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적 성찰
-‘지금, 이곳’의 모순을 중심으로-
김원열(한양사이버대)
1. 글을 시작하며
현재 사람들은 미국에서 비롯된 금융위기로 역사의 종말을 노래하던 자본주의 체제의 신자유주의가 붕괴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의 위기는 오래 전부터 예견되었지만 사람들은 그 예견을 무시하거나 혹은 매우 머나먼 일로 여겼다. 그런데 하루가 다르게 그 위기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은 한국 사회는 다른 어느 곳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 요즘 주가와 환율이 심하게 널뛰기하는 현상은 마치 거대한 공황의 밑그림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사회에 내재한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표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2008년 5월 2일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촛불은 그 동안 어둠 속에 숨겨진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의 모습을 명확하게 비추고 있다. 촛불집회를 통해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며, 그 모순의 근본적인 해결을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순(矛盾, contradiction)이란 무엇인가? 모순은 단일한 것인가, 아니면 복합적인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순은 어떤 것이 있는가? 만약 다양한 모순이 존재한다면 실천의 대상으로 무엇이 가장 중요한 모순인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모순 가운데 어떤 것이 모순의 주도적인 측면이고 어떤 것이 모순의 종속적인 측면인가? 이 글의 목적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지금, 이곳’의 모순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모순(矛盾, contradiction)은 부정적 함의를 지니고 있으며, 논리학적으로도 모순배제율을 중시한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ēs; 기원전 384-322)나 한비(韓非; 기원전 280?-233)의 모순 개념이 그러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순은 운동과 변화의 근원으로, 만약 모순이 없다면 운동할 수도 변화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회의 변혁을 추구할 경우, 그 사회 모순의 문제를 피할 수 없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규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모순에 관한 수많은 논의들 가운데 현실적으로 의미있는 것은 사회의 운동/변화의 핵심이 바로 모순이라고 보는 것이며, 모순에 대한 이해는 현실 변화에 대한 변증법적 파악으로 풍부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모순은 단일하지 않다. 왜냐하면 현실의 복합성이 모순을 복잡하게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반도 차원의 모순에 대해 생각해보면 휴전선을 기준으로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과의 모순, 이남과 이북의 모순, 이북과 미국의 모순, 이남과 미국의 모순 등과 같은 민족 모순이 있으며, 자본 계급과 노동 계급의 모순, 대자본 계급과 중소자본 계급의 모순 등과 같은 계급 모순이 있고, 강남과 강북의 모순, 서울과 지방의 모순, 지방과 지방의 모순 등과 같은 지역 모순이 있으며, 그밖에도 노동자와 농민의 모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모순, 남성과 여성의 모순, 인간과 자연의 모순, 다수자와 소수자의 모순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모순들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순은 단일하지 않고 복잡한 현실만큼이나 확실히 복합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의 복합성을 전제한다면, 도대체 ‘지금, 이곳’에서 어느 모순이 가장 중요한 모순인가? ‘지금, 이곳’의 중요한 모순을 정확히 파악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실천은 그 중요한 모순을 해결하는 데 집중할 수 있고, 그만큼 수많은 모순들의 해결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금 우리 사회의 모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모순과 그 모순의 양 측면을 파악하는 것은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모순은 다른 수많은 모순들을 제약하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모순을 비롯하여 모든 모순에는 대립하는 양 측면이 있다. 다시 말해 특정 시기 특정 사회에서 모순의 양 측면은 규정적인 주도적 측면과 규정되는 종속적 측면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 사회의 계급모순을 살펴볼 경우, 자본 계급이 계급모순의 주도적 측면이라면 노동 계급은 종속적인 측면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모순의 양 측면을 고정적으로 바라본다면 현실 사회의 운동과 변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그 사회의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역량에 따라 그 모순의 양 측면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으므로, 주도적 측면이 종속적 측면으로, 종속적 측면이 주도적 측면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순의 대립하는 양 측면을 변화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모순의 변증법적 특성을 체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모순에 대한 성찰 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 주체의 문제이다. 단지 모순을 객관적으로 본다고 해서, 그 모순의 해결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모순을 객관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모순을 사실로서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주체의 목적의식적인 실천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서 모순 해결의 주체는 누구인가? 이 주체에 대한 질문은 모순의 성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다시 말해 모순의 성격이 어떠하냐에 따라 모순 해결의 주체도 달라지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지금, 이곳’의 모순과 함께 모순 해결의 주체 문제를 다룰 것이다.
