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설렘의 화두,‘사랑’그리고 시詩
박승류 (시인)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가‘사랑’이지만, 그 뜻을 갑자기 묻는다면 다양한 답변이 나올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영유아 시절만 하더라도 부모로부터 사랑이라는 단어를, 다양한 상황에서 또한 셀 수 없을만큼 많이 들었을 것이니 말이다. 이는‘사랑’에 대한 개념을 한마디로 요약하기엔 무리일 것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또한 사전을 찾아볼 기회가 없을 정도로 나름대로 이미 인식하고 있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전(인터넷)에 요약된 정의를 여기서 정리해 보면,‘아끼고 위하여 정성과 힘을 다하는 마음’이라 되어 있다.
앞에서 살펴본 사전적 정의와는 다르게, 사람마다 의미 인식에 대한 편차가 있듯이 사랑하는 방식에서도 그럴 것이다. 어떤 유형의 사랑이냐의 문제로 접근해서 같은 틀 속의 사랑이라 해도 그렇다. 그래서 잉꼬부부가 있는가 하면 성혼선언成婚宣言의 메아리가 가시기 전에 파경을 맞는 부부도 있다. 사례의 극명한 차이는 부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사랑이란 단어의 의미가 가장 다양하게 집약된 경우가 남녀의 관계에서라고 볼 수 있겠기에 바로 앞에서 부부의 경우를 사례로 들었다.
여기 남녀의 사랑이 있다. 말 그대로 복합적 사랑이다. 감정 이전에 스스로 이성의 지배하에 머무르기를 추구하는 듯한 태도,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성에 숨은 계산적·전투적 이성을 합리화하려는 듯한 행위를 고발하는 사랑詩 한 편이다.
당신은 작전지도의 북쪽 고사리 숲에서 잘린 손가락을 주머니에 담는다. 잘린 손가락에 검은 담즙을 찍어 편지를 쓴다. 나는 작전지도의 남쪽 목책 아래서 잘린 손가락에 묶인 당신의 편지를 줍는다. 지금은 다만 남루한 존엄으로 서로를 위장한 게릴라전의 나날, 나는 지금의 당신이었고 당신은 지금의 내가 될 것입니다. 병적인 목마름이 당신의 피를 검게 하오.
당신은 이름 모를 나라의 알 수 없는 전쟁에 사로잡힌 포로였다. 오직 당신만이 내가 겨눈 나만의 적이었고 오직 나만이 당신이 겨눈 당신만의 적이었다. 우리는 서로 싸우기 위해 잡힌 걸까? 서로 잡히기 위해 싸운 걸까? 제네바, 협약은 늘 당신이 모르는 나라에서 체결되고, 입체파적인 폭우가 쏟아지는 참호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몸뚱이를 쌓고 허물었다.
쌓고 허물고 쌓고 허물었지. 한때 우리는 토네이도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침대보에 싸여 서로의 이름을 불렀지. 지금 나무 침상은 머나먼 목책 아래서 썩어가고 창유리에 날아와 부닥치며 노래하던 새 떼는 백기가 되어 마른하늘에 점점이 펄럭인다. 이제는 속이 빈 몸뚱이에 시멘트를 채우고 굳어가며 우리 서로의 어깨에 목덜미를 묻고 잠드는 긴 긴 참호 속의 나날.
다 닳은 풀빛 죄수복 바지에 웃통은 벗어젖힌 채 헝겊에 고무밑창을 덧댄 넝마를 발목에 끼우고, 당신은 말했지. 이것 봐 신발을 잘 간수해 걷지 못하는 자는 낙오하고 말아. 이 미로를 빠져나간다면 우리의 발뒤꿈치는 달의 뒤편에 멋진 발자국을 새겨 넣겠지. 우리 서로에게 게으른 형리가 되자꾸나. 모쪼록 우리서로 남은 죽음까지 모조리 죽이자꾸나.
나는 알 수 없는 나라의 이름 모를 전쟁에 사로잡힌 포로였다. 허리 뒤로는 묶인 손바닥이 타오르고 오장육부는 썩어 납빛으로 변해가는 몸에 질기디질긴 핏줄의 힘으로 말라가는 살가죽 위에 더딘 진실과 애타는 절규를 돋을새김한다. 당신은 내척추를 빨고 나는 당신의 피를 마셔라. 오직 당신만이 내가 겨눈 나만의 적이었고 오직 나만이 당신이 겨눈 당신만의 적이었으니.
