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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경제][고구려계 성씨①] 진주 강씨晋州姜氏

작성자고리아이|작성시간07.11.23|조회수111 목록 댓글 0
출처 카페 > 겨레의 역사 문화 나눔터 / 극도상존
원본 http://cafe.naver.com/voojiddang/5542

 시조는 고구려의 병마도원사(兵馬都元師)였던 강이식(姜以式)으로 수 문제의 30만대군을 물리치는 등 커다란 공을 새운 분이었다. 그의 후손인 강진이 신라 말 진양(진주) 후에 봉해지며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만주 봉천성 청원현 원수림에 있었으나 지금은 이역인 탓으로 진주시 상봉서동의 봉산사에 위패를 봉안, 매년 음력 3월 10일에 향사하고 있다.

 

 강씨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중엽에 이르기까지 문헌이 실전되어 계보를 밝히지 못하고, 시조의 원손을 중시조로 하는 박상공파, 소감공파, 시중공파 그리고 인헌공 강감찬(姜邯贊)의 아버지 궁진(弓珍)을 중시조로 한 인헌공파등 5파로 분류되어 있다. 그 중 박사공파는 계용의 손자 사첨(師瞻)이 어사를 지낸 까닭으로 어사공파라고도 하며, 시중공파는 원용의 손자 원로(元老)가 관서대 장군을 지내 관서대장군파라고도 한다. 또 인헌공파는 강감찬의 출생지가 금천인 까닭으로 금천 강씨라고도 한다. 진주 강씨는 고려 초부터 무용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는데, 특히 은열공파의 중시조 강민첨과 인헌공파의 강감찬은 다같이 고려조에서 크게 무훈을 세운 명장들이다.

 

 현종 9년 거란의 장군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오자 강감찬 장군은 상원수로서 구주 싸움에서, 강민첨 장군은 부원수로서 자주 싸움에서 각각 우리나라 전사상 유례없는 대승을 거둠으로써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함께 <해동의 명장>으로 일컬어진다. 이들이 개선할 때 왕이 몸소 영파역에까지 마중 나가 잔치를 베풀고 손수 술잔을 권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만 상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5명, 대제학 1명, 원수 및 장군 25명, 명신과 공신 51명, 문과급제자 227명, 청백리 7명을 배출해 가문이 번성하였다.

 

 

 

 

 

<박사공파(博士公派)>

 

중시조 국자박사(國子博士) 강계용(姜啓庸)은 고려 원종 15년 통신사서상관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손자 강사첨(姜師瞻)의 5세손 중 첫째 아들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을 통정공파(通亭公派), 둘째 아들 강회중(姜淮仲)의 후손을 통계공파(通溪公派)로 구분하는데, 이들의 후손에서 가장 많은 인물이 나왔다.

통정공파의 통정 강회백은 고려 말에 대사헌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에 올랐으며, 성리학에도 밝았다. 그의 아들 강석덕(姜碩德)은 세종의 둘째 부인 영빈강씨의 아버지로서 개성유수, 지돈령부지사(知敦寧府事) 등을 지냈으며, 시와 글씨에 능했다.

강석덕의 아들 강희안(姜希顔), 강희맹(姜希孟) 형제는 통정공파의 대표적 인물로 꼽는데, 강희안은 세종 23년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직제학이 되어 정인지, 성삼문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뒤에 단종복위에 연루되었으나 <참으로 현사(賢士)이니 죽이지 말고 중용하라>는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뒤에 호조참의를 지냈다. 그는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이라 불려질 정도로 이 방면에 있어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강구손(姜龜孫)은 그의 아들이고,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강맹경(姜孟卿)은 강희안의 4촌 형이다. 강희안의 동생 강희맹 또한 당대의 문장가이자 서화가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世子賓客)이 되고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통계공파에서는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강사상(姜士尙)과 역시 선조 때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오르고 이조, 병조판서를 거쳐 중추원판사를 지낸 진흥군(眞興君) 강신(姜紳)과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르고,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진 강인(姜絪) 형제가 빼어났다. 정묘호란의 주역으로 불리는 강홍립(姜弘立)도 강신의 아들이다. 특히 강인의 후손은 고종 때에 와서 강준흠(姜浚欽), 강시영(姜時永), 강문형(姜文馨), 강난형(姜蘭馨), 강우형(姜友馨), 강국형(國馨) 등 판서급 인물을 배출해서 명가로 꼽힌다. 이 밖에 인조 때 화포술(火砲術)을 전한 강홍중(姜弘重)이 있다.

 

 

 

 

 

<소감공파(少監公派)>

 

중시조 강위용(姜渭庸)은 사도소감(司徒少監)을 지냈다. -시중공파(侍中公派) 강원용(姜遠庸)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은열공파(殷烈公派)>

 

중시조 강민첨(姜民瞻)은 인헌공파의 파조 강감찬과 더불어 자주대첩의 전공으로 고려사에 크게 무훈을 세운 명장이다. 이 파에서는 특히 강백년(姜栢年), 강현, 강세황(姜世晃)의 3대와 강노(姜老)가 유명하다. 강백년은 조선 현종 때 관찰사, 예조판서,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는데, 문명(文名)이 높았다. 그의 아들 강현은 예조, 형조판서를 거쳐 좌찬성,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강현의 아들 강세황은 한성판윤과 각조 참판을 거쳤으며, 시서화(詩書畵)로 더 유명하였다. 강노는 강세황의 증손자로, 철종 때 대사간,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진주는 경상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烈城)인데 통일신라 문무왕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하였고, 경덕왕 16년에 9주 5소경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淸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에 다시 강주로 환원하였고, 성종 14년에 이르러서 진주(晋州)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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