이 글의 본론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첫째, ‘지금, 이곳’의 모순을 개념적으로 규명한다. 특히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의 상호관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한다. 둘째, ‘지금, 이곳’의 중요한 모순에 주목하여 중요한 모순의 주요 측면과 부차적 측면을 살펴본다. 셋째, 중요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주체 문제에 대해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결론에서는 본론의 주요 논의를 간략히 정리하고, ‘지금, 이곳’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2. ‘지금, 이곳’의 모순
지난 5월 2일 촛불이 어둠을 밝힌 것은 직접적으로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문제였으며, 그와 함께 촛불은 교육 문제, 공공 부문의 사영화 문제, 대운하 문제, 방송을 비롯한 언론 문제, 비정규직 노동 문제, 직접 민주주의 문제, 민생 문제 등으로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이 수많은 문제 제기들은 ‘지금, 이곳’의 모순이 무엇인지를 들려주고 있는 생생한 증언이기도 하다. 촛불집회에서 제기되었던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문제를 매개로 ‘지금, 이곳’의 모순에 대해 살펴보자.
잘 알려져 있듯이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문제는 2006년 2월 3일 한국과 미국의 FTA 협상이 이루어지기전에 이미 미국이 요구한 4대 선결요건들 가운데 하나였고, 당시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요구에 굴복하면서 FTA 협상에 나섰으며, 결국 2007년 4월 2일 굴욕적인 FTA 협정을 체결했다. 이와 같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한미 FTA 협정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다. 한미 FTA 저지 운동 속에서 미국산 쇠고기 문제는 중요하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2008년 촛불을 든 사람들은 대부분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하였고, 그 수입을 즉각적으로 반대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든 것은 노무현 정부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도 건강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을 충분한 여론 수렴 없이 매우 일방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이명박 정권을 비판하고 ‘이명박 퇴진’까지 외쳤던 것이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과정과 촛불집회에서 드러난 ‘지금, 이곳’의 모순을 살펴보면, 표면적으로는 촛불을 든 다수의 사람들과 이명박 정권의 소수 특권층과의 모순이 폭발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다수의 사람들을 계급적으로 단일하게 규정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대다수 사람들의 건강 이익 및 국내 축산 자본 계급의 이익과 미국 축산 자본 계급 및 국내 수입 자본 계급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한다는 면에서 그 모순의 계급적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촛불을 든 대다수 사람들을 계급적으로 단일하게 규정짓기 어려운 점은 인정하더라도, 그 사람들 대부분은 자본 계급이 아니고, 다양한 계급의 연합 형태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에 반해 이명박 정권의 계급적 기반이 자본 계급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확하다. 최근 종부세를 둘러싼 논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금, 이곳’의 모순은 자본 계급과 기타 계급 연합간의 첨예한 계급 대립과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본 계급과 노동 계급의 모순은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생산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한, 계급 모순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의 진보적 변화는 계급 모순의 해결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 모순의 기초적인 형태는 자본 계급과 노동 계급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고, 계급간의 대립과 갈등이 고조되면서 태업, 시위, 파업, 구조조정, 손해배상, 직장 폐쇄 등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가장 치열한 형태는 계급 혁명으로 노동 계급이 자본 계급을 적대시하여 계급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의 계급 모순은 어떠한가? 기본적으로 자본 계급과 노동 계급 특히 비정규직 노동 계급의 모순이 엄연히 존재한다. 예컨대 기륭전자, 이랜드, KTX, 코스콤 등을 살펴보면 비정규직 노동 계급과 자본 계급의 모순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순의 양 측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겠지만, ‘지금, 이곳’에서 계급 모순이 매우 중요한 모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의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의 관계는 어떠한가? ‘계급 모순’이 중요한 모순이고 ‘민족 모순’이 부차적인 모순인가? 아니면 ‘민족 모순’이 중요한 모순이고 ‘계급 모순’이 부차적인 모순인가? 이것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실천이론의 과제와 매우 긴밀한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어느 모순을 가장 중요한 모순으로 보느냐에 따라 모순 해결의 방법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모순’에 대한 파악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 고찰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이곳’이라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모순’이 특정 시기에 ‘계급 모순’이었다가, 다른 특정 시기에는 ‘민족 모순’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고정적으로 ‘하나의’ 모순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관념적인 유희로 그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특히 아직까지도 민족해방(NL)이나 민중민주(PD) 가운데 오직 하나만을 고집한다면, 모순의 복합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교조주의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 유의하면서 ‘지금, 이곳’의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의 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민족 모순’은 민족과 민족의 모순 관계를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과 타 민족간에 모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서 ‘민족 모순’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근대 이행기이다. 자본주의 발달 과정에서 형성된 제국주의 국가들 가운데 특히 미국 및 영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일본 민족과 고립된 우리 민족은 대립과 갈등의 모순 관계에 있었으며, 일본의 제국주의 즉 침략적 민족주의에 맞서 우리의 저항적 민족주의는 자주독립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후 그 일제 강점기에 ‘민족 모순’은 가장 치열한 형태인 민족해방전쟁으로 전개되었다. 일제 패망의 날인 1945년 8월 15일 ‘민족 모순’의 해결이라 여겼던 민족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결국 우리 민족은 분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분단체제하에서 ‘민족 모순’은 단지 우리 민족과 타 민족간의 대립과 갈등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상호간에도 모순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의 ‘민족 모순’은 무엇인가?