– 신동욱 「사랑 - 비트 17」 전문
시 「사랑 - 비트 17」은 이기적인 사랑과 이타적 사랑을 오가는 인간심리를 전투 상황에 빗대어서 그리고 있다. 물질이 현대인들의 정신을 지배하면서 감성적 사랑은 줄어들고 냉정한 이성의 계산된 사랑이 대세가 된 듯하다. 이런 현상은 시문학詩文學의 변화에도 드러나는데, 서정성이 약해지고 숨은그림찾기 하듯 퍼즐 맞추기 하듯 두뇌로 그 의미를 짚어내는 시들이 많이 발표되고 있음이다.
화자는 이 시에서는 결혼을, 배우자를 가둔 굴레로 인식하고 있다. 그 굴레에 가두기 전에 배우자는 목표물이었고, 수많은 전투(밀고 당기기)를 통해 간신히 포획(영향력 내에 가두어 둔)한 것으로 고백한다. 그러나 이별하기 전까지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래서 또한 전투(각자의 입장에서 포로와 벌이는 기묘한 전투, 즉 부부싸움)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감언이설이 무기였다고 단정한 배우자는, 무기를 제압하는 것에 실패해서 포로가 되었으니 감언이설을 장전하는 두뇌의 지향점, 색깔, 용량 등에 맞서기 위해 역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심지어는 고육계苦肉計도 마다치 않지만, 일진일퇴는 끝날 줄 모른다.
때로는 격한 감정싸움으로, 때로는 소강상태로, 때로는 평화 공존협정을 깨는 반칙을 거치면서 놓아주지 못하는 고집은 굴레를 더욱 단단하게 지지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굴레(결혼)란 가정이나 가족으로 표기되는 재질이겠으나, 그 재질에 자존심을 부가적으로 특수가공해서 더욱 질겨졌기에 끊는다는 것은 그만큼 더 어렵다고 하겠다. 결구“오직 당신만이 내가 겨눈 나만의 적이었고 오직 나만이 당신이 겨눈 당신만의 적이었으니”에서 우리는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간절히 원했던 오직 하나였다는 중의적 의미도 있다. 그래서 이 시에서는 실제‘잉꼬부부’와‘쇼윈도부부’라는 단어가 동시에 떠오른다.‘쇼윈도부부’의 관점은 앞에서 언급되었으니‘잉꼬부부’의 관점만 간략하게 덧붙이면, 갈증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사랑싸움이 떠오른다.
네가 꾸는 꿈속으로 들어가려고 네 잠꼬대에게 길을 물은 적이 있다
시린 몸을 뒤척여서 네가 덮은 것이 이불이 아니라 강줄기임을 알았다 감은 네 눈꺼풀 아래로 꽃잎도 아니고 금붕어도 아니고 새의 깃털로 채워진 강줄기가 흘러들고 있었다
혹여라도 너와 닮은 여자를 볼 때면 그 여자가 안 보일 때까지 나는 몸이 얼어붙는 기후에 속해 있어야만 했다
불어간 바람을 따라 허공이 한 줄기 파였고 바람소리가 석순으로 자라났다 환한 빛에 이끌려 동굴의 입구로 나오면 추위 속에서 떨어 온 나무의 시간만큼 나뭇가지마다 꽃송이가 발자국으로 피어나 있었다
내가 뒤쫓던 네 흔적은 떠나온 지 오래 될수록 가까이서 빛나는 향기였을까
헤어진 날 밤에 너는 함께 베던 네 방의 베개를 만리향 밑에 묻었다고 했다 덕분에 일만 시간이 지난 오늘에까지 내 잠을 통로로 풍겨오는 네 머리칼 냄새를 잊을 수 없다
바람을 따라가다 길가에서 쉬는 모자를 주워 머리에 썼다 그날부터 나는 모자 속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꿈만 꾸게 되었다 내가 지르는 짐승의 비명소릴 따라 깨어나는 날이 늘어갔다
내 방의 베개를 마당에 내놓고 태우던 날 멀리 보이는 산의 골짜기 속에서 캄캄하게 타고 있을 동굴들을 떠올렸다 꽃잎이었다가 금붕어의 지느러미로 나부꼈다가, 한 토막 숯에 벽화를 무늬로 남겨놓고 날갯짓으로 솟구친 새 떼를 떠올렸다
죽어서 땅에 묻히면 동굴이 된다는 불길에게 제를 올려주고 싶은 밤이었다
잠이 들면 나는 새로 산 베개에 조금씩 꿈을 흘려둔다 잠에서 되돌아오는 길을 잊고 싶지 않아서다 네 입속으로 날아간 내목소리는 어느 하늘 동굴 앞에서 떨고 있을까
꽃은 나뭇가지가 베고 자는 베개이다
* 우루시바라 유키, ‘충사’인용
- 최정진 「몽야간夢野間」 전문
시를 전개하는 방식은 산문 형태로 비슷하나 신동옥이 시 「사랑 - 비트 17」을 통해 이성적 사랑을 그렸다면 최정진은 시 「몽야간」으로 감성적 사랑을 그렸다. 「사랑 – 비트 17」에서는 디지털화된 현대인들이 떠오르지만 「몽야간」에서는 아날로그 방식의 옛 정서가 보인다. 그리고 또한 「사랑 - 비트 17」이 이기利己와 이타利他를 오간다면「몽야간」은 먼 과거와 현재, 꿈속과 생시를 번갈아 조합하며 넘나들고 있다.
