을까요. 이익의 다음 이야기에서는 마치 ‘기자’와 ‘교격’을 다른 사람으로 보고 있어요.
기자의 사회 계급
맹자는 또, “교격은 고기 잡고 소금 굽는 사람들 틈에서 등용되었다.” 했는데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것을 함께 지적한 것을 보면 이는 해변을 가리킨 것이니, 그가 과거에 서민이었던 까닭인가 보다. 은殷의 제도는 임금의 아들일지라도 그를 먼 곳으로 내보내어 인민의 어려움을 겪게 한 일이 있으니, 무정武丁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기자도 고기 잡고 소금 굽는 곳에서 등용되지 않았을 줄 어찌 알 수 있으랴?
맹자의 발언과 은의 제도, 그리고 무정의 사적을 인용하면서 이익은 ‘기자’라는 사람이 처음부터 자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교격처럼 일반 서민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펼치고 있는데, 확실히 이 부분은 이익이 ‘기자’라는 작위를 가진 사람의 이름이 바로 뒤에 나오는 ‘교격’으로 보고 있지 않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어요. 그렇다면, 맹자의 발언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이익은 더 이상의 생각을 내놓고 있지 않아 아쉽지만, 안정복처럼 기자의 이름을 확실하게 밝히면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왜냐하면, 안정복이 이익의 제자였고, 이익은 분명 기자의 본명을 알고 있었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위 인용문 가운데 ‘기자도 고기 잡고 소금 굽는 곳에서 등용되지 않았을 줄 어찌 알 수 있으랴?’ 라는 구절을 ‘자서여도 고기 잡고 소금 굽는 곳에서 등용되지 않았을 줄 어찌 알 수 있으랴?’라고 서술하여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기箕는 왕검조선인가 은상의 영토인가
기箕라는 나라는 곧 우리나라를 가리킨 것이다. 분야分野로 따진다면 우리나라가 기箕와 미尾의 지점에 해당되고 서쪽 지역이 기의 위치가 된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단군檀君 왕조의 말기에 기자가 이 기수箕宿의 지점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이 땅에서 봉작을 받은 것일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고기 잡고 소금 굽는 바다”라는 것이 무엇을 지적하여 말했단 말인가? 또 기가 다른 지방이라면 어째서 자기가 봉작을 받은 곳을 버리고 그 칭호를 썼겠는가? 은殷의 역사에서 쓴 칭호는 봉작을 받은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지, 봉작을 받기도 전에 이 칭호를 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주紂가 멸망하기 이전에 벌써 기자의 신기한 교화의 은택을 받았던 것이다.
여기서 분야分野란 고대 갈벌(西原, 곧 지나) 사람들이 하늘의 28개 별무리를 기준으로 지상의 방향을 정한 내용이어요. 곧 밤하늘 기수箕宿가 떠 있는 방향이 바로 왕검조선의 영토가 있던 곳이라는 셈이 되는데요. 4개의 별로 이루어진 기수는 그 생김새가 키(箕)와 같다고 해서 기수라는 이름이 붙었지요. 이 부분은 이익의 탁월한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자서여’라는 ‘기자’에 대해 성인 대접을 했던 까닭에 감히 ‘자서여’라는 이름을 함부로 쓰지 못하고 ‘기자’라는 보통 이름씨를 마치 특정 이름씨처럼 썼지요. 그럼에도 이익은 ‘기자’가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라 기 땅에 작위를 받은 사람이라면 붙일 수 있는 일반 이름이라는 것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익의 후대 학자이자 이덕무의 손자로 평생을 학문에 몰두한 이규경은 이익의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을 펴고 있어요. 조금 길지만, 눈여겨 볼만하다 여겨지기에 여기에 옮겨보도록 하지요.
