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대의 아름다운 시
이동훈(시인)
『1913년 세기의 여름』 (플로리안 일리스(한경희 역), 문학동네, 2013)은 1913년 유럽에 초점을 맞추어 주로 예술 방면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한때를 기록한 책이다. 당시에 주고받은 편지글을 다수 인용하면서 프로이드와 카프카 등 ‘좀 아는’ 사람의 이모저모를 떠올려 보는 재미가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과거 한때로 가서 특정 인물의 면면을 들춰보고 싶은 유혹이 있었는데, 그 생각이 아주 사라지기 전에 그나마 이렇게라도 끼적이게 되어 다행이다 싶다.
견문이 좁은 탓에 여러 인물과 시대상황을 연결해서 직조해낼 엄두는 못 내고, 문인과 그들의 작품, 특히 시에 대해서 이미 알려진 사실을 바탕으로 조금이라도 거든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쓴다. 이제, 몇 년도로 가서, 누굴 만날 것인가에 대한 과제가 남았다. 김소월을 우선 생각했기에 1934년 이전의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한 번씩 마음에 닿았던 시는 공교롭게 1936년 발표시였다. 이런 연유로 이 글은 1936년을 살았던 문인 예술가들의 대략적인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 해 발표된 다섯 편의 아름다운 시를 감상하는 정도가 될 것이다.
1936년 첫날, 김정한의 ‘사하촌’이 조선일보 신춘문예란을 장식했다. 제목처럼 절 아래 소외된 사람들과 그들의 봉기를 다루며 작가는 약자 편에 서서 목소리를 냈다. 이러한 입장은 훗날, “사람답게 살아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의 갈 길이 아니다.”(『산거족』,1971)라는 소설 구절까지 일관되게 나타났다.
유치환이 「깃발」(《조선문단》)로, 서정주가 「벽」(《동아일보》)으로 등장한 것도 정초였다. 공교롭게 유치환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서정주는 “벽 차고 나가 목매어 울리라! 벙어리처럼”으로 역설의 상황을 가정했으니, 자신의 존재를 소리치고 싶은 욕망과 현실과의 괴리에서 빚어진 현상이 아닐까 싶다.
시집 『사슴』이 출간된 것은 그 얼마 후다. 오산학교 스승인 김억을 통해 김소월 습작 노트를 받기도 했던 백석이 문단의 총아로 등장한 것이다. 시집 100부를 한정판으로 내놓은 그는 조선일보사 근무를 그만두고 함흥영생고보 영어 교사로 직장을 옮겨 갔다. ‘힌 바람벽이 있어’(《문장》,1941.4),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학풍》,1948.10)으로 이어지는 크나큰 상실감이 아직 나타나기 전이지만, 『사슴』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같은 신문사에 있었던 김기림은 백석의 시가 그의 외모와 딴판이고 유니크하다며 놀람을 표시하면서, “어디까지든지 그 일류의 풍모를 잃지 아니한 한 권의 시집을 그는 실로 한 개의 포탄을 던지는 것처럼 새해 첫머리에 시단에 내던졌다”(‘조선일보’, 1936.1.29)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슴』을 읽은 신석정은 “수선화는/ 어린 연잎처럼 오므라진 흰 수반에 있다”(「수선화」)로 백석의 이미지를 꼭 닮은 시를 보내왔고, 백석 역시 “노란 슬픔의 이야기”(「편지」)를 나누고 싶다는 화답시를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사슴』은 바로 전 해의 『정지용 시집』(시문학사,1935) 못지않게 주목을 받았다. 그 중에 「수라(修羅)」를 읽어 보자.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 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하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삭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 백석,「수라」전문
백석의 동향(평북 정주) 출신이자 오산 중학교 선배이기도 김소월이 『진달래꽃』(매문사, 1925)을 통해 민족 시인으로 자리매김한 이래 정지용이 그 뒤를 이었고, 이제 백석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직감하게 하는 시다. 서구적인 외모에 당시로는 드물게 영어 실력도 갖추고 있었지만 백석은 흙냄새 나는 시 밭에 모국어를 알뜰히도 가꾸었다. 백석의 시는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이야기하듯 들려주는 스타일이다. 선택된 언어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으면서 시에 녹아들고, 소용을 마친 언어는 여음이 되어 독자의 마음에 오래 머문다. 그런 밑바탕엔 이 시에서 보듯 미물에 미치는 따스한 인간애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방안에서 거미 식구를 만나지만 어느 거미에게도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집의 할머니도 그런 분이었다. 먼저 해를 끼쳐오지 않는 한, 벌레를 함부로 잡는 일이 없었다. 귀뚜라미가 들면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도록 했으며, 거미는 쓰레받기에 조심스레 받아서 한데로 내보냈다. 영물이라는 생각이 있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생명 존중 사상이 공동체 안에 배여 있어서 자연스런 실천으로 이어졌겠구나 싶다. 시인의 경험은 조금 더 극적이긴 하다. 새끼 거미, 어미 개미, 더 어린 새끼 거미를 차례로 밖으로 내보내면서, 이들이 이산가족이라도 될까 봐 걱정한다.
