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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우 박사가 쓴 글과 공박사 자료

작성자나라임자|작성시간13.06.28|조회수162 목록 댓글 0

한글과 한겨레를 끔찍하게 사랑한 과학자, 공병우

 

공병우 박사로부터 배울 점

온 겨레의 스승 공병우 박사

 

 

1. 붓은 칼보다 강하다

 

 

제목:나의 일생을 좌우한 작문 이야기 1/7

보낸이:공병우 (Kongbw ) 1993-11-20 13:37 조회: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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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생을 좌우한 작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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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는 성공의 어머니*

 

공 병우(한글 문화원장)

 

글자는 인간이 가진 무기중에서 가장 간한 무기이다. 그러므로

글자가 바탕이 되는 책이나 신문을 많이 읽는 사람은 성공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독서가 단순히 지식을 넓히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그 지식이 올바른 판단과 실천의 바탕이 되어,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일제시대 때, 나는 보통학교 5학년을 마치는 해, 장차 의사가

되겠다는 뜻을 가지고 '신의주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시험을

보았지만 낙제했다. 보통학교에서 잡지를 읽는 데만 골몰했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들은 공부를 하지 아니한 탓으로 낙방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압록강 강변에 있는 3년제 '의주농업학교'에 무시험으로 들어갔다. 그 학교를 졸업해도 고등 농업 학교에 입시 자격도 주지 않기 때문에 졸업 후 집에 돌아가서 농사를 짓거나 아니면 면서기나 군서기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른 학교로 갈 생각을 가지고 당시 일본 동경에서

발행하는 <시험과 학생>이란 잡지와 서울에서 발행하는 <경성일보>

라는 일본말 신문을 날마다 읽었다. 때문에 1학년 성적은 꼴찌를

겨우 면하고 2학년으로 올라갔다.

 

세월은 흘러 어느새 2학년 2학기가 되었다. 늦은 가을철 어느날, 작문 담당인 '와다나베' 선생께서 우리 2학년생들에게 각자 자유로운 제목으로 작문을 지어 내라고 했다. 나는 <농업학교와 나의 희망>이란 제목으로 작문을 썼다. 기숙사의 식생활은 감옥 죄수들의 것과 다름이 없고, 학생들을 감언이설로 중노동을 시킨다는 등, 심지어는 교육자로서 관존민비를 강조하는 교장 선생의 태도가 매우 유감스럽다고까지 언급했다. 교장선생은 60세 가량 되는 노인으로 키가 크고, 눈도 크고, 수염도 많고, 풍채가 매우 좋은 '고마쓰'라는 분이었다.

만일 교장선생께서 나의 작문 내용을 알게 되면 퇴학을 맞을 것이라 생각되어, 작문샌생에게 바칠까 말까 몹시 망설이다가 퇴학을 당해도 좋다는 결심 끝에 그 작문을 냈다.

 

작문을 낸 지 1주일이 지나고 다음 작문 시간이 돌아왔다. 작문

선생은 우리들에게 나의 작문을 큰 소리로 멋지게 낭독한 다음, 말하기를 “너희들의 작문은 모두가 가을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고 어쩌구 남의 글 흉내를 낸 글들이다. 그러나 공군의 글은 살아있는 호소력이 있는 작문이다. <압록강 일보>에 발표할 터이니 그때 다시

꼼꼼이 읽어 보아요”하고, 작문을 각자 자유 제목으로 또 지으라고 말하고 교실을 나갔다.

작문 시간이 끝나서 알고 보니 '와다나베'선생은 나의 작문을

1학년과 3학년 교실에 가서 수업중이던 선생을 교단에서 내려오게

하고 자신이 올라가, 나의 작문을 멋지게 각각 낭독을 하고 나서는, 교장 선생 이하 전교직원이 앉아 있는 직원실에서 큰 소리로 또

읽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자마자 나는 곧 기숙사로 가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 버렸다. 과거에도 두 번이나 퇴학을 맞을 뻔하고 용서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퇴학을 면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니, 각오는 하고 용기를 내었던 일이기는 하지만, 막상 퇴학을 당하게 되고 보니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퇴학을 하고 집으로 가면 아버님께 야단을 맞을 생각으로 근심걱정이 태산 같았다. 자리에 누운지 3일째 되던 날 저녁 7시에 교장 사택으로 오라는 호출을 받고 일어나 사택으로 갔다.

나는 퇴학을 각오하고 가서 교장 선생님 앞에 꿇어 앉아 사과의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뜻밖에 교장 선생은 무섭게 화를 내거나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오히려 반갑게 대하면서 진심어린 사랑으로

나를 의사가 될 수 있는 길로 나가도록 갈 길을 알려 주시며 지도해 주셨다.

나는 '와다나베' 선생과 교장 선생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평양

도립 의학 강습소>로 가서 의사가 될 수 있는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내가 간절히 바라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만일 그때 교장 선생이 감정을 앞세워 나를 퇴학시켰더라면,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면사무소의 서기나 시골 농사꾼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학시절에 있었던 나의 작문은 나의 평생의 운명을 열어주는

열쇠 노릇을 했다. 그 중에서도 나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와다나베'선생께서 나의 작문을 높이 평가해 주었다는 데 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의 글이라 해도 공개를 해 주지 않으셨다면,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또 내가 퇴학을 맞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작문 제출을 포기했더라면 내 운명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도 생각해 본다.

두 분의 훌륭한 스승을 만났기 때문에 나의 운명이 열리게 된

것이다. 지금은 나의 작문보다도 몇 배 더 중요하고 훌륭한 글을

써 놓아도 반응이 없으니 한심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나의 운명을 결정한 작문은 독서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진리의 말이 있다. 나는 중학시절의

체험으로 이 격언의 뜻을 가슴 깊이 깨닫게 되었다. 내가 본직을

버리고 반평생 동안, 한글 과학화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은, 세계에 둘도 없는 한글을 500여 년동안 천대만 하다가 나라가 망하기까지 했는데도, 이를 반성하지 못하고 여전히 한자와 2벌식 기계들로

천대를 하고 있는 것이 하도 안타깝고 한심한 마음에서 한글을 더욱 강한 무기로 발전시켜, 우리가 세계 선진국 대열에 자랑스럽게 앞장서는 힘의 바탕을 삼자는 데 그 뜻이 있다. <> (1993. 11. 16.)

 

2. 졸업장이 없는 박사

 

 

학교 졸업장이 하나도 없는 박사

 

님은 학교 졸업장이 하나도 없다. 초등학교 졸업장도 대학교 졸업장

도 없다. 그는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졸업을 하지 않고 요즘 말하는

자격 검정고시를 봐서 진학을 했고 자격증을 따고 학위를 받았다.

그렇다고 학교 다시기를 싫어하거나 공부를 게을리 한 것이 아니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 지금 초등학교인 보통학교 5학년을 마치고 6학

년을 다니지 않고 의사가 되겠다는 신념으로 신의주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실력이 모자라 떨어져서 무시험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의주 농업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학교는 님이 의사가 되겠다는 꿈과 먼, 농군과 면서기 등이 되는 공부를 했고 분위기였다.

2학년 때 자유 제목으로 글을 써 오라는 숙제가 있었는데 님은 [나의 희망과 농업학교]란 제목으로 글을 써 냈다. 주로 내용은 교장선생이 학교 운영을 비판하고 학교 분위기를 솔직하게 꼬집었다. 날마다 농장에서 농사일이나 시키고 교장 선생님은 조회 시간에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해 졸업한 다음 면서기나 군청 서기가 되라는 말씀만 하시고 기숙사의 밥은 좋지 않고 선배들이 많이 때린다는 것을 비롯해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써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벌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칭찬을 받았으며 의사가 될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작문 선생님이 님의 글이 솔직하게 잘 썼다고 칭찬해 주고 그 작문을 조회 시간에 전교생에게 읽어 준 다음 큰소리로 학생들에게 "여러분 똑똑히 들어요. 여러 학생들의 작문은 대체로 천고마비의 가을하늘이 맑고 푸르고 어쪄고 하면서 남의 글 흉내를 낸 글들이 많았는데 그런 글을 죽은 글이다. 그런데 공병우 군의 글은 매우 색다르다. 내용이 살아있는 진짜 작문이란 말이야. 그런 점을 참작해서 오늘 작문 시간에도 자유 제목을 줄 테니 한 번 써 보도록 해요. 그리고 공군의 작문은 압록강일보에 보내어 신문에 실리도록 할 테니 신문에 나거든 다시 잘 읽어 보도록 해요."라고 말하더란다. 그리고는 교장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 앞에서도 그 작문을 읽어 주었다는 것이다.

님은 교장이 그 사실을 알았다는 소리를 듣고 기슥사에 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눕고 말았단다. 퇴학을 각오하고 있던 사흘 뒤 교장 사택으로 오라는 소식이 왔다. 그 당시 관례로는 교장이 학생을 교무실로 불러 꾸중하면 용서받을 학생이고 퇴학을 시키기로 한 학생은 사택으로 조용히 타일러서 아무도 모르게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처벌 대신 의사가 될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교장은 [1년을 더 다녀야 졸업하지만 너는 졸업생과 같은 실력이 있다고 본다.네가 의사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경성 치과 학교에 들어가라. 그 학교 교장이 내 친구이니 내 추천장만 있으면 그냥 들어갈 수 있다]고 권하는 것이다. 그래서 님은 퇴학시키기 위해 하는 말로 생각하고 만약 서울에 있는 치과 전문학교에 못 들어가면 다시 다닐 수 있게 해주겠느냐 묻고 그렇게 해준다고 답하니 용기를 내어 서울 가는 길에 평양 의학 강습소에 가서 시험을 한번 치러 봐도 되겠느냐 물으니 좋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압록강 건너 중국에까지 가서 책을 구해 혼자 공부해서 의학 강습소에 합격했다. 참으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이런 때 딱 맞는 말인가 한다.

의학 강습소에 들어간 님은 졸업하기 전에 의사 검정 시험에 합격하고 의사가 되고서도 돈벌이에만 열심히 하지 않고 연구를 해서 일본에 가서 박사 학위까지 받은 것이다.

 

졸업하지 않고 평생 동안 공부한 분

 

님은 이렇게 평생 동안 졸업장을 받아 본 일이 없다. 졸업장 받을 학년에 졸업하지 않고 진학했기 때문이다. 그 때 일제 교육제도가 그것을 허용했기 때문이지만 실력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님의 생각이 맺은 열매다. 의학박사도 정규 대학 졸업생이 4년 걸려야 따내는 것을 님은 2년 동안에 땄다.

님은 80대 할아버지로서 쓴 그의 자서전에서 [...사실 나는 졸업장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다. 도대체 졸업이란 무엇인가? 공부를 끌냈다는 뜻이 아닌가, 죽는 날까지 학업을 계속할 일이지, 어떤 교육과정을 졸업했다는 것은 나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다. 나는 죽는 날까지 졸업 없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 나는 지금도 매일 공부를 한다. 교육계에서는 평생교육이란 말이 있는가 본데 나는 바로 그 평생교육을 목표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평생교육이 어찌 졸업이란 게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졸업장 없이 공부를 계속해 온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한다. 졸업장 따기 위해 대학에 다닌다는 사회 풍조도 있고, 대학 간판이 있어야 결혼도 할 수 있다는 경박한 일련의 분위기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그 같은 간판주의를 몹시 경멸한다. 졸업장을 코에 내걸고 취직이나, 출세나, 시집갈 때 간판 미끼로 삼으려는 우리 나라의 사회 분위기는 정말 돼 먹지 못한 것이다. 실력있는 사람이 정당한 대접을 받고 사는 사회가 되어야 참다운 민주 사회이다.]라고 쓰셨다. 나는 님의 자서전에서 이 대목이 짧지만 아주 큰소리로 외치는 것으로 들렸고 옳고 바른 말씀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나라 망칠 한국병이라고 할 수 있는 잘못된 교육 풍토를 새롭게 바꿀 수 있는 말씀이고 님 스스로 보여주셨다. 내가 오늘 님을 우러러 보고 님을 세상에 알리는 글을 쓰겠다는 마음을 갖게 한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이 말씀이다.

 

한번도 출신 학교를 묻지 않으셨다.

 

님은 나에게 한번도 출신 학교를 묻지 않았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이에게도 어떤 학교를 나왔느냐 묻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직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느냐, 자신과 함께 일할 수 있느냐에 관심이 많으셨다. 일류 대학을 나오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그 분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지위와 출신 학교를 자랑하고 싶고 그것을 먼저 인정받고 싶을 것이나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타자기와 셈틀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도 배우고 싶고 님의 뜻을 따르고 싶다면 반갑고 따뜻하게 맞이해 주신다. 그러나 아무리 이름난 사람이라도 타자기와 셈틀에 관해 모르고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슨 일을 열심히 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타자기와 셈틀을 주면서 배우라고 하셨고 자신의 주장을 심어주려 애쓰셨다.

님은 학벌이나 지위보다 열심히 일하는 능력과 마음 자세를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 님의 이런 마음과 몸짓은 학연과 학벌이 판치는 학국병 치료약이다. 졸업장이 없고 일류 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열심히 살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일하고 나라와 겨레를 위해 일하고 뜨겁게 사랑한 님을 세상이 알아주고 본받으면 저절로 이 한국 교육 병은 사라질 것이다.

 

 

3. 돈버는 일보다 봉사활동한 분

 

 

서울에서 최초로 안과병원을 연 공박사

서울에서 최초로 안과병원 연 사람

 

어릴 때 돌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의사가 되어 불쌍한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겠다는 꿈을 가졌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청소년 시절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마침내 그 꿈을 이루었고 서울에 개인 병원까지 열게 되었다.

 

농업학교 다닐 때 학교와 교장을 비판한 작문이 의사가 되는 길로 인도한 것을 보면 여러 가지를 느끼게 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두드리면 열린다는 말을 실감케 하고 선생님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깊히 느끼게 한다.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이 대학이라는 간판만 따겠다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것도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는 공병우 청소년의 마음가짐과 몸짓이 남다른 데가 있었고 오늘날 청소년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우연히 의사가 된 것이 아니라 의사가 되기로 정해진 것처럼 느낄 정도로 일이 잘 풀렸음이 그의 굳은 신념과 올바르고 부지런한 생각과 생활 태도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님은 전문 의사가 될 때 안과를 선택한 것도 남다르다. 그 때 별로 인기가 없는 안과 의사가 되었고 여러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에서 안과 전문 병원을 열었다. 그 당시 내과 외과 병원은 잘되고 알아주었으나 안과병원은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운 개척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안과를 개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이왕에 개척하는 마음으로 병원을 열으니 만주에 가서 개업할까 했으나 정든 서울에서 병원을 열었다. 서울에서 최초로 안과 병원을 연 것이다.

처음엔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병원 자리가 당시 서울 변두리인 안국동이라 잘 되지 않았으나 1년 뒤 중심가인 서린동으로 옮기고 병을 잘 고친다는 소문이 나면서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병원을 크게 늘려야 할 정도로 환자들이 많이 왔는데 그것도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니라 님의 남다른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그 때 크게 눈병이 유행하였는데 대학 병원,철도 병원 등 큰 병원에 다녀도 낫지 않았으나 공안과에 가면 간단히 낫게 되어 공 박사가 용하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님은 그 병에 대해 연구하고 실험해서 자기 나름의 치료 방법을 연구했고 정성을 다해 치료해서 병이 잘 낫았고 환자들이 믿었던 것이다.

님의 남다른 치료법과 운영 방법을 엿보고 하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다른 병원에서는 새로 오는 환자에게 진찰권부터 사게 했으나 님은 우선 진찰과 치료를 한 뒤 진찰권은 무료로 주었으며 돈이 없다는 사람에겐 돈을 안 받았다고 한다. 그 때 함경도에서 온 손님이 많았는데 돈이 없다고 하면 적선 삼아 그냥 치료해 주었는데 그것이 함경도에 소문이 나서 6.25난리 때 목숨을 건지게 했다고 한다.

 

서울 최초의 안과인 공병우 안과는 손님이 들끌었고 서울 장안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돈만 벌려고 하면 돈이 벌리지 않고 좋은 일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자기 일을 하면 돈도 벌고 이름도 날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배워야 할 점이라 느낀다.

 

일본 제국 교육제도와 일본 선생에게서 배울 것

 

나는 여기서 공 박사가 의사가 되기까지 농업학교 작문 선생과 교장, 그리고 경성 의전의 교수들의 도움과 남다른 태도를 눈여겨보게 된다. 공병우 소년도 남다른 데가 있었지만 그 일본인 선생들이 학생의 개성과 특기를 살리면서 잘 이끌고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작문 선생이 공병우 소년의 글을 눈여겨보지 않았고 교장이 자신에 대한 비판을 좋지 않게만 보았다면 공병우 소년은 의사가 되지 못하고 시골 면서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보통학교 학적부에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학생이란 것이 써 있지 않았다면 교장이 그것을 알고 그를 의사가 되는 길로 내몰지 못했을 것이다. 학생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바르게 적어 두었다는 것은 보통학교 선생도 학생들 지도를 잘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우리 교육 현실은 어떤가? 세월이 수십 년이 지났는 데도 그 때보다 못하다는 생각이다. 개성과 꿈과 특기를 무시하고 무조건 모든 학과 시험만 잘 보면 되는 풍토다. 선생님은 촌지라고 해서 돈 봉투 잘 가져오는 애들만 사랑하고 글쓰고 책 읽는 교육보다 외우는 교육뿐이다. 창의성과 개성을 살리는 교육으로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창의성과 개성을 무시하는 우리 교육 현실을 잘 나타내는 이야기 하나를 쓰겠다. 올해 컴퓨터 통신과 신문에서 본 사실이다. 전라도 어느 고등학교 학생이 수업 환경 개선과 관련한 내용을 컴퓨터 통신편지로 청와대에 보냈는데 그것이 잘못이라고 학생을 정학 처벌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통신 토론 마당에 여러 학생들이 학교와 정부를 비판하고 있었다.