먼저 휴전선 이남의 경우를 살펴보자. ‘지금’ 이남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등에서도 미국에 종속되어 있다. 이러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2008년 8월 15일 광복절 시청 앞에서 ‘건국절’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기념행사장이었다. 기념행사 내내 연단 앞에서 미국의 성조기를 들고 흔들어대는 것에서 그 노예의식의 전형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반해 1980년 5․18 광주 민중항쟁 이후 미국과의 ‘민족 모순’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졌고, 이후 민족해방운동을 통해 ‘민족 모순’이 광범위하게 폭로되었다. 따라서 오래된 일본과의 ‘민족 모순’과 함께 미국과의 ‘민족 모순’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휴전선 이북을 살펴보자. ‘지금’ 이북은 핵을 둘러싸고 미국과 적대적인 ‘민족 모순’의 관계에서 새로운 관계로 이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일본을 비롯하여 미국과의 ‘민족 모순’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남아있다. 따라서 ‘지금’ 이남과 이북의 공통점은 미국 및 일본과 ‘민족 모순’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민족 모순’의 관계에서 주의할 것은 미국인이나 일본인 전체를 적대시해서는 안 되고, 미국과 일본의 초국적 자본 계급을 제외한 나머지 계급들과는 연대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휴전선 이남과 이북의 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금강산관광과 개성관광이 중단되고, 개성공단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대화 단절의 상황이다. 그 동안의 대화와 교류 그리고 협력 관계의 평화적 성과가 무화되고 과거 냉전 시대 분단체제의 적대적 모순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2000년 6월 15일 남북 공동선언 이후 전개된 상호 이해와 협력 관계 그리고 자주적인 평화통일을 향한 진전이 ‘지금’은 상호 불신과 남북 관계의 악화, 대립과 갈등의 ‘분단 모순’의 심화로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분단 모순’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불신의 장벽을 넘어야 하고, 막혀버린 교류의 물꼬를 터야하며, 첨예한 ‘분단 모순’을 완화하는 것에서 궁극적으로 ‘분단 모순’의 해결인 평화통일을 지상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제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의 관계에서 생각해볼 것은 ‘계급 모순’의 해결 없는 ‘민족 모순’의 해결과 ‘민족 모순’의 해결 없는 ‘계급 모순’의 해결이다. 먼저 ‘계급 모순’의 해결 없는 ‘민족 모순’의 해결을 살펴보자. 만약 계급 모순을 그대로 방치한 채 민족 모순의 해결인 통일을 이룬다는 것은 자본주의식 통일을 의미하게 될 것이고, 계급간의 대립과 갈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이럴 경우 자본 계급이 한반도 전체를 극단적인 이윤 추구의 장으로 만들고 대다수 사람들은 생존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민족 모순’의 해결 없는 ‘계급 모순’의 해결은 어떠한가? 지금과 같이 분단체제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는 속에서 휴전선 이남만이 계급 해방을 이루는 것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분단체제하 민족 모순이 계급 해방의 물적 조건을 극도로 제약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급 모순은 ‘민족 모순’의 해결을 절실히 요구하고, 민족 모순은 ‘계급 모순’의 해결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실천의 측면에서 ‘지금, 이 순간’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모순인가? 이 문제에 대해 한미 FTA 협상이 한창 진행되던 2006년과 2007년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는 과거 냉전 시기에 비해 남북간의 대화와 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민족모순’이 상대적으로 완화되었지만, 상대적으로 FTA를 둘러싼 ‘계급 모순’은 심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계급 모순 즉 초국적 자본 계급과 노동 계급의 모순이 가장 중요한 모순이었다. 그런데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계급 모순뿐만 아니라 민족 모순도 더욱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남북 관계가 경색되고 게다가 대결 국면으로 치닫는 것을 고려하면 실천적으로 어떻게든 민족 모순을 해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이곳,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모순은 ‘민족 모순’이고 이 민족 모순의 자주적인 해결이 가장 긴급한 과제이다.
