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나 건국세력의 주류가 신라계승의식이나 발해계승의식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자료는 없는 반면, 고구려계승의식을 가졌던 것을 보여 주는 자료는 여럿이 발견된다.
㉠ 국호 고려
㉡ 작제건은 고려인 <고려세계>
㉢ 고려옹실의 선대는 고려대족 ≪고려도경≫
㉣ 서희의 발언
㉤ 후당의 태조 책봉 조서(933)
㉥ 고려는 고구려의 재흥_최승로의 태조 정치 평가
㉦ 서경
고려의 고구려계승의식은 신라 계승의식과 배치되는 것이다. 그 고구려계승의식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현대인들에게 이상하게 보일 여지가 있다. 첫째 고려의 영토에 옛 고구려의 중심부를 포함한 그 영토 일부가 포함되나 통일신라의 영토범위를 주축으로 하였다는 점, 둘째 시간적으로도 고구려 멸망 이후 고려 건국까지 200년이 넘는 간격이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한국사개설들에서도 모두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로 서술하고 있으니, 고려의 고구려계승의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평양 고지도_광여도_규장각_http://kyujanggak.snu.ac.kr/
단일 사회로의 일체 의식이 삼국유민의식을 극복하는 단계에 이른 것은 고려중기 이후였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 발달한 민족이념에 의해 더 한층 단일체로서의 인식을 강화한 과정을 거쳤으니, 현대인들로서는 통일신라나 나아가서는 삼국 모두를 ‘우리’의 역사로 당연히 인식을 하게 된다. 그러나 고려전기 이전으로 소급할 경우 옛 삼국주민들 간에는 고려중기 이후 단계와 달리 단일체로서의 집단의식이 삼국유민의식을 누를 만큼 강하지 못하여, 고려전기까지도 정체성正體性 인식에 후자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삼국주민들 간에는 각기 다른 문화적 특색과 정서가 존재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골품제를 고집한 신라와의 관계에서 정복자와 피정복민적인 관계가 해소된 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신라국가 지배체제의 붕괴를 본 것이다. 고구려나 백제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피정복민의 처지에서 쌓여 온 반감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라국가에 대한 반감도 상당히 존재했던 것이다.
신라에 대한 이러한 반감은 그만큼 옛 고구려지역주민들을 기반으로 건국한 고려의 역사적 정체성 인식을 신라와 연결 짓기 어렵게 하였으니, 패망한 고구려의 유민들에 의한 고려를 고구려의 부흥국으로 설정하고 고구려를 계승하는 역사인식을 성립시켰던 것이다. 고려사회에 삼국유민의식을 극복한 역사계승의식이 자리 잡기까지는 좀 더 오랜 세월이 필요하였다.
고려 초 이래의 고구려계승의식은 12세기부터는 큰 변화를 보게 되었다. 고려가 고구려유민의식에 기초하여 동류로서 받아들인 발해 유민들이 그 흔적이 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동화되었다. 남만주지역 발해유민의 현저한 감소로 인하여 12세기부터는 발해유민과의 접촉은 거의 과거사가 되어 버린 것도 고구려유민의식의 또 하나의 현실적 근원을 사라지게 하였다. 또한 삼국 후예들의 융합이 진전되면서 삼한일통의식이 더욱 확고하게 사회적으로 자리 잡아 갔다. 그에 따라 삼국별 계승의식의 분립적 이념 역시 사회적 공감을 받기 어렵게 되었다. 삼국유민의식은 지방에서는 국가적 통일성과 공존하는 향토의식 수준으로 축소되며 전환되어 갔다.
13세기 초까지도 지방민란들에서 삼국부흥이 표방된 것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때의 삼국부흥운동은 지방하층민들이 중앙정부와 연결된 지배층의 수탈에 저항하는 계급적 충돌로서의 민란의 성격을 띠었으며, 후삼국시대와 같은 삼국유민단위의 결집력을 갖기 어려웠다. 골품제에서와 달리 고려국가는 중앙관리층에 전국의 토호세력들이 참여할 제도적인 통로를 마련하고 그들의 참여를 활성화시켜 고려중앙관리층은 전국적인 지역출신을 포괄하였다. 또한 지방에 잔류한 토호세력도 호장층으로 편성하여 역시 지배층에 편입시켰다. 비록 중앙관리층과 토호층 사이의 갈등관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지배층으로서의 게급적 공동 이해관계가 훨씬 컸고, 그에 따른 결속력이 국가단위를 지속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이 시기 삼국부흥운동은 하층민들의 불만세력이 주축이었고, 그 지역 출신 관인을 포함한 지역 지배층들은 많은 수가 그들을 진압하는 편에 섰다. 삼국부흥의 표방은 그 내부의 계급적 이질성으로 인하여 큰 설득력을 갖기 어려웠다. 고려국가 단위의 사회통합이 진전됨에 따라 13세기 초 삼국부흥 표방의 실패를 끝으로 삼국유민의식은 사회적 집단으로서는 그 의미가 극히 축소되어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고, 역사의식과 관련된 잔영만을 일부 남기게 되었다.
14세기 원나라의 압제를 거치며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극히 약화된 14세기 말의 정치적 혼란과 왕조가 바뀌는 과정에서도 후삼국시대와 같은 분열의 조짐은 없었다. 왕씨에서 이씨로 왕실이 바뀌고 정치사회적 일련의 발전적 전환은 있었지만, 지배층은 물론 피지배층 속에서도 국가사회의 단일성은 공고하였다.
20세기 후반 이후 현대에 북한은 고구려, 호남은 백제, 영남은 신라를 내세우는 역사의식은 역사적으로 연속되어 전해내려 온 것이 아니다. 삼국유민의식과 함께 그에 연결되는 분립적인 역사인식은 13세기 이후 무덤 속에 들어가 잠들었다. 현대에 나타난 삼국유민의식은 실체 없는 유령과도 같은 것이다. 그 망령을 다시 살려 내도록 불을 붙이고 기름을 붓고 있는 것은 20세기 후반 이후 한반도 정치지도자들의 권력욕에 따른 교묘한 책동과 지역이기주의에 입각한 제로섬게임에 점점 더 몰입하게 된 한국인들의 정치의식이다.
▲ 평양 고지도_해동지도_규장각_http://kyujanggak.snu.ac.kr/
# 고려의 고구려계승의식은 신라 계승의식과 배치될까. 그리고 고려 사회가 특정한 단일 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가정 또한 오늘날 사회에서 표출된 다양한 의식에서도 무리수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고려 태조가 남긴 <훈요십조>를 보더라도 그 안에는 불교 뿐만 아니라 전래 종교인 무교巫敎_최치원이 언급한 선교仙敎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_가 함께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노명호 2009 ≪고려국가와 집단의식 : 자위공동체ㆍ삼국유민ㆍ삼한일통ㆍ해동천자의 천하≫, 서울대학교출판부, 72∼81쪽과 85∼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