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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경제][백제계 성씨①] 장흥 마씨長興馬氏, 목천 마씨木川馬氏

작성자고리아이|작성시간07.11.23|조회수237 목록 댓글 0
출처 카페 > 겨레의 역사 문화 나눔터 / 극도상존
원본 http://cafe.naver.com/voojiddang/5559

 

 

마(馬)씨는 우리나라 토착의 성씨이다. 마씨의 족보는 그 역사가 아득히 2쳔여년을 거슬러 삼한 시대로 까지 올라간다.
마한의 첫 임금이 마겸(馬謙)이며 그가 비로 우리 나라 마씨의 시작이다. 그러나 마(馬)씨의 아득한 조상은 실전되어 마겸 이후의 세계(世系)는 한동한 헤아리지 못한다. 때문에 백제의 건국 공신 마여(馬黎)를 시조로 받든다. 마여는 백제 창건 당시 큰 역할을 해 조간(鳥干) 등 10명의 공신 가운데 으뜸이어서 좌보(左輔)의 벼슬을 얻게된다. 그 후 다시 계보가 끊기다가 마육침(馬陸沈)을 중시조로 삼으며 다시 시작된다. 마씨가는 육침의 9세손에서 목천(木川)과 장흥(長興)으로 분관한다. 고려 문종 때 이부상서를 지내고 훗날 목성군(木成君)에 봉해진 마점주의 두 아들 중 형인 현(鉉)은 세거해 오던 목천(木川)을 본관으로 했으며, 동생 혁인(赫仁)은 장흥을 식읍으로 쓰게 되었다.

 

 목천파(木川派)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관조 현(鉉)의 8세손 천린(天麟)이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이 침입하자 복주로 피난가는 왕을 호종하여 보리일등공신(輔理一等功臣)에 책록되고, 목안군(木安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경수(坰秀)는 신안군(新安君)에 봉군되어 고려 말 무신들의 방자함을 견제하다가 미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송도 선죽교 옆에 살면서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성리학에 정통했던 희경(羲慶)은 명종 22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선조 때 이율곡의 천거로 북부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역학과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일찍이 서경 유수 윤근수(尹根壽) 는 송도를 지날 때 그를 찾아와 <난초는 깊은 계곡에 있어도 향기가 절로 배어난다(在蘭幽谷香氣自襲)>고 그의 깊이 있는 학문과 고결한 인품에 감탄했다고 한다. 한편 효렴(孝廉)으로 극찬을 받았던 희상(羲祥)의 손자 상원(尙遠)은 문장이 뛰어나 당시 <동방문사(東方文士)>로 일컫어진 차천로 형제와 함께 <양차일마(兩車一馬)>로 불리워졌다. 희경의 손자 사종(嗣宗)은 오음 윤두수에게 글을 배웠고 문장과 학문이 뛰어났으며, 주자의 [가례(家禮)]가 현실에 맞지 않는다 하여 당시의 실정에 맞게 [오륜통의(五倫通義)]와 [사례비요(四禮備要)]를 저술하여 우리 나라 고유의 예법을 정립하였다.

 그 외 병자호란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오른 인호(仁浩)와 영조 때 직강(直講)을 지낸 지휘(之徽)가 학유를 역임한 맹하(孟河)와 함께 가통을 이었다.

 

 고려 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개성윤에 이르렀던 혁인(爀仁)이 뿌리를 내렸던 장흥파의 인물로는 관조 혁인의 손자 의유(義裕)가 고려 의종 때 문과에 오르고 홍주 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희원(希願)은 희종(熙宗)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를 지낸 지백(智伯)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태종 때 관산군(冠山君)에 봉해진 치원(致遠)의 아들 영(榮)은 사마봉시경(司馬奉寺卿)을 역임하고 귀향하여 조종이 쌓은 수령산성을 보수하여 왜구를 막는 한편 후학에 진력하다가 후에 곡성 당상촌으로 이거하였고, 만년에 수령군(遂寧君)에 추봉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을 도와 좌명3등공신(佐命三等功臣)에 책록된 천목(天牧)은 영(榮)의 아들로 태종 12년 전라도 병마절제사를 두 번이나 역임하여 당시 해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웠고, 항구적인 왜적방어책으로 광주에 있던 병마본영(兵馬本營)을 도강의 수인산으로 옮겨 장수대(將帥臺)를 만들어 왜구를 방비하니, 그후부터는 왜구가 접근하지 못했다. 또한 세종 원년에 북방육진(北方六鎭) 개척의 필요 성을 역설하여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토록 하였고 도성수축도감제조(都城修築都監提調)가 되어 현재 서울 성곽을 완축하는데 공을 세워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맏아들 승(勝)은 세종과 단종 대에 경상도 수사와 판안주목사, 이조 참판 등을 지내며 청백한 관리로 유명했으나,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일생동안 문의와 충절을 지켰다. 승의 아우 전도 단양 군수를 지내다가 장흥으로 돌아가 예양강에서 시로 회포를 달랬고, 반(珊)은 도강으로 내려가 후진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그 밖의 인물로는 전의 6세손 하수(河秀)가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아들과 함께 향선(鄕船) 10여 척으로 이순신을 돕고 특전대를 조직하여 포위된 아군을 구출하려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구례 현감을 지낸 반(珊)의 6세손 응방(應房)은 진안 현감으로 동생 응허(應虛)·응정(應井) 등과 남원성에서 싸우다가 순국하여 남원의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한편 폭군 연산군의 불의와 패륜에 항거했던 숭조(崇祖)의 5세손 윤(倫)·응훈(應勳)·운종(蕓宗)·창종(昌宗) 5종형제(五從兄弟)가 모두 창의(倡義)하여 의병장으로 진주의 남강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고, 창종의 아들 인호(仁好)는 남강 전투에서 순절하여 충의의 가통을 지켰다.

 

 

인구는 1985년 조사 당시 목천본은 5,233명이고 장흥본은 23,803명이었다.

 

 

장흥은 전라남도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오차현을 신라가 오아로 고쳐 보성군에 속하게 하였다가 고려 때 영암에 소속되고, 인종 때 장흥부에 이어 회주목으로 승격되었으나 충선왕조에 와서 다시 장흥부로 개칭, 여러 변천을 거쳐 고종 32년에 장흥군이 되었다.
목천은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이고, 장흥은 원래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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