내가 살펴보건대, 성호(星湖, 이익의 호)의 조선이 기성箕星의 분야이기 때문에 조선에 봉작됨으로써 기자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말은 옳지 않은 듯하다. 갈벌(西原, 곧 지나)의 사책과 경전에서 기자와 미자微子를 모두 상商 시대의 인물로 일컬어 놓았다. ≪서경書經≫ <미자지명微子之命>에 따르면, 미자가 주周로부터 대체로 나라(國)만 받고 작호爵號는 받지 않았으니, 나라를 받은 것은 선왕先王의 제사祭祀를 단절시키지 않고 받들고자 함이었으며, 작호를 받지 않은 것은 주에 신하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절조節操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미자라고 칭하였던 것이다. <미자지명>의 공씨(孔氏, 공안국孔安國) 전傳에, “미微는 기내畿內의 국명國名이요, 자子는 작호爵號다.” 하였다. 미자가 죽자 그의 아우 연衍을 세웠으니, 이가 곧 미중微仲이다. 그러나 연은 그의 형 미자를 이어 송宋을 계승한 것이지, 미微를 계승한 것은 아닌데도 미중이라고 칭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는 바로 미중의 마음이 미자의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의 아들 계稽에 이르러서는 촌수가 이미 멀어졌으므로 비로소 송공이라 칭한 것이다. ≪서경≫ <홍범洪範>에는 ‘십유삼사十有三祀’ 라 하였고, <미자지명>은 구대舊代의 작호로 편篇을 명명하였으며, 홍범의 ‘기자가 이에 말하였다(箕子乃言曰)’라는 것 또한 구대의 작호를 존속시킨 것이니, 여기에서 남의 지조를 억지로 빼앗지 않은 무왕武王ㆍ주공周公의 어진 마음을 알겠다. 그러니 미자와 기자는 똑같은 경우다. 기자의 묘정비廟庭碑 딸림글에, “기자의 이름은 수유須臾인데 은실殷室에서 기箕에 봉해졌기 때문에 기자라 부른 것이다.” 하였으니, 기자에 대해 ‘기箕는 나라 이름이고 자子는 작호다.’ 한 말이 어찌 은대殷代에 받았던 명확한 증거가 아니겠는가.(이규경 <檀箕爲國號辨證說, 附三韓> ≪오주연문장전산고≫[경사편5 논사류1])
이규경은 ‘기자’라는 명칭이 이익의 견해처럼 ‘기수’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기’라는 은의 영토 안에 있던 나라 이름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지요. 곧, ‘기’가 왕검조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 이익은 “기가 다른 지방이라면 어째서 자기가 봉작을 받은 곳을 버리고 그 칭호를 썼겠는가.” 라고 맞서면서 ‘기’는 왕검조선을 가리키고 있는 표기임을 강조하고 있지요. 한편, 이규경의 지적 가운데 ‘기자’라는 칭호가 ‘은대’에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이익도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논의를 이끌어가도록 하겠어요.
이익의 한계와 ≪삼국유사≫
하지만, 이익의 탁월한 생각은 아쉽게도 여기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었네요. 이익은 마치 ‘기자’의 작위를 받은 자서여가 은 말기에 왕검조선으로 와서 단군이라는 지배자를 대신하여 교화의 은택을 펼쳤다고 하는 자신의 생각을 적고 있는데요. 이 생각에 이르러서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워지네요. 게다가 이때를 마치 왕검조선의 ‘말기’라고 보는 시각에 대해서는 더욱 긍정하기가 어렵고요. 실제 당시 말기에 접어든 왕조는 왕검조선이 아니라 은이었거든요.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 <고조선>의 끝 부분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네요. 곧, 기자가 조선에 봉해지자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 이야기를 이익의 생각에 맞추어 풀어보도록 하면, 은 말기 자서여라는 인물이 왕검조선에 ‘기자’라는 작위를 받아 왔고, 이에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겼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를 남의 나라의 작위를 받은 이에게 순순히 내어줄 지배자가 있을까요. 곧, 이익의 생각처럼 자서여라는 기자가 단군을 대신해서 왕검조선을 다스렸다고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기≫의 딸림글에 보이는 ≪괄지지≫에 따르면, 자서여라는 기자는 은의 마지막 임금 주의 실정에 대항하고자 미친 척을 하다가 결국 옥에 갇힌 신세가 되거든요. 하지만, 은이 주에게 멸망하기 전 자서여가 기자라는 작위를 받고 왕검조선에 왔다는 이익의 견해를 인정하면서 감히 제 생각을 붙인다면, 먼저 ≪삼국유사≫의 내용을 마치 자서여가 ‘기자’가 되어 왕검조선에 왔기 때문에 단군이 마지못해 장당경으로 옮겨간 것처럼 새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또 자서여라는 기자가 왕검조선의 실제 지배자가 되었다고도 새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은 왕조의 입장에서 볼 때 기자는 기 땅의 자작이겠지만, 왕검조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은 왕조가 파견한 일개 관리였다고 생각할 수 있거든요. 오늘날 관료 체계로 말하자면, 외교관 직위에 가까운 것이 ‘기자’의 실체라고 여겨지거든요.
