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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경제][고구려계 성씨⑦] 사천 목씨泗川睦氏

작성자고리아이|작성시간07.11.23|조회수81 목록 댓글 0
 
 
 
시조는 고려 고종 때 낭장동정(郎將同正)을 지낸 목효기(睦孝基)이다. 그의 선계는 고구려 영류왕 24년 당나라에서 파견되어 건너 온 8학사 중 한명인 목앙(睦秧)이 있다. 목앙은 우리 나라에 온 뒤 사천(泗川)에서 살아, 그 연유로 사천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으며 특히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라 성을 목(睦,화목할 목)씨라고 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목충(睦忠) 목인길(睦仁吉) 목자안(睦子安) 등의 이름이 [고려사]에 보이는데 이들은 모두 무신으로서 정삼품 이상의 관직에 오른 인물들이다. 목충은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고, 우왕조에 조전병마사, 밀직부사가 되어 여러 차례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동지밀직사사에 이르렀다. 충의 종제 목인길은 공민왕 때 기철(奇轍)의 일당을 멸하여 1등공신이 되고, 홍건적의 난 때는 병부상서로 왕의 남행에 호종, 홍건적을 물리쳐 다시 공신이 되어 지밀직사사에 올랐으며, 우왕조에 문하찬성사로 전라도에 침범하는 왜구를 무찔렀다. 목자안 역시 우왕조에 밀직부사로 전라도 부원수가 되어 왜구를 막았고, 다시 강릉킿도체찰사가 되어 평해부에 침범한 왜구를 격퇴했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목세칭 목첨(睦詹) 부자와 첨의 아들인 목서흠(睦서欽), 목장흠(睦長欽), 목대흠(睦大欽) 삼형제가 있다. 목세칭은 조선 중종때의 학자로 김식(金湜)의 문인이다. 그는 기묘사화가 일어나 많은 사림이 화를 입자 청운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그의 아들 목첨(睦詹)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 충청도 관찰사로 있다가 윤원형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뒤에 선조 때 이조참판, 도승지 등을 지냈다. 첨의 아들 3형제 중 맏이인 매계(梅溪) 목서흠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거쳐 효종 초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둘째 목장흠은 형보다 앞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광해군 때 좌부승지. 청풍군수등을 지낸 후 사직했다가 인조반정 후 재기용되어 호조참판. 도승지 등을 지냈으며, 막내 목대흠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을 거쳐 광주 목사가 되었으나 정치가 문란해지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인조반정 후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의, 강릉부사 등을 지냈다.
 이 밖의 인물로는 목씨의 유일한 상신인 목내선(睦來善)이 있다. 그는 서흠의 아들로 허목(許穆)의 문인이다. 효종 때 문과에 급제, 숙종 때 남인의 중진으로서 당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많은 파란을 겪었으며 현종 때 이른바 <제2차 예송>이후 서인이 실세한 데 이어 숙종 초 남인이 득세하면서 형조 호조 예조의 각 판서를 역임하다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삭직되었다. 그 뒤 다시 형조판서에 기용, 좌참찬을 거쳐 우의정이 되고,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차 집권하면서 좌의정에 올랐으나 그 5년 뒤에 일어난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이 실각당하면서 유배되었다. 목장흠의 아들로 숙부 대흠에게 입양한 목행선(睦行善)은 효종 때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목창명(睦昌明)은 숙종 때 남인으로서 병조판사를 지내고 갑술옥사로 삭주에 귀양가서 죽었다.  목씨는 갑술옥사를 고비로 남인의 몰락과 함꼐 세력을 잃었다. 또한 다른 파계의 목호룡(睦虎龍)이 신임사화(辛任士禍)의 고변자가 됨으로써 목씨의 명예가 다소 손상되었다. 순조 초에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천주교도를 탄압하고, 뒤에 판서를 지낸 목만중(睦萬中)도 이 문중의 인물이다.
 
 
우리나라 목씨(睦氏)의 분포사항은 1960년 국세조사 당시 4,167명 1975년 때는 1,192가구그리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1,721가구 7,0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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