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당 나라 태종 때 사람으로 벼슬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고구려 영류왕의 요청에 의하여 8학사(八學士)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 나라 문화 보급에 공헌하고 남양(南陽)에 뿌리를 내린 형옹(邢옹)이다.
시조 형옹의 13세손 방(昉)이 고려 충목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이르렀으며, 경남 진주 반성에서 살았다. 방(昉)의 손자 공미(公美)가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충렬왕 6년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왜군을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일등공신에 책록되어 진양군(晋陽君, 진주의 옛 이름)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그를 일세조로 하고 진주(晋州)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진주 형씨는 방의 현손 찬(贊)이 조선조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세째 군소(君紹)가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평양윤을 거쳐 삼도의 순찰사를 지낸 후 이부상서(吏部尙書)·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나 [동문선(東文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해진다. 그의 아우 군철(君哲)은 세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강계부사 등을 거쳐 충청도 병마사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대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그 외 호조 참팜(戶曹參判)에 추증된 세영(世英)은 학문으로 이름났으며, 협(浹)은 효종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 형씨(晋州邢氏)는 남한에 총 1,226가구 5,145명이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등을 집성촌으로 하여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