3. 모순 해결의 대상과 주체
어떤 모순이든 모순에는 양 측면, 즉 주도적인 측면과 종속적인 측면이 있다. 중요한 모순인 ‘민족 모순’의 경우 적극적이고 규정적인 역할을 하는 측면이 주도적인 민족이고 소극적이며 규정되는 측면이 종속적인 민족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과거 일제 강점기에 ‘민족 모순’의 주도적인 측면은 일본 민족이었고, 종속적인 측면은 우리 민족이었다. 제국주의국가였던 일본의 민족이 조선의 민족을 식민 지배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민족’이라고 할 때, 사실은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실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다. ‘민족 모순’에서 일본의 경우 자본 계급, 지주 계급이 실질적으로 주도적인 측면이었고, 우리의 경우는 노동 계급, 소작 계급이 종속적인 측면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 자본 계급과 지주 계급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흔히 일제 강점기 우리의 자본 계급을 ‘민족 자본가’라고 하지만 대다수는 일본의 지배 체제 속에서 매판 자본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고, 지주 계급의 경우도 대다수는 일제의 식민지 분열 지배 정책에 이용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모순 해결의 목표는 민족자주독립이었고, 그 방법은 민족해방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는 소작 계급, 노동 계급이었다.
우리의 치열한 민족해방운동과 국제 정세로 일제 강점기에 모순의 주도적인 측면이었던 일본이 패망하여 일시적으로 종속적인 측면으로 바뀌고, 종속적인 측면이었던 우리는 해방을 맞이하여 종속적인 측면에서 주도적인 측면으로 전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초강대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위도 38도를 기준으로 우리 민족을 분단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새로운 ‘민족 모순’이 등장하였으니, 미국과 소련이 모순의 주도적인 측면을 차지하고, 우리는 여전히 종속적인 측면에 머물게 되었다. 당시 강력한 외세에 맞서 민족해방운동으로 단일한 민족통일국가를 구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시대적 과제였다. 그러나 38선 이남의 경우 친일 세력이 친미 세력으로 변신하면서 이북을 배제하고 이남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분단체제가 본격적으로 성립한 것이다. 단일한 민족 통일 국가를 지향하던 사람들은 주로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분단체제가 성립함으로써 친미 정권에 의해 철저히 배제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해방 이후 냉전기에 우리 민족이 강대국들에 의해 분단되어, 분단체제가 민족의 일상적인 삶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민족해방운동을 통해 분단체제를 해체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것은 분단 시대의 절실한 과제였지만 그 분단체제 극복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예컨대 남북이 서로 대화를 했던 1972년을 생각해보자. 비공개로 은밀하게 진행되었던 회담은 7월 4일 ‘통일의 자주적 해결’, ‘통일의 평화적 방법’, ‘민족적 대단결’이라는 합의를 이루었지만, 이남은 10월 유신헌법에 따라 유신 독재체제가 성립하면서 국내 문제로 통일에 관한 합의가 이행되지 않게 되었다. 또한 1991년 12월 13일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7․4 남북공동성명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면서 ‘남북화해’, ‘남북불가침’, ‘남북교류와 협력’을 합의했지만, 이후 이북과 미국의 대립 속에서 이 합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2000년 6월 15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의 정상이 합의한 ‘남북 공동선언문’에서 통일 문제에 대한 ‘자주적 해결’을 선언한 이후, 비록 핵을 둘러싼 이북과 미국의 대립, 그리고 반민족/반통일 세력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남북간에는 구체적인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2007년 10월 4일 남북 정상이 다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통해 ‘6․15 공동 선언’을 계승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남에서 반민족/반통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교류와 협력의 성과들이 무산되고, 상호 불신과 남북 관계의 악화, 대립과 갈등으로 분단 체제의 긴장이 높아가고 있다. 이와 같이 남북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대화와 교류 그리고 협력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민족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족해방운동이 필수적이며 그 대상은 민족 모순의 원인 제공자인 강대국들 특히 미국이다. 또한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는 우리 민족이 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남과 북이 대화하고 합의하며 공동으로 선언한 주체는 주로 남과 북의 권력자들이다. 분단체제의 ‘민족 모순’을 해결하는 주체가 권력자들이라는 점에서 말로는 ‘민족’을 들먹이지만 사실은 분단체제하에서 각각 자신의 권력 유지와 강화 차원에서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민족 모순’을 자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남과 이북의 권력자들이 주로 지배 계급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이남과 이북의 이런 한계를 고려하면 민족해방운동의 주체가 훨씬 더 확대될 필요가 있다. 민족 문제를 다루면서 민족해방운동의 대상이 주로 강대국의 자본 계급이라는 점과 민족해방운동의 주체가 피지배 계급이라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민족해방운동의 대상과 주체 문제에서 계급적 관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를 민중으로 설정하고자 한다.
