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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클리닉

'판타지'인가, '팬터지'인가

작성자보슬비|작성시간03.03.26|조회수688 목록 댓글 0
'판타지'인가, '팬터지'인가


[어린이도서연구회 이야기보따리에 쓴 글입니다.]

'판타지'인가, '팬터지'인가?

9월 13일자 최종규님의 게시 ['팬터지'가 뭐지요?]를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살갑고 뜻이 정확하게 나타나는 우리말을 쓰자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우리말로 비평하기' 역시 저도 비평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제 나름의 고민을 하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구회 편집실에서 표기를 통일하지 못한 것이 잘못은 아니고, 저의 표기를 존중해준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적하신 '팬터지'라는 표기를 사용한 글 [팬터지를 사랑할 것인가]([동화 읽는 어른] 2002년 9월호)를 쓴 필자로서 '판타지'라고 쓰지 않고 왜 '팬터지'라고 표기를 했는지, 글쓸 때의 생각을 되짚어보고 '팬터지'라고 쓸 때의 의미 같은 것을 더 더듬어보겠습니다.
연구회 게시판을 찾으시는 분들이 이런 문제에도 관심이 매우 높은 것 같아 즐거운 마음으로 적습니다.

*

'팬터지'라고 쓴 것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사실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만, '판타지'라고 그냥 따라 쓸 수는 없었고, 설사 제가 '판타지'라고 썼더라도 그 용어와 표기를 그대로 쓸 것인가를 고민하고 쓴 것일 것입니다.

서론이 길었군요. fantasy는 발음기호로는 [f nt si] [f nt zi]입니다. 이를 우리말로 가장 가깝게 표기하면 '팬터시(씨)', '팬터지'일 것입니다. 앞에 있는 것이 우세한 발음이지요.
제가 원어민 발음과 영국, 미국의 발음 차이는 모르겠고, 사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네요. 사전을 찾아보고는 사실 '팬터시'로 써야 하는 게 아닌가,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발음을 그대로 좇을 필요는 없지요. 우리 의사소통을 우선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원발음과도 가까우면 좋다는 생각입니다. '팬터시'로 써버리면 '판타지'와는 다른 단어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래서 '팬터지'로 할 것인가 '판타지'로 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대부분 '판타지'라는 표기를 쓰고 있고, 일부 '팬터지'라고 표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 글의 주제가 어린이문학과 관련된 팬터지이니까, 그동안 어린이문학 동네에서 '판타지'라고 주로 써온 것도 감안을 했습니다. 이재복 선생님의 [판타지 동화세계]나 원종찬 선생님의 [동화와 판타지(1)]는 제 글에 언급되기도 하였습니다. 즉, 필자가 의식적으로 '팬터지'라고 쓴 것을 독자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제 의식, 무의식에는 지금까지의 '판타지' 논의와는 뭔가 좀 다른 내용을 담아보자, 기존의 판타지 개념을 그대로 가져와서 논의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아마 깔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뭐, 좀 튀어보려는 수작이다라고 볼 수도 있겠죠.
또하나, '판타지'라는 표기가 정확하고 앞으로도 계속 고수해야 할 표기인가 하는 데에 의문을 제기하자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여러 가지 새로운 의미연쇄가 생기면서 표기가 달라진 용어들이 사실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전의 표기는 당시의 용어 수입의 맥락에 따라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요즘에는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이슬람 연구가 정수일 선생님은 {코란}을 {꾸르안}으로 표기합니다. '코란'은 서구식 표기라는 거지요. 우리가 서구와만 접할 때는 '코란'이라고 쓸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써야 의사소통이 됐지만, 이슬람 전문가가 많이 나오고 이슬람과 직접 교류가 많은 시대에 '코란'으로는 오히려 안 통하거나 영어 추종세력으로 의심받게도 됩니다. 너무 말이 거창해진 것 같네요.

