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호킹, 시간의 역사 중에서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는 무엇이며, 우주와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주의 현황은 왜 이러한가?
이런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우주관'을 선택한다. 마치 평평한 지구를 떠받치는 거북들의 무한한 탑이 이러한 우주관의 하나이듯이, 특급의 끈(superstring)의 이론도 그러하다. 두 가지가 모두 우주에 대한 이론이다. 다만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더 수학적이고 정확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두 이론은 모두 관측적 증거가 없다. 누구도 지구를 등에 업은 거대한 거북을 보지 못했겠지만, 그렇다고 특급의 끈을 본 사람도 없다. 그러나 거북의 이론은 사람들이 지구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예언하므로 좋은 과학적 이론이라 할 수 없다. 이것은 경험과 들어맞아본 일이 없다. 버뮤다 삼각해역에서 실종되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는 한 말이다.
우주를 기술하고 설명하는 최초의 이론적 시도는, 모든 사건이나 자연 현상이 신령(神靈)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생각과 관련되어 있다. 신령은 인간의 감정을 가졌으며, 극히 인간적으로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 신령들은 자연물-강, 산, 해와 달 같은 천체도 포함된다-속에서 살고 있다. 신령들을 달래서 은총을 얻어야만 농경의 풍요와 계절의 순환이 보장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 어떤 규칙성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다. 태양신에 희생물을 바쳤건 말았건 간에, 해는 언제나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다. 더욱이 태양, 달, 행성들은 상당히 정확하게 예보할 수 있는 경로를 그리며 하늘을 운행한다. 태양과 달은 여전히 신일지도 모르나, 그들은 엄격한 법칙에 예외 없이 따르는 신들이다. 다만 태양이 여호수아를 위해서 운행을 멈추었다는 이야기는 예외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규칙성이나 법칙이 천문학과 또 다른 몇 경우에서만 뚜렷하였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서, 특히 지난 300여년 동안에 점점 더 많은 규칙성과 법칙이 발견되었다. 이런 법칙의 성공은 19세기 초에 라플라스로 하여금 과학적 결정론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즉 그는 어떤 시각에 우주의 상태에 주어진다면 우주의 진화를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는 법칙의 체계가 존재한다고 제안하였다.
라플라스의 결정론은 두 가지 면에서 불완전하다. 이는 법칙이 어떻게 선택되어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으며, 또 우주의 시초 상태를 규정하지 않는다. 이런 일은 신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신은 우주가 어떻게 시작하고 어떤 법칙을 따를 것인지를 선택했지만, 일단 우주가 시작되면 우주에 개입되지 않는다. 사실상 신은 19세기 과학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갇혀졌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라플라스가 희망했던 결정론이 적어도 그가 의도했던 방식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는 한 쌍을 이루는 어떤 양-입자의 위치와 속도-을 동시에 정확하게 알 수 없음을 가리키고 있다.
양자역학은 이런 사태를, 입자들이 명확한 위치와 속도를 갖지 않으나 파동으로 표현된다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즉 입자의 위치나 속도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파동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위치와 속도라는 선입 관념에 파동을 억지로 맞추려고 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우주가 `무엇'인가를 기술하는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는 데 너무 골몰해서 `왜' 우주가 존재하는가를 질문할 틈이 없었다. 한편, `왜'를 묻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철학자들은 과학적 이론의 발전과 어깨를 나란히하여 따라오지를 못했다. 18세기에는 철학자들이 과학을 포함한 인간 지식 전체를 그들의 분야라고 생각하여 여러 문제를 논의했는데, 예컨대 "우주에는 시초가 있는가?"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에 과학은, 몇몇 전문가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 기술적이고 수학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철학자들은 그들의 물음의 범위를 너무나 좁혀버린 결과, 금세기의 가장 유명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에 남겨진 오직 한 가지 일이란 언어의 분석뿐이다"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칸트에 이르는 철학의 위대한 전통에서 보면, 커다란 몰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실제로 완전한 이론을 발견하게 되면, 이것은 머지않아서 누구에게나 -몇몇 과학자가 아니라- 원칙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과학자, 철학자, 일반인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인간과 우주과 왜 존재하는가란 문제를 논하는데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답을 찾아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성(理性)의 최종적인 승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는 무엇이며, 우주와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주의 현황은 왜 이러한가?