시 「몽야간」에서는 도입부인 첫 연부터 이미 사랑에 대해 지고지순한 화자가 보인다. “네가 꾸는 꿈속으로 들어가려고 네 잠꼬대에게 길을 물은 적이 있다”니 그렇지 않은가.“잠이 들면 나는 새로 산 베개에 조금씩 꿈을 흘려둔다 잠에서 되돌아오는 길을 잊고 싶지 않아서”라니 그렇지 않은가. 어쩌면 짝사랑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떤 연유로 헤어진 상태인 너에게 가 닿기를 소원하는 화자의 애절한 마음이 시 전체에 묻어난다. 지극히 감정에 충실한 사랑이다.“네 입속으로 날아간 내 목소리는 어느 하늘 동굴 앞에서 떨고 있을까”에서처럼, 화자는 사랑의 대상인 너에게 가 닿지 못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짐작하고 있다. 그럼에도 상대만 바라보는 시선은, 그래서 더 진정성이 있어 보인다. 그 때문인지 시 「몽야간」에서는 돌아오는 반응이 없음을 인지하면서 보내는 순애보와 같은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런 사랑이 대체로 바람직한 사랑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게 아가페가 아닌 이성 간의 사랑이라 해도 그렇다. 손익을 계산하기 전에 감정의 요구에 이끌리는 이런 사랑이 어쩌면 세상을 풍요롭게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앞의 시 두 편과는 다르게 다음의 시「남자」는 수월하게 읽힌다. 그리고 물론 재미가 있다. 앞의 시 두 편은 제법 긴 이성적 사고思考의 통로를 통과하는 절차를 거친 감성이 감응한다면, 시「남자」는 이성적 사고思考의 통로가 짧다는 차이가 있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야하다
개구쟁이처럼 야하다
하얗게 물오른 볼에 입술을 가져다 대면
야한 것이 불끈 불끈
두 주먹을 쥔다
사각팬티보다 삼각팬티
쌍방울표 하얀 팬티를 즐겨 입는다
팬티 바람으로 물속에 풍덩
들어간 그놈은 시커먼 터럭이 숭숭 비치고
야한 그것이 또렷하게 눈에 박힌다
마치 별처럼 영롱하게
맑고 영롱한 것이 별만인 줄 알았던 적이 있다
– 남정화 「남자」 전문
지난날‘관념의 사물화’또는‘사물(현상이나 사건)의 객관화’와 ‘객관적 상관물’의 차이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시「남자」에서 또 그런 생각이 스친다. 시 「남자」는 남성의 상징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남성상을 드러내는 것으로 남자를 객관화시켰다.(여기서 객관화란 성性적 정체성과 관련된 본질적인 부분을 말한다.) 그리고 또한 여기서 남성의 상징이란, 객관적 상관물이라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는 점이다. 사실이지, 성性적 비유보다 더 확실한 객관적 상관물의 역할을보여줄 방법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인간(특히 성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성性이므로 그렇다.