사실 '판타지'라는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어 쓸 말이 없을까, 내가 바꾸어 써서 그 용어가 정착되면 좋겠다 하는 욕망을 글쓰는 사람으로서 갖게 됩니다. 쉬운 일이 아니죠. '환상문학'이라는 번역어를 평론이나 논문들에서는 많이 사용합니다.
제 글이 문예지나 학술지에 실릴 글이었다면 환상문학, 환상동화, 환상소설이라는 역어를 더 많이 써도 좋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들을 묶어서 쓰기에 적당한 용어는 아직 없습니다. '해리 포터' 영화나 근래 팽창한 판타지 소설 장르와의 연관성을 생각하면, 환상문학이나 환상장르라는 용어는 생소하기도 하고 그 연관성이 잘 안 떠오릅니다. 그러나 판타지라는 용어는 [밥데기 죽데기](권정생) 등 '한국적 판타지'와는 잘 어울리지 않고, 또 요즘의 논의 분위기에서 중립적인 용어라기보다 추종이나 배척의 이미지를 덮어쓰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표기법의 문제, 의미연상의 문제를 고려해서 '팬터지'라는 표기를 선택하였습니다.

*

사실 '팬터지'보다 '판타지'가 우세하게 쓰이는 것은, 최근의 추세에서는 대개 원발음을 좀더 충실하게 표기하고자 함에도 사전에 등재된 표기법이 '판타지'로 되어 있어서 이것을 지켜주려 하기 때문인 점도 많이 작용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참에 잠깐 외래어(영어) 표기법을 살펴보겠습니다.
교육부 편수자료(1994)의 외래어 표기 용례에는 '판타지'로 나와 있습니다.(두산동아 [새국어사전] 부록의 용례 자료) 이를 준수해서 '판타지'로 쓰는 것은 가장 '안전한' 외래어 표기법입니다.
철자에 따라 발음이 천차만별인 영어의 경우 사실 '외래어 표기법'이 있어도 통일된 표기가 나오기 어렵고 어떤 단어는 오히려 생소한 표기가 나오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용례집을 만들게 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fantasy의 경우도 '외래어(영어) 표기법'(1986)을 따르면 '판타지'가 아니라 '팬터시'가 됩니다. 그렇다면 '판타지' 표기는 오히려 '외래어 표기법'의 예외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표기법'과 '용례'를 따라야 하겠으나, 따르지 않을 경우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

어린이도서연구회에서 팬터지 작품과 관련 책들을 검토하고 분류, 소개하시면서 각기 다른 특성들을 가진 작품과 책들을 세부적으로 잘 분류해서 이름을 붙여주시면 우리말 용어를 발전시키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2002.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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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최종규씨 글을 덧붙입니다.


: 최종규
`팬터지'가 뭐지요?


오늘 집으로 온 <동화읽는 어른> 9월호를 받아 보았습니다. 그 회보에 실은 글 가운데 "팬터지를 사랑할 것인가"라는 글이 있는데 `팬터지'는 무엇인지요? 어떤 사람은 `환타지'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판타지'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팬터지'까지. 참으로 알쏭달쏭하군요.

외래어 적기법을 알아 보니 이 말 fantasy는 `판타지'로 적어야 옳습니다. 미국말대로 읽는다면 `팬터지'가 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우리는 미국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국말을 하는 사람인 만큼 글로 적을 때는 그런 적기법을 제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말씀드린다면 `판타지'라고 말해야만 무슨 뜻이 통한다고 보는 생각은 우리들이 가진 좁은 편견이기도 함을 가지면 좋겠네요. 외국에서 쓰는 말을 그대로 들여와서 쓸 수도 있고, 이를 평론과 비평을 하면서 그대로 쓸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구태여 `우리 말로 철학하기'를 하듯 `우리 말로 비평하기'를 할 까닭까지 없기도 하지만, 어차피 할 평론과 비평이라면 누구에게나 좀 더 쉽게 다가가면서 우리 문화 속에서 녹아들어가는 말과 글로 하면 더 나을 텐데요.

어린이도서연구회에서 소개하고 비평하는 책에서도 `판타지 영역'에 들어가는 작품이 많이 있는 줄 압니다. 그냥 `판타지'라는 말을 쓸 수도 있겠지만 한번쯤, 아니 한번쯤을 넘어서 꾸준히 좀 더 살갑고 쉬우면서 뜻이 정확하게 확 들어오는 말을 찾는 이야기를 나누고 차분하게 돌아볼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냥 `fantasy'를 쓴다고 할 때도 부디 외래어 적기법에 따라 한 가지 말로만 통일을 보고 글을 실어 주시면 좋겠고요. 이는 물론 회보를 엮는 분만이 아니라 이 말을 쓰면서 비평을 하고 평론을 하는 모든 분들이 솔선수범하면서 나서야 하는 일입니다.

그럼.
한 말씀 올리고 이만 물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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