‘민중’이란 무엇인가? 무엇보다 민중은 피지배 계급이다. 또한 민중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노동을 통해 가치를 생산하면서도 구조적으로 착취를 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민중은 계급의식과 자주의식을 지닐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서 민중이 중요한 이유는 ‘민족 모순’의 주도적인 자본 계급과 맞서기 위해서는 피지배 계급의 연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민족해방운동에서 민중은 반민족/반통일 세력에 맞설 수 있는 중요한 주체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민중은 어떤 단일 계급이 아니라 통일전선의 구축에 적합한 계급 연합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기존 권력자들인 자본 계급에 맞서 민족 모순을 해결하고 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이 민중이 주체가 되는 것이 적합하다. 민족 통일의 문제에 있어 이남과 이북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통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으며, 이남의 자본주의나 이북의 사회주의가 아닌 다른 새로운 체제를 지향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도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의 해결에 민중이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의 계급 모순을 해결하는 계급 해방의 과제에 대해 살펴보자. 지금 이 순간 민족 모순이 가장 중요한 모순이라면 계급 모순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계급 모순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민족 모순을 해결하는 민족해방운동에서도 계급 모순은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다만 계급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민족 모순의 해결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민족 모순이 가장 중요한 모순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실제 계급 해방이 지금처럼 분단체제의 민족 모순에서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계급 해방을 이룰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미국의 자본 계급에게 종속적인 상황에서는 분명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계급 해방의 대상인 자본 계급을 국내 자본 계급으로 한정할 경우 미국의 자본 계급의 방해로 근본적인 계급 해방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급 해방의 주체는 무엇인가? 고전적인 의미에서 계급 해방의 주체는 프롤레타리아트 즉 산업노동 계급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단지 산업노동 계급만으로는 계급 해방을 이루기 어렵게 되었다. 객관적으로 산업노동자가 계급 모순의 종속적 측면이고, 주체적으로 계급 의식이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산업 구조가 3차 산업의 비중이 커졌고, 노동 계급 구조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본 계급은 구조조정에 따라 노동 계급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고 차별 대우를 통해 양자를 분열시키고자 한다. 그래야 자본 계급이 노동 계급을 지배하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민족 모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제국은 식민지를 지배할 때 식민지의 민족 내부의 차별과 분열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민족이 분열되어야 지배의 목적을 수월하게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급 해방의 주체나 민족 해방의 주체는 단지 과거의 산업노동자가 아니라 광범위한 계급 연합인 민중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민족 모순이 현재 가장 중요한 모순이고 계급 모순이 중요한 모순이라면 다른 모순들, 예컨대 남성과 여성의 모순, 인간과 자연의 모순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선 남성과 여성의 모순에 대해 생각해보자. 여성해방론자들은 흔히 여성 일반으로 남성과 대비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은 남성과 여성의 모순에는 민족 모순이 복합적으로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남과 북이 군사적으로 대결하고 있는 분단체제하에서 민족 모순이 존재하는 한, 양쪽이 모두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계급 모순이 있는 한 여성도 다 같은 여성이 아니라 여성 자본 계급과 여성 노동 계급의 차이 속에서 여성들끼리도 극심한 차별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모순은 생산력 및 환경 문제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 민족이 분단되어 있는 민족 모순의 상황에서는 사회의 생산력 전반을 향상시키는 데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환경 문제 또한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생산력의 향상은 각종 자원의 가장 적합한 이용이 필요하고, 환경 문제의 해결은 한반도 나아가 지구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현재와 같이 이남과 이북이 분단된 상태에서는 생산력의 한계에 이르고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또한 지금과 같은 생산관계로서의 자본 계급과 노동 계급의 모순이 첨예하게 존재하는 한 생산력을 더 이상 향상시키기 어려우며, 환경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게 된다. 왜냐하면 계급적인 착취구조 속에서 생산력 향상을 기대하기 어렵고, 극단적인 이윤 추구 속에서 환경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의 모순, 인간과 자연의 모순 등과 같은 우리 사회의 각종 모순들은 그 자체의 모순도 심각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의 영향을 크게 받고 규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각종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의 모순뿐만 아니라 민족 모순 및 계급 모순과의 연관성 속에서 실천이 이루어져야 한다.