 

그 학생이 개선책을 제시한 것은 잘한 일이다. 만약 그 개선책이 잘못된 것이라면 몰라도 그런 건의를 했다고 그 학생을 처벌하기 앞서 교장은 개선하려 노력해야 하고 정부도 마찬가지 개선책을 검토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학생을 처벌하기 보다 칭찬해야 옳았다. 일제 때 농업학교 작문 선생과 교장이 한 행동과 비교해 보면 무엇이 우리 교육 문제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슨 건의를 하면 곧바로 하급 해당 기관에 넘기는 청와대의 태도도 잘못이고 교육부도 마찬가지며 자신의 권위와 위신만 생각하는 그 교장과 선생들의 태도가 아주 잘못되었다고 본다. 이것이 우리 교육이 잘못된 뿌리이며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대학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일제 때 교수들이 출신 학교와 간판만 다졌다면 공병우 님이 의사가 되기도 박사 학위 따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공 박사의 삶에서 우리 교육 개혁안도 찾을 수 있다.

 

나는 여기서 한마디 더하고 싶다. 김영삼 대통령도 그랬고 김대중님

도 대통령이 된 다음 일제 때 선생 덕분으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고마워하고 찾아 큰절하는 모습을 보고 못마땅해 했었다. 그러나 속으로 그 일제 때 교육자의 질이 높았고 교육을 잘해서 일본이 세계 강국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일제 때 고도의 식민 통치 수단으로 질 높은 선생을 우리 땅에 보냈으며 그 후유증이 오늘날까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일본이 얼마나 철저하고 무서운 나라인지 다시 느꼈다. 공 박사의 성장과정과 환경에서 교육 개선책을 찾자.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쓰자.

 

님이 농업학교 때 학교 분위기를 비판한 작문을 써서 교장 선생의 눈에 띄고 의사가 되는 길로 가게 된 것도 평소에 책을 읽은 때문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보통 학생들이 읽지 않는 신문과 잡지를 사 보았고 글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 때 자신이 사보는 잡지를 선배가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주긴 했으나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고 그 선배에게 끌려가 맞은 일이 있는데 그 것이 분해 며칠을 이불 쓰고 참다가 칼을 들고 찾아가 그 선배에게 대든 일도 있었다.

 

청소년 때의 책읽기는 인격 형성과 능력을 기르는데 매우 중요한 일이다. 책을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님은 80이 넘어서 자서전을 쓰면서 일상생활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지만 책을 통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인도의 간디와 중국의 임어당을 존경하게 된 것도 책을 통해서 알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스스로 공부해 검정시험을 보아 월반하고 진학할 자격을 따서 남보다 빨리 의사가 되고 박사가 되어 남다른 삶을 가꾸었고 돈도 벌고 이름도 날렸다. 농업학교 때 교장 선생이 의사 강습소에 가라는 말을 듣고 기뻐 압록강을 건너 만주땅에까지 가서 책을 사 가지고 와서 머리를 싸매고 공부를 하여서 시험에 합격했다고 한다.

 

글쓰기를 얼마나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했는가를 증명하는 것이 80대 할아버지 때 매일 컴퓨터통신에 글을 올렸으며 쓴 글을 많은 사람들이 보라고 한글문화원 앞에 진열해 놓고 아무나 가져가게 하였다. 또 우편으로 많은 이들에게 자신이 쓴 글을 달마다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글을 읽는 사람을 좋아했다. 언제인가 나보고 [내가 쓴 글을 다 읽는 사람은 이 선생뿐인 것 갔오. 나는 누가 내 글을 읽는지 안 읽는지 알고 있오]라고 말씀하시며 칭찬해 주셨다. 사실 나는 공 박사님 글 뿐 아니라 다른이들이 내게 주는 책이나 편지를 모두 자세히 읽는 버릇이 있다. 요즘 아는 분들이 책을 많이 내기 때문에 그들이 쓴 책을 받게 된다. 그런데 재미없는 책도 있으나 끝까지 읽는다.

 

옛날엔 한글로 된 책이 별로 없었고 살기 힘들어 책 사 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한글로 쓴 읽기 쉬운 책도 많고 신문도 한글이며 마음만 먹으면 돈 없이도 책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돈 없이 책을 빌려볼 수 있는 도서관도 많고 아는 사람에게 책을 빌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똑똑해지려면 남보다 많은 책을 읽고 힘이 세지려면 글을 많이 써야 함을 공 박사를 통해 배웠다.

 

 

 

꿈을 가지고 살자

 

 

꿈을 가지고 살라.

 

님이 어려서부터 의사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기에 공부를 열심히

했고 남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고 본다. 의사가 되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를 했기에 공부도 잘되었을 것이다. 목적을 가지

고 사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들고 믿음을 준다. 믿을 수 있었기에 사랑도

받고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꿈이 있었기에 용기도 생겼고 힘이 솟아났으며 부지런하였다. 꿈

이 있는 삶은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고 멋있어 보이고 아름답게 보

인다. 꿈이 있는 사람의 눈은 맑고 빛나지만 꿈이 없는 사람의 눈

은 흐리멍덩하고 빛나지 않는다. 꿈이 있는 사람의 몸짓은 힘차고

부지런하지만 꿈이 없는 사람은 맥이 빠져 있고 게으르다. 꿈이 없

는 사람은 공부도 못하고 놀기만 좋아하지만 꿈이 있는 사람은 공

부도 열심히 하고 일도 잘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다. 희망이 있으면 밥을 먹지 않

아도 배부르고 아무리 힘들어도 즐겁다고 했다. 나는 님의 자서전

을 읽으면서 그리고 님과 함께 한글사랑 운동을 하면서 님의 삶이

아름답고 멋있게 보인 것이 꿈을 가지고 사는 분이며 그 꿈을 이

루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멋있게 보였다고

생각한다.

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늙었어도 늙어 보이지 않는다. 80 어

르신이 간난아이처럼 맑게 웃으며 살 수 있다. 힘차게 걷지 못해

도 가련해 보이지 않는다. 혹시 지금 부자가 되고 싶거나 공부를

잘하고 싶은 젊은이가 있으면 꿈을 가져라. 그리고 자기 아들딸

이 부자가 되고 공부를 잘하게 하고 싶은 부모가 있으면 꿈을 갖

게 하라. 또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하고

싶은 선생님은 그 학생에게 꿈을 갖게 하라. 또 국민들이 열심히

살게 하고 싶은 대통령이 있으면 국민들에게 희망을 갖게 하라.

꿈이 있으면 자신감이 생긴다. 가난해도 부끄럽지 않고 대통령,

국무총리 같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부럽지 않다. 공 박사의 삶에

서 꿈의 중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용기 있는 사람

 

님은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농업학교 때 신입생에게 중노동을

시킨다고 교장선생에게 항의하는 시위할 때 주모자로 나섰다는

것과 상급생이 님을 마구 때렸다고 칼 들고 상급생에 맛서 따진

일과 교장과 학교를 비판하는 작문을 써낸 일들이 용기 있는 일

이었다.

옳지 않은 것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고 맛서 싸우고 그것을 바

로잡으려 애쓰는 용기가 뒷날 한글사랑 운동에 일생을 바치는 밑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기 이익만 생각지 않고 다른 사람과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태도와 힘찬 몸짓이 참된 용기라는

생각이 든다. 교장을 비판한 작문을 쓰고도 처벌이 두려워 내지

않았다면 의사가 될 길을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의학 강습소에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독학으로 공부한 것도 용기가 있었기 때문

이다. 자신은 농업학교 학생이어서 인문 학교 학생보다 뒤처진다

고 자신감이 없었다면 의사 강습소 시험에 떨어졌을 것이다. 의

사가 되고 박사 학위를 받은 것도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참된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생각이 다다른다. 간절한

희망과 뚜렷한 목표와 자신감에서 나온다고 생각된다. 그런 자신

감은 어디서 나왔을까? 바르게 살고 옳은 일을 하기 때문에 떳떳

하고 자신감이 드는 것이다. 바르게 살고 옳은 일을 위해 용기

있게 나서면 공부도 잘되고 모든 일이 잘된다는 것을 배운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리리라.

 

공 박사가 의사가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

고 두드리면 열린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맛있는 감을 먹고 싶은

뜻이 있다고 해서 감나무 아래에서 떨어질 때까지 입벌리고 가

만히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감을 먹기 위해 궁리하고 움직여

야 한다는 것이다. 장대를 구해, 또는 감나무에 올라가서 딴다든

지 힘써 움직이면 그 감을 얻을 수 있다.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의사가 되었고 아픈 사람들을 잘 고쳐 주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연

구하고 치료했기 때문에 잘 치료한다는 소문이 났으며 함경도를

비롯해 온 나라 곳곳에서 환자들이 몰려왔고 많은 돈을 벌 수 있

었다. 돈이 없는 사람은 그냥 치료해 주어서 6.25 난리 때도 살

수 있었으며 한글사랑 나라사랑 새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님은 잘못된 것을 그냥 보고 넘기지 않는 올바른 성품을 가졌고

그에 맛서 싸우는 용기가 있었으며 꿈을 이루기 위해 끈질기게 연

구하고 두드렸다. 그런 정신과 태도가 고성능 타자기를 발명하게

했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게 했고 그래서 님

의 삶은 멋있고 아름다웠으며 위대했다. 새롭고 좋은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을 자꾸 두드리자. 님이 열지 못한 문들을 열기 위해

뒷사람들이 끈달아 두드리면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난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공 박사가 요즘 유행하는 벤처사업가이며 그 때

정부가 님을 짓밟지 말고 도와주었더라면 더 큰 발명을 했을 것

이란 생각을 한다.

 

천재도 학교 성적이 꼴지가 될 때도 있다.

 

앞에 공 박사가 쓴 글에서 신의주 고등 보통학교 입학시험에 떨

어진 이야기와 의주농업학교 1학년 성적이 꼴지에서 두 번째였

다는 이야기를 읽었을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님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게 이름난 사람이었고 천재

라는 평가를 받은 사람이다. 천재교육 전문가인 변영애님이 등

불출판사에서 낸 [천재가 되려면 웃는 법부터 배워라]라는 책에

서 여섯 명의 천재를 알렸는데 그 여섯 사람 가운데 공 박사가

들어갔다. 그 여섯 분은 물리학자 리차드 헤인만박사, 예수그리

스도, 석가모니, 수필가 김소운, 공병우, 번역문학가 전혜린이었다.

대학 입학시험이 있을 때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사람보

다 떨어지는 사람이 더 많다. 그리고 대학에 가지 못하는 사람

도 있다. 나는 이 젊은이들에게 의주 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농업학교에 다니며 1학년 성적이 꼴지에서 두번째 였다

는 것을 생각하고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할 것을 권한다.

인문고등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상고나 공고 농고에 다니는

학생들에게도 공병우식 삶을 기억하고 꿈을 가지고 열심히 책

을 읽고 공부할 것을 권한다.

그리고 이 나라의 부모와 선생님들에게도 공 박사의 삶을 엿보

라고 권한다. 그리고 자기 자식이나 제자가 시험 성적이 나쁘다

고 실망하거나 무시하지 말기 바란다. 그 애에게 공병우식 삶을

배우리고 말하라. 그 애가 앞으로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지도 모

른다.

 

하고 싶은 공부는 잘된다.

 

진학 시험에서 낙방한 일이 있고 무시험으로 들어간 학교에서

1학년 성적이 꼴지인 학생이 의사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1년간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 인문학교 졸업생도 힘든 의사전문학교

시험에 합격한 사실을 우리는 보았다.

나는 여기서 억지로 하는 공부가 아니고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공부는 잘되고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꿈을 갖게 하자 .이

것이 공부를 하고 싶게 하는 것이다. 다음 스스로 공부하자. 스

스로 깨닫든 선생님이나 부모가 그렇게 만들든 이것은 매우 중

요하다. 다음 학교와 부모와 사회와 국가는 애들이 공부하기 좋

은 환경만 만들어 주고 도와주자. 좋은 책을 많이 만들고 공부

에 전념하게 하고 건강을 도와주면 된다.

교육 개혁의 비결이 여기 있다. 삶이 행복해지는 길도 여기 있

다. 시험 성적순으로 사람을 나누고 등급을 메기는 현 교육 풍

토는 아주 잘못된 일이다.

오늘날 잘못된 교육 환경이 수많은 천재를 바보로 만들고 과학

자를 할일 없이 거리를 헤매는 놈팽이로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어디서나 최선을 다하라.

 

소년 공병우가 학교 졸업장이 없이 의학박사가 된 것은 꿈을 가

지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지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하는 일에 푹 빠져서 최선을 다하면 좋은

열매를 얻게 된다. 의사가 되겠다는 마음이 생기니 공부를 하

겠다는 욕심이 생기고 그러니 자동차가 없던 때 풍선을 타고

신의주까지 가서 책을 구하고 돈이 모자라니 값싼 책을 구

하기 위해 압록강 건너 만주땅까지 가서 책을 구해 다가 공부

했다는 사실이 그가 얼마나 공부를 하고 싶어했고 또 열심히 했

는지 알 수 있다.

부모가 하라고 해서 또는 선생님한테 혼날까 봐 공부를 한 것

이 아니다. 그러니 꼴지하던 학생이 1년 정도 공부해서 졸업생

보다 더 실력을 올린 것이다. 1년 정도 독학으로 그런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면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했는지 짐작이 가고

도 남는다. 열심히 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나오길 바라지 않았

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

 

경성 제대 출신이 아닌데도 경성 제대 교수 문하생이 되고 경의

전문학교 연구원이 된 것도 착하고 바르게 살고 착실하게 사는 젊

은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박사 학위를 받을 기회를 얻은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세상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 자기만 알고 눈속임으로 잘 보이려 하고 간판만 따려고 해선

신용을 얻을 수 없다. 먼저 마음이 바르고 하는 일이 빈틈없어야

하고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창의력을 길러라.

 

공병우가 짧은 시간에 박사가 된 것은 머리가 좋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한 땀을 흘렸고 신용을 얻었기 때문이지만 스스로

창의력을 가지고 실험했기 때문이다. 남이 하라는 것만 잘하는

것도 좋고 중요하지만 스스로 연구하고 새로운 방향을 찾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바로 창의력이다. 이 힘이 발명도 하고 남다른

성공을 하게 한다. 사회도 발전하게 만든다. 외우기를 잘해서

시험 성적이 좋은 것도 중요하고 시키는 것을 잘해서 윗사람에

게 잘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창의력이 좋아 새로운 길을 찾고

윗사람이 바라는 것을 미리 알아서 모든 일을 스스로 잘 처리

해 놓으면 일 잘한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지금까지 압록강변에서 태어난 댕기머리 팔삭둥이 공병우 소

년이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의사가 되고 돈을 버는 과

정을 살펴봤다. 공병우 소년은 아주 고관대작이나 재벌의 아

들로 특별한 집안에 태어나서 잘먹고 잘입고 편하게만 산 것

이 아니다.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집안에 태어나 평범한 소

년으로 잘랐다. 오히려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보다 좋지 않은

조건을 안고 있었다. 8달만에 허약한 몸이었으며 뜻대로 진학을

한 것도 아니다. 또 시대 상황은 어둡고 불행한 시대환경이었다.

그러나 꿈을 가지고 열심히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뛰었다. 두드리

면 얻으리라를 보여주었다.

지금 젊은이들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공병우 소년보다 건강하

고 공병우 농업학교 학생보다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고 공병우

학생보다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조건이고 환경이다. 자신이

불행하고 처지가 어렵다는 사람들은 공벙우 소년처럼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했는지 그리고 연구하고 땀흘려 바쁘게 살았는

지 되돌아 보기 바란다. 만약 그보다 바쁘게 살지 않았다면 지

금부터라도 그만큼 꿈을

 

 

발명가 과학자 공병우

 

 

한글 속도타자기 세상이 오다.

돈 잘 버는 의사 일은 제처두고 돈 버리는 한글사랑에 힘쓰다.

 

위에서 안과 의사 공병우 박사가 한글과 타자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것이 간단한 일 같지만 보통 일이 아

니었다.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과학 탐구정신이 없었다면 일제에

길들여진 대로 한자혼용파 지식인이 되어 한글쓰기를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님은 잘못된 것을 보고 그냥 넘기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이제 해방이 되었으니 우리 말글을 도로 찾아 써야 하고 우리 말

글을 잘 부려쓰려면 문자생활을 기계화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 문제를 스스로 풀기 위해 나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타자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타자기가 있어도 쓸 줄도 모르고, 또 쓸 생각을 하지 않을 40년 대 님은 한글 타자기를 스스로 만들 생각을 한 것이다. 그것도 돈 잘 버는 의사가... 이 일은 오히려 나라에서 해야 할 일이었다. 개인이 하기에 힘든 일이었지만 님은 그 일에 선듯 나섯고 해냈다.

 

보통 돈 많은 사람이라면 놀고 먹으려 하지 스스로 그 고생길을

가지 않는다. 남다른 희생 정신을 가진 분이고 머리가 좋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고 그런 고생을 한 것이었다. 우리 겨레와 나라를

위해 고맙고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분을 이 나라 지도자

라는 자들과 국민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오히려 괴롭혔으니 한심스

럽다.

