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Is Not All | Edna St. Vincent Millay
Love is not all: it is not meat nor drink
Nor slumber nor a roof against the rain;
Nor yet a floating spar to men that sink
And rise and sink and rise and sink again;
Love can not fill the thickened lung with breath,
Nor clean the blood, nor set the fractured bone;
Yet many a man is making friends with death
Even as I speak, for lack of love alone.
It well may be that in a difficult hour,
Pinned down by pain and moaning for release,
Or nagged by want past resolution’s power,
I might be driven to sell your love for peace,
Or trade the memory of this night for food.
It well may be. I do not think I would.
사랑이 전부가 아니에요 | 에드나 St. 빈센트 밀레이 작 | 백정국 역
사랑이 전부가 아니에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가벼운 잠도 비막이 지붕도 아니에요.
가라앉다 떠오르고 가라앉다 떠오르고
다시 가라앉는 사람을 구하는 물에 뜬 통나무가 아니에요.
사랑은 굳어진 폐에 숨을 채워 넣지도 못하고,
피를 맑게도, 부러진 뼈를 맞추지도 못해요.
하지만 허다한 사람들이 죽음과 친구해요
내가 말하는 이 순간에도, 그까짓 사랑 하나 없다고.
모를 일이죠. 내게 힘겨운 시간이 오면,
고통의 못바늘에 꽂혀 벗어나려 신음하거나
결심의 힘만으론 불가능한 궁핍함에 시달린다면,
그대의 사랑을 팔아 치워 평온을 구하거나
오늘밤의 추억을 먹을 것과 바꾸려 들지.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럴 거라 생각은 않지만.
[작품읽기]
"사랑이 밥 먹여주냐?"라는 대꾸는 시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말이다. 사랑에 물질적인 교환가치로 가늠할 수 없는 고귀함이 있다고 믿는 몽상가가 시인인 까닭이다. 그러나 에드나 밀레이는 퉁명스럽다 못해 무례하게까지 들리는 이 질문에 시인의 동정심을 살만한 애절함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사랑이 밥 먹여 주냐?"는 엉성한 사랑의 주인공이 내뱉는 대사이기에는 너무도 짙은 삶의 파토스(pathos)를 느끼게 한다.
밀레이가 「사랑이 전부가 아니에요」에서 정녕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랑과 삶 사이의 치열한 긴장관계이다. 시인은 사랑이 생존과 배타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을 만큼 삶 자체가 힘겨운 사람들이 있음을 깊이 의식하고 있다. 시인의 이러한 의도는 시의 내용이 끊임없이 시의 형식에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 시는 13세기경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져 16세기 영국으로 건너와 전성기를 누렸던 "14행시"(fourteen liner), 즉 소네트의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소네트의 전통적인 주제인 지고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이 소네트가 20세기 초에 쓰여 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밀레이는 수백 년간 이어온 소네트 전통에 조용히 반기를 들고 있는 셈이다.
사실 페트라크나 셰익스피어와 같은 위대한 시인들의 소네트에 투영된 사랑과 그 사랑의 주인공들은 이 지구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기 때문에 근사하게 보인다고 생각된다. 이들의 소네트에는 흔히 가감을 거부하는 완벽한 미의 화신이 등장하여 냉정한 침묵으로 여왕 못지않은 권력을 화자에게 휘두른다. 그러면 애타는 화자의 몸과 영혼은 초췌해지며 사랑에 몸부림친다. 여인이 명시적으로 사랑을 받아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적어도 그러한 기미가 조금이라도 감지되면 화자는 행복하기 그지없다. 바꾸어 말하면, 소네트는 그 태생 상 나날의 삶이 버거운 영혼들을 어루만진다거나 그들에게 따뜻한 포옹을 허락하는 시와는 거리가 멀다. 소네트 속의 주인공들이 열정적으로 사랑을 고백하거나 혹은 그런 고백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그런 감성적 향락에 몰입할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유는 소네트의 주인공들 밑에서 그들의 육체적 노동을 대신 했던 힘없고 무지한 "아랫것들"의 서러운 자기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다.
