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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평론

공간의 구성 | 양선규(대구교육대학 교수)

작성자홍예영|작성시간15.09.01|조회수56 목록 댓글 0

                         공간의 구성                

 

 

                                  양선규(대구교육대학 교수)

 

공간이 내면內面 구성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장소적 환경이 인간의 마음가짐에 영향을 미칩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아야 제대로 영화감상을 있는 것처럼, 학교에 가서 선생의 육성肉聲 전하는 진리에 기울여야 진정한 배움이 있는 것처럼, 신전에서 모아 고개 숙여 신을 만나야 신앙심을 제대로 배양할 있는 것처럼, 공간은 인간의 내면을 구성하는 힘을 가집니다. 요즘 들어서 신앙생활에 바쁜 아내가 제게 말했습니다. 믿음과 선행善行 중요한 것이지 장소에 충실한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싶은데… 아마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웃에게서 믿음과 선행 보기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저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소聖所 모이는 것이 우리 내면의 신성神聖 양성하는 유일하거나 가장 효과적인 길일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말을 꺼낸 김에 한마디 더했습니다. 물론 부부 사이에서나 있는 터놓고 하는 이었습니다. 신전에서 우리를 기다립니다. 우리가 부른다고 아무데나, 혹은 가가호호, 함부로 나타나는 자는 신이 아닙니다. 신의 가면을 욕심일 뿐입니다. 신은 자신의 공간 안에만 있습니다. 그게 신입니다. 공간 안에서, 우리를 기다려주는 것이 그의 자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아내는 들은 척도 않고 부엌으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두 듣는 소리가 아니지 않느냐는 표정이었습니다. 김이 빠졌습니다만 어쩔 수가 없군요. 자신의 공간으로 버리니 속수무책입니다.

 

하루 종일 공간 조정을 했습니다. 이사 오고 나서 어중간하게 방을 나누어 쓰고 있었는데, 원래대로, 신혼 때부터 줄곧 해오던 대로, 원위치를 했습니다. 안방을 서재로 쓰고 안에는 모든 것을 일습一襲, 혼자 갖추어 놓고 사는 스타일입니다.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아프고 나니 마지막으로(?) 하던 대로 정리라도 해놓고 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간이 내면을 구성한다는데 그렇게라도 해서 내면을 채워보자는 욕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짐을 옮기고 이것저것 꺼내고 넣고 하는 틈을 타서 버리는 아내 본색(?) 드러내고 있네요… 공간과 관련된 화두 한두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다리와 개울 : 다리는 우리를 건너가게 합니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인간은 다리다라고 말했습니다. 불가佛家에서도 아난의 입을 빌려 오백 바람에 깎이고, 오백 햇볕에 타고, 오백 비에 맞은 뒤… 누군가 밟고 건너갈 있는 돌다리가 되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최종 도달점은 다립니다. 차안도 피안도 아닙니다. 그저 다립니다. 다리가 구원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건너려는 의지를 강조했고, 부처님은 희생과 헌신을 강조했습니다. 주말 아침, 문득 교외로 나가 천변에 섰습니다. 멀리 길게 새로이 조성된 징검다리가 보였습니다. 지난해 홍수 물에 떠내려간 징검다리를 튼튼하게 보수했습니다. 물이 불면 다리는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냥 물길 안에 돌덩어리들입니다. 마치 제가 살아온 나날을 보는 듯했습니다. 의지도 희생도 큰물 앞에서는 안에 잠겼습니다. 가뭄이 들고 물이 말라서 누구나 개울을 건널 있을 때라야 비로소 다리를 자처했습니다. 그러고서도 평생을 돌다리라고 자위自慰하며 살아왔습니다. 부끄러운 주말의 오전입니다.

 

문과 : 나서면 길이 시작됩니다. 반대도 있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야 길이 열릴 때도 있습니다. 문밖의 삶이 있으면 문안의 삶도 있을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문이 닫혀 있으면 우리는 길로 나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위의 있으려면 먼저 안의 이나 밖의 있어야 하겠습니다. 조성기 소설 「통도사 가는 길」을 보면 <문과 > 대한 모종의 비유적 사색이 볼만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나는 종종 이런 꿈을 꾸기도 하였지요. 나는 힘들여 언덕을 올라갑니다. 그 언덕만 넘으면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언덕배기로 올라와 보니 엄청나게 큰 문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 문은 거무튀튀한 굵은 나무들로 짜맞추어진 것으로 차라리 거대한 벽이라고 할 만합니다. 사실 벽이라고 해도 되는 것이, 어디서 어디까지가 문짝에 해당하는지 도통 가늠을 할 길이 없거든요. 비록 문짝 부분을 확인했다 하더라도 워낙 커서 온몸을 다 사용해 밀어도 끄떡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 문, 아니 벽 앞에서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문 앞에 서 있으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져 오는데, 그것은 그 문 자체가 하나의 세계요 길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 문은 꿈속에서 종종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인 하동 근방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세워져 있는 듯도 했고, 남한과 북한의 경계인 휴전선 일대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하여튼 내 의식 속에서 부각되는 갈등과 관련하여 그 문이 서 있는 경계가 그때그때 정해지는 듯싶었습니다.