거미 입장에서는 병 주고 약 준 꼴이긴 하지만 그 약이라도 없었으면 그야말로 낭패 아닌가. 누군가의 장난질로 가족이 생이별의 위험에 직면했지만 그나마 안녕한 것은 생명 있는 것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마음 그리고 사뭇 도와주면서도 미안해하는 마음에 빚진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산업화 이후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자연과 생명을 성찰하고자 했던 생태주의 시가 수월찮게 쓰인 점을 고려할 때 백석의 이 시는 생태시의 오래된 모범이라 해도 손색이 없겠다.
세상사 알 수 없는 일이라지만, 해방공간에서 이념 대립과 전쟁 그리고 분단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 속에 무수한 주검과 생이별로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이 민족의 현실이 될 줄을 시인은 깜깜 몰랐을 것이다. 훗날, 월북했다가 한국전쟁에 종군해 서울로 돌아온 임화도 딸의 행방을 수소문하다가 결국, “아직도/ 이마를 가려/ 귀밑머리를 땋기/ 수줍어 얼굴 붉히던/ 너는 지금 이/ 바람찬 눈보라 속에/ 무엇을 생각하여/ 어느 곳에 있느냐// …” (「너 어디 있느냐」부분 (『너 어디 있느냐』,전선문고,1951)며 눈물자국 그렁한 시를 남긴 바 있다. 백석만큼 잘 생긴 임화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잠깐, 미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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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2월. 신문에 5개월 정도 연재되었던 심훈의 소설, 『상록수』가 영신의 죽음 이후 동혁이 “상록수 그늘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었다”(동아일보,1936.2.15)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그렇지만 심훈은 더 걸어가지 못하고 그 해 9월 서른 중반의 나이에 장티푸스로 사망하고 만다.
이상은 폐병이 악화되어 평안남도 성천으로 요양을 떠났다가 이 무렵 서울로 돌아와 있었다. 성천에서의 경험을 ‘산촌여정’(매일신보,1935), ‘권태’(조선일보,1937) 등의 빼어난 수필로 쓰기도 했던 이상은 생계에 대한 상당한 부담을 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가정」이란 시에 유난하게 잘 드러나 있다.
문(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생활이모자라는까닭이다.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조른다.나는우리집내문패(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감(減)해간다.식구(食口)야봉(封)한창호(窓戶)에더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수입(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지붕에서서리가내리고뽀족한데는침(鍼)처럼월광(月光)이묻었다.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수명을헐어서전당잡히나보다.나는그냥문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이매어달렸다.문열려고안열리는문열려고.
- 이상,「가정」전문
이상은 비상식적인 세계 혹은 초월적 세계로 한달음에 달려가 자신의 영역을 구축함으로써 동시대 혹은 이후 작가들의 냉대와 찬사를 한몸에 받은 인물이다. 여기서 비상식적인 것은 생활인의 모습에서 벗어나서 삶이 결여된 예술(또는 그냥 술) 쪽으로 한참 기울어졌다는 의미다. 이 점이 작품을 창작하는 에너지와 무관하지도 않겠지만 실제, 이상이 그렇게만 치부해도 되는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따져 보아야 한다. ‘가정’은 이상이 얼마만한 고민 속에 생활을 이어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작품의 화자를 작가의 분신으로 볼 것 같으면, 문패로 상징되는 가장의 역할을 성가셔 하는 것은 형식적인 포즈일 뿐 오히려 가장의 역할을 다하려 무진 애쓰는 모습이 이 한 편의 시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일상 밖으로 내뺄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일상의 짐을 쉽게 부리지 못하고 가족을 위하고 자신의 앞가림을 하려는 모습이 역력한 것이다. 가난이든 불운이든 시인 앞에 닥친 현실은 시인의 수명을 헐 정도다. 실제 이상은 금홍이와 함께 했던 제비 다방 이후에도 자신의 집을 전당 잡혀 가면서 ‘쓰루’, ‘69’ 등의 다방 영업을 이어가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한다. 이상은 자신을 낳아준 친부와 자신을 입양시켜 길러준 양부 모두를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증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서리 내린 지붕을 월광(月光)이 “침(鍼)”처럼 파고들면 안에 사람은 신음할 수밖에 없을 텐데 이상의 처지가 꼭 그러했을 것이다.
