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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평론

때거울| 양선규

작성자홍예영|작성시간15.11.17|조회수58 목록 댓글 0

  

마당 이야기의 최종편입니다. 언젠가 이 자리에서 폐가(廢家)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용회이명4, ‘귀신이 산다’). 폐가는 사람이 살지 않음으로써 죽은 집이 된다는 것, 사람의 기운이 닿지 않는 곳은 겉이 아무리 번지르르해도 폐가에 다름 아니라는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사람살이도 한 가지일 것입니다. 노심초사, 전전긍긍, 스스로를 닦달하며 잘 살아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것과 누가 보든 말든, 내 멋대로, 되는대로 막 살겠다는 심보로 점철된 것 사이에는 엄연히 큰 차이가 질 것입니다. 그 비슷한 이치를 윤기, 윤광이라는 말로 표현한 재미난 글이 있습니다.

 

삶도 잘 살아내면 윤기(潤氣)’가 난다. 인간도 지극한 정성으로 수련하면 몸과 행동에서 윤기가 흘러넘친다. 집도 마찬가지다. 잘 보살피고 가꾸면 그 집에서 반질반질하고 매끄러운 윤기가 난다. 연장도 마찬가지다. 호미며 삽, 낫과 같은 흙과 들녘의 도구들도 잘 보살피고 간수하면 그 거친 흙과 쇠의 몸에서 윤기가 난다. 우리들도 어린 시절 경험했을 것이다. 주머니 속의 작은 공깃돌이나 가방 속의 필통 같은 것들조차도 잘 보살피고 아끼면 거기서 놀라운 윤광(潤光)’이 나던 경험을 말이다. 윤광이 나는 이런 존재들을 삶의 곳곳에서 빛나는 문장처럼 뜻하지 않게 만났을 때, 그 순간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의 내면은 놀람을 느끼고 환해지며 고양된다.

윤기가 나는 것들은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고 드높여준다. 그들이 세상에 보내는 밝은 에너지는 심연처럼 캄캄한 우리들의 삶을 살려낸다. 윤기란 결코 겉에서, 단기간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런 만큼 윤기의 힘은 은밀하나 아주 강력하고 오래간다. <중략>

앞에서도 말했듯이 모든 존재의 윤기란 하루 이틀 만에 급조되는 산물이 결코 아니다. 제아무리 능력 있는 상인이나 공인일지라도 다른 것들은 모르나 이 윤기만은 절대로 졸속주의로 급조해낼 수가 없다. 윤기란 서정주가 그의 시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에서 말했듯이 대대로 이어지는 시간과 삶과 정서와 정신의 누적 속에서 만들어진 역사적이며 자연적인 세계이다. 이때의 윤기는 시 속의 외할머니 집 뒤란 툇마루의 빛 같은 먹빛이며 물빛이고 하늘빛이다. [정효구, 마당 이야기중에서]

위에 인용된 글에 이어서, 저자는 진정한 마당은 언제나 윤기로 충만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받고 있는 존재, 쓸모 있는 존재들은 그렇게 윤기로 자신을 드러낸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 이틀만에 얻어지는 것이 아닌 그윽한 자태로 자신을 드러내는 그것을 설명하는데 서정주 시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가 차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시를 배운 적도 가르친 적도 없습니다. 문득 그 내용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시 전문을 한 번 찾아봤습니다.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읍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날마닥 칠해져 온 것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는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래,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에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정주,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서정주의 시는 그저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느낌을 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걸 천재(天才)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온 외손자에게 오디 열매를 따주는 외할머니의 주름진 손길이 눈앞에서 어른거립니다. ‘날이날마닥손때를 칠한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의 성화를 피해 그 손때 묻은 툇마루로 피신한 어머니의 어린 생명, 그 어린 생명을 보다듬어 내는 어머니의 어머니, 한 폭의 인생파(인상파?) 그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시를 불러낸 마당도 좋지만 객꾼으로 등장한 뒤안(뒤란) 툇마루도 주인 못지않게 심금을 울립니다(主客顚倒?).

