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이 읽는 시
관계, 좁고도 넓은, 얕고도 깊은
박 승 류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가끔 사회적 동물임을 잊은 채 살고 싶어 하거나 실제 잊고 살아가기도 한다. 물론 너무 바빠서 또는 이기적인 생각의 발로에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인간은 심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관계로의 진입을 부정하고 외면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뿐만이 아니다. 지구상의 대부분 생명체가 그렇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죄 지은 사람을 단죄하고 교화시키는 교도소를 보라. 사회로부터 격리하여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으로 죗값을 요구하는 것에서, 우리는 관계를 지향하는 인간의 본능적 생체구조를 가늠할 수 있다. 이는 관계로부터 얻는 물질적 정신적 이익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특정 행위는 관계의 핵심적 요건이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특정 행위에 대한 만족감, 이것은 관계로부터 파생되어 당사자의 정신건강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줄 것으로 추측된다. 자선사업가의 사업도 익명의 후원자 후원금도 역시 그렇다.
사랑방 툇마루 끝에 걸터앉은 아버지는
조금만 더 머물면 안 되느냐고 물으셨다
딸은 지체할 수 없다고 되받아쳤다
어머니에게라면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단단한 한마디에
정히 가야 한다면 속히
다시 오라는 말에
월급쟁이 맘대로가 아니라고
간격을 두지 않고 또 하나 화살을 날렸다
앞으로 쏠린 앙상한 몸을 외면하며
딸은 그때까지도
공평하게 나누어 가난한 이웃이 없어야 한다
희망의 나라를 기필코 건설할 수 있다고 믿는 거인
신념만으로 감옥을 드나들던
열혈 청년, 아버지에 대한 자세는
줄다리기처럼 팽팽해야 한다고 믿었다
추녀 끝
아버지 모습 어른거리더니
큰 고드름 기어이 떨어진다
돌아오라 속히, 떠나지 마라
그 속마음을 헤아리는 내 나이
깊은 우물에도 수직으로 떨어진다
홍예영, 「고드름, 그리고」 월간 《우리詩》 2013, 11
이 시 「고드름, 그리고」는, 화자의 젊은 날 한 컷과 현재가 겹쳐진다.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은 부富의 공평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평하게 나누어 가난한 이웃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상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이상을 실현해 보고 싶은 젊음이 없다면 또한 미래는 따분할 것이라는 예측이 다가온다. 완전한 공평은 불가능하다 해도 가장 공평에 가깝도록 제도와 사회분위기를 만드는 것, 아마 이것의 실현을 위해 젊은 날의 아버지는 신념의 ‘열혈청년’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눈앞에 없다. 아니, 고드름으로 화자의 눈앞에 나타났다. 녹아내리면서도 쉽게 끝나지 않는 끈기와 신념은 수壽를 다하는 순간까지 지속된 모양이다. 그리고 화자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화자 역시 만만찮은 신념의 소유자로 짐작된다. 옳다고 판단하면 ‘감옥’에 드나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닮은 딸은, 이견으로 충돌이 있던 날로부터 먼 훗날 화해하기에 이른다. 고드름은 아버지였지만 바로 화자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으니 화자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노릇이다.
부녀지간은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호적을 파낸다고 해도 그것은 서류상일 뿐, 부모와 자식이라는 생체학적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이해타산으로 맺어지는 여타의 관계와는 다르다. 가족은 근원적이고도 가장 먼저 인간이 경험하는 관계의 관문이다. 부모의 뱃속에 태아로 맺어지는 순간부터 인지하든 못하든 태아는 관계의 틀 속에 들어오게 된다. 이는 부모가 세상을 떠나도 마찬가지다. 다만, 정신적으로 얼마나 깊은 유대감이 형성되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시 「고드름, 그리고」에 나타나는 관계는 이견이 있었다 해도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형성된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 이는 혈연 외에도 지향하는 정신세계가 유사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다음의 시 「규칙적인 산책」은 어떨까? 「고드름, 그리고」와는 다르게 「규칙적인 산책」은 이해타산으로 연결된 틀 속의 관계론이다. 의사가 등장하지만 결국은 ‘너’와의 관계다. 그리고 일종의 집착이 보인다. 그것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금전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제목 「규칙적인 산책」에서 나타나듯 화자는 현실에서도 정신세계에서도 산책을 규칙적으로 하고 있다. 집요하게 너를 생각하는 정신적 산책과 그로인해 나타나는 부정적 현상들을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 산책이 병행되지만 아직 긍정적인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죽이 만들어지는 냄새는 눈이 부셨다’는 결구에서 짐작하면 가능성은 조금 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가능성은 역시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이는 관계로부터 입은 내상이 관계를 통해 치유된다는 의미다.
또한 의사의 처방과 그 처방을 실천하려는 의지는 관계의 틀 속에 존재한다. 병원이나 ‘죽鬻집’은 관계의 장소이자 대상이다. 정신적 산책에서의 ‘주술사’, 문구점 등도 그렇다. 기억을 통해 정신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과거의 복원이다. 그런 복원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느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과언이 아니다.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과거는 특정된 상황을 통해 화자와 만나게 되는 관계에 놓이는데 이런 현상이 화자의 무의식과는 별도로 가끔 의지로 재현되기도 한다. 바로 추억한다는 행위이다.
의사는 손바닥에 포진한 물집을
스윽 훑으며 재미있게 살면
낫는다고 했다
금식 중인 주술사의 몽롱한
말처럼 들려왔다
너는 의문문으로 되물었지만
노트를 사러 가야 해
너 자신에게 일러바치는
고소장 같은
손바닥엔 이미 꾼 적이 있는
차가운 소름 같은 반란들이 살고 있었지
기도문도 메모도 없는 너의 손에
흰 밥알들에 대한 생각
죽鬻집의 창은 맑고 고요했다
사랑의 노래를 들고 있던 이들은
밥을 거부하며 지나갔다
먹다 남은 약봉지 같은 노트는
조만간 불태워질 것이다
너는 나석 같은 얼굴로 앉아있었지
죽이 만들어지는 냄새는 눈이 부셨다
— 위상진, 「규칙적인 산책」 월간 《우리詩》 2013, 11
사랑한다는 표현은 대부분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다. 단순한 감정에서의 순수함이 표현되는 순간 얼굴을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순수한 사랑이란 없다고 한다. 네가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라면서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니 세상 어디에 순수한 사랑이 있겠는가? 심하게 말하면 짝사랑 역시 그렇다. 더 심하게 표현하면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도 그렇다. 주는 것으로 편안함을 느끼고 만족감을 느끼고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난다면 그렇지 않다고 누가 우길 수 있을까?
품안의 자식, 키우는 재미라는 말은 또 어떤가? 미래의 보험이라는 말은 또 어떤가? 부모만 그렇다고? 천만에, 자식 역시 마찬가지다. 유교적 관습의 굴레를 벗은 현시대 젊은이들의 부모에 대한 인식을 체크해 보라. 이처럼 관계란 좁고도 넓으며 깊으면서도 얕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관계로부터 받은 상처를 관계를 통해 치유하는 「규칙적인 산책」과 관계에서 발생되는 갈등을 유대감으로 순화시키고 종국에는 지향하는 공통분모를 통해 화해하는 「고드름, 그리고」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아리스토텔레스를 보게 된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단어가 주는 복잡 미묘한 맛을 곱씹으면서.
박승류 2007년 월간 《우리詩》로 등단. 시집으로 『맷집』이 있음. psr230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