금홍이가 떠난 후 이상은 권순희(정인택과 사별 후 박태원의 아내가 됨)를 보내고, 변동림(화가 구본웅의 이복동생, 나중에 김환기의 아내가 됨 )을 만나 1936년 6월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지만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러 일본으로 떠났던 이상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이상의 『날개』에 나오는, 골방에 틀어박혀 생활 능력을 잃어버린 사내는 스스로를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로 여기는데 그 천재를 알아보고 끝까지 지지해 준 벗이 있었으니 두 살 연상의 김기림이었다. 김기림은 이상의 모던한 경향을 좋아했고, 겉에 드러나지 않은 삶의 고뇌도 깊이 이해했다. 이상 역시 그런 김기림을 위해, 그의 첫 시집 『기상도』(창문사, 1936.7)의 장정을 기꺼이 대신했다. 이상과 김기림 두 사람을 기념하듯 세로로 두 줄이 난, 그 당시로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근대적 양식이었다. 김기림의 『기상도』에 실리지 못했지만 김기림 개인사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 이 시기에 발표된다. 수필로 썼던 것이지만 다분히 시적이다.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 김기림,「길」전문
이 글을 읽고 모네의 <파라솔을 든 여인>(1875)이 왜 떠올랐을까. 김기림도 이 그림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카미유 뒤에 서 있는 아들 장과 시인의 소년 시절이 묘하게 겹쳐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카미유의 치맛자락을 사납게 흔드는 바람이 예까지 와서 어머니 상여를 보낸 “긴 언덕길”에도 불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후 장이 어머니를 여읜 것처럼 김기림 역시 여덟 살 무렵에 어머니와 누이를 차례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김기림과 구인회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이태준 역시 아홉 살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차례를 잃고 쓸쓸한 유년을 보냈다. 부모를 일찍 여읜 사람들의 상실감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 이 한 편의 시(아무려나 시라고 하는 게 낫겠다)에 슬프게 또 아름답게 담겨 있다.
이 시가 슬픔을 넘어 찬연한 느낌마저 주는 이유는 뭘까. 훗날 백석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부끄러움과 어리석음에 취해 방을 뒹굴다가 창밖의 ‘갈매나무’를 생각하며 생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듯이, 이번에는 “늙은 버드나무”와 “어둠”이 우는 아이의 “뺨의 얼룩을 씻어” 주는 것 아닌가. 갈매나무와 버드나무는 잠시 빌리거나 데리고 나온 것일 뿐, 삶의 위로는 스스로 주는 것일 테다. “항용 감기를” 앓던 아이는 언덕길과 강가를 떠나서 훌쩍 성장했다. 그동안 부지런히 길로 나섰고, 앞으로 길을 만들어가기도 하겠지만, 언제든 어머니와의 추억이 간직된 옛날의 길을 품고 살 것이고 이렇듯 아름다운 문장으로 한 번 울컥한 뒤 한결 편안해졌을 것이다.
1936년 5월엔 야학교사로 있으면서 인근 다솔사를 오가고 했던 김동리가 ‘무녀도’(《중앙》), ‘바위’(《신동아》)를 잇달아 발표했다. 이상의 절친한 벗이기도 했던 김유정이 자신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동백꽃’(《조광》)을 발표한 것도 이 시기다. 박녹주, 박봉자로 이어지는 그의 연애사는 참담할 정도였지만, 그의 글은 언제든 해학이 넘쳤고 그의 폐병은 점점 깊어졌다.
