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詩칼럼 ■
마르크스를 읽는 詩
박 승 류 (시인)
어느 날,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의 주장이 문득 떠올랐다. 2010년 우
리詩회가 여름자연학교 행사를 하고 있을 무렵, 필자가 시를 읽고 있던 밤
이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
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단순한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를 넘어선 좌
우명 같은 우리시회의「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이라는 가치는, 시를 쓰
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보편적 가치이리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또한 무엇
을 가꾼다는 것은 “의식”의 전제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까지 따라 나왔다.
-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를 음미하다.
많은 사상가 중 하필이면 마르크스라는 사실이 좀 의외이기는 하지만 뭐
어떤가? 어쩌면 그것이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라는 변명을
하기도 하며, 또한 기록이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사상은 전복되
기 위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역사의 발전에는 전복과 파
괴도 한자리를 차지했으니, 기존의 기록이나 사상이야말로 신기록이나 신
사상을 빛내는 든든한 배경이다. 아무튼 구시대적 사상가의 사상이라 해서
모든 것이 전복된 것은 아닐 터, 전복된 사상이 아니라면 이는 훌륭한 고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라는 주장은, 대체로 후차적 성
취로 얻은 사회·경제적 위치로서의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는, 노동자로 존재하는 자의 의식과 자본가나 정치가로서 존재하는 자의
의식에 많은 격차가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음이다. 때문에 존재가 의식
을 결정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면서 여러 형태의 경우를 여기서 함께 살펴보
려 한다. 즉 마르크스의 이 주장을 분절하고 비틀어서, 사단법인「우리詩진
흥회」몇몇 구성원의 시를 통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진다.
그들은 만재도에 와서 재미를 못 보았다고 한다
낚싯대와 얼음통을 지고 배를 타기 직전까지도
그 말만 되풀이했다.
날보고 재미 봤냐고 묻기에
나는 낚시꾼이 아니고 시인이라고 했더니
시는 어디에서 잘 잡히느냐고 물었다
등대 쪽이라고 했더니
머리를 끄덕이며 그리로 갔다
- 이생진,「 낚시꾼과 시인」전문
생명이 직업을 구속하고 직업이 자유를 구속하는 굴레를 벗어나기 힘든
생명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이 작품은, 화자의 신분 즉 존재로부
터 결정되는 의식의 시이다. 작품의 특징은 화자의 의식을 있는 그대로 표
현한 상태로 두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때야 한다는 것이 없다. 시
에 등장하는 양자 모두 세월을 낚는 것은 동일하지만, 낚시꾼이니 고기를
낚고 시인이니 시를 낚는 것이다. 현재 존재로부터 결정되는 의식은 있지만
그 의식으로부터 결정되거나 또한 변화가 예상되는 그 아무것도 없다. 그러
나 현 상태의 시적 구성에도 독자에게 돌아오는 사유와 감흥의 폭은 크다.
-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를 분절하다.
위의 경우와는 달리 의식으로부터 존재를 취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음은 물론이다. 이는 존재에 의한 의식이 아닌 존재를 위한 의
식일 것이므로 인간의 의지가 반영된 의식이다. 그러므로 또한 그래야만
더 많은 사회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낮은 곳으로 임하려는 성
자적聖者的의식을 가진 자이거나, 구도자求道者적 삶을 영위하려는 자, 또는
실패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자挑戰者적 삶을 마다하지 않는 자, 그리
고 도피자逃避子적 삶을 지향하는 자라면 아마 의식에 의해 존재를 결정하
는 것도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이 겨울밤 어디에
눈이 내리겠네
내리는 눈 속에
그대 잠들었겠네
고운 잠 꿈결마다
피는 동백꽃
동백길 천만 리로
내 무너져 눕겠네
- 임보,「 겨울연가」전문
「겨울연가」는「낚시꾼과 시인」과는 달리 귀소본능의 분위기가 풍긴다.
여기서 돌아가고 싶은 곳이 집巢이 아닌 장소所여도 상관없다. 평화로운 곳,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조건이 갖춰진 유토피아 또는 평온한 전원田園이 그
곳일 수 있다. 그리고 그곳은 특정한 장소만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정신적 평화를 말함이다. 물욕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더없이 풍요로운 곳,
또는 마음의 상태이다. 지난날「백석」은「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오
막살이로 귀歸를 갈망하였고, 「정지용」역시「향수」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봐도 무방할 얼룩백이 황소를 그리워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내 무너져 눕겠네”로 끝나는「겨울연가」엔 시인의 의도와는 별
도로 도전자적 삶을 살아가려는 인간유형이 나타난다. 「도피자적」이 아닌,
「도전자적」이라 함은 익숙한 물질문명(도시생활)을 접고 평온한 생활로의
지향함을 의미한다. 「백석」이「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세상에 지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라고 했지만, 이는 새로운 환경으로 귀의(歸依와 歸
意를 포함)하려는 의지를 뜻한다. 그런데「겨울연가」역시 존재에서 의식이
결정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존재에서 비롯된 의식은 곧 또 다른 존재
를 결정하는 의식이기에「낚시꾼과 시인」과는 다르다.
- 존재와 의식의 선후를 외면하다.
대부분의 조건에는 예외가 존재한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의식에는 원초
적 의식도 있겠으니, 이는 위의 두 유형과는 별개가 아닐까 싶다. 때문에
존재의 성립 그 자체에서 이미 결정된 의식이라면 존재로부터 발생되는 의
식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주변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된, 물리적으로 성
립된 인간이라면 아마 존재와 의식의 선후 문제에 있어서 예외일 것이다.