4. 모순 해결을 위한 방법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모순 해결의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지금, 이곳’의 모순은 각종 사회적 문제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 사회적 문제들은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고 있으며, 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 의식을 밖으로 표출하는 경우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광장의 촛불집회에 참여한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을 제기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문제 의식을 지니고 있어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데, 촛불집회를 통해 그 문제 의식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직접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우리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사람이라면, 그 동안 촛불집회에서 거론된 수많은 문제 제기들에 귀 기울이고 그 문제들을 사회적 의제로 삼아 대안까지 모색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모순 해결과 연관하여 밀실이 아닌 광장에서 제기된 각종 문제들을 모순과 연관하여 살펴보자.
우선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의 경우 촛불집회로 이어지고 확대된 계기는 건강에 관한 권리 의식이다. 다시 말해 이미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건강을 단지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닌 사회적 차원의 기본 권리로 자각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건강권이란 것이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더라도 그것을 사회적 차원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일정한 생산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권리이다. 당장 먹고 사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는 곳에서는 사치스런 권리로 오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건강하고 싶은 욕망을 탓하거나 폄하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건강의 욕망을 사회적 차원에서 법과 제도로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급 모순의 측면에서 보면 광우병 쇠고기의 위험성에 쉽게 노출되는 것은 자본 계급이 아닌 노동 계급이다. 예를 들어 자본 계급은 선택의 여지가 상대적으로 많은 반면, 노동 계급은 선택의 여지 없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광우병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군대, 병원, 학교 등에서 벌어지는 단체 급식의 계급성을 고려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법과 제도의 측면에서 볼 때,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문제에서 나타난 독재적 처리 절차에도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게 된 것은 그 만큼 사람들의 민주적 권리의식이 고양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수입 대상 쇠고기에 대한 검역 주권의 문제는 단지 계급 모순의 결과만이 아니라 심각한 민족 모순의 산물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대적으로 일본에 비해 미국산 쇠고기의 검역 조건을 철저하게 관철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미국 자본 계급에 대해 우리의 종속성이 더욱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종속성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근본적으로 광우병 위험 쇠고기로부터 우리의 건강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이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우리 사회에서 미국의 자본 계급의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그 해결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큰 흐름에서 미국의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은 무엇보다 미국을 절대적 존재에서 상대적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 이곳’에서 미국의 자본 계급은 다른 어떤 곳보다 절대적 존재로 우리 사회 모순의 주도적인 측면에 해당한다. 예컨대 분단 체제의 원인을 제공한 미국의 자본 계급은 정보를 독점한 상태에서 자국의 군대를 여전히 주둔시키며 우리 사회를 좌지우지하면서 각종 모순을 심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사회의 많은 부문이 미국에 종속되어 있기에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 즉 자본주의의 위기가 우리에게 오히려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미국의 자본 계급이 망한다고 우리도 함께 망할 수는 없다. 그래서 현재 미국 자본 계급에게 종속적인 우리 사회가 살아나는 방법은 계급간의 연합을 통해 대응하고, 민족의 대단결이 이루어져야 하며, 다양한 나라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여 미국을 절대적 존재에서 상대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미국의 존재를 상대화시키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가 미군 철수인데, 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다면 한반도에 외국 군대가 없게 될 것이고, 비로소 남과 북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한반도 문제를 풀어나가며, 자주적으로 통일을 실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미국 또한 자체적으로 미군의 단계적 철수 계획이 있는데, 한반도의 평화와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는 단계적인 방식이 아니라 즉각적인 방식으로 미군 철수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남과 북의 민중이 전쟁이 아닌 평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평화를 위해 최대한 힘을 합쳐야 한다. 그래야 남과 북의 민중이 상호 이해와 인적/물적 교류를 확대할 수 있고, 서로 공동 번영의 길을 모색할 수 있으며, 결국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통일은 이남의 자본주의도 아니고 이북의 사회주의도 아닌 민중이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새로운 이념과 체제라야 한다. 촛불집회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과 연관하여 이 새로운 이념과 체제가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촛불의 함성들 가운데 어린 학생들이 제기한 교육 문제는 의료, 전기, 가스, 수도 등과 함께 공공성의 문제에 속한다. 