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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논술

소설 해설 및 서평: 4. 이문열 '젊은날의 초상'

작성자paradox|작성시간03.11.19|조회수365 목록 댓글 0
젊은날의 초상



어느 날이었다. 순식간에 경제력을 잃은 백수가 되어 스산한 겨울 오후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주말이면 거품처럼 도로를 가득 메우던 차들은 지금쯤 어두컴컴한 지하주차장에서, 거대한 도시의 길거리에서 차가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것이었다.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시야는 한결 넓어지고 출근부와 서류더미와 형식적인 조직의 메마름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자유로움,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는 아득한 슬픔이 제한속도보다 저만큼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살아온 만큼 꿈은 비누처럼 거품을 가득 품으며 마모되고 있었고, 그 꿈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자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졌다.

평범한 ‘나’로 돌아오기 위한 오랜 방랑

스스로 낯설어지기 위한 여행

그렇게 달려간 곳이 경주. 불국토를 꿈꾸던 신라인들의 기도처였던 남산(금오산)에 오르고 싶어졌다. 꼬박 4시간을 달려갔으나 날은 저물었다. 불국사 못 미쳐 남산이 바라다 보이는 한적한 여관으로 들어갔다.
“일행은 없나요?”
혼자 다니는 여로는 외롭다. 모든 일에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
새벽에 산을 오르기 위해서 차 트렁크에 넣어둔 등산복과 등산화를 꺼내려다 발 밑에 툭하고 떨어지는 물건을 집어드니 한 권의 책이었다. 그 동안 휴가 한 번 제대로 가보지 못하고 일에 잡혀 있던 시간들, 언젠가는 발길 닿는 대로 떠나보리라 생각하며 챙겨두었던 물건 중의 하나.
1981년 민음사 간행, 저자 이문열, 겉장 몇 장이 떨어져 나가 목차도 없고 본문도 서너 장 뜯겨 나간 ‘젊은 날의 초상’은 그렇게 나의 동행이 되었다.
1990년 곽지균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 이 소설은 단편소설로 발표된 바 있는 ‘하구(河口)’ ‘우리 기쁜 젊은 날’ ‘그 해 겨울’, 이 세 편을 다시 묶은 것이다. 1960년대를 배경으로 20대 초반의 ‘나’가 방랑을 통해 격렬하게 이 세상과 조우했던 경험을 회상 형식으로 들려주고 있다.
주인공 ‘나’는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을 맞이하고 존재의 허무함을 느끼며 형이 보내온 대학 등록금으로 빌린 돈을 갚고 유랑의 길을 준비한다. 자기를 둘러싼 세계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존재의 불완전성에 고민하는 젊은이에게 방랑은 특권과도 같은 것. ‘나’는 절망의 거주지로부터 자신을 추방하는 심정으로 여행에 나선다. 이는 자신을 낯선 세계에 내던짐으로써 스스로 낯설어지겠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보다 확실하게 알기 위해 지금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릴 것. 더욱 큰 가치를 붙들기 위해 이미 접근해 있는 모든 가치로부터 떠날 것. 미래의 더 큰 사랑을 위해 현재의 자질구레한 애착에서 용감히 일어날 것.
‘하구’는 대학검정시험 준비도 할 겸, 요양도 할 겸, 모래채취업을 하는 형이 있는 강진이라는 하구 마을에서 주인공이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주인공이 ‘유적(流謫)’이라고 표현했듯이 주변에 어른거리는 사람들을 애증 없이 바라보는 태도로 일관된다. 좌익운동에 가담하고도 실형을 받지 않은 서노인 가족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별장집 남매, 주인공 형과 함께 모래채취장을 운영하던 최와 박씨에 대한 관찰은 20대로 막 넘어가는 주인공의 인간관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사회의 밑바닥을 형성하고 있는 하류민이지만 나름의 주체적인 생활방식과 가식 없는 인간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무력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우리 기쁜 젊은 날’은 대입검정시험에 합격하고 대학생이 된 주인공이 사변적이고 논리적인 지성인의 세계로 접어드는 성장기를 보여준다.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만 하는 궁핍한 생활과 문학 동아리에서의 열정적인 활동, 그리고 부잣집 여대생과의 짧은 사랑은 그를 한결 더 높은 지적인 세계로 인도한다.
그러나 허름한 여인숙에서 하룻밤 동숙한 소년의 인간에 대한 맑은 믿음 앞에 자신이 가진 지성의 허울을 발견하고, 가까웠던 선배이자 친구였던 김형의 돌연한 죽음으로 삶에 대한 절망감을 확인하게 된다.
‘그 해 겨울’에서 비로소 주인공 ‘나’는 허울좋은 지성의 무력함과 일상의 때묻어 가는 반복으로부터 자신을 이탈시키는, 바다로 향하는 여정에 나선다. 강원도 탄광에서 탄부로 일하고자 하나 막장 인생은 주인공에게 비겁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경상북도의 산촌 마을 술집에서 허드렛일을 두 달 동안 하면서 만났던 욕망에 찌든 사람들, 그리고 주인공에게 달려드는 술집 작부의 집요한 유혹을 피하면서 이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또 하나의 삶의 지층을 발견한다.
주인공은 이윽고 바다를 보겠다는 열망으로 산촌 마을을 떠나 폭설이 내린 해발 700미터의 창수령(경북 영양군) 고개를 넘기로 한다. 추위와 허기를 견뎌내며 강행군을 거듭하면서 사랑에 실패하고 시골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친척 누나를 만난다. 또 1950년 한국전쟁 전 좌익 혁명을 꿈꾸다가 거사 전에 밀고를 해버린 배반자를 찾아가는 ‘칼 가는 사내’도 만난다.
이들을 보며 주인공은 묻는다.
‘도대체 우리의 삶은 어디부터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가? 사랑에 실패하고 은폐의 삶을 사는 누나의 삶의 목적지는 어디이며, 저 칼 가는 사내의 불타는 복수심은 얼마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방랑은 꿈꾸는 자의 특권

눈 덮인 창수령 높은 고개를 넘어가면서 주인공은 무섭도록 처절한 설경에 압도되고 결국 그가 찾고자 하는 가치가 그 설경과 같은 ‘아름다움’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진실로 예술적인 영혼은 아름다움에 대한 철저한 절망 위에 기초한다고. 그가 위대한 것은 그가 아름다움을 창조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도전하고 피 흘린 정신 때문이라고….’
설령 절망으로 끝나더라도 꿈꾸고 도전하는 아름다움. 자신의 절망과 방랑도 헛된 것이 아님을 깨달은 ‘나’는 바다에 이르러 그간의 감상과 익기도 전에 병들어버린 지식을 벗어던진다. 그리하여 평범한 생활인으로 돈도 벌고, 가정도 이루는 일상으로 되돌아갈 힘과 명분을 얻는다.
용기 있는 자만이 방랑을 꿈꾼다. 얻기 위해 버리는 것, 안주하기 위해 떠도는 것,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 멀리서 바라볼 때 비로소 삶은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젊은 날의 초상’은 힘겹게, 치열하게 젊음에 도전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에게만 보여지는 얼굴이다. 우리 삶은 어차피 방랑의 연속, 언젠가 한번은 만나게 될 홍역과도 같은 절망의 굴을 통과하듯이 방랑은 선택된 자유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 낯선 세계로 맞부딪쳐 가는 용기로부터 얻어진다. 별것 아닌 평범한 ‘나’로 돌아오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긴 방랑을 계속해야 하는가.


<나호열 / 시인/대한항공 SKY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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