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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시 산책

시문학입문 | 빌리 콜린스

작성자은비|작성시간09.03.04|조회수897 목록 댓글 0

 

 

Introduction to Poetry  / Billy Collins

 

I ask them to take a poem

and hold it up to the light

like a color slide

or press an ear against its hive.

I say drop a mouse into a poem

and watch him probe his way out,

or walk inside the poem’s room

and feel the walls for a light switch.

I want them to water-ski

across the surface of a poem

waving at the author’s name on the shore.

But all they want to do

is tie the poem to a chair with rope

and torture a confession out of it.

They begin beating it with a hose

to find out what it really means.

 

시문학 입문  / 빌리 콜린스 작   

 

나는 그들에게 시 한 편을 집어 

컬러 슬라이드처럼 

빛을 향해 들고 있든지 

아니면 시의 벌통에 귀를 밀착시키라고 한다. 

나는 생쥐 한 마리를 시 속에 떨어뜨려 

놈이 길을 헤쳐 나오는 것을 관찰하든지, 

아니면 시의 방으로 걸어 들어가 

벽을 더듬어 전등스위치를 찾으라고 한다. 

나는 그들이 수상스키를 타고 

시의 수면을 가로지르며 

해변에 있는 작가의 이름에 손을 흔들기 바란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밧줄로 시를 의자에 동여매고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다. 

그들은 호스로 시를 후려치기 시작한다. 

진짜 뜻이 무엇인지 캐내기 위해.

 

 

[작품읽기]

 

  빌리 콜린스의 「시문학입문」은 학생들을 성공적으로 시의 세계에 입문시키지 못한 문학교수가 결국 시를 쓰게 되는 이야기다. 이 시의 매력은 강의실에서 실패한 듯한 화자가 실은 시에 대해 매우 독특한 통찰력을 갖고 있는 비범한 선생님이라는 데 있다.

  대학의 어떤 입문 과목이든 가르치는 이가 배우는 이들에게 반드시 제공해야 할 공통적인 서비스가 있다. 그것은 "입문"이란 말 앞에 붙는 단어에 대해 명쾌한 정의(定義)를 내려주는 일이다. "철학입문"이면 철학이 무엇인지, "경제학입문"이면 경제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능한 한 똑 부러지는 설명이 있어야 한다. 학문이란 궁극적으로 정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콜린스 시의 화자는 시문학입문을 강의하면서 시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학생들에게 일련의 해괴한 주문만을 할 뿐이다.

 

  우선 다짜고짜 시를 슬라이드인양 집어 들어 빛에 비추어 보라고 한다. 황당한 주문이다. 세상에 시를 집어 들라니? 시는 읽는 것이라는 통념을 전복시키는 불량한 명령이다. 그러나 시를 읽으려면 시집을 집어 들어야 하니 수긍이 전혀 가지 않는 명령은 아니다. 정작 난해한 것은 시를 컬러 슬라이드처럼 취급하라는 부분이다. 잘 인화된 벨비아 포지티브 필름을 프레임에 넣어 그 이미지를, 빛상자와 루페없이, 자연광을 통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할 것 같다. 인화된 슬라이드 필름은—특히 풍경 사진일 경우—앞면과 뒷면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손에 잘못 들리면 뒤집힌 사진을 보기 십상이다. 또한 최상의 화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슬라이드 표면에 지문이 묻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해야 한다. 슬라이드를 막무가내로 아무 빛에나 들이대서도 안 된다. 빛의 종류와 강도에 따라 슬라이드의 색감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눈이 시릴 정도로 너무 오랫동안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필름에 맺힌 상을 빛이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시란 그렇게 조심스럽게 경험하는 것이다.

  이 요구가 번거롭다 싶으면 시의 벌통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다. 억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소리를 정밀하게 수용하라는 소리다. 내가 조용해야 들리는 소리다. 그 소리는 단일한 윙윙거림이 아니라 윙윙거림 속의 다양함이다. 시란 그렇게 듣는 것이다.

 

  화자는 생쥐를 시 속에 떨어뜨리고 녀석의 탈출을 관찰해 보라고도 한다. 시가 어떻게 생겼길래 거기에 생쥐를 떨어뜨릴 수 있단 말인가? 화자에게 시는 크레타섬의 미궁(迷宮)처럼 이카로스의 날개가 있어야만 벗어날 수 있는, 생명을 위협하는 구조물이 아니다. 문자로 짜여진 시의 미로는 생쥐 같은 집요한 성실함이 있으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탐험의 대상인 것이다.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생쥐기사 리피칩의 모험이 펼쳐지는 곳과 같은, 거칠기는 하지만 용기있는 영혼이 압도되지 않는 곳이 시의 세계다.

 

  생쥐한테 영감을 받는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면 시의 방으로 몸소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 안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불을 켜기 전에는 알 길이 없다.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켜는 일은 학생들의 몫이다. 화자는 이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암흑 속에서 하나의 벽이 아니라 여러 벽을 더듬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가장 절묘한 부분은 전등스위치가 이 방에 있는 것들 중 가장 귀중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시의 가치란 탐욕스런 자에겐 보이지 않는다.

  화자의 또 다른 바램은 학생들이 수상스키를 타듯 시의 표면을 날렵하게 가로지르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얼마나 빠르게 잡아끄는 스키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시인들이 끌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의 이름은 해변에서 학생들의 손짓을 기다릴 뿐이다. 괴로움을 증폭시키기 위해 시를 읽는 사람은 없다. 심각한 시가 있는 것은 심각한 시인이 있기 때문이다. 시는 읽어서 재미있어야 한다. 왜 재미있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 아무리 위대한 시와 시인도 내가 읽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시 읽기는 주체적인 영혼의 즐거움을 향한 스릴 넘치는 공간이동이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기발한 요구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이 안타깝다. 그들에게 시란 변장과 변신에 능한 흉악범에 불과하다. 그들은 시란 놈이 또다른 형태로 모습을 바꿔 일을 힘들게 만들기 전에, 놈을 체포하여 고문을 해서라도, 그 진짜 정체를 밝혀내고 싶어 한다. 그들에게 시란 흠씩 얻어터져야 정신을 차릴 것 같은 질긴 놈이다. 그러나 시가 좀처럼 자백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자기의 정체를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다.

 

  호스를 집어 들어 시를 후려치는 학생들의 모습이, 한때는 착했지만 이젠 사악한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무고한 시민에게 몹쓸 짓을 자행하는 사람들을 연상시킨다고 하면 지나친 상상일까? 시험 문제로 둔갑할 시를 위해 시어와 시행에 밑줄을 그어가며 그 뜻을 외우라고 강요하는 사악한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주제넘은 일일까? 누군가 대답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 빌리 콜린스(Billy Collins, 1941~) 

 

  뉴욕 태생의 미국시인. 2001년부터 2003년까지 계관시인직을 맡았으며 현재는 뉴욕시립대학교(CUNY) 레먼 칼리지 영문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9/11사태 희생자들을 추모하여 "이름들"(The Names)이라는 자작시를 계관시인의 자격으로 국회에서 낭송했다. 콜린스는 다양한 여러 인쇄 매체에 자신의 시를 발표해 오고 있으며, 자신의 시집을 낭송한 녹음 CD를 발표하기도 했다. 시인 스티븐 던은 콜린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빌린 콜린스의 시는 우리가 현재 어디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가 가는 방향을 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도착하는 곳에 나도 도착하고 싶다. 열등한 시인은 그럴지 몰라도, 콜린스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우리가 명료하게 엿듣도록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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