 

발명품이 그냥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고성능 공병우 타자기

가 나오기까지 많은 돈과 시간과 힘을 썼으며 밤잠 못 이루며 고민

했고 연구했다. 님은 먼저 영문 타자기를 사다가 뜯어 본 뒤 그 때

나와 있는 우리 한글 타자기를 구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견주어 연구했다. 그 당시 이원익 타자기와 송기주 타자기라는 것이 있었는데 세로쓰기 5벌식으로서 아주 속도도 느리고 불편했다. 타자기는 손으로 쓰는 것보다 빠르고 편리해야 하는데 그 때 나와 있는 타자기는 느리고 쓸모가 적어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 타자기의 단점을 찾아 보완해서 다시 만들어 보고 또 안

되면 며칠이고 방안에 들여 밖혀 다시 만들다 보니 병원이 문닫을 지

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상황을 자서전에서 옮긴다.

[...우리집 사랑방은 해체된 타자기와 쇠붙이 부스러기로 마치 고물상처럼 지저분하기만 하였다. 병원 경영보다 타자기 일에만 몰두하고 있으려니 고용 의사만으로는 병원 운영이 부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공 박사한테 직접 진찰을 받겠다."는 환자에게 차츰 실망을 주게 되었으니 병원이 잘 될 리가 없었다. 병원 일은 내버려 둔채 쇠붙이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나에게 가족들도 참다못해 내놓고 못마땅하다고 불평하기에 이르렀다. 병원이 망하게 되었으니 이러다간 집안까지 망하지 않겠느냐고 항의하는 것이 아닌가? 타자기에 미쳐 병원 망하게 되었다는 소리가 번지자 친구들마저 스스럼없이 한 마디씩 충고를 하며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성화였다. 온 신경이 곤두세워지는 연구자의 심정을 너무 몰라주는 것 같기만 했다. 그들은 피가 마르는 듯한 순간 순간과의 투쟁이 연구 생활이란 것을 알 리가 없는 일이었다. "병원이나 잘 경영할 일이지, 눈 의사가 무슨 타자기를 발명한다는 거야." "한문도 안 나오는 타자기를 누가 쓰겠다고 하기에, 한글만 나오는 타자기를 만든다는 거야." "산문, 잡지, 공문, 편지들 모두 내려쓰는데 왜 가로쓰기 타자기를 만들고 있어?" 위로도 격려도 아닌 조롱에 가까운 말로 연구 중단을 종용하는 이도 있었다...."환자들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어요."하던 간호원의 목소리는 점점 풀이 죽어 갔다. 이제 환자들의 불평이 노골적으로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연구하다 말고 손을 툭툭 벌고 일어날 수 없었다. 공 박

사가 미쳤다는 소리가 점점 많이, 더욱 크게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

럴 때마다 나는 큰 일을 위해서는 작은 일들은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억지 같은 소리를 해 가며 가족이나 환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그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위 글을 읽으며 가슴이 아프고 저렸다. 그 때 님은 자신이 좋

아서 그런 고생을 했지만 그 가족들까지 마음 고생이 많았을 것이

다. 가족들도 이 겨레와 나라를 위해 뜻하지 않은 아픔과 괴로움을

껵어야했다. 님과 님의 가족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며 그 자손들이

라도 복 받기를 두 손 모아 빈다.

 

타자기 발명을 알아준 분들과 몰라준 사람 들

 

님은 [어떤 발명이든 발명된 뒤에는 쉬운 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

나 발명이란 많은 정력과 시간, 그리고 끈질긴 의지와 많은 돈이 들

어가는 것임을 체험하게도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무엇이

든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신념을 스스로 입증시킨 것이라 생각한다]

고 말하고 있다. 발명이란 힘든 일이고 아무리 힘들지만 굳은 믿음

과 노력이 있으면 성공한다는 말씀으로서 우리 모두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이다.

 

그런데 이렇게 힘들게 만든 발명품을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쓰지

않는다면 얼마나 가슴아프겠는가.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큰 보람을 느낄 것이다. 공 박사가 타자기를 만든다고 할 때 많은

이들이 알아주지 않았는데 조수로 함께 일한 이임풍씨가 많이 도와

주고 힘들여 만든 타자기를 알아준 한글학회 최현배 회장과 타자기

를 써 준 미군정 당국자에게 크게 고마워하고 있다.

 

해방 뒤 일반 사회에서나 우리 관공서에서는 한글을 섞어쓰지 않

고서는 공문서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

청 문교부에서는 한국의 교육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영문 타자

기처럼 편리한 한글 타자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공

박사가 하고 있는 타자기 발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 미국인인 스미드 편수국장은 공 박사를 찾아 격려했고 시제품

이 다 된 날 문교부 장관실로 그 시제품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여

러 사람에게 보여주고 빨리 대량생산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단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발명품을 미국에 가서 특허를 받았을 때는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는데 우리 정부에서는 무

관심했고 쓸 생각을 하지 않아 매우 실망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

글학회 최현배님, 의사이신 백인제 박사, 주요한선생, 소설가 이광

수님, 정인섭박사 들이 [한글 속도타자기 보급회]를 만들어 일반인

들에게 "한글 속도타자기 발명은 민족의 자랑이며 민족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일이라고 찬양해 주어서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타자기를 만든 공 박사도 훌륭하지만 그 것을 알아준 분들도 선각

자요 선구자들이었다.

 

 

6.25 전쟁 중에 빛난 한글 속도 타자기

 

그렇게 애써 연구해서 발명한 한글 속도 타자기는 한국인들에게는

낫선 것이어서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 원조기관에 타자기

발명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니 그 타자기 100대를 구입해 한국

정부에 기증하겠다니까 문교부와 원호처에서 관심을 보이고 타자기

를 주문하기 시작했으나 6.25전쟁이 터져서 그것도 물거품이 되었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처럼 전쟁 중

에 손원일 해군 참모총장이 공병우 타자기를 해병대에서 쓰겠다고

공 박사를 찾는 신문 광고를 내고 미국에 원조품으로 공병우 타자

기를 달라 해서 쓰기 시작했다. 공 박사는 군인들에게 타자기 사용

법을 가르치니 전쟁 중에 군부대 천막 속에서 타자기 소리가 울려

퍼졌고 빠른 업무 수행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한다.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을 때는 유엔군 통역관인 언더우드라는 분이

공 박사에게 타자수를 추천해 달라 했고 그 타자수는 헬리콥터로

모셔져 특별 대접을 받으며 판문점에서 휴전회담 하는 서류를 만

들었다. 그 때 회담 내용이나 북측에서 오는 전화 내용을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서류를 만드는데 한글 서류가 중국어 서류는 말할

것 없고 영어 서류보다도 가장 먼저 나왔다니 한글 속도 타자

기가 영문 타자기보다도 속도가 더 빠른 타자기임을 그 때 증명

되었다.

 

한글 타자기 전성시대가 오다.

 

이렇게 전쟁 중에 군대에서부터 한글 타자기를 쓰고 성능을 인정

받게 되니 전쟁이 끈난 뒤엔 많은 사람들이 타자기의 훌륭함과 필

요함을 알게 되어서 민간 사무실에서도 타자기를 쓰게 되었다. 그

래서 상업학교에서는 타자 교육을 시키고 일반 사회에도 타자학원

까지 생겼으니 한글 타자기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타자기 열기가 뜨겁게 일어날 무렵 난데없이 타자기는 한

자를 쓸 수 없어 불편하다면서 문서를 펜으로 쓰라고 명령한 군

간부가 있었단다. 1957년에 육군창모총장이 된 백선엽장 군이었다.

그는 한글로만 쓴 공문은 한자가 없으니 읽기가 불편하다면서 타

자기 사용을 못하게 한 것이다. 참으로 무식하고 답답한 지휘관

이었다. 그러니 육군부대에서 타자기 사용이 줄게 되고 타자기 발

전에 위기감이 돌았다. 그러나 그 때 이승만 대통령이 공문은 한

글로 써야 한다는 담화를 발표함으로서 다시 육군은 말할 것 없

고 다른 정부 기관들도 한글 속도타자기를 쓰게 되어 한글 타자기

바람이 세차게 일게 되었다.

 

여기서 백선엽 장군 같은 진짜 무식하고 얼빠진 한자 중독자들이

나라의 중요한 자리에 앉아서 한글 발전과 글자 기계화를 가로막

은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아직도 그런 자들이 판치고 있어 피

해가 막심하다. 이들은 한자 섞어쓰는 일본식 말글살이에 길들여

져서 자신들 편리함만을 위해 한글쓰기를 방해하고 있다. 1965년

한일 회담이후 일제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득세하면서 한글과 한글

기계화는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김종필, 민관식 같은 정치인과 이

희승, 남광우 같은 일제 교육 찌꺼기가 판치니 한글 세상과 한글

기계화가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손원일 장군은 선각자요 백선엽 장군은 돌머리로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한글 지킴이지만 김종필.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은 한글 훼방꾼이다.

 

 

 

남산에 끌려갔던 이야기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이야기

한글 타자기가 대중화 대면서 공병우 속도 타자기 회사도 잘 되었으

나 한글 기계화에 무식한 군사정부가 공병우식 타자기 글자꼴이 예쁘지 않다고 4벌식 타자기를 국가 표준으로 함으로서 공병우 타자기 회사는 어려움에 처했고 공박사는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정부와 맛서 싸우게 되었다.

 

그러다가 김재규를 비롯한 군사혁명찌꺼기들이 만든 중경재단이란 곳에서 공병우 타자기 회사를 인수해 발전시키겠다고 하니 선듯 넘겨주었는 데 공박사의 병원과 집까지 담보로 많은 빚을 얻어쓰고 부도를 내는 바람에 회사도 망하고 많은 재산을 날리게 되었다. 그들에게 사기 당한 것이다.

 

그러나 공박사는 한글을 살리고 잘못된 한글 기계화 국가 표준을 바로잡기 위해 군사독재 정권과 맛서 싸우다 많은 어려움을 겪고 결국 악명높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수모를 당하고 미국으로 망명해서 컴퓨터 공부와 연구를 하고 민주화 바람이 부는 1988년에 귀국 한글문화원을 만들고 한글사랑운동을 다시 하시게 된 것이다.

 

그 때 하이텔 피씨 통신에 올렸던 글을 여기 다시 옮긴다.

 

 

 

 

제 목:남산에 끌려 갔던 이야기 관련자료:없음 1/5

보낸이:공병우 (Kongbw ) 1993-11-06 11:22 조회:1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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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공병우 박사님의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았다”의

제 8장 '고독한 투쟁' 157~161쪽에서 뽑아 요약한 글입니다.

1969년 3공 군사정부가 비과학적인 4벌식 표준자판을 제정하고 다른

글자판 보급을 관권으로 탄압할 당시, 공병우 박사님이 과학적인 3벌식

글자판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속칭 '남산'으로 통하던 중앙정보부에

끌려 갔던 이야기입니다. 1993. 11. 6. (한글 문화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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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에 끌려갔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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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나는 정부에서 정한 4벌식 표준자판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밝히기 위해, 임 종철 선생님과 함께 타자 경기 대회와 세미나를 열고 연구 보고서를 만들어 뿌리기도 했다. 그러자 정부는 글자판 통일을 위한 심포지엄을 방해하거나 자판 비교연구를 발표한 잡지사를 폐간하는 등 심한 탄압을 했다. 이렇게 탄압을 해도 소용이 없자 과학기술처 장관이 우리집으로 와서 나를 회유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문화상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장관에게 문화상을 사양했다. 그러자 중앙정보부에 고발을 했는지, 장관을 만난 지 며칠 후 남산에서 왔다는 두 사나이가 나를 찾아왔다.

“중앙 정보부에서 왔는데 잠깐 갑시다.!” 나는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로 끌려 갔다.

 

먼저 사진실로 가서 앞가슴에 신문에서 보던 것과 같은 숫자판을

붙든 채 사진을 찍었다. 마치 간첩과 꼭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5~6명의 젊은이들이 책상에 둘러 앉아 있는 사무실로 끌려갔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내게 “왜 정부의 시책을 반대하는가?”하고 질문을 했다. 과학기술처에서 잘못한 점에 대해 내가 몇 마디 말하자, 그 방에 있던 젊은 사람들이 일제히 “이 새끼, 여기가 어딘데, 정부가 잘못한 것을 따따부따하는 거야?”하고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은 그날 심문을 마치고는 다음날 다시 오라고 했다. 그런데

다음날 갔더니 그 사람들의 태도가 아주 달라져 있었다. 그들은 시중에 나가서 타자학원을 돌아다니면서 3벌식과 4벌식 타자기에 대해 알아 본 모양이었다.

 

3벌식은 한 달만 배우면 전문 타자수로 취직이 가능하지만, 4벌식은 3개월 교육을 받아야 취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 통신과에 가서 3벌식은 영문 타자기보다도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북한과 외국에서 들어 오는 라디오 방송을 직접 받아 찍는 속기 타자기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반면 4벌식은 영문보다 느린 타자기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벌식이 훨씬 더 우수하다는 것을 조사를 통해 알았다고 말했다.

 

“과학기술처가 잘못하고 공박사님을 고발했습니다. 과학을 위해서 앞으로 더욱 투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과장님 앞에 가서는 정부 시책에 반대하지 않겠다고만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야 이 사건을 무사히 끝낼 수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부탁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대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풀려 나왔다.

 

정부 시책을 반대하다가 고발을 당한 내가, 애국애족하는 사람들이 끌려 가면 고문으로 죽거나 병신이 되어 나오던 남산에서 '이 새끼' 소리를 듣다가 무사히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과학적이고 고성능인 세벌식 한글 기계의 진리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로,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진리의 격언처럼, 내가 주장한 타자기가 칼을 물리치게 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미국이나 독일 사람들은 윗글쇠를 3% 누르는 로마자 자판을 시간과 정력 낭비라면서 '대문자 안 쓰기' 운동을 하는데, 3공 군사 정부가 1% 누르는 3벌식 자판을 버리고 10% 누르는 4벌식 자판을 만들어 놓더니, 5공 군사 정부는 4벌식을 버리고, 윗글쇠를 20%나 누르는 괴물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한글은 나날이 죽어가고 한자가 나날이 기승을 부리는 오늘의 현실을 볼 때, 선진국의 문화 침략으로 한글은 한자와 로마자의 시녀 노릇을 하게 될 것만 같다. 윗글쇠를 1% 누르는 글자판으로 만든 한글 기계들, 특히 타자기(수동ㆍ전자)가 일반화되기 전에는 한자의 보급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자전거 붐이 일어나듯이, 먼저 타자기의 붐이 일어나서 국민 모두가 기계로 글자를 치게 되어야만 한글도 살고 나라도 산다고 믿는다.(편집자 주)

 

한글 문화원 서울. 종로구 와룡동 95 우:110-360

전화:744-3268, 전송:742-9580

 

 

천재 공병우 박사

 

 

 

 

hitel PLAZA 큰마을 #181/72460

 

제 목:한글을 살리기 위한 또다른 나의 투쟁

보낸이:공병우(Kongbw) 1994-02-01 13:51 조회: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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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살리기 위한 나의 또다른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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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병우 (한글 문화원장)

 

한글을 살리기 위해 내가 과거에 실천한 몇 가지 투쟁 이야기

를 말하고자 한다. 한글을 사랑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상생활에서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것이 한글을 살리는 지름길이라 믿는다.

 

1. 1991년의 일로 기억한다. 해마다 '동아연감'의 부록으로

나오는 '동아 인명록'을 발간하는 곳에서 나의 이력을 적어 보내

달라는 요청서가 왔다. 나는 한글만으로 이력을 적어 보내면서, 먼 훗날에 젊은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만으로 인명록에 올려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해마다 한자혼용으로 올려지던 내 이름이 그 해의 동아연감 인명록에는 쏙 빠져 버렸다. 그 이듬해에 또

요청서가 왔기에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한글만으로 적어 보내면서

한글만으로 공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내 나의 고집이 받아들여져 한글만으로 나왔고 그 이듬해에도 역시 한글만으로 기록되어 나왔다.

 

아울러 나는 1993년 판 동아연감 인명록에서 평소 한글을 사랑

하고 한글만 쓰기에 앞장서는 분들의 이름이 모두 한자로, 이력

내용도 한자혼용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았다. 이 사실은 한글을

사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한글을 살리기 위한 투쟁에 철저

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에 견주어 금 수현 님의 이름은 이미 오래 전부터 동아연감

인명록에 한글만으로 실려 왔었는데, 그것은 해방 후 김 수현을

금 수현으로 성을 바꾸고 한글로 이름을 써 왔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나는 금 수현 님이야말로 진정 한글을 사랑하면서 실천을 하신 분이며 위대한 선각자라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얼마동안 이 사실을 모른 채 연감 인명록에 내

이름만이 한글로 기록되어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을 하였지만, 이미 오래전에 한글만으로 써 오신 금 수현 님을 알고 나서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2. 우리나라 통일원에서, 북한 친척 방문 희망자가 신청서를 제출하면 북한 방문을 허가해 준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신청서를 제출했

다. 그 후 어느날 통일원 직원이 전화로 나의 한자이름을 질문하기에 나는 한자 이름이 없다고 대답했다. 한자이름이 없으면 북한에 갈 수 없다고 말하기에, 나는 북한을 못 가더라도 이미 버린 한자 이름을 다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지 수 주일 후 북한을 방문해도 좋다는 허가서를 받았다. 통일원 허가는 받았지만,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가지 못하고 일본이나 홍콩을 경과하여야만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제 나라 땅을 밟아 가겠다는 고집으로 오늘날까지 가지 못하고 있다. 남의 나라 땅을 밟아야만 북한을 갈 수 있는 비극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이런 비극의 근본 원인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우리 민족의 가장 강한 무기인 한글을 천대만 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3. 1993년 "한국발전"이란 계간지를 발행하는 "한국발전 연구원"

에서 나에게 원고 청탁을 위한 규정을 인쇄한 원고 청탁서를 보내왔는데, 그 청탁서에는 원고 제목과 원고 장수 제한, 원고료 등이 기록되어 있고, 원고는 한자를 25% 이상 넣어 달라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인쇄된 청탁서로 미루어 보아 이 한자 혼용 요구 조항은 창간할 때부터 편집 방침으로 일관해 온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원고 쓰기를 즉각 거절했다. 그 후에 다시, 한글만으로 써도 좋다는 부탁이 와서 원고를 써 보냈더니 그 해 봄호에 한글만으로 공개되었다.