이런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우주관'을 선택한다. 마치 평평한 지구를 떠받치는 거북들의 무한한 탑이 이러한 우주관의 하나이듯이, 특급의 끈(superstring)의 이론도 그러하다. 두 가지가 모두 우주에 대한 이론이다. 다만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더 수학적이고 정확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두 이론은 모두 관측적 증거가 없다. 누구도 지구를 등에 업은 거대한 거북을 보지 못했겠지만, 그렇다고 특급의 끈을 본 사람도 없다. 그러나 거북의 이론은 사람들이 지구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예언하므로 좋은 과학적 이론이라 할 수 없다. 이것은 경험과 들어맞아본 일이 없다. 버뮤다 삼각해역에서 실종되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는 한 말이다.
우주를 기술하고 설명하는 최초의 이론적 시도는, 모든 사건이나 자연 현상이 신령(神靈)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생각과 관련되어 있다. 신령은 인간의 감정을 가졌으며, 극히 인간적으로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 신령들은 자연물-강, 산, 해와 달 같은 천체도 포함된다-속에서 살고 있다. 신령들을 달래서 은총을 얻어야만 농경의 풍요와 계절의 순환이 보장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 어떤 규칙성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다. 태양신에 희생물을 바쳤건 말았건 간에, 해는 언제나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다. 더욱이 태양, 달, 행성들은 상당히 정확하게 예보할 수 있는 경로를 그리며 하늘을 운행한다. 태양과 달은 여전히 신일지도 모르나, 그들은 엄격한 법칙에 예외 없이 따르는 신들이다. 다만 태양이 여호수아를 위해서 운행을 멈추었다는 이야기는 예외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규칙성이나 법칙이 천문학과 또 다른 몇 경우에서만 뚜렷하였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서, 특히 지난 300여년 동안에 점점 더 많은 규칙성과 법칙이 발견되었다. 이런 법칙의 성공은 19세기 초에 라플라스로 하여금 과학적 결정론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즉 그는 어떤 시각에 우주의 상태에 주어진다면 우주의 진화를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는 법칙의 체계가 존재한다고 제안하였다.
라플라스의 결정론은 두 가지 면에서 불완전하다. 이는 법칙이 어떻게 선택되어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으며, 또 우주의 시초 상태를 규정하지 않는다. 이런 일은 신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신은 우주가 어떻게 시작하고 어떤 법칙을 따를 것인지를 선택했지만, 일단 우주가 시작되면 우주에 개입되지 않는다. 사실상 신은 19세기 과학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갇혀졌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라플라스가 희망했던 결정론이 적어도 그가 의도했던 방식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는 한 쌍을 이루는 어떤 양-입자의 위치와 속도-을 동시에 정확하게 알 수 없음을 가리키고 있다.
양자역학은 이런 사태를, 입자들이 명확한 위치와 속도를 갖지 않으나 파동으로 표현된다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즉 입자의 위치나 속도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파동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위치와 속도라는 선입 관념에 파동을 억지로 맞추려고 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우주가 `무엇'인가를 기술하는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는 데 너무 골몰해서 `왜' 우주가 존재하는가를 질문할 틈이 없었다. 한편, `왜'를 묻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철학자들은 과학적 이론의 발전과 어깨를 나란히하여 따라오지를 못했다. 18세기에는 철학자들이 과학을 포함한 인간 지식 전체를 그들의 분야라고 생각하여 여러 문제를 논의했는데, 예컨대 "우주에는 시초가 있는가?"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에 과학은, 몇몇 전문가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 기술적이고 수학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철학자들은 그들의 물음의 범위를 너무나 좁혀버린 결과, 금세기의 가장 유명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에 남겨진 오직 한 가지 일이란 언어의 분석뿐이다"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칸트에 이르는 철학의 위대한 전통에서 보면, 커다란 몰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실제로 완전한 이론을 발견하게 되면, 이것은 머지않아서 누구에게나 -몇몇 과학자가 아니라- 원칙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과학자, 철학자, 일반인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인간과 우주과 왜 존재하는가란 문제를 논하는데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답을 찾아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성(理性)의 최종적인 승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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