자본주의 이념이 시장만능과 무한경쟁을 요구하는 한, 공공성은 심각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공공성의 파괴에 고통을 받을 사람은 대다수 민중이기에 새로운 이념은 공공성이라는 가치 기준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공공성의 측면에서 극단적인 이윤추구를 보장하는 시장만능과 약육강식으로 최고의 승자가 모든 것을 혼자 독차지하게 되는 불공정한 무한경쟁을 철저히 비판하면서 대안으로서의 민중 이념을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체제는 민중의 삶의 질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는 법과 제도로 뒷받침 되어야 한다. 현재 교육의 공공성을 망각하고 오직 사적인 능력을 총동원하여 불공정한 무한경쟁으로 아이들을 내모는 것은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고 이러한 결과는 전적으로 기존 성인들에게 책임이 있다. 새로운 교육 체제는 돈에 따라 운명이 좌우되는 불공정한 무한경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무한협력을 통해 자아의 실현과 공동체 의식의 함양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방향에서 새롭게 성립되어야 한다. 교육을 포함하여 공공부문이 자본 계급의 사적 욕망에 희생되지 않고 민중의 이익을 확보하는 사회적 공공성을 바탕으로 할 때 새로운 이념과 체제가 실제로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이념과 체제는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직접민주주의의 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이념과 체제는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과 합의를 필요로 하며, 공유된 합의를 즉각적으로 실천하는 가운데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직접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촛불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계급적 특징은 단일 계급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계급 연합이다. 특히 지식정보화 사회의 세례를 받은 누리꾼들의 경우 계급이 다양한데도 서로 힘을 합쳐 공동의 목표에 헌신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에서 촛불집회가 계급 연합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촛불집회의 직접민주주의 성과를 의식의 측면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촛불집회에 처음 참여한 사람이 개인주의적 성향을 지녔더라도 뜻을 함께 하는 공동체 의식을 지니게 된다. 남의 문제로만 여겼던 것을 자신의 문제로 삼을 수 있는 공동체 의식이 참여와 토론 그리고 실천 속에서 형성된다. 둘째, 촛불집회의 직접민주주의 체험은 과거에 노예의식을 지녔던 사람이라도 주인의식을 지니게 만든다.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실천을 하며, 당당하게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주인의식이 촛불집회 속에서 형성된다. 셋째, 민주적인 방식으로 직접 참여한 사람은 촛불집회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현실 권력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과정에서 권력의 계급적 본질에 대해 깨닫는 계급 의식을 지니게 된다. 넷째, 사회적 문제들이 지닌 모순의 복합성에 대해 자각하면서 현실 권력의 배후에 존재하는 모순에 대한 의식의 고양을 체험한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의 수많은 문제들과 복합적인 모순들을 통합적인 차원에서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촛불민주주의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자본 권력은 모순에서 여전히 주도적인 측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집회의 촛불들은 자본의 폭력 앞에서도 불을 끄지 않았으며, 최근에는 객관적으로 약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도시 유격대처럼 갑자기 나타나서 ‘퇴진 이명박’과 ‘해체 한나라당’을 외치고, 어느새 수많은 민중 속으로 흩어져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지금까지 촛불집회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과정을 보면 촛불집회의 직접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의 각종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다양한 방식으로 계승되어, 결국 새로운 이념과 체제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새로운 이념과 체제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금, 이곳’에서 자본 계급의 독재로부터 촛불집회의 직접민주주의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민중의 직접민주주의는 정치적 자유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정치 체제이다. 집회와 시위의 정치적 자유가 없다면 직접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온갖 탄압에 맞서 민중의 집회와 시위가 계속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새로운 이념과 체제로서 민중의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정치적 자유인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 자유는 반드시 사상과 표현 그리고 결사의 자유를 그 핵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사상과 표현 그리고 결사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을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이념과 체제는 자유로운 사상과 표현 그리고 다양한 결사체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민중의 직접민주주의를 확장하여 자본주의식 경제 및 사회체제의 문제를 비판하고 대안적인 경제 및 사회체제를 적극적으로 모색하며 끊임없이 실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사회적 비판과 모색 그리고 실천은 ‘지금, 이곳’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실제로 각종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5. 글을 맺으며