 

하지만 이 계간지를 만드는 분들은 한자혼용이 한국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이 계

간지에는 한글을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글들도 많이 실려 있었

다. 그러나 이 분들의 글 중에는 한자혼용이 있었다. 한글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서도 막상 실천에서는 한자혼용으로 한글을 천대하고 한글전용에 걸림돌 구실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4. 1960년 대에 있었던 일로 기억한다. 신동아와 같은 이름난

월간지나 신문사에서 원고 청탁을 받고 내가 한글 타자기로 글을

써서 보내면 거의 모두가 200자 원고지에 다시 써 보내 달라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이에 대해, 미국에서는 소학생들이 숙제를 손으로 써 가면 교사가 받아 주지 아니한다면서, 타자기로 작성한 원고를 다시 펜으로 200자 원고지에 쓰라는 것은 미개한 처사라고 거절했다.

 

그런데 그 당시는 한글만으로 쓴 신청서를 시청이나 구청에

제출하면, 한자로 다시 써오라면서 받아 주지 아니했다. 그리고

은행에서는 자기앞수표에 금액을 한글만으로 써가면 한자로 다시

써오라고 거절했다. 그때 나는 한글을 천대하는 사람은 비애국자라고 언쟁까지 했다. 상대방은 나에게 한자를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이라고 대꾸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사필귀정으로 모두 한글만으로 쓰게 되어 나의 주장이 승리했다.

 

그렇지만 달나라 여행을 하게 된 오늘날, 아직 200자 원고지

00장으로 원고를 요청하는 잡지사와 신문사가 대다수인 것을 보고,

우리 나라 글자생활은 아직 원고지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미개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아직도 문필가 대다수가 기계로 원고

를 쓰지 못하고 200자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쓰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나라가 기계문맹을 벗어나지 못한 미개한 나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누구나 배우지 않고 손쉽게 한글을 찍을 수 있는 3벌식 타자기가 대중화되어야만 200자 원고지가 없어질 것이다. 타자기의 대중화로 원고지가 없어지는 날이 오기 전에는 신문, 공문, 명함, 명패 등에서 한자가 판을 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한글을 진정 사랑한다는 분들이 한글을 천대하는 일이 수두

룩하다. 두어 가지 예로 한자로 이름을 쓰는 것은 물론이고 아직 타

자기도 사용할 줄 모르는 분이 있는가 하면, 한글을 죽이는 2벌식 기계와 컴퓨터를 사용하는 분이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한글을 해치는 일이 무엇인가를 한글을 사랑하는 분들이 먼저 깨닫고 실천하기 전에는 원시적인 200자 원고지 생활에서 벗어날 수도 없기 때문에 한글도 나라도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1994. 1. 31.

 

 

 

제 목:나의 행복은 어디에서?

보낸이:공병우(Kongbw) 1993-11-16 18:34 조회:69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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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복은 어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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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복은 40연이란 긴 세월을 덤으로 살고 있기 때문-

 

공 병우(한글 문화원장)

 

사람은 기쁨과 슬픔을 번갈아 가면서 살게 마련이다. 내 나이

88세가 된 지금, 나에게 가장 기뻤던 일은 8ㆍ15 해방을 맞이하던

때이고, 반대로 가장 큰 비극은 625 전쟁 때 겪은 고통이다.

6ㆍ25 전쟁 때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나는 한 공산군 군의감의 증언

덕분에 죽지 않고 지금까지 43년이란 긴 세월을 덤으로 살고 있다. 지금까지 덤으로 살고 있으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점에서 기쁨과 행복한 마음으로 살다가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다.

 

1. 민족의 번영과 국가흥망을 죄우하는 한글 과학화 운동을 한

결과, 나의 '3벌식 글자판'이 과학적이고 능률적이란 사실을,

수많은 젊은이들이 알게 되었다. 지금은 그 보급과 계몽에 솔 선 나서는 애국정신을 가진 분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내일 죽어도 내가 심어놓은 3벌식 한글나무는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3벌식 한글나무가

무럭무럭 자라 난다면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최고 수준의

문명국가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2. 내가 한글 타자기로 3벌체 글씨꼴을 최초로 만들었을때, 글씨

모양이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모두가 거부감을 가졌다. 나는

3벌체의 과학성은 내가 죽어 50년 이상 지나야만 실용화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은 세계적인 한글

을 500여년 동안이나 천대만 하고 있으니, 3벌체의 과학성 또한 쉽게 깨닫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신문, 간판, 출판물 등에서 널리 3벌체 글씨꼴들을 실용하고

있는 것을 본 나는 뜻밖에도 살아서 나의 3벌체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사실을 보고 무척 기쁜 마음으로 눈을 감게 되었

다.

 

3. 천재전문 교육가이신 변 영애님의 저서인 “천재가 되려면 웃는

법부터 배워라”라는 책에서 영애님은 천재 본보기로 리차드

훼인만, 예수 그리스도, 석가모니 부처님, 김소운, 공병우,

전혜린 등 6명을 뽑았는데, 그 중 나만이 살아있다. 내가 살아서 이런 책을 읽고 죽게 된 것을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4. 나는 10여년 전에 팔도강산 구경삼아 사진을 5년 동안 찍었다.

금년 정월 '한국사협'이란 월간지에, 전주에 계시는 권진희님이 나의 사진에 대해 쓴 긴 글이 실렸다. 사진은 세계적으로 발전

하고 있는 과학이기 때문에, 내가 죽은 후 10년 정도 지나야만

이런 나의 사진에 대한 평론이 공개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살아서 나의 사진 평론을 읽게 된 것을 무척 기쁘고 행복하게

생각한다.

 

나는 오늘 생각한다. 내가 만일 돈을 위주로 안과병원을 운영했다든가, 고성능 타자기를 개발한 일이 없었다든가, 공산당 위조지폐 사건 때 허위 진단서를 썼다든가, 3주일 동안 정치보위부에 있을 때, 번민과 고통을 못이겨 지조를 버리고 남들과 같이 허위 자술서를 썼더라면, 나는 그 당시 정치범으로 총살을 당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나의 지조를 생명처럼 지켰기 때문에 죽지 않고 지금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사람은 돈보다 더

소중한 사랑을 위해 정직하고 정의롭게 노력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빛나는 생명의 축복을 받는다고 확신한다.<> (1993.11.17.)

 

한글 문화원 서울 종로구 와룡동 95 우:110-360

전화:744-3268, 전송:742-9580

 

 

 

한자는 비과학이다.

 

 

제 목:한자 이름은 비과학적인 글자생활

 

보낸이:공병우(Kongbw) 1993-04-02 16:24 조회:16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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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이름은 비과학적인 글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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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병우(한글 문화원장)

 

대부분의 이름난 일간신문들이 사람 이름을 한자로 기록

하고 있다. 사람 이름에는 어려운 한자가 많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공자, 맹자 등 한문을 배워 온 88살 늙은이인데도,

어느 단체의 명단을 보면 읽을 수 없는 한자가 수두룩해 명단

을 한글로 입력하는 데 애를 먹는다. 하물며 젊은 사람들은

대다수가 한자에 까막눈이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한국 사람들조차 대다수가 신문이나 명함의 한자를 제대로

읽을 수 없을 뿐더러, 외국 사람들은 자기네 말로 읽기 때문에

전혀 엉뚱한 이름으로 부르게 된다.

예를 한 가지 든다면, 만일 김 영삼 대통령의 이름을 한자로

쓴다면, 중국 사람은 '찌인 유응 싸안'이라 읽고, 일본 사람들

은 '깅 에이 상'이라 읽는다.

그리고 서양 사람들은 한자 명함을 받으면 “당신은 중국

사람이오? 일본 사람이오?” 하고 묻는다.

한국 사람 모두가 읽을 수 있고, 중국이나 일본 사람들이

우리 나라 대통령의 이름을 올바로 부르게 하려면, 이름을 한글

로 쓰고 괄호 속에 로마자로 써 넣으면 세계인 누구나 한국

대통령은 김 영삼으로 부르게 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왜 세계에서 둘도 없는 한글과 국제적인

로마자를 무시하고, 소중한 이름을 꼭 한자로만 쓰는지, 한자

이름에 어떤 장점이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나는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무기인 한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천대만 하고 여전히 비과학적인 글자생활

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선진국에 비해 우리의 과학ㆍ문화 수준

이 형편없이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글자는 민족

문화를 좌우하고 민족문화는 국가흥망을 좌우한다'는 말이 불

변의 진리임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3. 4. 2)

 

한글 문화원. 서울. 종로구 와룡동 95번지 우:110-360

전화:744-3268, 팩스:742-958

 

 

 

제 목:국가흥망을 좌우하는 한글전용

보낸이:공병우(Kongbw) 1993-04-19 14:51 조회:16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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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흥망을 좌우하는 한글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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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병우(한글문화원장)

 

지난 16일 동아일보 독자란에 송 기헌 교수님은 우리말

70 퍼센트가 한자어이기 때문에 한글표기 땐 의미 혼란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의 예를 들여 한자 혼용을 주장하셨다.

송 교수님이 예를 들어 보인 바와 같이 글자생활에 혼란이

있다는 사실에는 나도 100%로 동감한다. 그러나 그런 혼란은

한자혼용 생활에서 한글전용 생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현상

으로 피할 수 없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 혼란을 벗어나는 길은

하루빨리 한글전용 생활을 발전시키는 길뿐이다. 그런 과도기의

혼란을 이유로 한자혼용을 주장한다면 한자어를 더욱 늘리게 되

어, 글자생활의 혼란이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한자어는 우리 조상들의 사대사상으로 빚어진 중국식 외래

어로, 우리말을 위축 또는 말살시켜 왔다. 따라서 한자어를

하루빨리 줄이는 동시에 우리말로 바꾸는 과업이 우리 나라 과학

문화 발전을 촉진하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한글전용을 실천하려면, 먼저 대중적인 신문, 잡지, 공문,

명함, 명패, 간판 등 일상생활에서부터 한자어 사용을 줄이고

우리말을 사용해야 한다. 만일 한자나 로마자를 기록할 필요가

꼭 있을 때는 한자나 로마자를 괄호 속에 넣는 방식으로 하여야

만, 한자나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한자

어는 줄어들고 우리말과 글은 발전할 것이다.

 

일본은 수백 년 전부터 일본 가나를 활용하여 한자를 일본어

로 바꾸는 동시에, 반드시 한자를 가나와 같이 기록함으로써,

누구나 글을 읽을 수 있는 일본 고유의 한자(Japanese Kanji)로

만들었다. 이렇게 일본은 소리글자인 가나의 힘으로 중국 한자

를 일본식 한자로 만들어 사용하였기 때문에, 동양 어느 나라 보

다도 먼저 문맹을 벗어나 선진국으로 발전하였다. 우리는

일본 가나보다도 두 배나 과학적인 한글을 천대만 하면서, 중국

식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중국의 속국이 되었고, 일본에게

나라가 망한 적이 있었음에도 아직도 한자 사용을 주장한다면

일본이나 중국에 또 다시 속국이 되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한자혼용은 일본 문화 침략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처사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한자와 가나를 혼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도 한자혼용을 하자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일본이 일본식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과, 우리가 외국 글자인 중국식 한자

를 사용하는 것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는 사실, 즉 일

본인이 사용하는 한자는 일본 문화 발전에 훌륭한 무기 구실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는 마약 구실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처사이다. 일본이 만일 가나 대신 한글을

가졌더라면, 로마자보다도 먼저 세계적인 글자로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한자 문화권에서 벗어난 지 이미 오래되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한자를 우리말화하면서 한글전용으로 한글을

발전시킨다면, 머지않아 한글이 세계적인 글자로 발전할 것이다.

 

일본과 중국은 모든 생활 방식을 서양식으로 바꾸었고, 글자

까지도 로마자로 바꾸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우리는

생활 방식은 서양식으로 바꾸었지만, 글자만은 로마자보다도

우수한 한글이 있기 때문에 바꾸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민족의 보물을 500여 년 동안 천대만 해 왔고, 지금은

더욱 천대하고 있으니, 이대로 간다면 한글문화가 발전하지 못

하여, 결국 한자의 해독과 로마자 문화 침략이 현재보다도 앞으

로 더욱 심한 꼴이 될 것이다. 외국의 문화 침략은 위대한 한글

로 민족 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만 막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글자생활을 개혁하여 한글 문화를 발전시켜야만 한다.

 

첫째, 사람이름과 고유명사(예: 김영삼, 동아일보, 조선일

보)는 한글로 쓰고, 로마자나 한자로 기록할 필요가 있을 때

에는 괄호 속에 로마자로 기록하는 것이 우리말을 정확히 나타

내는 글자생활이다.(자세한 내용은 동아일보 4월 10일자, '나의

의견'란 참고)

 

둘째, 신문, 잡지, 공문, 문패, 명함 등 일상생활에서

한글전용을 단행할 것이다. 꼭 필요할 때만 괄호 속에 한자나

로마자를 넣는다. 이것은 일본이 수백 년 전부터 해 오는 방식으

로 한글을 주인으로 외국 글자를 종으로 하는 방식이다.

 

중국은 자기네 글자와 로마자로 글자생활을 하고 있으며,

일본은 수백년 전부터 한자를 모두 일본 가나로 번역하여 일본

고유의 한자로 만들었고, 지금도 일본식 한자어로 바뀌지 않은

어려운 한자는 반드시 가나를 함께 기록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일본말을 로마자 화하는 운동은 중국보다도 백년

이상 앞서 시작하여, 현재는 국민학생들이 읽는 로마자로 만든

일본말 신문을 보급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셈틀(computer)에

서는 일본말을 로마자로 입력하면 일본 한자와 가나로 번역되어

나온다고 한다. 일본은 한문 타자기와 한문 식자기를 최초로

개발하여 동양 각 나라에 보급한 나라이다. 일본말 로마자화도

기계화도 컴퓨터화도 동양에서 가장 앞서가고 있는 일본의 글자

정책에 대한 역사를 읽어보면, 우리 나라는 일본의 100년 전

글자생활보다도 뒤떨어진 원시적인 글자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도 한자어를 빨리 우리말로 번역하는 운동과 한자를 사

용할 경우에도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먼저 기록함으로

써 '한글사랑이 나라사랑'이란 선각자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나라는 한글의 위대한 과학성으로 말미암아,

과학자, 종교인, 예언자, 도인들의 예언과 같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우수한 과학 문명국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1993. 4. 19.

 

한글 문화원 서울. 종로구 와룡동 95번지우:110-360

전화: 744-3268, 팩스: 742-9580

 

 

장난감 타자기를 만들자

 

 

작난감 타자기는 왜 없나? - 공박사님 글

공박사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겨울에 쓰신 글과 한글 문화원 근무하던 아가씨가 쓴 글을 옮긴다. 이 글을 쓰기 한 달전 쯤 공박사님께서 꼭 상의할 일이 있으니 삼청동 댁으로 와 달라는 전화가 있어 가보니 김슬옹군과 또 다른 친구가 와 있었다. 님 께서는 독일과 미국 들에서 구입해온 작난감 타자기를 보이시며 우리 나라도 작난감 타자기를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보급하면 셈틀 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소형 타자기를, 작난감 타자기 대신 만들어 보급하고 싶다시며 함께 그 일을 하자고 하셨다. 그러나 그 때 일반인들의 반응이 좋지 않아서 실패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공박사님은 절실한 사업이어서 큰 기대를 가지고 만나 의논한 것이었는 데 누구 하나 호응하지 않으니 크게 실망한 빛이었다. 그 때 공박사님 연세에 새로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도 무리한 일이고 나 자신 그 일에 매달릴 수 없는 처지라 찬성할 수가 없었다. 마침 내 동생이 타자기를 만드는 회사인 경방기계 생산부장으로 있어 의논해보니 지금까지 만들던 타자기도 국내에선 수요가 없어 중단하고 수출품만 주문받아 만들고 있다고 하며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겨울 감기 증세로 병원에 입원하셔서 끝내 하늘 나라로 가셨다. 작난감 타자기를 만들어 보급하는 일이 마지막 하시고 싶었던 일인데 아쉽다. 지금이라도 나라에서 초등학생들에게 교육용 작난감 타자기를 만들어 보급하고 학교에서 셈틀 가르치기 전에 자판 숙달 교육용으로 쓰면 기계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없애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이 대로

 

 

보낸이:공병우(Kongbw) 1994-12-14 19:09 조회:5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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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구성원리는 세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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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경아 (한글 문화원)

 

미국의 유명 과학 전문지 '디스커버리'는 94년 6월호에서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극찬하였다. 한글은 그 뛰어난

과학성과 배우기 쉬움으로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우수한 글자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한글이 정말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일까?

 

우리 한글은 초성 19자, 중성 21자, 종성 27자, 모두 67자의

자소를 조합하면 11,172자의 음절 글자를 만들 수 있는 과학적인

글자이다. 즉 초, 중, 종성 3벌만 있으면 어떠한 소리든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비해 로마자는 초성과 중성 26자만을 가지고 가로로

나열하여 단어만을 만들 수 있으므로, 불완전한 글자인 것이다.