다만, 존재의 근원적인 성립에서 결정되는 의식이라 할지라도 그 의식의
결정이 주변 환경의 간섭을 받은 경우는 흔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는
무엇(직업이나 신분 등)으로 존재하는가에서 결정된 의식과는 다르다.
철쭉꽃 날개 달고 날아오르는 날
은빛 햇살은 오리나무 사이사이
나른, 하게 절로 풀어져 내리고,
은자나 된 듯 치마를 펼쳐놓고
과거처럼 앉아 있는 처녀치마
네 속으로 한없이 걸어 들어가면
몸 안에 천의 강이 흐르고 있을까
그리움으로 꽃대 하나 세워 놓고
구름집의 별들과 교신하고 있는
너의 침묵과 천근 고요를 본다
- 홍해리,「 처녀치마」전문
흔히들 시에는「쾌락적 기능」과「교훈적 기능」이 있다고 한다. 이는 시에
내재된 요소들로 인해 독자는 감동받고 교훈을 얻게 됨이다. 작가의 입장
에서 살펴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창작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작가의 고뇌마저도 창작의 기쁨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물로서 자기만족에 다다른다면 이는 쾌락으로 볼 수 있겠으며 또한
그 과정이나 결과물을 통해 자기수양이란 기능을 경험하게 될 것이므로 우
리는 이를 교훈적 기능이 작동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하나를
외면한 시는 어떨까? 바로「참여」가 아닌「순수」이다.
여기서 잠시「순수시」를 생각한다. 이 시가 포함된 영역을 굳이 둘 중에
서 선택하라 한다면 순수시에 가까울 것이다. 이 지면에 소개되는「낚시꾼
과 시인」「겨울연가」「처녀치마」모두 순수시로 볼 수 있다. 교훈적 기능이
내포된「순수시」도 간혹 있지만,「 처녀치마」는 교훈적 기능이 배제된「순수
시」이면서, 시의 의미를 통해 유희적 기능을 강화시킨 작품이다. 존재로서
의식을 하지만 이는 근원적 존재로서만 의식하는 선에 머물러 있음이다.
이와 같이 이 작품은, 위에서의 언급처럼 무엇(직업이나 신분 등)으로 존재
하는가에서 결정된 의식과는 다르다.
- 존재와 의식의 선후를 망각하다.
또 있다. 이번에는 존재와 의식의 선후가 혼재된 시이다. 즉 존재에 의해
의식이 결정되고 그 의식으로부터 또 다른 존재로 자리매김이 되는 형식이
다. 다음의 졸시「못과 벽」은 벽에 고정되고 난 후 존재감에 대한 매력적 유
혹이 결국, 벽에 고정되기 전의 존재에서 결정되는 의식에 개입되는 형국
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생각하면 이 역시 존재로부터 ‘개입’이라는 의식이
결정되는 것이므로 아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주장을 벗어나지 못
한다. 따라서 그 둘의 구분에서 얻는 실익은 없으므로 그저 한 몸으로 생각
하는 것으로 접어 둔다. 다만, “존재하므로 의식하고 의식하므로 존재한
다.”를 취한다.
우악스런 망치가
다짜고짜 뒤통수를 내리치지만
벽은 못을 완강히 밀어낸다
구멍이 있어야 비로소 제구실하는 못
구멍이 없어도 제구실하는 벽
다급해진 망치가 손에 침 뱉고 힘껏
연거푸 내리치지만 벽은
여전히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튕겨 나간 못, 대가리 무참히 일그러지고
뻣뻣하던 다리 후들거린다
빈틈없는 벽 뚫으려는 못, 함께 잠시 침묵하다
반복되는 망치질에 끝내 무릎을 접는 못
접었다 폈다 반복된 깨우침을 통해
속살속살 들이미는 부드러운 마음을 보이고
마침내 벽은 무릎을 받아들인다
간절함만 앞세우고 밀어붙인 무지의 죄
무릎 꺾은 마음에서 용서되는 것인지
무릎 접을 수 없는 벽은 꿇었던 못의 무릎을
온몸으로 감싸 안기 시작한다
속살에 뿌리내리며 안도하는 표정의
못, 흔들림 없이 정착한다
- 졸시,「 못과 벽」전문
논리적 결과의 실익이 없음에도 굳이 선후를 구분해 보는 것은, 존재에
서 의식이 결정되는 것보다 의식에서 존재가 결정된다면 인간사회는 좀 더
성숙된 사회가 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소극이 아닌 적극
적 의식에 의해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의식에 의
해 또 다른 위치의 존재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인해, 사회의
발전이 좀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의해서이다. 이것이
존재와 의식의 선후를 고민하는 이유이다.
위의 화두는 이미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함께 공존하는 선행과
악행도 따지고 보면「존재와 의식의 선후」로부터 늘어나기도 또는 줄어들
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와 함께 존재와 의식에 대한
고민이 녹아 있는 작품이 독자들과 만나게 된다면, 독자의 사상에 긍정적
방향으로 기여하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위에서 구분된 작품의 유형을 편의
상「존재가 의식을 생산하는 작품」,「 의식이 존재를 모색하는 작품」,「 존재
와 의식을 외면한 작품」,「 존재와 의식이 상호작용하는 작품」으로 정리해
본다.
박승류 시인
* 2007년 월간《우리詩》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