이번에도 사실 여행길에 오르기 전에 그 문을 꿈속에서 보았습니다. 그 문은 그녀가 누워 있는 방과 내가 누워 있는 방의 경계에 세워져 있는 듯이 여겨졌습니다. 꿈속에서는, 집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집들을 다 삼킨 듯한 거대한 문만이 서 있었습니다.

 그 문이 꿈속에서 나타날 적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까마득히 높은 문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러면 말입니다. 어김없이 문 꼭대기에 통도사라는 세 글자가 하얀색으로 적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통도, -. 꿈 전체가 통도라는 기이한 울림으로 가득 메워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전율하게 마련이지요.

그런 꿈을 여러 번 꾸었으면서도 나는 통도사를 선뜻 찾아 나서지 못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런 꿈을 꾸고 있기 때문에 찾아가는 것을 꺼렸는지도 모릅니다. 왜 그런 꿈을 종종 꾸는 것인가. 나 자신을 분석해 보아도 그 이유를 잘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어릴 적 통도사 이름을 들으면서 그 통도라는 울림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삶에 있어 길이 자주자주 막히는 것을 경험하면서 길을 뚫어 나가고 싶은 무의식적인 소원이 통도라는 말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대강 이 정도밖에 생각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와 나의 사이에 막힌 길을 뚫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몹시 낙담한 가운데 있을 때 나는 또 그 꿈을 꾸었고, 꿈에 이끌리듯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통도사를 이제야 찾아 나선 것이었습니다. 임금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찾지 못해 애태우는 굴원의 시집을 들고. [조성기, 「통도사 가는 길」]

 

소설 화자에게는 통도사행이 자신 앞을 가로막고 있는 , 막힌 길을 뚫는 일생일대의 행사였습니다. 통도通途, 그에게는 그것만큼 절실한 화두가 없었던 듯합니다. 문을 열고 길을 걸어야 하는 그는 그러나 앞에서 좌절하고 맙니다. 문은 거무튀튀한 굵은 나무들로 짜맞추어진 것으로 차라리 거대한 벽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연애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은 그에게 좀처럼 문을 열지 않습니다. 심정(저는 알지 못합니다만) 임금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찾지 못해 애태웠다는 굴원의 그것에 비견합니다. 듣기로 초사楚辭 유명한 굴원은 끝내 길을 찾지 못하고 멱라(汨羅: 汨水․羅水 합류점) 물고기 밥을 자청하였다고 하는데 그런 절박감 속에서 그는 통도사를 찾습니다( 통도사인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고민을 완화시켜 방도를 거기서 찾을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통도通道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가 찾은 통도사는 막상 통도通途 통도通道 아닌 통도通度였습니다. 만법에 통하라, 그래서 중생 구제에 나서라, 너나 나나 없이 우리 모두는 구원받아야 하는 불쌍한 존재다, 보이는 , 표상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라, 기타 등등, 그는 한꺼번에 밀려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전율합니다. 여기서도 되로 주고 말로 습니다. 안내만 받고자 했는데(통행권?) 어디든 길을 있는 권한을 얻어 갑니다(도로 개설권?). 길이 본디 문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깨닫고, 세상의 모든 문에 통하는 열쇠를 깎을 있는 듬직한 쇠꾸러미 하나를 받아 갑니다(돈오점수?).

 

그런 같습니다. 모든 길은 안에서 시작되어 안으로 돌아옵니다. 문은 자신입니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결국 내가 열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통도通度 큰절 이름이 되고 있는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양선규

소설가. 창작집 『난세일기』 『칼과 그림자』 『장졸우교』 . 연구서 『한국현대소설의 무의식』 『코드와 맥락으로 문학읽기 『풀어서 문학이야기』 . , 대구교육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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