풀어쓰기를 하는 로마자의 표음 능력으로는 소리를 표기하는 데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본 가나는 음절만을 기록할 수

있는 글자로서, 음소를 기록할 수 없는 글자이기 때문에

로마자보다도 더욱 불완전한 글자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 없다.

 

글자들의 과학성을 몇 가지 요소만을 가지고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공병우 글자 구성 비교표

+---------------------------------------+--------------+

|글자별구성|말|단어|음절|초성.중성.종성|점수|비율|비유|

+---------------------------------------+--------------+

|한글 |+ | + | + | + + + |600 |100% | 금|

+---------------------------------------+--------------+

|로마자 |+ | + | - | + + - |400 |66.7%| 은|

+---------------------------------------+--------------+

|한글 |+ | + | + | - - - |300 |50.0%| 동|

+---------------------------------------+--------------+

 

이 표를 통해 로마자와 한글을 비교하면 한글이 로마자보다 33.3%

우수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단순비교이긴 하지만, 한글이

모아쓰기를 통해서 음절 단위로 끊어 쓸 수 있는, 로마자도 따라올

수 없는 뛰어난 표음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은 잘 알 수 있다.

 

이처럼 한글의 과학성은 3벌로 모아쓴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2享 구성원리를 위배하여

한글 과학화 발전에 역행하고 있다. 한글의 과학성이 3벌식에 있음을

안다면 한글 과학화도 세벌식으로 해야 합리적이다.

 

현재의 2벌식 자판으로는 기본적으로 한글 기계들끼리 기종간

통일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2벌식으로는 1982년에 컴퓨터 자판을

먼저 만들고, 자판 통일을 위해 삼 년 뒤인 1985년에 타자기를

만들었는데, 컴퓨터에서야 오토마타가 받침 입력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만, 기계식 타자기에서는 그것을 기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 받침 글자를 입력할 때마다 쉬프트를 눌러야 하는 찍기

거북스런 타자기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자판배열만

두벌식이지 실제로는 찍힌 글씨나 찍는 방식은 네벌식이다. 이처럼

2벌식 표준 자판으로는 편리한 타자기를 만들어 낼 수가 없어,

사람들은 기계식 타자기가 더 이상 필요없다고 말한다. 한글의 3벌식

구성원리를 따르면 모든 한글 기계에서 자판 통일이 가능한데도

2벌식을 고수하느라 불필요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3벌식 글자판은 한글의 구성원리를 잘 따른 자판으로 한글의

과학성을 잘 발휘시킨 자판이다. 3벌식을 채택하면 기계화에서 가장

중요한 기종간 통일이 가능하고, 모든 한글 기계들을 똑같은

입력방식으로 다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3벌식 타자기는 특별히

배우지 않고도 누구나 한글을 손쉽게 찍을 수 있는 기계이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쉽게 친숙해질 수 있다. 3벌식 타자기가 대중화되면

대다수 국민들이 기계문맹에서 벗어날 수 있다. 빠른 3벌식 타자기

대중화로 국민 대다수가 기계로 글을 쓰게 되어 '추억 속의

타자기'가 아니라,'생활 속의 타자기'가 될 것이다.

1994. 12. 14.

 

한글 문화원 서울. 종로구 삼청동 28-7호 우:110-230

전화:722-3268,전송:738-2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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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왜 우리나라에는 장난감 타자기가 없는가?

보낸이:공병우(Kongbw) 1994-12-09 21:17 조회:2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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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 나라에는 장난감 한글 타자기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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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병우 (한글 문화원장)

가정마다 어린이가 타는 세발 자전거나 두발 자전거가 있듯이,

가정마다 <장난감 한글 타자기>가 있어야만 합니다. 장난감 타자기는

어린이들에게 글자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고, 또 기계에

대한 지혜와 기술을 습득시키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영국 어느 시인은

" 만일 원숭이에게 타자기를 가지고 놀게 한다면, 몇천 년 후에는 큰

도서관을 만들 것이다" 라고 타자기가 어린이 지능 발달에 효과가

매우 크다는 것을 멋지게 풍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갖은

장난감들이 다 있지만, 어린이 지능 발달에 가장 요긴한 <장난감 한글

타자기>는 아직 없는 나라로 참으로 뒤떨어진 나라입니다.

 

저는 40년 전 미국에 가서 어린이가 있는 가정이면 <장난감

타자기>가 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나는 지난해 견본으로

사용하기 위해,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장난감 타자기>를 사보내라고

부탁했습니다. 기계식이 올 것으로 알고 있던 나는 <영문 전자

장난감 타자기>를 바다 보고 놀랐습니다. 다시 기계식 장난감

타자기를 사보내라고 부탁했더니 기계식은 구하기가 힘들었다면서 한

대 사 보낸 것을 받았습니다. 지금 영문 장난감 타자기를 두 대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둘도 없는 한글을 가진 우리 나라에는 아직 기계식

장난감 타자기도 없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미국에서 보내온 기계를

본받아 <기계식 장난감 한글 타자기>를 만들어 보급할 사업가를 찾아

보았지만, 정부가 정한 타자기 자판이 국무총리 훈령 지시 21호로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추진에 걸림돌이 되어 지금까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몇해 전에 사업가들이 윗글쇠를 20%나 누르는, 구조가 복잡한 가짜

두벌식 표준자판으로 장난감 타자기를 만들다가 성공 못하고 막대한

손실만 보았습니다. 군사독재 정권이 엉터리 가짜 두벌식 자판을

표준화했기 때문에, 어린이 지능 발전에 필요한 장난감 타자기를 만들

수 없을뿐 아니라, 사무자동화(OA) 발전에 기본이 되는 타자기가 없는

미개한 나라로, 맨족문화 수준이 나날이 뒤떨어지고 있습니다.

 

한글 구성원리에 꼭 들어맞는 세벌식 타자기는 윗글쇠를 1% 누르기

때문에 영문 타자기보다도 속도가 30%나 더 빠릅니다. 군사독재

정권이 세벌식으로 표준화를 했더라면, 타자기 대중화로 국민 대다수가

달구지 시대를 벗어나서 모두 기계로 글을 쓰게 되었을 것입니다.

실용가치가 없고 국민을 속이는 가짜 두벌식 타자기로 말미암아,

타자기 대중화를 이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계문맹국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고, 어린이 장난감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난감

타자기>도 없는 우리나라 앞날이 캄캄하기만 합니다. 고성능인 세벌식

한글 타자기는 한자를 찍을 수 없고, 누구나 배우지 않고 한글을 찍을

수 있으며, 값이 싸기 때문에 손쉽게 대중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성능 세벌식 타자기의 대중화로써만 날로 늘어나는 한자혼용을

막아낼 수 있고, 한글전용을 이루워 후진국을 벗어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앞으로 많은 타자기 제작과 판매 업자들이 나와서 품질

개량과 판매에 경쟁을 하게 되어야만, 한글도 살고 나라도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 제 글에 대한 질문이나 반론을 환영합니다.

 

1994. 12. 9.

 

한글 문화원 서울. 종로구 삼청동 28-7호 우:110-230

전화:722-3268, 전송:738-269

 

 

 

마음의 눈을 뜨게 한 공박사

 

마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공 박사님

 

제 목:[옮김] 마음의 눈을 뜨게 해준 공병우박사님

1998-04-01 08:41 조회:27 1/3

 

며칠 전 한국일보 수도권뉴스 [이사람] 란에 공병우박사님에 관한 기사가

있어 옮깁니다. 지난 3월7일이 님께서 돌아가신 지 3년이 되는 날인 데

어쩌다 그냥 지나쳤습니다. 죄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가슴을 짓눌렀는

데 그 기사를 보고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님의 뜻과 한

글 사랑 정신을 되새기고 싶습니다.

어제 그 기사 주인공 김종률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아무도 공 박사님의

큰사랑을 이어가지 않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멋있고 뜻

있고 아름답게 살다 가신 공병우박사님, 본받아야 할 나의 큰 스승,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부담감이 들고, 님을 잊지 않기 위해 무엇인가 할

생각에서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송현님과 박흥호님을 불러서 한글기계화 전문가로 만든 공박사님! 우리가 본 받고 받들어야 할 선조요 선배이십니다.

 

 

강영우

 

 

남다른 삶

 

나의 유서 이야기 - 공 박사님 글

공 박사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유서를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은 그 유서 대로 시행 했습니다. 돌아가셨다는 것을 남에게 알리지 않고, 묘소를 쓰지 않고,주검을 의학도 실험용으로 바쳤습니다. 오늘 날 많은 이들이 시신을 기증하고 또 묘소 만들지 않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공 박사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님

이 살아 계실 때 하이텔에 쓰신 것을 옮깁니다.

 

PLAZA 큰마을 #52/72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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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나의 유서에 대한 이야기

보낸이:공병우(Kongbw) 1993-08-04 17:23 조회: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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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서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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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병우(한글 문화원장)

1989년 9월에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대원사 발행)라는 제목으

로 나의 자서전을 펴 냈다. 수 개월 동안 1만여권이 팔렸고, 나의 자서

전을 읽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다. 모두 재미있고

감격스럽게 읽었다면서, 나의 유서에 대해서만은 매우 유감이란 내용의

편지가 많았다. 어떤 분은 편지와 함께 성경책을 보내 왔는가 하면, 어

떤 분은 성경책 일부를 복사하여 편지와 함께 보내 오기도 했다. 기독

교인들은 모두가 나의 생활에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머지, 유서에 대해

서만은 섭섭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며 다시 생각해 보라고 간곡히 부탁

했다.

나의 유서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죽은 후 반드시 화장을 한 후, 타고 남은 재는 한 줌도 어디에든

지 남겨 두지 말 것이며, 또 내가 죽은 뒤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나의

영혼도 남아 있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살아서 많은 죄를 지은 내가

죽어서는 내 영혼이 또 죄를 지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나의 자

서전 7쇄: 225쪽과 272쪽)

이런 내용의 유서에 대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충고의 편지를

받고 나는 내가 잘못된 생각으로 유서를 잘못 써서 많은 분들께 충격을

드린 것인가 하여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잘못된 생각을 반성하고 다시 유서를 쓰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생각하

여 번민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내가 옳고 내가 원하는 일이라도 수많

은 사람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갖게 해서는 도리가 아니라는 나의 양심

때문이었다. 많은 분들이 주신 간곡한 권고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생각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법정 스님이 월간 <샘터>에 다음과 같이 쓰신 글을 읽고 나

의 번민은 아침 안개 걷히듯 사라졌다.(월간 샘터 1990년 7월호)

“ㆍㆍㆍㆍㆍㆍ올봄에 읽은 책 중에 제가 감명받은 책 한 권을 소

개하겠습니다. 올해 83세이신 안과의사 공병우 박사의 자서전인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입니다. 이분은 아주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살아

오신 분입니다. 하신 일도 많습니다. 우리 나라 최초로 고성능 한글

타자기를 발명하셨고 지금도 한글 기계화를 위해 컴퓨터 개발에 몰두하

고 계시며 72세에 시작한 사진도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어 내신 분입니다. 이

분의 자서전 안에 미리 써둔 유서가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지요. 이분은 자기가 죽어도 일절 남에게 알리지 말랍니다. 장례

식이나 추도식도 하지 말고 빨리 시체를 처리하라고 합니다. 시체에서

조직이나 장기가 다른 사람의 치료에 사용될 수 있으면, 그것을 꺼내어

쓴 후 나머지는 병리학과나 해부학 교실에 연구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

도록 의과대학에 기증해 달랍니다. 만약 이처럼 할 수 없다면 숨이 끊

어진 24시간 이내에 화장이나 수장을 시켜 달랍니다. 만약 이것도 법적

으로 불가능하다면 가장 가까운 공동묘지에 매장하는데, 그때도 새 옷

으로 갈아입히지 말고 입던 옷 그대로 또 관도 가장 싼 것을 쓰고 묘지

도 최소한의 면적에 묻어 달랍니다. 혹 여행 중 사망하면 찾지 말고 죽

은 뒤 한 달 후에 점차 알리라고 합니다. 또 매장되었을 경우 묘지 소

재도 알리지 말고 화장하였을 경우 재를 조금도 어디에나 남겨 두지 말

라고 했습니다. 이 어른의 유서에는 그분 나름의 투철한 삶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유언하고 있는 것

입니다. 요즘 큰 스님들보다도 훨씬 더 선사다운 죽음이라고 저는 평가

하고 싶습니다.ㆍㆍㆍㆍㆍㆍ”

법정 스님의 글로 말미암아 나의 번민은 하루 아침에 사라졌다. 이

일을 통해 나는 고명하신 법정 스님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

도 한 번 찾아 뵙고 감사의 인사도 드리지 못하여 죄송스러운 마음뿐이

다.

그리고 이런 인연으로 불교가 기독교보다 600년이나 앞서 생겼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강남 메마른 서초구에서 살다가 3개월 전에 삼청동 산골로

이사해 왔다. 산속에서 뻐꾹뻐꾹 뻐꾹새 우는 소리가 구슬피 들리고

삼청동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 속에는 가재가 살고 있다. 나의 집 북쪽

으로는 드높은 북악산이 버티고 서 있고, 앞쪽으로는 멀리 인왕산이 보

인다. 그리고 나의 집 맞은 쪽으로는 녹음이 우거진 산 속에 칠보사라

는 절이 건너다 보이는데, 아침 저녁으로 이 절에서 들려 오는 종소리,

목탁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법정 스님을 생각한다. 나의 고민을 씻어

주신 그분의 고마움을 기억하면서 이 글을 썼다. 1993. 8. 4.

 

서울. 종로구 삼청동 28-7호 110-230 전화:735-5887, 전송:738-26

 

 

 

 

박흥호 이찬진 송현

 

 

나모 박흥호 사장과 공병우 박사님

오늘도 이런저런 일이 걱정이 되어 일찍 일어났다. 신문에 또 무

슨 골치아픈 소식이 있나 밖에 나가 신문을 가지고 들어와 펼처봤다. 중일일보 55쪽에 낮익은 얼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나모 박

흥호 사장이 환하게 웃는 사진이다. 반갑고 고마웠다.

 

[기술로는 마이크로 소프트사 제품 눌러] [정보화 공로로 산업포

장 받은 박흥호 사장] 이라는 제목으로 박사장에 대한 기사가 한

쪽 가득하다. 우리 동문이 좋은 일을 하고 또 세상에서 인정을 받

고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것이 기뻤다.

 

그는 일 년 중 반은 기술 개발과 새 제품 선전을 위해 미국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앞으로 세계에서 가장 좋은 제품을 만들고 회

사를 크게 일으킬 것이란 자신있는 모습이 보여 흐믓하다. 신문

에 난 그 기사 내용을 조금 옮긴다.

 

- 공병우 박사를 통해 이 분야에 입문하게 되었는데-

 

"대학 2학년 때 은사 한 분이 앞으로는 글자생활을 기계로 해야

한다면서 타이핑 연습을 시켜줬다. 기계로 해보니까 너무 좋았다. 그 타자기가 공병우 타자기였다. 교사로 발령 받은 뒤 우연히 공

박사의 자서전을 읽었는데, 남다른 업적에 절로 머리가 숙여져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바로 답장이 왔다. 한번 보자면서 기차표

까지 보내서 만나게 됐다. 연구소를 찾아 갔는데, 85세 노인이 혼

자 연구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후 석 달동안 고민하

다 겨울 방학 때 사표를 내고 무작정 상경해 연구원으로 눌러 앉

았다."

 

-공박사에게서 무엇을 배웠나-

 

"학교에서 우리 말과 글이 상당히 과학적이고 영어보다 앞선다고

배울 때는 자화자찬인 줄 알았는데 진짜 그렇더라. 당시 한글 쓰

기가 불편했는데 그런 불편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웠다.

완성도 높은 것을 만들기 위해 목표치를 더 높게 잡고 더 악착같

이 하는 것, 탐구심을 현실화.체질화 하는 방법, 돈은 벌 수 있

어도 시간을 벌 수 없다는 것도 배웠다."

 

박사장이 언젠가 신문인지 방송에 나와서 자신에 관한 취재 때

공박사님에 관련된 말이 없어서 섭섭한 마음이 들었는데 이번에

그렇지 않아 고마웠다. 그리고 공박사님 생각이 나서 이렇게 자

판 앞에 앉아 이 글을 쓴다. 10년 전 일들이 머리속을 스치고 지

나가면서 와룡동 한글문화원 시절과 공박사님이 그립다. 박흥호

사장이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얼굴도 떠오르고 그 때 동문과 후배

학생들이 생각난다.

 

10년 전 우리 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사무실이 한글문화원 안에 있

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많은 일을 했다. 한 달에 한 번식 [한

글 사랑 이야기 마당]을 열었고 그 내용이 신문에 여러번 크게 소

개도 되었다. 그 때 공박사님은 자신의 자서전을 읽고 느낌을 보내

주는 사람에게 고마워하고 반가워 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한글

문화원에 가니 낫설을 젊은이가 있고 공박사님은 그를 내게 소개했다. 부산에서 국어 선생님 하던 젊은이인데 앞으로 함께 일하기로 했다면서 흐믓해 하셨다. 그는 대학시절 국어운동학생회 활동도 했다고 했다. 나도 반갑고 고마웠다. 나는 그 후배에게 송현 선생 이야기를 하며 열심히 잘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공박사님을 잘 모시고 돌아가시기 전에 그 분의 모든 것을 배우고 뜻을 이어가라고 부탁한 일이 있다. 그 때 김한빛나리,김두루한 후배에게도 그런 말을 했었다. 옆방에선 한컴을 만들기 위해 또 다른 젊은이들이 땀흘리고 있었다. 박흥호도 한컴 창업패와 합류했고 한글 역사에서 빛날 큰 일을 많이 했다.