마당에 대한 기억도 별로 없습니다만, ‘뒤안(뒤란) 툇마루에 대한 기억은 제게 전혀 없습니다. 그런 대물림이 제겐 없습니다. 미당 선생이 뻐기는(?) 그런 사무치는(?) ‘() 내림의 은사가 제겐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 미당 선생을 실물로 딱 한 번 뵌 저로서는 선생의 시나 인생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느낌은 듭니다. 선생이나 저나 그저 날이날마닥제 하고픈 대로 막 살아온(살다간) 인생이라는 느낌 정도는 듭니다. 그래서 좀 위안도 되고, 이내 또 우울해지기도 하는 금요일 오후입니다. 일테면 선생처럼, 마음속 깊이 간직했다가 심한 꾸지람이 있을 때면 언제나 훌쩍 꺼내 볼 수 있는 때거울하나쯤 가지고 싶은, 그렇게 막연한, 오던 비 그친 흐린 날 오후입니다.

 

사족 한 마디. 페이스북에서 하고 싶은 것 하며 사는 삶의 궁()함에 대한 철학적 단상(斷想)을 잠깐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헝그리 정신과 궁상의 차이(이진경)’라는 글입니다. 저 역시 제 하고픈 일만 하면서 살아온 인생이라고 자부하던 터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한 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그 글에서는 언급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막 사는 인생(?)’의 요체는 입출(入出)’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들고 나는 일에 거침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들어가고 싶을 때 거침없이들어가고 나오고 싶을 때 미련 없이나올 수가 있어야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살 수 있습니다. 체면, 세간적 이해(利害), 자존심, 관습(관례) 같은 것을 징하게 생각하면 후회 남기지 않는 결행(?)이 불가능합니다. 그 점을 참고로 하시면서 다음의 헝그리 정신과 궁상의 차이(이진경)’를 감상하시기 바랍니다(오늘 글은 인용글 위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헝그리정신은 궁상이 아니다. 궁상을 떠는 것은 대타적으로는남들 앞에서 없는 티를 내는 것이고, ‘대자적으로는궁핍 앞에서 사고나 행동이 위축되거나 빈약해지는 것이다. 궁상은 궁핍에 짓눌려 찌든 삶이고, 남들에 대해서는 궁핍을 드러내 동정을 구하거나 인색함을 변명하려는 태도다. 반면 헝그리정신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의 삶을 위해 능동적으로(!) 가난을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가난 앞에서 당당하다. 없으면서 있는 척 하지도 않지만, 있는 것 이하로 궁핍을 과장하지 않는다. 나보다 잘 버는 친구와 만나면 엔간하면 얻어먹지만, 나보다 못 버는 이들과 만나면 가능한 한 내가 사야 한다. 자신을 위해 쓸 때에는 최대한 신중하지만, 남을 위해 쓸 일이 있으면 최대한 과감해져야 한다. 항상 검소하게 살고자 하고 엔간하면 돈 쓸 일을 안 만들지만, 써야할 일이 있을 땐 머뭇거리면 안 된다. 그렇기에 작은 돈을 쓰는 데는 민감하고 쫀쫀해지지만, 큰돈을 쓸 때에는 과감해져야 한다. 이럼으로써 돈에 부림을 받는 삶이 아니라 돈을 부리는 삶이 가능해진다.

궁상은 이와 다르다. 나보다 없는 자들 앞에서 없는 티를 내고, 나보다 가난한 자들에게 내 음식값을 내게 하며, 돈을 내야 마땅한 일 앞에서 빈손을 내밀거나 궁핍을 드러내는 것, 혹은 돈을 내야 마땅한 처지임에도 거꾸로 돈을 받아가려고 하는 것, 돈이 많지만 항상 돈 벌 생각만 하며 돈에 주린 자처럼 사는 것, 자신이나 자기 가족들을 위해선 얼마든지 아낌없이 쓰지만, 남을 위해선 인색하게 구는 것, 돈이 될 일이다 싶으면 자기보다 가난한 이웃을 젖히고 독차지하려 덤벼드는 것, 이런 게 궁상을 떠는 것이다. 이것만은 아니다. 한 술 더 뜬 궁상은 자기가 돈을 조금이라도 더 낼 일이 될 듯하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그 일 자체를 필요없다고 사래치거나 안 좋은 일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헝그리 정신과 궁상의 차이(이진경)’,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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