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ne | Maya Angelou
Lying, thinking
Last night
How to find my soul a home
Where water is not thirsty
And bread loaf is not stone
I came up with one thing
And I don’t believe I’m wrong
That nobody,
But nobody
Can make it out here alone.
Alone, all alone
Nobody, but nobody
Can make it out here alone.
There are some millionaires
With money they can’t use
Their wives run round like banshees
Their children sing the blues
They’ve got expensive doctors
To cure their hearts of stone.
But nobody
No, nobody
Can make it out here alone.
Alone, all alone
Nobody, but nobody
Can make it out here alone.
Now if you listen closely
I’ll tell you what I know
Storm clouds are gathering
The wind is gonna blow
The race of man is suffering
And I can hear the moan,
’Cause nobody,
But nobody
Can make it out here alone.
Alone, all alone
Nobody, but nobody
Can make it out here alone.
혼자서 | 마야 안젤로
지난밤, 누워서
물이 목마르지 않고
빵 덩어리가 돌이 아닌
거처를 내 영혼한테
마련해 줄 방법을 궁리하다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틀린 생각이 아닐 것이다.
누구도,
정녕 누구도
여기서 혼자서 해낼 순 없다고.
혼자, 혼자서만
누구도, 정녕 누구도
여기서 혼자서 해낼 순 없다고.
쓸 수 없는 돈을 가진
백만장자들이 있어
그 아내들은 통곡하는 정령처럼 돌아다니고
그 아이들은 울적한 노래를 부르고
그네들은 돌이 되어버린 심장을
고치려고 비싼 의사들을 고용한다지.
그러나 누구도
절대, 누구도
여기서 혼자서 해낼 순 없다고.
혼자, 혼자서만
누구도, 정녕 누구도
여기서 혼자서 해낼 순 없다고.
이제 당신이 귀담아 듣는다면
내 아는 것을 말해 주지요.
폭풍 구름이 모여들어
바람이 몰아치고
인류가 고통을 당할 때
난 그 신음을 들을 수 있어요.
누구도,
정녕 누구도
여기서 혼자서 해낼 순 없기 때문에.
혼자, 혼자서만
누구도, 정녕 누구도
여기서 혼자서 해낼 순 없다고.
[작품읽기]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사는 곳이라는 사실이 더 이상 평범한 진리가 아닌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미련한 공간적인 군집이 지혜로운 공동체와 혼동되며, 모든 타인은 잠재적인 경쟁자로 둔갑해 버려, 성공의 순간이 가장 비참하고 남루하다. 패배해야 할 순간에 악착같이 이기려고 몸부림을 치니 막상 승리했을 때 이웃의 미소가 조롱임을 알지 못한다. 전체의 생각과 개인의 생각이 구별되지 않는 사회는 위험한 사회지만, 개인의 생각이 지나치게 내밀하고 터무니없이 독립적인 사회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마야 안젤로의 「혼자서」는 이러한 현대 사회의 병리현상을 밑그림으로 하고 있다.
시는 야상곡夜想曲 같은 분위기로 시작된다. 한밤중, 화자는 혼자 누워서 천장 혹은 암흑을 응시하며 명상에 잠긴다. “물이 목마르지 않고 빵 덩어리가 돌이 아닌 거처”를 자신의 “영혼한테” 마련해 주려는 목적이다. 그런데 그 메타포가 너무 강해 ‘혼자서 해낼 수 없다’는 시의 명백한 주제가 느닷없는 깨달음인지 아니면 메타포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관점에서 보든 시의 논리적인 설득력은 훼손을 입지 않을 듯이 보인다. 갑작스런 생각의 전환을, ‘자기만을 위한 외로운 사색은 결코 진전될 수 없다’는 일종의 경고로 받아 드린다면, 주어진 메타포의 해석적 중요성은 급격하게 감소된다. 즉, 메타포로 인한 부분적인 의미연결의 단절이 전체적인 의미연결에 역설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메타포의 해석 가능성에 매달릴 수도 있다. “목마르지 않는 물”과 “돌이 아닌 빵”에 대한 언급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말과 생애를 연상시킨다. 순간적인 갈증을 풀어줄 샘물을 찾던 여인에게 모두를 위해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을 나누어 준 이가 예수라고 알려져 있다. 굶주림에 굴하지 않고 돌로 빵을 만들어 먹으라는 사탄의 유혹을 거부함으로써 고립되고 나약한 존재의 한계를 극복했던 이 역시 그 가난한 유태 청년이었다. 