 

지난 10월8일 성균관대학교 강당에서 한글문화연대 행사에 축사를

해주기 위해 나와 김근태의원과 한컴 전하진사장이 대기실에 있을

때 전사장은 내게 [ 한컴에 처음 사장으로 가니 그 임원과 직원들

전이 모두 한글운동가이고 한글사랑 정신이 떠거운 것을 보고 놀랐

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 그들은 공병우박사의 한글

사랑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이고 돈만 벌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한글을 빛내기 위해 일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한컴은 그런

회사이어서 많은 국민들이 한컴 살리기 운동을 했고 당신이 사장

이 되었다. 잘 키우고 돈을 많이 벌어 한글을 위해 좋은 일 많이

하길 바란다]라고 부탁한 일이 있다. 그 때 다시한번 한글문화원

에 드나들던 그 창업자들이 떠오르고 고마운 생각을 한다.

 

4년 전 어느 무더운 여름날 한글학회에 들렀을 때 박흥호사장이

땀을 흘리며 컴퓨터를 나르고 있는 것을 보고 한컴을 나온 줄 알

았고 나는 걱정이 되어 [ 잘하라. 성공해야 한다. 공박사님을 잊

지 말자]고 말했고 그는[잘 할 것이고 잘 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진짜 그는 잘하고 있고 성공했다. 그러나 계속 공박사님의 정신

과 처음 한글문화원에 왔을 때 마음을 간직하고 머리가 하얗게

늙을 때까지 좋은 일 많이 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가 국어운동학

생회 동문임도 잊지 말고고 동문회와 공박사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힘써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스승, 우리 선배 공병우 박사님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

고 좋은 분이었다. 우리 후배들은 이 분 정신과 업적을 본받고

한글을 빛내기 위해 더 힘쓰자. 2000.12.11 새벽

 

 

공박사님이 돌아가신 날

 

 

공병우 박사님 영전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6년 전 나는 공 박사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래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돌아가시기 6개월 전 나는 공 박사님으로부터 컴

퓨터 자판 두드리는 기초부터 배워서 돌아가신 뒤 바로 님을 대신해

컴퓨터 통신 하이텔에 가입해 한글 사랑운동을 시작해 오늘까지 왔습

니다. 스승님을 그리면서 이 글을 여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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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공병우 박사님 영전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오늘 김 한빛나리 군으로부터 박사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

고 슬픔을 감추지 못하여 이렇게 박사님의 명복을 비는 글을 올립니

다. 사람이 태어나면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고, 또 요즘 박사

님 병세가 위독하시다 해서 마음의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막상 돌아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보니 허망하고 놀랍습니다.

 

이제 박사님의 몸은 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박사님의 겨레사랑, 나라

사랑, 한글사랑정신은 우리 들 마음속에 오래 남아있을 것입니다.

 

박사님은 한글기계화의 선구자이셨고 한글과 겨레를 위해 몸과 마

음과 재물까지도 아끼지 않고 바치신 큰 애국자이셨습니다. 몸은 90

살이었지만 마음은 20살 젊은이로서 힘차고 뜨겁게 일하시고 연구하

신 과학자였고 교육자이셨습니다.

 

지난해 여름 젊은이도 견디기 어려운 더운 날씨에도 흔한 에어컨

하나 없는 삼청동 이층 방에서 웃옷을 벗은 채로 한글기계화 연구

와 글쓰기에 땀을 흘리시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그 더운 날

씨에다가 바뿐 가운데서도 이 못난 저를 밤 11시까지 댁으로 오라

시어 새벽 1시까지 제게 컴퓨터 글쓰기를 가르쳐 주신 공병우 스승

님! 여러모로 모자라는 저를 인정해주시고 칭찬해주시며 기대하셨

으나 저는 그에 보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그 동안 제가 주신 가르침과 뜨거운 사랑을 잊지

않고 님의 뜻을 받들어 이어가고 이룰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한글

이 살아야 나라가 살고, 한글이 살려면 한글기계화가 바르게 되어

야 하며, 한글기계화는 2벌식 완성형이 아닌 3벌식 조합형이어야

한다"는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병 문안 다니고 조문할 시간 있으면 한글기계화 연구와 한글사랑

운동하라"고 모든 이에게 돌아가신 것을 알리지 말라 시고 시신까지

도 의학도들 연구에 바치고 가신 큰 사람, 공병우박사님! 부디 저

세상에선 고생하시지 마시고 가족과 단란한 시간도 보내시고 편히

쉬십시오. 생전에 박사님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 용서를 빌면서 빠

른 시일 안에 제 이름으로 셈틀 통신에 가입하여 다시 인사드릴 것

을 다짐하며, 마지막 떠나시는 님께 큰 절 올립니다.

 

1995년. 3. 8 공병우 박사님의 마지막 제자 이대로 올림.

 

 

 

내가 만난 사람

 

 

아래 글은 글쓴이가 10년 전에 월간지 여성동아에 썼던 글입니다. 여성

동아에서 내가 살아오면서 만난 분 중에 존경하는 분이나 기억 남다르

게 남는 분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부탁이 와서 공 박사님에 대해 글을

썼는데 이 글을 보신 공 박사님께서 "나를 과학자라 말한 사람은 이 선

생뿐이요"라면서 좋아하셨다. 님은 스스로 과학자라 생각하셨고 우리 나

라의 과학 수준이 낮은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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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사람

 

1. 내 식대로 살아 왔다는 공병우박사

 

누구나 살다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자기에게 기쁨을 준 사람도

있고 괴로움을 준 사람도 있으며 아무 뜻 없이 스쳐간 사람도 많다. 농

촌 운동과 국어 운동의 길이 내 인생길인 줄 알고 살아온 지난날 어려

움도 많았지만 그 길에서 훌륭한 선생님들과 좋은 선후배들을 많이 만

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보람있고 뜻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 분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낌으로써 내 삶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공병우 박사님을 만난 것은 큰 영광이고 기쁨이

다. 내가 처음 공 박사님을 알게 된 것은 23년 전 국어운동 대학생 활동

을 시작할 때 우리 모임의 유인물을 공병우 타자기회사에서 타자해 주

셨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는 국어사랑의 정신과 중요성 들 많은 유인물

을 만들어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뿌리기도 하고 각 기관에 보내기도 했는

데 그 대부분을 수 년 동안 공병우 타자기회사에서 타자해 주었다. 그 때

우리뿐 아니라 한글학회 등 여러 모임들도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그런데 군사정권의 잘못된 정책과 탄압으로 우리 학생 국어운동도 위축

되고 공병우 타자기회사도 기울었으며 정부와 싸우다 지친 공 박사님은

미국에 가셔서 돌아오시지 않고 고국의 민주화 운동과 한글 문화운동을

하고 계셔서 뵐 수 없다가 1988년 민주화 바람이 불고 우리 국어운동 대

학생 동문회도 다시 활동을 시작했을 때 공 박사님도 귀국하여 한글 문

화원을 차리시고 활동을 다시 하시게 되어 우리는 공 박사님을 다시 만나

또 많은 도움과 지도를 받게 되었다.

 

나는 1988년 11월30일 공 박사님께서 귀국하시어 여생을 한글 문화 운동

에 바치기로 하셨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인사차 전화를 드렸더니 반가워

하시며 곧 만나자고 하셨다. 그 뒤 나는 공 박사님을 자주 뵙고 국어 운

동에 대한 의논도 하고 한글 기계화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공 박사

님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박사님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2.시간이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공병우 박사님

 

공 박사님은 1906년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태어나셨다. 보통 사람은 10

달만에 태어나는 데 공박사님은 8달만에 태어나 학교 교육도 졸업장 받

는 학년을 모두 월반하고 검정시험으로 대학까지 진학했으며 4년 이상

걸리는 의학 박사 학위도 2년만에 따신 분이다. 남보다 빨리 태어나 바

쁘게 공부하신, 졸업장이 하나도 없는 남다른 의학박사이시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안과 전문 병원을 개업하셨고 일본어로 된 시

표를 한글로 바꿔 보급하셨고 일제가 강제로 창씨 개명한 자신의 이름을

호적에서 지우기 위해 '공병우 사망'이란 전보를 고향으로 친 분이며,광

복 후 자신이 일본어로 쓴 안과 교재를 한글로 번역하시다가 편리한 한글

타자기의 필요성을 느끼시고 한글의 특성을 잘 살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3벌식 한글타자기를 발명, 보급하셨다.

 

맹인 등 장애자를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하셨고 돈 잘 버는 의사 일은 '내

가 안 해도 세계의 추세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지만 한글은 우리가 살리지

않으면 영원히 천대만 받을 것이다'시며 병원 일은 제쳐두고 한글 기계화

연구와 한글 전용 운동에 많은 정렬과 시간과 돈을 바치셨다.

 

넥타이 매는 시간이 아깝다고 매지 않고 신사복 대신 몸에 편리한 옷 차

림을 좋아하는 검소한 분이다. 1953년 미국에 처음 다녀오실 때 가족에

게 줄 선물 대신 장님들을 위한 흰 지팡이만 잔뜩 사 가지고 왔으며, 자식

들에게 용돈 주는 것은 인색하시고 기독청년회와 한글학회엔 많은 재물과

땅을 기부하셨다.

 

민족문화를 고도로 발달시킬 수 있는 연모인 한글을 두고도 활용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국민들을 깨우치기 위해 자나깨나 한글 기계화를 생각

하신다. 할 일은 많고 갈 길은 먼데 나이 들어감을 아쉬워하시며 85살의

나이에도 출퇴근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연구실에서 먹고 자고 연구에

몰두하고 계신다.

 

오늘도 신문이나 책에서 좋은 글을 보시면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사

무실 앞에 복사해 놓아 여러분이 마음대로 가져다 볼 수 있게 하시는 분

이며 국내 처음으로 콘텍트렌즈 개발, 맹인용 점자 개발, 한글 워드프로세

서 개발 등 많은 업적으로 대통령 표창과 훈장도 받으셨고 국전에서 사진

작가로 입선도 하고 사진전도 열고 자서전도 내고 컴퓨터 글쓰기에 열심히

하신다.

 

3.본 받을 점이 많은 이 시대 한국사람의 모범상 공 박사님

 

요즘 공 박사님을 찾는 기자 등 손님도 많고 모르는 사람한테 편지도

많이 온다. 그런데 한문으로 된 명함을 내놓는 이에겐 용건을 듣기 전에

한글 사랑과 기계화에 대한 필요성을 설명하시고 한글을 쓰지 않는 것

에 대한 꾸중 겸 호소를 하시는 바람에 손님이 당황하는 일이 있고, 한

문을 펜으로 섞어 쓴 편지는 싫어하고, 타자기나 컴퓨터로 쓴 글을 보시

면 반가워하신다. 이렇게 자기 주장이 뚜렷하시고 남에게 잘 보이려는

말이나 몸짓은 안 하시기 때문에 좋은 일 하시고도 제 대접을 못 받는

일이 있어 가족들로부터 처세술이 모자란다고 불평을 사기도 하신다.

 

그러나 공 박사께서 다른 사람보다 먼저 깨닫고 앞서가는 데서 오는 오

해요, 부작용이다. 공 박사께선 자기식대로 자신만을 위해 산 것 같으나

모두 남을 위해 산 이 시대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분이며 몸은 80대 어르

신이지만 마음과 행동은 20대 젊은이 같으시다.

 

수십 년간, 수많은 나라 돈을 쓰고 지위와 권력을 누리면서도 한글 기계

화는 못하는 정부관리들에 비하면 안과는 외국인이 발전시킬 수 있지만

한글기계화는 한국사람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며 한글 과학화가 당신

의무로 알고 자신과 가정도 돌보지 않고 애쓰시는 모습은 한글 창제하신

분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말로만 애국하고 실제 행동은 자신과 자기 패거리의 이익만을 위해 싸

움이나 하는 정치인들과 한글 전용을 국책으로 정하고도 4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정

부 관리들에 비하면 말없이 행동으로 한글을 살려서 나라를 키우겠다고

땀흘리며 한글 기계화 연구에 몰두하시는 백발 노인의 모습은 거룩한 희

생정신이고 큰 애국심이시다.

 

조금만 이름이 나도 거드름 피고 돈 좀 있다면 멋 내고 낭비하는 세상인

데 언제나 검소한 옷차림에 부지런히 일하는 생활태도며, 힘센 남의 나라

나 권력자에 아부하고 떠받들거나 시대 유행과 못된 풍조에 따르지 않고

오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는 분, 신념을 가지고 사는 주체정신,

남을 돕는 희생정신, 졸업장이나 지위보다 실력을 중요시하는 정직한 정신,

연구 개발에 몰두하는 과학 탐구정신, 죽는 날까지 배우고 공부하는 평생

교육 정신들은 한국병을 치료하는 치료약이며 온 국민이 본받고 따라야

할 분이다.

 

공 박사를 어떤 이는 이름난 안과 의사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고집쟁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한글운동가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분이

한글 고속타자기도 만들고 여러 가지를 발명한 과학자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성직자 못지 않은 고귀한 삶을 사신 성인으로 부르고 싶다. 80이

넘으신 어르신이 환하게 웃는 모습은 간난아기의 깨끗한 웃음이 떠오르게

한다. 그 만큼 그 분 마음과 삶이 어린이처럼 깨끗하고 올바르다는 것이

웃음에 떠오른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겐 존경하고 따를 만한 인물이 없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분에게 공 박사님을 자신 있고 추천하고 싶다. 나는 지금까지

아무리 이름난 분이라도 이렇게 칭찬하고 좋아해 본 일이 없다. 처세술은

모자랄지 모르나 너무나 순수하고 참된 생활 모습이 감동스럽고 바람직스

러워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다. 내게 한글 기계화를 눈뜨게 하고 참된

삶의 본보기를 보여주신 박사님이 요즘 건강이 안 좋다고 하여 걱정이

다. 새 해엔 박사님의 소망인 한글 기계화와 남북통일과 고향 방문이 이

루어지고 건강이 회복되시길 두 손 모아 빈다. 공 박사님의 소망이 우리

모두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1991.1.15]

 

 

 

 

한글 간소화 이야기 - [내일1호]에 쓴 공박사님 글

아래 글은 1968년에 펴낸 국어운동대학생회 회지 [내일1호]에서

옮긴 글입니다.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나라발전을 위해 한글

전용과 한글 기계화가 중요하고 급함을 잘 나타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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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간소화 이야기

한글 타자 연구회장 공 병우

 

 

나는 작년 8월에 쌍룡 시멘트 회사 기술고문으로 반도호텔에서

유숙하고 있던 Mr.Tompkins로부터 받은 명함이 로마 소문자만

으로 인쇄되었다. 대문자를 한 개도 사용하지 아니한 사실을 보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독일 학자들이 Typing speed를 올리기 위하여, Capitel leeter

를 사용하지 않고 소문자로만 Typing하여 원고를 소문자로 만들

어 신문사로 보내고 있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

직 귀하의 명함과 같이 소문자로만 된 명함은 처음으로 봅니다.

귀하는 어떻게 되어 명함을 소문자로만 만들게 되었읍니까?"

 

그의 대답은 간단하였다.

 

"소문자만으로 모든 사물을 적을 수 있고 이해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26개의 대문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새로 배우는 아이들

에게 큰 부담이 되고, Typing이 느리고, 통신과 인쇄가 느리기 때

문에 현대와 같이 바쁜 시대에 글자생활이 다른 생활의 속도와 보

조가 맞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대문자와 소문자 도합 56자를 사

용하는 사람은, 작은 글자 26자만을 사용하는 사람보다도 뒤떨어

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클럽 동지들은 소문자만을 사용

하기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신문기자들이 뉴-스를 빨리 보내기 위

하여 작은 글자만으로 Typing하는 것은 생존경쟁이 극심한 이 시

대가 그들을 그렇게 바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그분에게 "이 시대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국 사

람들이 세계에선 먼저 시간의 귀중함을 깨닫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먼저 많은 기계를 발명하였기 때문에 이 시대가 더욱 바쁘

게 되었고, 생존경쟁도 더욱 심해진 것으로 압니다. 미국과 같이,

기계를 이용하는 나라는 더욱 바빠져서 사람의 부족을 느끼고 있

지 아니합니까?"라고 말하였다.

 

미국 사람들로서는 왜 한국 사람들이 로마자보다도 우수하고 24

자로 글자생활을 할 수 있는 한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수 천 개

나 되는 한문자를 사용하면서 문화건설이 선 자리에서 뭉기고

있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 한국 사람들은 52자

밖에 아니 되는 글자 중에서도 대문자를 또 폐지해 나가는 미국

사람들의 "스피드"시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직도 한문 약자를 500개 식이나 새로 만들어 쓰자는 소위

지성인들이 수많이 있으니, 이런 머리를 가지고 생존경쟁이 극

심한 우주 시대에 있어서, 과연 우리 민족이 낙오자가 되지 않

고 잘 살게 될 것인가가 의문이다. 자유당 시대에 이승만 대통

령이 한글 간소화를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서 타자, 통신, 인쇄

에 능률을 올리자는 것이었다. 지금은 한글을 간소화하고, 한글

약자를 만들어 내어도 늦은 감이 있는 것이 일부의 지성인들의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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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and isabel tompkins

 

 

570-b avenlda sevilla

lanuna hlls,califonia 02653

phone (714) 837 8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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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더욱 간소화하여 24개로 풀어쓰자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

는 반면에, 아직 수천 자가 넘는 한문자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이 많다. 24개의 한글을 배우는 데 비하여 2,000자의 한문자를 배

우는데는 100배 이상의 시간과 정력이 소비될 것이며, 기록을 하

는데도 200배 이상의 시간과 정력이 소비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문자를 쓰는 동안은, 우리 나라가 후진국가를

면치 못할 것은 물론이고 한문자를 사용하는 사람은 나날이 생존

경쟁에서 뒤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글자를 찍는 타자기도 속도가 느린 5벌식 한글타자기를 사용하고

있는 개인과 기관은 속도가 빠른 세벌식 타자기를 사용하고 있는

개인과 기관에 비하여, 그 속도의 차이만큼 나날이 뒤떨어지고 있

는 것도 사실이다. 마치 시속 60km으로 가는 자동차가 시속 100km

로 달리는 차에서 멀리 뒤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시대는

고속도 도로 건설 만으로서는 생존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고, 미국

사람들과 같이 자가용 비행기를 가지게 되어야만 경쟁을 할 수 있

는 시대이다.

