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되고 안 되고는
언젠가 철없는 아들이 공연히(?) 예술가를 자처하는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빈둥거리며 침대에 누워 책장을 넘기고 있는 아버지 옆에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간 아들이 털썩하고 같이 누우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예술이 되고 안 되고는 누가 결정해요?"
그 질문에 아버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걸 아는 놈들이 결정하지."
아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게 누군데요?"
아버지가 답했습니다.
"당근, 예술가들이지."
아버지의 대답이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었습니다. 아들이 또 물었습니다.
"누가 그 사람들을 예술가라고 인정하는데요?"
또 아버지가 답했습니다.
"그거야 물론 ‘예술을 아는’ 예술가들이지."
여전히 불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아들이 또 물었습니다.
"자기는 예술가라고 우기지만 남들이 아니라고 하면요?"
아버지가 심드렁하게, 그러나 철없는 아들의 물음이 가소롭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아닌 거지."
그러자, 아들이 픽하며 콧방귀를 꼈습니다. 예술이란 게 무슨 소용이야,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물론 그 표정에는 별 내용도 없이 공연히 예술가연하는 아버지에 대한 조롱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놈의 표정을 흘낏 살피면서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짐짓 심각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본디 모르는 놈들은 모르는 법이다. 이 세상은 두 부류의 인간으로 나뉜다. 아는 놈과 모르는 놈. 그게 예술가들이 이 세상을 나누는 유일한 척도다. 너도 알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르는 놈은 끝까지 모르고 죽는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이미 오래 전에 그걸 강조했지만, 그걸 아는 게 중요하다. 무릇 인간이라는 존재는 알기 전까지는 아무리 알고 싶어도, 이를테면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법이다. 세상에는 ‘경지境地’라는 말이 있다. 말이 있을 때는 무언가 그 말로 형상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상이 있다는 것인데, 예술은 어디까지나 경지에 속하는 것이다. 경지에 든 놈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닌 것이다. 그게 바로 예술이다. 경지를 모르는 놈들이 백 놈이 모여서 한 목소리로 떠들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이상.”
갑자기 아버지의 장광설이 무언가 엄연한 진실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아들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아마 아버지의 언동言動에서 무엇인가 아는 놈의 낌새를 발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더 이상 모르는 놈 취급을 받기가 싫었는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물러났습니다.
아들에게는 아들의 세상이,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세상이 있습니다. 세상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아버지의 경지를 모릅니다. 누구나 스스로 아버지가 됨으로써 ‘아버지의 세상’도 가집니다. 자기가 모른다고 세상에 있는 것이 없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내가 예술을 모른다고, 문학을 모른다고, 예술이 없어지고 문학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는 ‘공유적 인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애매하고 모호하게 정의하고 있다고 여겨져도 그것이 있어서 세상의 한 축으로 행세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어는 그런 ‘공유적 인식’이 만들어낸, 그런 ‘공유적 인식’을 유포하는, 둘도 없는 인간화(사회화)의 전제 조건입니다. 언어의 힘은 바로 그 ‘공유적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성립합니다. 언어는 그 관계 위에서 인간화에 필요한 사회적 사물과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언어처럼, 예술론적 인식, 심미성의 기준 같은 것들은 반드시 그 ‘공유적 인식’을 바탕으로 생성됩니다(대중들은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공유적 인식’에 항상 목말라합니다). 그렇지만 예술가는 언제나 그 ‘공유적 인식’에 반기를 듭니다. 고삐가 매여져 있지만, 예술가라는 말[馬]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아방가르드로 튈 수 있는 것이 예술입니다(예술과 정치는 그런 면에서는 이음동의어입니다). 새로운 공유적 인식을 만들고 유포시키면서 예술은 인간의 삶을 확장시킵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그 ‘공유적 인식’에 무지하거나 그것을 우정 소홀히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른 사이에 ‘얼치기’가 되어 있는 것이 또 예술의 세계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언어를 기표의 본체라고 여긴 라캉의 말을 조금 소개하겠습니다.
라캉은 먼저 언어는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의미작용을 만들어낼 뿐이다”라고 말하고 그 진술을 증명하길 즐겼습니다. 그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진술행위를 의미작용의 끝없는 지속과정으로 설명합니다. 그 논의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언어(랑그)가 기의記意의 전 영역을 대신할 수 있다는 명제가 생겨납니다. 모든 것이 결국은 말이라는 말이지요. 기의는 기표記標로서만 존재할 수 있으니까 필연적으로 기표가 기의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모든 욕구들을 충족시킨다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그에게는 ‘기표는 기의를 재현하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다’라는 말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화장실 문 위에 쓰인 ‘Ladies’와 ‘Gentlemen’이란 기표를 예를 들면서 이들 기표들의 차이가 기의로서의 사회법칙을 규정한다고 말합니다. 기표는 비물질적이거나 추상적인 형태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방식으로 기의에 침투한다는 거지요. 기표들은 의미생성을 위해서 다른 기표 속에 침투하고 또 다른 기표를 포섭하기도 하며 상대방에게 서로 의존합니다. 궁극적으로 기표들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요소로 환원되고 동시에 완결된 체계를 이루려는 목적으로 서로 결합하기도 하는 이중 운동을 수행합니다. 그에 따르면 문자는 통합된 의미를 불가능하게하고 총체적인 의미를 분산시켜버리는 기표들의 구조인 것입니다. (이동연, 『라캉의 유혹 : 라캉 언어모델과 기표의 좌절』 참조)
결국 말만이 말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말’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라캉의 ‘언어주의’는 그러나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는 좀 낯선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보통 언어를 둘로 나눕니다. 진리를 드러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눕니다. 그렇게 차별하는 데 익숙합니다. 대개의 경우, 이른바 증명 가능한 ‘과학의 언어’만이 진리를 보지保持한다고 여깁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문학의 언어’는 늘 진리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저 ‘황당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비과학적 언어’라고 폄하합니다. ‘소설을 쓰고 있다’라는 말은 터무니없는 ‘날조’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지만 그것들만 없애면 세상이 훨씬 명징해지고 조용해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이익이 있는 곳에 진실이 있다’라는 것 이외에는 모두 거짓말로 치부합니다. 그것 이외에는 모두 삶의 진실을 배반한 ‘오해와 편견’의 소산, ‘기표놀음’일 뿐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늘 예술이나 문학은 감시나 조롱의 대상에 머물러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비하합니다.
사족 한 마디 : 예술은 삶을 ‘우회’합니다. ‘우회迂廻’하는 것 없이 ‘직진直進’만 있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를 가끔씩 생각해 봅니다. 환상 없는 세상, 환상 없이 사는 인간들, 그리고 그들의 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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