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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클리닉

심심하면 소금 치지

작성자보슬비|작성시간03.05.05|조회수288 목록 댓글 0
심심하면 소금 치지


"… 세계 각국의 경축 사절과 내외 귀빈 여러분께도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노대통령(노태우가 아니라 노무현) 취임사를 텔레비전 뉴스로 보는데,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고 하는 대목이 있었다. 그 대목을 듣는데 속으로 쿡 웃음이 일었다.
난 '심심한 감사'라고 하면 웬지 '지루한 감사', '겉으로는 대단한 듯 말하지만 속으로는 별 것 아닌 감사'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왜 그런 착각이 생길까?

요즘에는 잘 안 쓰이는 것 같지만, 내가 자랄 때 어른들은 '심심하다'는 말을 흔히 썼다. 밥 먹을 때 반찬이나 국이 싱겁다고 하면 "심심하면 간장 좀 쳐." "심심하면 소금 더 넣어라." "심심하면 고춧가루 타."라고 하였고, 한가한 날에 친구가 마실 오면 "심심한데 장기나 두자"고 하였다. 또 야구장이나 축구장에 가면 "심심풀이 땅콩이요, 심심풀이 오징어요" 하면서 팔에 바구니를 걸고 주전부리할 것을 팔러 다니는 장사꾼들이 있었다. 그래서 '심심하다'고 하면 내게는 지루하다거나 싱겁다거나 그런 말같이 느껴진다.

물론 '심심한 감사'의 '심심'은 그런 심심이 아니라 한자로 쓰는 심심이다. 그런데 이 '심심'을 한자로 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심심(甚深)하다, 즉 '매우 깊다'는 뜻이니 쉬운 말을 어렵게 한 것이라 하겠다.
'심심한 감사' '심심한 조의' '심심한 경의' 이런 표현들은 격식을 차린 말이다. 이런 어구를 쓰면 예의를 벗어나거나 분위기와 동떨어질 염려가 없어 편리한 점이 있다. 그렇지만 정말로 '대단히 깊은' '절실함'을 담은 표현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자신의 진정을 또렷하게 나타내려면 그것을 고스란히 전하는, 유일한 자신의 말을 찾아내야 한다.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 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 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 산천에도 금잔디에.
―김소월 [금잔디] 전문


여기서 심심은 심심(深深)이다. 깊고 깊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말이 대단히 자유롭게 운용되는 것 같으면서도 그 놓이는 자리나 어울려 쓰이는 모습이 제한적이고 미묘하다.
'심심하다'는 말을 자꾸 잊어가는데, 국이 '짜다' '싱겁다'라고만 하지 말고 '심심하다'도 자주 써 보자.

노대통령의 취임사는 '뜨거운 감사' '심심한 감사' '깊은 위로'와 같이 표현을 바꿔가기 위해 '심심한'을 택한 듯 보인다. '심심한 감사'는 '싱거운 감사' '지루한 감사'가 되기 쉬우니, 소금을 팍팍 쳐서 이왕이면 '짭짤한 감사'를 드려보라고 권하고 싶다.

(2002년 3월 7일)

-삶이 보이는 창 2003년 4-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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