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오른 방계홍(房季弘)이다. [갑인보(甲寅譜)] 서문에 보면 그의 선계(先系)는 중국 당나라 문소공 방현령(房玄齡)의 둘째 아들로 우리나라에 온 당의 8학사 중 한 분인 방준(房俊)의 9세손이라고 나와 있다. 방준이 우리나라에 온 뒤 당성(唐城, 지금의 남양)에 정착하여 예학(禮學)을 가르쳐 왔기에 남향을 관향으로 하사 받았다 한다.
남양 방씨의 인물로는 계홍(季弘)의 아들 의강(儀康)이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손자 진유(珍儒)는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한편 상호군(上護軍) 주(柱)의 아들 사량(士良)은 공양왕 때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전의시승(典醫寺丞)을 지냈고, 그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구행(九行)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차남 구달(九達)은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을 역임하여 대(代)를 이어 가세를 일으켰고, 사량(士良)의 증손 귀원(貴元)과 옥정(玉精)이 유명했다. 특히 계문(戒文)의 아들 귀온(貴溫)은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중종조에 효행으로 천거되어 참봉과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이 되었으나 기묘사화로 스승이 사사(賜死)되자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만 진력했으며, 남명 조식에게 글을 배운 응현(應賢)은 선조 때 농사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실학자로 명망이 높았다. 그 외 응현의 손자 원진(元震)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고, 광해군 때는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인조반정 후에 찰방(察訪)에 천거되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장생의 휘하에 서 소모사로 활약했으며, 복령(復齡)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선조로부터 <가히 대장부>라는 칭찬을 받고 공신에 책록되어 명성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방씨(房氏)는 남한에 총 5,371가구 22,519명이 경기도 수원시 일원, 화성군 남양면 일원과 전남 담양군 대전면 병풍리 등을 집성촌으로 하여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