1936년 6월엔, 이원수와 최신애의 결혼이 있었다. 십 년 전에 ‘고향의 봄’을 썼던 이원수와 ‘오빠 생각’을 썼던 최신애가 몇 년 간 편지를 주고받다가 결실한 것이다.
1936년 8월엔 이상, 김유정 등과 구인회 후기 멤버이기도 했던 박태원이 청계천 주변의 풍속을 잘도 그려낸 ‘천변풍경’을《조광》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던 현진건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의 기사를 보내면서 일장기를 지운 일로, 《신가정》의 편집장이었던 변영로는 ‘조선의 건각’이란 제목으로 손기정 선수의 다리만 게재한 이유로 해서 핍박을 받아 직장을 떠나야만 했다. 이즈음에 발표된 임화의 시 한 편을 보자.
앞서 살펴본 이상의 보성고보 동기생이기도 한 임화는 KAPE(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서기장까지 지낸 경력의 소유자며, 일찍이 「우리 오빠와 화로」(1929) 등을 통해 노동 운동에 대한 신뢰와 연대감을 드러낸 바 있다. 그런 그가 일제의 탄압에 더 저항하지 못하고 KAPE 해산계를 제출하며 운동의 방향을 틀기 시작하지만 인용한 시에는 아직 희망을 잃지 않은, 낭만성이 도저한 서른 즈음의 임화를 만날 수 있다.
감이 붉은 시골 가을이
아득히 푸른 하늘에 놀 같은
미결사의 가을 해가 밤보다도 길다.
갔다가 오고, 왔다가 가고,
한 간 좁은 방 벽은 두터워,
높은 들창 가에
하늘은 어린애처럼 찰락거리는 바다
나의 생각고 궁리하던 이것저것을,
다 너의 물결 위에 실어,
구름이 흐르는 곳으로 띄워볼까!
동해바닷가에 작은 촌은,
어머니가 있는 내 고향이고,
한강물이 숭얼대는
영등포 붉은 언덕은,
목숨을 바쳤던 나의 전장
오늘도 연기는
구름보다 높고,
누구이고 청년이 몇,
너무나 좁은 하늘을
넓은 희망의 눈동자 속 깊이
호수처럼 담으리라.
벌리는 팔이 아무리 좁아도,
오오! 하늘보다 너른 나의 바다.
- 임화,「하늘」전문
1930년대는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활발했던 시기로 경성트로이카 주축 멤버로 노동운동을 전개하던 이재유가 일제에 검거된 것도 1936년 12월의 일이었다. 임화가 이들 운동가와 어떤 연결고리를 갖고 있었는지 불분명하지만 “목숨을 바쳤던 나의 전장”으로 일컬을 정도로 사회주의 운동과 그 일환으로 전개된 노동운동에 상당한 애착을 갖고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1919년 경성방직이 영등포에 자리 잡으면서 인근에 공장과 사택, 노동자들의 주거지가 들어서고 인근 공장을 중심으로 몇 차례 노동운동이 있었다. 1936년엔 붉은 벽돌로 경성방직 사무동이 지어지기도 했으니, “영등포 붉은 언덕”은 그 시기를 혁명의 마음으로 살았던 젊은 시인의 붉은 마음의 표현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시 속의 화자는 미결사(재판을 기다리는 미결수를 수감하는 시설)에 구류되어 있는 상태다. 이전의 카프 시절 수개월 옥살이했던 시인의 경험이 반영되기도 했을 것이다. “한 간 좁은 방”에 갇혀 “들창”을 통해 바라본 것은 자유롭지 못한 시인의 현재 처지와 같이 “너무나 좁은 하늘”이었다. 그렇지만 이 좁은 가늘 하늘은 시인의 상상 속에 활기를 얻어 확장되기 시작한다. “찰락거리는 바다”가 되어 시골의 고향 마을을 떠올리게 하더니, 희망의 면적을 넓혀 가면서 마침내, “하늘보다 너른 나의 바다”를 감격에 겨워 외게 된다. 영화배우로 활약했던 이력답게 연극적인 느낌도 주지만, 갇힌 공간에서 열린 세계를 지향하는 임화의 자유로운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 시를 발표하기 직전에 임화가 재혼한 사실까지 생각해 보면, 요양 차 마산에 내려갔다가 인연이 된 바닷가 여인, 지하련(본명, 이현욱)에 대한 감정이 “나의 바다”에 묻어 있으리란 추정도 해볼 만한데 실제, 지하련이 임화의 ‘하늘’을 즐겨 암송했다는 사실이 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한다. “한 간 좁은 방”이 전부일지라도 자유를 꿈꾸고 사랑을 말할 수 있을 땐 시인은 갇혀도 갇힌 게 아니다. 구름보다 높게 피어나는 이상이 있다. 하지만, 구름 속 허방 짚을 때가 있고, 이쪽 아니면 보이지 않는 저쪽에서라도 구름이 한순간에 사라질 때 있으니 임화의 삶이 꼭 그랬을 것이다.