지금까지 ‘지금, 이곳’의 모순을 중심으로 각종 사회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보았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사회 문제들과 관련된 모순은 결코 단일하지 않으며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 이곳’의 모순이 복합성을 지니고 있기에, 그 모순의 해결도 통합적인 방법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 모순의 복합성과 통합적 해결 방법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모순을 파악하는 것이고, 그 모순의 해결 과정에서 ‘계급’과 ‘민족’은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여길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계급’이 없는 민족 해방은 결과적으로 극소수 계급만의 극단적인 이익 추구만을 의미하게 될 것이고, ‘민족’이 없는 계급 해방은 실현 가능성 자체가 거의 희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의 관계를 상호연관된 것으로 파악하고, 그 모순의 해결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모순에 관한 논의에서 어떤 모순이든 양 측면, 즉 규정적인 주도의 측면과 규정되는 종속의 측면이 있다. 그런데 만약 모순의 양 측면을 형이상학적으로 본다면 현실 사회의 운동과 변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되고, 결과적으로 모순의 해결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에 반해 모순의 양 측면을 변증법적으로 본다면 그 사회의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역량에 따라 그 모순의 양 측면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순의 주도적 측면이 종속적 측면으로, 종속적 측면이 주도적 측면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그 변화에 소요되는 시간과 주어진 공간에 따른 실천의 차이는 있어도, 이러한 모순의 양 측면이 변화하는 것은 인류가 걸어온 길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모순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 사실 인식만으로는 모순을 해결할 수 없으니, 바로 주체의 목적의식적인 실천이 있어야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실천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모순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촛불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되는 실천 주체로서 민중을 살펴보았다. 넓은 의미의 계급 연합으로서 민중은 ‘지금, 이곳’의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을 극복하고,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의 새로운 이념과 체제를 형성하는 데 매우 적합한 주체이다. 이미 새로운 민중은 직접민주주의의 광장에서 목적의식적으로 과감하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실천하고 있다. 새로운 민중이 변혁의 주체로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곳’의 모순이 아무리 복잡하고 그 모순 해결이 결코 쉽지 않아도 거대한 진보의 발길을 멈출 수는 없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진보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실천 속에서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촛불집회는 위대한 직접민주주의의 대장정에 소중한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앞으로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직접민주주의의 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면서, 극소수인 1% 특권층과 대다수인 99% 민중의 계급적인 대결 구도를 형성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계급 연합인 민중이 오직 극소수 자본 계급만의 이익을 추구하며 반민족적인 행위를 일삼는 이명박 정권을 고립시키는 전략은 매우 중요한 실천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자본의 독재에 반대한다면 어떤 계급, 어떤 정파, 어떤 사람도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그래야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을 통합적으로 해결하며 새로운 이념과 체제로서 민중의 직접민주주의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곳’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어떤 단일한 계급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계급 연합으로서 민중이며, 민중만이 직접민주주의의 실질적인 주체가 될 수 있다. 촛불집회 과정에서 보여주고 있는 민중의 계급적 다양성은 새로운 이념과 체제인 민중의 직접민주주의 이념과 체제를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창조성의 원천이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민중이 함께 촛불을 밝혀들고 즐겁게 만나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투쟁하는 가운데 각종 문제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공유하고, 유쾌한 풍자와 발랄한 놀이 그리고 풍성한 민주주의의 잔치가 펼쳐지면서 공동체적 삶의 기쁨을 향유한다. 그 광장의 대화와 투쟁 그리고 잔치 속에서 직접민주주의의 이념이 새롭게 형성될 것이다. 그리고 민중이 현재의 지배체제에 치열하게 저항하면서 대안 체제로서 직접민주주의를 향해 힘차게 행진할 때, 비로소 직접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민중은 ‘지금, 이곳’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해방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참고문헌
김원열,「동북아시아 삼국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시대와 철학』제 16권 3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05.
김원열,「민중의 관점에서 바라본 문화대혁명」,『시대와 철학』제 14권 2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03.
김원열,「민중이란 무엇인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제10차 한국사회문제연구분과 발표문, 2004년 6월.
김원열,「지금, 이곳의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제59차 한국사회문제연구분과 발표문, 2008년 10월.
김원열,「촛불 집회의 쟁점과 사회적 의미 그리고 이후 전망에 대한 고찰」,『icoop생활협동조합연구소 제9회 포럼자료집』, icoop생활협동조합연구소, 2008.
김원열,「촛불집회,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갈 것인가」,『한국사회포럼2008자료집』, 한국사회포럼2008조직위원회, 2008.
김원열,「한․미 FTA와 공공성 문제에 대한 사회철학적 비판」,『한․미 FTA와 한국의 선택』, 한울, 2007.
김원열,『중국 철학의 인간 개념 연구』(증보판), 한국학술정보, 2008.
노르베르토 보비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황주홍 역, 문학과 지성사, 1992.
로버트 달, 『민주주의』, 김왕식 외 역, 동명사, 1999.
베링턴 무어,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진덕규 역, 동명사, 1985.
샤오메이 천, 『옥시덴탈리즘』, 김정아 역, 강출판사, 2001.
에드워드 W.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역, 교보문고, 1991.
中共中央文獻編輯委員會 編, 『毛澤東選集』1-4, 北京, 人民出版社, 1991.
최장집,『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2.
*** 이 글은 2008년 11월 7일 학술단체협의회 2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 및 토론된 발표문으로, 김원열 저, 김원열 박사 진보를 말하다(도서출판 솟대, 2012) 15-43쪽에 수록되어 있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