시의 화자가 자신을 일종의 종교적인 구원자나 구도자로 높이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시인은 혼자만의 삶을 거부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꿈꿨던 청년 예수의 생애로부터 얼마간 영감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로 “여기서 혼자서 해낼 순 없다”는 말은 마치 노래의 후렴처럼 계속 반복된다. “여기서”는 이 땅, 즉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이 시간과 이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혼자서 해낼 순 없다”라고 했을 때 그 말은 인간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화자에게 염려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부는 개인을 극도로 소외시켜 공동체적 삶의 고상함을 유린한다는 걱정이다. 시인은 다 쓰고 죽지도 못할 돈에 인생을 걸고 수직적인 위계질서의 정점으로 스스로를 밀어 올린 부자들을 불쌍히 여긴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정확히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세상이다. 그들의 삶에는 진정한 웃음이 없고 무거운 슬픔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백만장자들의 아내들은 부지런히 쏘다녀도 생명을 가져오기는커녕 (가족의) 죽음을 예고한다고 알려진 통곡하는 정령 “반쉬”(banshee)에 비유된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은 “울적한 노래”만을 부를 뿐이다. “돌로 변한 심장”을 몇 번 더 뛰게 하기 위해 치룰 돈은 많지만 그들을 진정 사랑해 줄 이웃은 가져본 적이 없다. 그저 혼자일 뿐이다.
소소하게 시작된 화자의 어조는 다섯째 연에 이르러서 예언자의 그것처럼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사적인 깨달음과 신념을 대중을 향한 권고의 말로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굉음 속에서도 화자는 인류가 내뱉는 고통의 신음을 듣는다. 그리고 그 신음이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과 독단, 이기심과 탐욕에서 비롯된 것임을 전달코자 한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혼자서」는 마치 후렴이 많은 노래처럼 같은 어구를 여러 차례 반복한다. 둘째, 넷째, 마지막 연이 완전히 일치하고, 첫째, 셋째, 다섯째 연의 마지막 세 행은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모든 연은 한결같이 똑같은 구절로 끝을 맺는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지나친 반복은 귀아픈 잔소리, 부담스런 주술, 끝없는 지겨움이지만, 생각의 마당이 깊은 시에서 반복은 달콤한 귓속말, 겸손한 염원, 그리고 매번 새로운 흥분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존 조건과 의미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창조적으로 규정되고 풍성하게 될 수 있다는 말의 경우, 그 반복은 좀처럼 달콤한 귓속말, 겸손한 염원, 매번 새로운 흥분으로 들리지 않는다. 대신 적극적으로 손해만 보며 살라는 무익한 명령처럼 들린다.
혼자 이익을 보며 여럿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 혼자 손해를 보며 여럿에게 득을 주는 것보다 감정처리에 유리하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내일의 주가를 염려하며 전전긍긍 잠 못 이루는 사람들보다, 모두가 스스럼없이 자신을 내려놓고 서로 돕는 공동체를 고대하며 피곤한 잠자리에 드는 고귀한 영혼들이 더 필요하다. 혼자서 해보는 생각이다.
[작가소개]
마야 안젤로(Maya Angelou, 1928~ )
시인, 자서전 작가, 역사가, 교육자, 배우, 극작가, 인권운동가, 연출가 등, 소개하는데 참 여러 단어가 소요되는 미국의 흑인여성. 여덟 살 때 어머니의 친구에게 강간당한 후 약 5년 동안 거의 말문이 막혔다가 수많은 고전을 읽고 회복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 때 흑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여성으로 최초로 시를 낭송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전히 높이 평가되고 애독되는 처녀 시집 『난 새장에 갇힌 새가 왜 우는지 알아요』(1969)로부터 최근에 발표된 산문집 『딸에게 보내는 편지』(2008)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감동적인 작품들을 발표했다. 흑백을 막론하고 미국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동시에 받는 미국 문화의 아이콘이다.
백정국
고려대 영어교육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에서 미국문학 석사.
University - Camden에서 영문학 석사,
University of California - Davis에서 셰익스피어 드라마 연구로 박사 학위 받음.
현재 한성대 영어영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