1936년 9월엔 이상이 『날개』를, 10월엔 이효석이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면서, 자기 문학의 정점을 찍었다. 전전 해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이상에게 「오감도」를 발표할 기회를 주었던 이태준은 자신의 소설 『까마귀』(《조광》,1936.1)에 여자 주인공을 폐병 환자로 등장시킨 바 있다. 까마귀와 폐병이라니, 혹 이상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닌지 “장정(裝幀) 고운 신간서(新刊書 )에처럼 호기심이 일어났다”는 소설 문구처럼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태준이 석 달 간 연재하던 ‘황진이’(조선중앙일보)를 9월에 마치니 이후 황진이가 재조명되어 여러 작가에 의해서 새로이 창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6년 11월엔 서정주, 오장환이 중심이 된 《시인부락》창간호가 발행되었다. “우리 부락에(...) 여러 가지의 식구들이 모여서 살기를 희망한다”는 편집 후기처럼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서정주,「문둥이」), “보수는 진보를 허락지 않아 뜨거운 물 끼얹고”(오장환,「성벽」),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함형수,「해바라기의 비명」) 등 다양한 느낌의 시에서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생각의 편린이 살짝살짝 묻어난다.
1936년 12월에도 어김없이 별은 떴을 것이다.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풍림》)던 이육사는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삶과 문학이 하나가 된 저항 문학의 유일무이한 ‘별’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1936년에 발표된 다섯 편째 시를 찾아서 소개해야 할 차례다. 정지용의 ‘별똥이 떨어진 곳’을 우선 생각했으나, 정지용 전집에 따르면 문학관에 게시된 연보와 다르게, 발표연도가 1936년 12월이 아니라 그로부터 일 년 후로 되어 있다. 다른 시로 대체할까 생각도 했으나, 그러기엔 너무 서운해 무작정 여기에 싣는다.
밤뒤를 보며 쪼그리고 앉었으라면, 앞집 감나무 위에 까치 둥어리가 무섭고, 제 그림자가 움직여도 무서웠다. 퍽 치운 밤이었다. 할머니만 자꾸 부르고, 할머니가 자꾸 대답하시어야 하였고, 할머니가 딴 데를 보시지나 아니하시나 하고, 걱정이었다.
아이들 밤뒤 보는 데는 닭 보고 묵은세배를 하면 낫는다고, 닭 보고 절을 하라고 하시었다. 그렇게 괴로운 일도 아니었고, 부끄러워 참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둥어리 안에 닭도 절을 받고, 꼬르르 꼬르르 소리를 하였다.
별똥을 먹으면 오래오래 산다는 것이었다. 별똥을 줏어왔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날밤에도 별똥이 찌익 화살처럼 떨어졌었다. 아저씨가 한번 모초라기를 산 채로 훔켜 잡어온, 뒷산 솔푸데기 속으로 분명 바로 떨어졌었다.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이젠 다 자랐소
- 정지용,「별똥이 떨어진 곳」전문
이 시는 시인이 《학생》(1930.10)에 동요 풍의 「별똥」을 먼저 발표하고 나중에 앞 사설을 붙여 산문 형태로 완성한 작품이다. 한 해를 보내는 인사로 웃어른에게 하는 절이 “묵은세배”인 만큼 시인이 시를 쓰거나 추억하고 있는 시기가 섣달그믐에 가까운 어느 해 겨울 초입인 줄 알겠다. 날씨도 쌀쌀하고 밤도 무서울 텐데 한데로 나가 엉덩이 까고 밤뒤(밤에 똥 누는 일) 보는 버릇이 썩 내킬 리가 없다. 할머니가 기꺼이 따라나서고 그로 인해 밤공기도 훈훈해졌겠지만, 할머니는 손자만큼이나 개구진 데도 있다. 밤뒤 보는 버릇을 없애기 위해서 “닭 보고 절을 하라” 는 주문이 그렇다. 아이는 아이답게 솔깃해져 절을 하고, 닭은 무슨 이유인지 “꼬르르 꼬르르 소리”로 답하고, 할머니는 짐짓 입술을 물고 웃음을 참느라 주름을 지었을 것이다. 때마침 별똥 하나 “찌익” 날아오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자연과 인정과 동심이 두루 섞인 훗훗한 밤이다.