화자는 남녀의 사랑을 남성의 상징을 통해 화끈하지만 에둘러 그리고 있다. 시 내용을 보건대 화자의 연인은 매우 적극적이고도 당당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아마 자신감이 충만한 젊은 남성이리라 여겨지는 것도 그런 이유다. 다시 정리하면, 이 시는 남성의 심벌로 남자를 그렸으나 이면엔 결국 남녀의 사랑이다. 육체적 사랑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쯤의 거리에 두고 감상하는 구도.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넘나들 듯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인사이드로 걷겠다는 듯한 전개. 그것으로 건강한 부부 사이나 연인 사이를 보여준다는 것에 독자는 공감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 이유로서, 건강한 세상은 가족 구성단위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가족이 건강하면 마을이 건강하고 마을이 건강하면 나라가 건강하다.
막차로 온 손님
마지막 방에 들면
‘빈방없음’팻말을 내걸고
그제야 하품 빼물며 잠자리에 든다
열린 창으로 갯내음 기웃거리고
어떤 방은 잠을 뒤척이며
또 어떤 방은 코를 골고 있다
수평선 저 너머에서 해초처럼 떠 밀려온 사람들
더러는 선원으로
더러는 공사판 인부로
날이 새면 또 썰물처럼 흩어지겠지
금강모텔 창가로 보름달빛 내려와
이불깃 당겨 덮어준다
- 임영순 「금강모텔」 전문
시 「금강모텔」은 모텔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 관념을 반전(관념의 방향 전환적 활용)시키는 것에 시의 맛이 있다.(모텔은 원래 자동차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편리한 주차공간을 제공할 목적으로 고안된 호텔이라고 하지만 애초의 용도와는 다르게 부정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짐작하는 바와 같다) 반전에서 다가오는 뒷맛이 포근하다는 것에서 또한 시가 개운하다는 느낌이 든다. 시가 어렵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기교가 그다지 많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개이기도 하다. 현대시가 운율보다 의미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면서 난해시가 점점 더 많아지고 난해의 정도[程限] 또한 깊어지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지만, 쉬우면서도 뒷맛이 개운한 시는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을 것이란 것을 시 「금강모텔」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선원이든 공사판 인부든 힘든 노동의 대가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휴식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이 시에서 길고도 짧은 하룻밤 휴식을 제공하는 모텔은, 관념이 되어버린 부정적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이 넘치는 공간이다.“하품 빼물며 잠자리”에 들기를 미루는 시간이나, “갯내음 기웃거리”도록 열려있는 창이나,“이불깃 당겨 덮어준” “보름달빛”은 모두 해당 시각과 장소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주체들이다. 각자가 맡은 역할이라 해도 주체의 진심이 내재되어야 각각의 행위에는 사랑이 엿보일 것이다. 이 시가 그렇다. 화자의 마음이 투영된 각각의 객체가 시 속에서 온전하게 주체로 거듭나는 것은 역시 화자의 진지한 심성의 발로라 하겠다. 그러므로 그 심성이 바로 주변에 대한 화자의 사랑이다.
어느 시인이 내게 기교가 없는 시에 대한 편견이 있다고 했다. 편견 이전에, 기교가 없는 시는 없다. 이유는 무기교無技巧 역시 기교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감동성이 있는 시를 좋아한다. 감동이란 공감으로 오는 것이며, 공감은 설득력을 바탕으로 획득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기교無技巧 역시 기교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지 않은가. 대부분 시인이 시를 쓸 때 독자의 정서적 울림통을 겨냥하고 쓸 것이란 점을 생각해 보라. 그 울림통이 크게 울릴수록 시인의 성취감은 커질 것이고, 최소한의 울림마저 없다면 이게 과연 시일까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정서적 울림에는 감성적 느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에서도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바가 있을 것이며, 남다른 시각으로 재해석한 대상을 통해서도 정서적 공감은 다가올 수 있고, 심지어는 숨은 그림 찾듯이 구성한 전개에서도 정서적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이런 경우엔 찾아낸 메시지의 영향력에 좌우되겠지만) 그러므로 슬픔이나 아픔 또는 행복감 등만이 정서적 울림의 근원이라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어떤 유형의 시가 좋은지는 독자에 따라 다르지만, 문학인들이 지향하는 가치는 대체로 다양성의 포용이다. 그래서 대부분 문학지는 특정 유형의 작품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독자의 입장에서는 주로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시를 골라서 읽을 수는 있다.
ㅡ『우리詩』2016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