소네트의 첫 8행(octet)에서 목격되는 사랑에 대한 화자의 의구심은 사랑이 생명의 보존에 즉각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놈의 사랑은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 육체에 자양분을 공급하지도 못하고, 피난처를 제공하지도 못하고, 생사生死의 기로에 선 사람을 생生쪽으로 당기지도 못한다. 죽은 생명을 소생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병든 사람과 다친 사람을 온전하게 다시 세워 놓지도 못한다. 사랑이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는데, 바로 그 사랑이 없다고 생명을 잃는 숱한 청춘 남녀들을 화자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소네트의 나머지 6행(sestet)에서 화자는 자신이 예의 그 쓸모없는 사랑에 빠져있음을 고백적으로 암시한다. 남의 얘기였을 때는 어느 정도 편하게 말할 수 있지만 자신의 얘기였을 때는 결코 편하지 않은 것이 사랑의 문제다. 화자가 가정하는 잔인하게 짓누르는 삶의 고통과 의지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가난함이 사랑에서 연유된 것인지, 아니면 사랑과는 별개로 벌어지는 인생의 조건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경우든, 사랑을 팔아 "평온"과 "먹을 것"을 구할 수도 있다는 개연성은 서글픈 협박처럼 들린다. 시의 마지막 구절 "그럴 거라 생각은 않지만"은 그래서 더욱 애절하게 들린다.
끝으로, 엉뚱한 생각이지만 이 소네트는 "사랑이 전부예요"라는 논리로 내용을 완전히 뒤집어 읽어보면 재미있다.
사랑이 전부예요. 먹을 것이고 마실 것이고
가벼운 잠이고 비막이 지붕이에요.
가라앉다 떠오르고 가라앉다 떠오르고
다시 가라앉는 사람을 구하는 물에 뜬 통나무예요.
사랑은 굳어진 폐에 숨을 채워 넣고,
피를 맑게 하고, 부러진 뼈를 맞추어 줍니다.
그래서 허다한 사람들이 살아갈 용기를 내죠.
내가 말하는 이 순간에도, 그까짓 사랑 하나 때문에.
분명해요. 내게 힘겨운 시간이 오더라도,
고통의 못바늘에 꽂혀 벗어나려 신음하거나
결심의 힘만으론 불가능한 궁핍함에 시달린다 해도,
그대의 사랑을 팔아 치워 평온을 구하거나
오늘밤의 추억을 먹을 것과 바꾸는 일은 없을 거예요.
분명해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뒤집어 놓은 버전이 원래의 시보다 감동적으로 들린다면 그 이유는 다음 셋 중의 하나일 것이다. 당신이 잘못된 시대에 태어났거나,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결혼을 했다면 아직 해고당하지 않은 것이다.
[작가소개]
에드나 St. 빈센트 밀레이 (Edna St. Vincent Millay, 1892~1950)
미국의 시인이며 극작가. 여성 시인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토마스 하디는 미국에 두 가지 커다란 구경거리가 있는데 그 하나는 마천루이고 다른 하나는 밀레이의 시라고 했다. 그녀는 소네트형식에 현대적인 사랑의 여러 모습을 서정적으로 담아낸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미국대학의 문학 교재는 적어도 그녀의 시 한편은 반드시 싣고 있다. 밀레이는 배우로서 무대에 오르기도 하고 자유연애를 실천하며 살았던, 생각과 행동에 거침이 없는 영혼이었다. 남편이 사망한 다음 해, 집 계단 밑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백정국 (1965~ )
고려대 영어교육과와 대학원에서 미국문학 석사.
University - Camden에서 영문학 석사,
University of California - Davis에서 셰익스피어 드라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고려대에서 영어와 영문학을 가르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