「별똥」을 읽으면서 워즈워스의 「무지개」에도 생각이 미친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고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가슴이 뛰었는데, 만약 그렇지 않게 된다면 죽게 하라는 내용인 줄 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눈앞의 일들을 처리하느라 하늘을 쳐다볼 여유조차 잃어가는 현대인에게 별똥과 무지개는 그다지 요긴하지 않은 자연현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요긴하지 않아서, 쓸모가 없어서 더 아름다운 거라는 역설의 말을 흘려듣기도 하지만 별똥과 무지개는 그 자체로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심미적 대상이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신비와 영감에 푹 젖어들지 못하고 마음이 조금씩 늙어가는 것이니 별똥과 무지개를 찾아 나서는 것은 어릴 적 간직했던 순수와 동경을 자기 마음 안에서 재생시키는 행위와도 같다.
아이 똥은 흉이 없지만 사람 똥은 독하다. 자연과 이웃 공동체와의 연대를 생각하고, “별똥 떨어진 곳”을 그리는 마음을 아주 잃지 않을 때라야 사람 똥도 별똥처럼 귀한 대접받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1936년에 발표된 시 다섯 편을 같이 읽어 보았다. 정지용과 김기림은 6.25 전쟁 발발과 좌우 대립 속에 희생당한 걸로 알려져 있으며, 임화 역시 자신이 믿었던 사회주의 세력에 의해서 숙청당하는 아이러니한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백석은 숙청은 면했지만, 선배 김소월이 “삼수갑산 날 가두었네”(「삼수갑산」,《신인문학》,1934) 노래했던 그 삼수에 갇혀 쓸쓸하게 여생을 마쳤다.
이상은 1936년을 자신의 시대로 만들어놓고, 현해탄을 건너간 뒤 돌아오지 못했다. 1937년 3월, 김유정이 죽은 지 불과 한 달 후, 채 서른을 못 살고 친구를 따라 같은 병으로 죽었다. 병명은 ‘삶을 위해, 문학을 위해 자신을 지극히 소모한 병’이라 해 두자.
1936년 이 해 태어난 신경림은 훗날 백석과 이용악을 읽으며 시인의 길을 걷게 되고, 1936년 열 살의 박인환은 부모를 따라 인제에서 서울로 이사를 오고, 1936년 스무 살의 윤동주는 정지용을 필사하며 「병아리」(《카톨릭소년》,11월) 등의 동시를 쓰기도 했다. 박인환의 경우, 스무 해가 훌쩍 지난 1956년, 아직 전흔이 가시지 않은 명동 거리 술집에서 「세월이 가면」을 즉흥적으로서 쓴다. 여기에 이진섭이 곡을 붙이고, 나애심과 임만섭이 노래하면서 명동 샹송으로 사랑받게 된다. 이상을 좋아했던 박인환이 이상 추모의 밤 행사를 준비하면서 연일 폭음을 하다가 끝내 깨어나지 못한 것도 그 즈음의 일이다.
1936년의 아름다운 시를 더듬어 보는 이 시간,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는 거”(‘세월이 가면’, 박인희 노래) 라는 내 안의 허밍을 내 귀가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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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수라」 (『사슴』,선광인쇄주식회사,1936)
- 이상,「가정」 (《카톨릭청년》,1936.2)
- 김기림,「길」 (《조광》3월호,1936 /『바다와 육체』,평범사,1948 재수록)
- 임화,「하늘」 (《조선문학》,1936.8 /『현해탄』,1938 재수록)
- 정지용,「별똥이 떨어진 곳」 (《소년》,1937,12)
ㅡ『우리詩』2016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