 

우리도 자가용 비행기를 가지고 잘 살기를 희망한다면, 먼저 한

글전용을 단행하고 한글을 간소화하여 기계화로 고속도의 타자,

통신, 인쇄가 실천되어야만 우리도 고도의 문화를 건설하고 잘 살

게 될 것이다.

 

문화건설은 글자의 생산 속도에 좌우되는 바가 대단히 크기 때

문이다. 현대의 서양 문화는 활자의 발명보급과 타자기와 라이노

타이프의 발명으로 이뤄 졌다고 말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끝-

 

 

 

한글의 핏줄

 

한글의 핏줄 - 1991년 공 병우

한글의 핏줄

 

한글 문화원 원장 공 병우

 

 

1. 한글의 할아버지는 서 재필 박사이고,

2. 한글의 아버지는 주 시경 선생이고,

3. 한글의 손자들은 최 현배 박사와 이 극로 박사이시다.

 

서 재필 박사는 독립신문을 통하여, 오랫동안 안방에서만 살던

한글을 세상에 나와 햇빛을 보게 했고, 그 분 제자인 주 시경 선

생은 서 박사의 뜻을 받아들여, 또 그 제자들에게 전했다.

 

약 100년 전 서 박사는 한글 문화 나무의 뿌리를 심었고, 주 시

경 선생은 그 뿌리에서 한글나무가 돋아나게 했고, 주 시경 제자

들은 나무 가지와 잎을 피게 했다. 한글을 무시하고 한자만으로

공문과 신문을 만들고 있던 그 시절에, 순 한글로 신문을 만든 것

은 혁명이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아직 신문, 잡지,

공문들이 한글전용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한글전용만이

한글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길이요, 글자가 국가의 흥망을 좌우

한다는 서 박사의 이념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과학적인 한글을 500여 년 동안 천대만 해 오

다가 나라가 망한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반성조차 못하

고, 엉터리 한글 글자판과 코드 통일 등으로 한글을 더욱 천대만

하고 있는 한심한 현실은, 외국의 문화 침략을 막아날 수 없을 것

으로 생각한다.

 

1991. 9.22 추석(한글날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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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시경 제자들이 잎을 피게 한 한글 나무, 공 박사가 한글 기계화

로 꽃을 피게 했다. 이제 우리들이 그 꽃이 시들지 않고 좋은 열매

를 맺게 하자. 그 열매는 우리 후손들이 살 지우게 하고 따먹게 하

고...

 

2001.3.6 공 박사님 제삿날 이 대로

 

 

 

공박사의 예언

 

나의 예언 - 공 병우

나의 예언

 

공 병우(한글 문화원장)

 

 

1. 한글은 금이요, 로마자는 은이요, 일본 가나는 동에 불과하다.

2. 3벌식 글자판은 금, 4벌식 글자판은 은, 2벌식은 동에 해당한

다.

3. 3벌식 글씨꼴은 금, 다벌식 글씨꼴은 은, 완성형 글씨꼴은 동

이다.

 

 

따라서 한글전용을 단행하고, 3벌식 글자판 입력과 3벌식 글씨꼴

출력을 하는 글자 생활은, 자판 통일을 이룩하고 능률 극대화로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확신

한다.

 

현재와 같이, 한자 혼용과 2벌식 글자판 그리고 네모 글씨꼴로

하는 글자 생활은, 자판 통일이 불가능하고, 극도의 비능률적인

글자생활로 인해, 선진국보다 문화 수준이 50년 이상 뒤떨어져

있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을 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더욱 뒤떨

어질 것이다.

 

금나라

 

한글전용 + 3벌식 글자판 + 3벌식 글씨꼴=최고의 문명국으로 발전

할 수 있다.

 

 

은나라

 

한글전용 + 4벌식 글자판 + 다벌식 글씨꼴= 중등 정도의 문명국으

로 발전할 수 있다.

 

동나라

 

한자혼용 + 2벌식 글자판+완성형 글씨꼴=문화수준이 선직구보다

도 50년 이상 뒤떨어진 현실보다도 더욱 뒤떨어지게 될 것이다.

 

1991.10.9

 

 

 

 

한겨레 신문이 살아야 이 나라가 산다.

 

공 병우 (한글 문화원장)

 

한겨레 신문에 대한 나의 생각

 

내가 미국에 있을 때, 한겨레 신문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무척 기뻐했습니다. 내가 기뻐한 까닭은 첫째-한글 전용과 가로짠

다는 점이요, 둘째- 군사 독재 정권과 싸우다가 희생을 당한 애국

언론인과 기자들이 단결하여 적은 봉급으로 희생적 운영을 한다는

점이요, 셋째는 정부나 재벌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서 대중의 주

머니 돈을 모아 운영한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약 100년 전, 서 재필 박사가 미국의 호화스러운 의사 생활을 버

리고, 망해 가는 조국을 살리기 위해서 서울로 돌아와서 장관직을

사양하고, 학교, 교회, 병원 등, 중요한 사업들을 모두 거절하고,

순 한글로 독립신문을 만들어 보급했습니다.

 

왜냐하면 서 박사님은 당시 나라가 망해 가는 가장 큰 원인이 한자

로 인한 문맹 때문이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서

박사님이 한글로 독립신문을 만들어 민주주의 정신과 한글 사랑이

곧 나라 사랑이란 정신을 심어주신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잘 살게

된 터전이 잡혔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는 한자만으로 글자 생활을 하던 때인지라, 한글 전용을 주

장하는 서박사의 뜻을 정부와 국민 모두가 반대하면서 받아들이지

못하였지만, 오직 주 시경,이 승만 두 학생만이 서 박사의 한글 사

랑이 곧 나라 사랑이란 정신을 받아들였습니다.

 

서 박사께서 한글전용을 주장하시면서 한글 신문을 실지로 만들어

보급한지가 거의 100년이 지나간 오늘에, 아직도 한자혼용 신문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한글전용을 반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얼마나 한심한 현실입니까? 독립신문처럼 우리 나라에서

유일한 한글 전용 일간지인 "한겨레신문"이 살아야 나라가 살고,

이 신문이 죽으면, 독립신문이 죽은 뒤 나라가 망한 것처럼, 또 나

라가 망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만나는 사람에

게 잊지 않고 한겨레신문을 구독해야 한다고 애독 권유를 하는 것

입니다.

 

한겨레신문은 제2의 독립신문

 

제2의 독립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 한겨레신문이 발전하여야 나라도

삽니다. 그러니 한겨레신문의 발전을 위해, 누구나 애독자와 광고

주, 주주 늘리기 운동에 적극 참여합시다. 한겨레신문 애독자 한

사람이 한 사람씩만 늘린다면, 독자가 두 배로 늘어날 것입니다.

 

한겨레신문이 빨라지면, 남북 통일도 빨라질 것입니다. 한겨레 신

문은 우리 고유의 문화와 한글문화를 발전시키는 신문입니다.

젊은 자녀들이 교육과 성공에 크게 도움이 되는 신문입니다, 젊은

이들이 한자의 해독에 물들지 않고, 가로로 짠 신문이기 때문에 빨

리 읽는 습관을 들일 수 있는 과학적인 신문입니다.

 

한글 전용은 나라를 살리고 겨레를 행복하게 하는 국가 시상 과업

이고, 한겨레신문은 국가 자상 과업을 촉진시키는 유일한 신문입니다.

 

 

내가 희망하는 점

 

1. 서 박사가 한글전용으로서 한자로 인한 문맹을 벗어나는 운동을

했듯이, 지금은 그보다도 더욱 심한 기계 문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먼저 한겨레신문사가 선진국처럼 한글 기계를 기자들의 책상 위에

놓고, 한글을 기계로 쓰게 되기를 바랍니다.

 

2. 글자생산 능률 극대화를 이룩하는 길을 조사하고 개선하는 가칭

"사무자동화(OA)위원회"를 구성하여 글자 생활을 기계화하면 다른

신문사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원고 청

탁서를 보고 오직 그런 기구가 없는 것으로 느꼈습니다.

 

3. 앞으로 6개월 동안, 신문에 "한글 과학화"라는 판을 만들어, 한글

에 관한 역사, 발달사, 가 나라의 글자들과의 비교, 한자혼용과 한글

전용의 문제, 세로 짠 신문, 잡지로 인한 피해, 날로 발전하고 있는

한글의 과학, 기계문맹 퇴치운동 등에 관한 소개를 하면, 신문사 발

전과 나라 발전에 도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아니면 한글에 관한 강연회를 문화 사업으로, 또는 창간 3주년 기념

사업으로 개최한다면, 나라 발전에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신문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1991.8.25]

 

」 이 글은 누구나 부담 없이 일부 또는 전부를 다른 유인물에 옮겨

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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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박사님을 한겨레신문 창간을 매우 반겼고 적지 않은 돈을 내고 주주

로 참여하셨으며 많은 바람도 있었습니다. 저도 창간 주주로 참여했

고 제 자식 셋도 따로따로 주주로 참여했습니다. 그 애들이 어른이

되면 독자가 셋이 늘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였습니다.

 

그런데 한겨레신문이 공 박사님과 또 다른 주주들의 바람을 들어 주었

는 지 또 오늘날 잘 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때 답답합니다. 저는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사장과 기자들은 한겨레신문이 왜 주주로부터도 외면 당하고 있는지 반

성하고 더 좋은 신문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2001.3.11 한겨레 주주 이 대로

 

 

 

 

과학의 뿌리를 알고 과학을 다루자!

 

-- 글자는 과학의 어머니 구실을 한다 --

 

 

공 병우(한글 문화원장)

 

 

우리 나라 과학자들은 과학 발전을 좌우하는 한글의 과학성을 알지

못하고 있는 분이 많다.

 

글자는 과학의 어머니 구실을 한다. 그러므로 한글의 과학성을 알지

못하는 과학자들이 우리 나라 과학을 다루어 왔기 때문에, 우리 나라

과학수준이 형편없이 뒤떨어지고 있고 문화의 후진성도 면치 못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한글을 가지고 있는 우리 나라 과학 수준이

이렇게 뒤떨어져 있는 원인은, 우리 나라 과학자 대부분이 한글이 왜

세계에서 으뜸가는 글자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한글의 구성 원리를 알고 있는 과학자는 2벌식 글자판과

3벌식 글자판을 비교해 보면, 어느 것이 한글 구성 원리에 잘 들어맞

는가를 판가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글의 과학성을 분명

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판가름을 못하는 것이다.

 

한글에 대한 과학성을 국민학교에서 부터 옳게 가르쳐야만 과학의 뿌

리를 내릴 수 있는데도, 대다수의 국민학교 교사들 자신이 한글의 과

학성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아이들에게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결

과가,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자기 나라 글자의 과학성을 제대로 알지 못

한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한글을 풀어쓰자고 주장하는 한글 학자

들이 먼저 한글의 과학성을 진정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한글의 과학성은 초성, 중성, 종성의 3가지 자소를 모아서 한 음절을

나타내는 글자이기 때문에 세계에서 독창적인 글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서, 한글 구성 원리를 배우는 동시에 타자치는 기술도 익히는 길

이 장차 과학자로서 소중한 지식을 가지게 하는 교육일 것이다. 3벌식

한글 타자기 이외에도 교과서나 시청각 교육을 통하여, 한글의 구성원

리를 가르치는 기술도 익히는 길이 우리 나라 과학을 발전시키는 뿌리

라고 믿는다.

 

자기 나라 글자인 과학적인 원리도 모르는 과학자가 과학 교육을 한다

는 모순 자체가, 오늘날 과학이 뒤떨어지고 문화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과학자들이 한글이 왜 으

뜸가는 과학적인 글자인가를 분명히 깨닫게 하는 것이, 한글 전용과 한

글 기계화나 전산화를 과학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이며, 나아가서

우리 나라 과학을 눈부시게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1991년 4.21 과학의 날]

 

 

임상의학계열 - 이비인후과학교실 (음성언어의학 연구소)

 

 

안성복 (지도 최홍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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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언어의학 연구소 실습

 

언어.

말과 글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언어라는 신비한 표현 수단에 매료되어 있었다. 중학교 시절에 한글문화원을 드나들며 한글 기계화와 한글 전용에 대한 자료를 받아 보았고, 고등학생 때 한글 글씨꼴에 대한 가독성 조사를 하여 전자신문에 실린 적도 있었다. 이 때 만난 한글문화원장이신(그 전에는 안과 의사이셨던) ‘공병우’ 박사님을, 본과 1학년 때 해부학 실습을 하며 해부실습용 시신으로 다시 뵙게 되었을 때에는 신비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과 2, 3학년 때에는 해부학 교실 ‘정인혁’ 선생님이 위원장으로 계신 대한의사협회 의학용어심의 실무위원회의 의학용어 한글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때까지는 말과 글 중에서 주로 ‘글’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는데, 대학에서 연극반 활동을 하며 연극 연습 과정에서 발성과 발음 훈련을 하면서 ‘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체계적인 발성과 발음 연습을 위해 관련 문헌을 찾다가 ‘음성언어의학’이라는 분야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특성화선택과정으로 ‘음성언어의학 연구소’를 선택하였다.

'음성언어의학 연구소'는 이비인후과에 속해 있으며, 신촌 세브란스 안이비인후과 병원에 음성언어검사실과 음성언어치료실이 있다. 음성언어의학 연구소에서는 기본적으로 음성과 한국어에 관한 의학적 연구와 음성직업인의 음성관리 및 진료를 하고 있다. 연구부장이신 ‘최홍식’ 교수님이 특성화선택과정의 지도교수이셨고, 여러 연구원 선생님들이 계시는데 발성치료를 하시는 ‘서동일’ 선생님과 언어치료사인 ‘표화영’ 선생님과 주로 접하며 연구에 참여하였다. 크게 기초 연구(Basic Research)와 임상 연구(Clinical Research)로 나눌 수 있는데, 직접 참여한 기초 연구로는 후두이식에 관한 동물 실험이 있었고, 임상 연구로는 한국어 파열자음에 관한 음향학적, 공기역학적인 연구와 이비인후과 환자의 인후두 역류 증상 빈도 조사가 있었다.

기초 연구인 후두이식에 관한 동물 실험은 매주 월요일에 의과대학 4층의 중대형 동물실험실에서 이루어진다. 최홍식 교수님이 직접 참여하시며 비글(Beagle)견을 이용한 후두 이식 실험을 하는데, 이미 7례의 후두 절반이식과 2례의 후두 전이식을 시행하였으며 앞으로도 계속 비글견을 이용한 후두 이식 실험과 기타 개와 쥐 등을 이용한 후두의 형태학적, 생리학적인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개의 후두이식 수술에는 직접 참여하여 후두이식 수술의 전과정을 상세하게 지켜볼 수 있었고, 수술 후 관리를 직접 하였다. 이식 수술이니 만큼 거부 반응을 방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직접 투약을 하며 한 달 이상 관리한 개의 이식후두 기능검사 결과가 좋게 나왔을 때의 성취감과 보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동물기르기에는 원래 관심이 없어 집에 있던 금붕어도 몇 주 못가 다 굶겨죽이곤 했었는데, 사람을 잘 따르는 비글견의 특성 때문인지 개와 친해질 수 있었던 것도 이번 특성화선택과정에서 얻은 행운이라 하겠다.

임상 연구인 한국어 파열자음에 관한 실험은 언어치료사인 '표화영' 선생님과 함께 참여하였는데, 정상인 남, 녀 20명을 대상으로 압력감지 센서를 비공을 통해 구인두강에 위치시키고 파열자음 발음 시의 구강내압과 폐쇄기 및 Voice Onset Time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이 실험을 통해 ‘말’이 이루어지는 원리에 대한 음향학적인 기초 지식을 공부할 수 있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큰 성과라 하겠다. 다양한 자음과 모음이 어떠한 원리로 서로 다르게 만들어지며, 어떠한 원리로 서로 다른 소리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본 개념을 가질 수 있었다.

색다른 임상 치료과정인 ‘발성 치료’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흥미로웠다. 성악가이자 음성언어의학 연구소의 연구원인 ‘서동일’ 선생님께서는 매주 월, 화, 수요일에 Vocal Cord Bowing 환자나 후두미세수술을 받은 환자 등을 대상으로 발성치료를 시행하는데, 이는 발성연습을 통한 일종의 성대 재활 훈련이라고 하겠다. 환자들은 여러가지 음높이로 반복적인 발성연습을 받게 되는데, 그 치료 효과와 환자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은 것이 놀라웠다. 서동일 선생님은 성악 뿐만 아니라 연극에도 관심이 많으셔서 연극에서의 발성법과 그 훈련 방법에 대해 많은 조언을 주셨으며, 내가 직접 서동일 선생님께 발성연습을 받아보기도 하였다.