그런데 여전히 걸리는 문제가 자서여라는 기자가 왕검조선에 오자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겼다는 내용이어요. 마치 왕검조선의 지배자인 단군이 지배자의 모습을 포기한 듯한 인상이 짙거든요. 여기서 최우선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실은 자서여라는 기자와 왕검조선의 무력 대립이어요. 그래야만 왕검조선의 지배자인 단군이 도읍을 옮기게 되는 사건이 발생할 수 있으니까요.
한편, 다른 방향으로의 상상력이 허락된다면, 당시 왕검조선 자체 제도에서 외교관을 접대하는 예식 또는 제도에 따라 자서여라는 기자가 은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왕검조선에 오자 지배자인 단군이 장당경이라는 별도別都로 옮겨 간 것은 아닐까요. 또는 자서여라는 기자가 온 사실과는 상관없이 왕검조선의 지배자인 단군의 천도 계획에 따라 장당경으로 옮겨간 것은 아닐까요. 왜냐하면 자서여가 오기 전 단군이 도읍을 평양에 세웠다가, 그 뒤 백악산 아사달로 옮긴 일이 보이거든요.
이러한 상상력을 가능하게 한 근거는 자서여라는 기자가 왕검조선에 왔다고는 하지만, 이익의 시각처럼 왕검조선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삼국유사≫가 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곧 ≪삼국유사≫에서는 ‘왕검조선’이나 ‘위만조선’에 비교되는 ‘기자조선’에 관한 이야기가 독립되어 있지 않고,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겼지만 뒤에 다시 아사달로 몰래 돌아와 산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만 있지요. 이는 곧 ≪삼국유사≫의 지은이가 왕검조선에서 기자조선으로의 왕조교체를 인정하지 않는 서술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삼국유사≫에서 ‘왕검조선’을 ‘고조선’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위만조선’과 비교하여 시기적으로 앞 선 조선이라는 뜻이거든요.
나가면서
이제까지 이익의 ‘기箕는 우리나라를 가리킨다(箕指我東)’는 글을 보면서 느낀 점을 정리해보았어요. 무엇보다도 ‘기’가 우리나라를 가리킨다는 이익의 관점은 이규경의 비판이 있음에도 탁월한 견해라 여겨지네요. 하지만, ≪삼국유사≫의 내용과 비교하여 볼 때, 왕검조선에서 기자조선으로의 지배계급의 교체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기자가 왕검조선의 단군을 대신해서 지배자로 군림하였다는(이익의 표현으로는 ‘기자의 신기한 교화의 은택’) 견해에 대해서는 인정하기 어려움을 알 수 있네요.
한편, 왕검조선에서 기자조선으로의 왕조교체를 인정한 자료는 ≪제왕운기≫에서야 비로소 나타나거든요. 왕검조선을 ‘전조선’, 기자조선을 ‘후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시켜 노래하고 있거든요. 게다가 ‘단군’의 표기도 ‘壇君’에서 ‘檀君’으로 바뀐 것도 ≪제왕운기≫에서 비로소 나타나고요. 그 뒤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 ≪삼국유사≫의 기록도 중시하는 경향도 있지만, ≪제왕운기≫의 노래를 더욱 중시하여 ‘단군’의 표기를 비롯한 ‘기자’에 대한 갖가지 전설과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역사서술의 재구성은 현재 이 땅에 발 딛고 있는 이들의 몫이라고 보아요. 데데한 글에 강호제현의 아름답고도 당찬 채찍을 기다려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