또한 매주 화, 수, 금요일의 음성클리닉 참여를 통해 다양한 음성장애 환자의 진단과 치료 과정을 직접 살펴보았고, 매주 목요일에는 후두미세수술(Laryngomicrosurgery)을 참관할 수 있었다. 참고서적으로서 ‘John. S. Rubin’의 “Diagnosis and Treatment of Voice Disorder”를 통해서 음성언어의학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적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음성언어의학은 앞으로 연구해야할 과제들이 많은 미개척 분야이다. 후두이식에 관한 연구는 최근에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1998년에 외국에서 인체 후두이식이 1례 있었고 본원에서도 2000년에 인체 후두이식을 시도할 계획이다. 앞으로 특성화선택과정으로서 음성언어의학을 선택하는 후배들은 더욱더 흥미로운 연구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말과 소리를 다루는 의학. 너무나 매력적인 분야가 아닌가!

내가 특성화선택과정으로 이비인후과 실습을 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나는 특성화선택과정으로 이비인후과 실습을 한 것이 아니라 ‘음성언어의학 연구소’ 실습을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최홍식 교수님께서 자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해 주신 덕택이다. 덕분에 능동적으로 공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이번 특성화선택과정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위 글 중 최홍식 교수는 외솔의 손자이고 안성복학생은 연세의대생 같다]

 

 

실명을 극복한 강영우 박사와 공박사 인연

 

 

▣ 지금 계신 곳은 : Home > i@church> 장애우교회 >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장애를 이겨낸 사람들 - 지난 이야기--------------- ① - 휠체어를 탄 제2의 아인슈타인 스티브 호킹 ② - 열정적 휠체어 인생으로 새로 태어나는 수퍼맨 크리스토퍼 리브 ③ - 다운증후군을 극복하고 연극배우가 된 파스칼 뒤겐제 8 요일 ④ - 외팔의 드러머 릭 앨린 ⑤ -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 ⑥ - 흑인 팝 음악의 살아있는 신화 스티비 원더 ⑦ - 인간승리의 주인공 '의족의 발레리나' 스테파니 바스토스

 

[장애를 이겨낸 사람들]

 

 

 

◈ 실명을 극복한 강영우 박사'

 

 

 

연세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하여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교육학 전공으로 석 박사학위를 받고 노스이스턴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는 사람이 있다. 인디애나 주지사 재활 정책 자문위원을 맡기도 했고, 국제로터리클럽 청년 봉사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국제로터리클럽 봉사상을 수상했으며, 국제로터리클럽 75주년 기념 봉사 인물 75인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히기도 했다. 이 사람과 부인의 이름은 미국 교육계 저명인사 인명 사전에 올라 있다.

 

 

 

이 분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그들은 미국 최고의 명문인 필립스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에 진학하여 한국인의 우수함을 빛내고 있다. 이들 두 젊은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에서 연극 동아리를 만들어 성극을 발표하기도 하고, 찬양 사역을 하기도 한다. 이들은 평신도이지만 설교도 하고 또 그들의 설교문이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기도 한다. 학교에서는 성경과목을 일등으로 이수하는가 하면 매주 한 번씩 모이는 성경공부반도 만들어 인도를 한다.

 

 

 

이 엄청난 성공을 거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그가 바로 한국 최초의 맹인 박사 강영우이다. 그는 열 다섯 살 때인 중학교 3학년 때에 친구들과 축구 시합을 하다가 공에 맞아 소경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소경이 되기 2년 전인 열 세 살 때에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 가셨고, 소경이 된지 일 년만에 아들이 영구히 장님이 된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어머니가 뇌일혈로 돌아 가셨다. 목사가 되겠다던 아들이 안마사나 길거리의 구걸 행인이 될 것을 생각한 나머지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나셨던 것이다. 이제 맹인 소년 강영우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은 고아가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 가신지 다시 일 년 사 개월만에 가장이었던 누나 마저 세상을 떠났다. 학업을 중단하고 네 식구의 생계를 위해서 돈벌이에 나서야만 했던 누나는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삶의 의지를 잃고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을 중퇴한 18세의 꽃다운 나이었다.

 

16세의 맹인 소년 강영우는 아홉 살짜리 여동생과 열 세살짜리 남동생을 끌어안고 울고 또 울었다. 불과 4년이란 짧은 세월에 양친과 누나와 시력을 모두 잃고 어린 두 동생을 껴안고 절망에 몸부림을 치며 울어야 했던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은 강영우의 집안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재앙이 닥쳤다고 말했다. 집안 대대로 섬기던 조상들의 신이 노해서 벌을 준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소경인 자신이 동생들을 돌 볼 수 없기 때문에 남동생은 철물점에서 먹고 자고 심부름을 해주면서 저녁에는 야간 학교에 다녔고, 여동생은 보육원으로 보내어졌다. 그리고 자신은 공병우 박사가 세운 맹인 재활원에 입소해서 타자와 점자를 익혔다. 그리고 서울맹학교에 입학했다. 낮에는 맹학교에서 안마술과 더불어 공부를 했고, 저녁에는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다. 그러다가 웅덩이에 빠져 다치기도 하고 맹인이라 재수 없다고 버스 차장까지도 밀쳐 버리는 바람에 도저히 학원을 계속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원 봉사자들과 재정적인 후원자들을 붙여 주셔서 대입준비를 할 수 있었고, 맹인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받았던 수많은 오해와 편견과 수모를 극복하고 연세대학교 교육과에 10등으로 입학을 했고, 사 년 후에는 2등으로 졸업을 했다. 한 체육교수의 편견만 없었다면 그는 수석졸업도 가능했었다. 연대를 졸업하자마자 훌륭한 부인을 만나 결혼을 했고, 장애인은 유학할 수 없다는 법적 불평등 조항과 국가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여권과 비자를 받아냈다. 그리고 그는 3년 8개월만에 두 개의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아 냈다.

 

어떠한 동기와 정신력이 고아요 맹인인 강영우로 하여금 절망과 좌절의 늪 속에서 승리의 길을 걷게 하였을까? 보지 못하는 맹인이 어떻게 별따기처럼 어려운 박사학위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그의 신앙고백의 내용은 '역경 속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 '더 좋은 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 '실명을 도구로 쓰시는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시련과 역경을 통해서도 역사 하신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의지가 강하고 두뇌가 명석해서가 아니다. 실명에 대한 확고한 자신의 태도에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실명 때문에 사물을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이며,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못할 것이 없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시력이 없을 뿐이지 정상인과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정상인들보다 못하라는 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정상인 친구들의 도움을 받을 때에도 언제나 자신도 정상인들을 도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그는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지 않았다. 강의실을 옮길 때마다 안내를 받고 책을 읽어 받는 도움을 받으면서도 정상인 친구들을 도울 길을 찾았다.

 

 

 

이 모든 이야기는 강영우 박사 부부가 쓴 {어둠을 비추는 한 쌍의 촛불}이란 책에 실려 있다. 맹인 강영우 박사는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보았고, 절망 속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한 때는 원망스럽고 두려웠던 하나님이었지만, 자신의 고통 속에 동참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었다. 하나님이 고난을 딛고 일어 설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고 믿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의 실명은 장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에 교량 역할을 하는 도구이다. 또한 장애인 재활을 통한 국제 이해와 우호 증진에 도구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의 도구로 인해서 나의 실명에 감사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 기쁘게 가리라."

 

그는 한 때 실명의 절망과 무서운 고독 속에서 시력을 되찾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육신의 빛대신 실명을 하나님의 도구로 쓸 수 있는 능력과 정열을 주셨다. 실명으로 인한 성취가 자신이 갈고 닦은 학문이나 지적인 능력을 통한 성취보다 더욱 고귀하다는 것이다.

 

 

 

그는 한 때 배고픔을 참다못해 희미하게 남은 시력으로 한사코 별을 찾으며 부유함을 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재물대신에 사랑과 행복이 넘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세상에 빛을 비추는 가정을 주셨다.

그는 한 때 멸시와 천대 속에서 권력을 가진 강자가 되어 남의 대접을 받으며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자가 되는 권력대신에 약자가 되게 하시어 하나님의 존재와 필요성을 인정하고 오히려 자신의 약점을 자랑할 수 있는 용기와 신앙을 주셨다.

 

강영우 박사는 자신의 소경된 것이 자신의 죄 탓도 부모의 죄 탓도 아니란 사실에 확신을 얻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실명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이런 확신과 믿음에는 사도 바울의 영향이 컸다.

 

바울은 스스로 '육체의 가시'라고 말하는 신체의 장애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살았다. 바울은 자신에게 열등감을 주는 신체적인 조건에 대해서, 첫째, '내 은혜가 족하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신체적인 불리함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오히려 감사를 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둘째,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진다'고 말했다. 뛰지 못함을 아는 거북이가 쉬지 않고 걸었을 때에 뛸 수 있는 토끼를 이겼다는 이솝의 우화처럼, 느린보 거북이가 '나는 달리는 토끼와 경주하여 이길 수 없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절망하지 아니하고 포기하지 아니하고 경주하여 이긴 것처럼, 나의 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그 부족함을 채우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온전하여진다고 믿었다. 사도 바울이 인류 역사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은 사도 바울이 완벽한 인물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능력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그 부족함을 채우려고 부단히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크게 기뻐하며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하였다. 그는 약점들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았다. 굳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 놓고 자랑은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큰 일을 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굳이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바울은 적대자들이 자신의 약점을 이용하여 공격을 가하며 견디기 어려운 인격적인 수모를 가하는 바로 그 점에서도 오히려 자신의 약점을 기뻐하며 자랑하였다.

 

 

 

넷째,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하다'고 말했다. 약점을 강점으로 생각한 것이다. 낙상매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약한 것이 강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게 한다. 낙상매가 비록 다리는 병신이지만, 뛰어난 사냥매이기 때문에 사냥꾼의 사랑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쓰시는 것이다.

 

 

 

이런 바울의 신앙은 강영우 박사가 불행했던 과거와 실명으로 인한 고통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나의 약점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나의 약점을 통해서 봉사하고 기여한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배운 것이다. 강영우 박사는 말한다. 하나님은 역경 속에서 역사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더 크고 좋은 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이미 열린 문을 닫을 수도 있다. 만일 두 개의 문이 다 열리면 어떤 문으로 들어갈까 망설이다 길을 잘못 드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강영우 박사가 소경이 된 것은 이미 하나의 문이 닫힌 것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신체적인 장애를 갖게 된 것도 이미 하나의 문이 닫힌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문이 닫힌 바로 그 때가 하나님께서 더 크고 좋은 문을 여시는 때임을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보았다.

 

 

국가 발전과 한글

 

공 병우

 

1. 인간에게 가장 강한 무기는 글자이다

동물 중에서 말과 글자를 먼저 가지게 된 동물이 인간이다. 인간은 말과 글자를 먼저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문화를 건설하고, 동물을 지배하게 되었다. 인간이 오늘날 위대한 원자력을 이용할 수 있고, 또는 달나라를 가게 된 것도, 인간이 글자를 잘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글자 없이는 과학을 발달시킬 수 없고, 문명의 이기를 개발할 수도 없고, 활용할 수도 없다.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에게 가장 강한 무기는 글자이다. 글자를 가지지 못한 나라 사람들의 생활은 동물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2. 동양과 서양에서의 글자 생활의 능률 비교

서양 사람들은 26자의 "알파벳"을 기계화하여 능률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동양 사람보다도 과학을 급속도로 발전시킬 수 있었으며, 따라서 높은 문화를 건설할 수가 있었다. 동양에서는 일본이 먼저 한문 글자를 기계화하여, 능률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강대국의 일원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개발한 한문 글자의 기계화 속도는, 서양에서 개발한 "알파벳" 기계의 속도에 비하면, 그 능률이 1/10에 불과하다. 아직 일본 문화가 서양 문화에 비하여, 수십 년 뒤떨어져 있는 사실은, 글자의 생산 속도가 서양의 글자 생산 속도를 못 따르기 때문이다.

서양 여러 나라 중에서, 미국이 먼저 타자기, 라이노 타이프, 텔레 타이프, 컴퓨터 등을 개발하여, 글자를 능률적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문화를 건설하였다. 미국 사람들이 먼저 일본에서 원자탄을 사용한 사실과, 먼저 달에 가게 된 것도, 다른 나라보다도 먼저 글자를 가장 능률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계를 개발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한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천시만 하고, 한문 글자만을 숭배하여 왔기 때문에, 글자 생활이 대중화되지 못하고, 과학과 문화가 발전하지 못하여, 결국 그 후손들은 나라까지 일본에 빼앗겼던 쓰라린 역사를 가지게 된 것이다. 중국의 손 문 씨는, 일본이 "가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청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다고 말하였다. 과거도 그랬거니와, 점점 "스피드"를 요하는 시대에 있어서 글자를 능률적으로 활용하는 나라와 개인이, 생존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글자를 능률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글자의 생산을 기계화하는 길밖에 없다. 기계화하여도, 뜻글자(표의 문자)인 한문 글자보다는, 표음 문자인 한글이나, 일본의 "가나", 또는 서양의 "알파벳"의 기계가, 10배 이상의 능률을 나타낸다.

최근 일본의 경제가 고도로 발전한 것은, 일본 "가나"의 기계화로, 거의 샤양과 같은 능률적인 글자 생활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가나 텔렉스"의 보급 대수가 미국, 독일 다음으로 간다는 사실로 보아도 알 수 있다. "가나 컴퓨터"의 보급 대수도 미국과는 비할 바가 못되지만, 서독에 비하여 뒤떨어지지 아니하고 있다. 기계의 위대한 능률을 활용하기 전에는, 경제 성장은 물론, 문화 건설도 할 수 없다.

 

3. 우리 나라의 글자 기계화

일본은 글자 생활의 능률화에 있어서, 미국의 흉내를 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미국의 흉내는 고사하고, 일본의 흉내도 내지 못하고 있다. 서양에는 영문 타자기와 영문 기계의 글자판과 코드(code)가 국제적으로 통일되어, 고도의 능률을 발휘하고 있다.

그에 견주어 우리의 글자판 통일 과업은 불행하게도, 문교부에서 하다가 실패하고, 한글 학회에서 하다가 실패하고, 한글 학회와 상공부가 합동으로 하다가 실패하고, 최근 과학기술처에서 한 것도 역시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중대한 과학의 기본 문제가 오랜 세월을 두고 실패만을 거듭해 온 이유는, 민간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연구 개발한 민간 전문가들의 글자판을 무시하고, 번번히 새로운 글자판을 과학적인 실험 근거도 없이 제정하였고, 또 그 인간 공학 또는 기계 공학적 면에서 분석한 결과가, 비능률적이고 비경제적인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1969년 7월, 과학기술처에서 제정한 소위 표준 글자판은, 역대로 개발한 수많은 글자판 중에서 가장 모순이 허다한 글자판으로서, 가장 실패적인 것이다.

이런 실패적인 표준 글자판은 그 동안 막심한 국가적 손실을 초래하였고, 현재 심각한 글자판 혼란을 빚어 내고 있ㅇ으며, 각종 한글 기계의 개발을 암초에 부딪히게 하여, 한영 겸용 타자기, 한영 겸용 텔렉스는 물론, 한글 자동 식자기 등, 시급을 요하는 기계의 개발과 "코드" 일원화 작업을 마비 상태로 빠지게 하였다. 한글 기계화의 마비 상태는, 곧 한글 전용 추진이 마비 상태로 빠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현실은 한글이 역대로 여러 차례 겪어 온 액운 중의 또 하나의 커다란 액운을 만난 것이다. 글자판 혼란으로 말미암아, 한글의 기계화가 오랫 동안 침체된다면, 그야말로 민족적인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4. 글자판 통일이 시급한 문제이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보배를 500년 동안 천시만 하고, 올바른 활용을 못함으로써, 민족적인 비극을 겪어온 우리가, 아직도 글자의 중요성과 기계화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심각한 한글의 액운을, 지성인들은 먼 하늘에 뜬 구름을 바라다 보듯이 보고만 있다.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지성인들과 문화 단체가 단결하여, 한글 기계화의 "글자판 통일"이라는 민족적인 과업을 이루기 위하여 힘을 써야만 할 때이다. 그리고 전문가와 과학자들도 단결하여, 한글 기계의 연구 개발 및 개량에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여야만 할 때라고 생각한다.

한글 기계화의 추진 정책은, 국가 발전에 있어서, 고속 도로를 개발하는 정책보다도, 더욱 중요한 과업이라는 것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이런 개발에 소요되는 비용은 고속 도로의 개발에 소요되는 비용에 비한다면, 극히 적은 금액에 불과한 것이다.

극히 적은 돈을 가지고, 지극히 중대한 국가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사업은, 한글 기계화 추진 과업이라고 믿는다. 설사 한글 기계화 추진에 많은 경비가 든다고 치더라도 고속 도로 개발보다도, 우선적으로 추진하여야만 할 과업으로 믿는다. 그 이유는 한글 기계화가 과학, 교육, 통신, 산업, 경제, 안보, 교양 등 모든 분야에 급속한 발전을 도모하는 지금길이 되기 때문이다.

한글 전용은 한글 타자기의 보급에 의하여 촉진되어 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바이다. 표준 글자판 때문에 일어나는 혼란과 마비 상태로 말미암아, 한글 전용도 늦어지게 되었꼬, 도리어 뒷걸음질을 칠 우려도 없지 않다. 그러므로 글자판 통일 과업이 하루 속히 올바로 이루어지기 전에는, 한글 기계화가 발전할 수 없고, 한글 기계화의 발전 없이는, 한글 전용도 전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전 국민이 한글 전용을 실천하더라도, 한끌의 기계화 없이는, 즉 글자를 능률적으로 생산히기 전에는, 국가 발전을 기대할 수 없고,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승리할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1972. 7. 6.) ♤

 

 

 

 

 

 

 

 

 

 

첨부파일 한글과 한겨레를 끔찍하게 사랑한 과학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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