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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육아일기를 남긴 묵재 이문건|조영임

작성자홍예영|작성시간14.01.10|조회수316 목록 댓글 1

아이가 출생해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육아일기는 흔히 어머니의 전유물이었다. 요즈음은 육아에 적극적인 아버지가 쓴 육아일기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다. 그래도 육아일기를 남긴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흔하지 않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그것도 할아버지가 손자의 육아일기를 남긴 경우가 있다. 묵재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이 그 주인공이다.
이문건이 저술한 『묵재일기默齋日記』는 현존하는 최고의 생활일기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까지 전해진 일기류- 난중일기, 계축일기, 열하일기- 는 대체로 정치적, 사회적 성격을 담은 것으로 일상생활이나 아동 교육에 관한 기록은 아니었다. 그런데, 묵재가 저술한 일기에는 시묘살이, 유배생활, 부부관계, 출산과 양육, 관혼상제, 질병치료 등 생활사 전반에 걸친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문집 속에 들어있는 『양아록』은 조선사회의 식견 있는 양반 사대부층에 의하여 저술된 체계적인 육아기록이라는 점에서 매우 진귀하면서 가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양아록』의 저자인 이문건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성주요, 자는 자발子發, 호는 묵재默齋·휴수休叟이다. 중형인 충건忠楗과 함께 사림파의 중심 인물인 조광조의 문하에서 학업을 연마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가 화를 당하자 조광조에 대한 의리를 지켜 조상弔喪하였다. 이후 기묘사화를 주도한 남곤, 심정 등에게 미움을 받아 1521년 안처겸의 옥사사건이 일어나자 낙안에 유배되었다. 그러고 나서 사면된 후 주서, 정언,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당시 이문건은 이황, 조식, 성수침, 이이 등 당대의 유수한 대학자들과 교유하였던 것으로 보아 사림으로서의 그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평탄할 것만 같았던 이문건의 일생은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 등에 의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또다시 성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성주의 유배생활은 23년간 지속되었으며, 가족들도 이곳으로 이거하여 살았다.
이문건은 부인 김씨와의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으나, 불행히도 장남 온熅을 제외하고는 모두 질병과 유산으로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온 마저도 열병으로 인해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장남이 두 번의 결혼 끝에 손자 수봉守封을 얻게 되었으니, 이때 이문건의 나이 58세였다. 그리고 외아들 온이 6년 뒤에 사망하자, 손자 수봉의 양육은 조부인 이문건의 몫이 되었다.

『양아록』은 손자 수봉이 출생한 1551년부터 16세 되던 해인 1566년까지의 기록이다. 귀양살이 중이라 벗할 동료도 없고, 마땅한 일거리도 없이 무료하게 지내던 차에, 손자의 탄생은 이문건에게 더없이 기쁜 일이었다. 그는 기울대로 기운 가문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손자의 양육에 온 힘을 쏟았다.
『양아록』에는 모두 37제 41수의 한시가 실려 있고, 산문도 4편 수록되어 있는데, 손자가 출생하였을 때의 기쁨, 손자에 대한 기대감, 본격적인 양아의 과정과 내용 등이 비교적 소상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문건은 손자에 대하여 “쇠퇴해 가는 가문 네가 지탱하여 수천 년까지 이어가게 해야 하리”라든가, “내가 진심으로 하나뿐인 손자에게 바라는 건 시종일관 학문을 완성하여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라고 손자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하였다.
다음의 시는 앉고 말하기를 배우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4개월이 되니 들춰 안아도 되고
고개를 제법 가누어 잡아주지 않아도 되네.
6개월이 되어 앉아 있기도 하는데
아침저녁으로 점점 달라져가는구나.
四月堪提抱 頸强不用扶
六朔坐能定 朝晡覺漸殊 ―「習坐」
커가는 손자 지켜보는 일 즐거워
내 자신 늙는 줄도 모르겠네.
사람의 말 분명하게 흉내 내는 것이
나날이 전보다 나아지는구나.
善見兒孫長 仍忘己老衰
效人言語了 日日勝前時 ―「學語」

 

위의 시를 보면, 아이가 4개월이 되면 목을 제대로 가눌 수가 있고, 6개월이 되면 혼자 앉아 있을 수도 있다는 성장 발달 과정을 알 수가 있다. 이외에도 이가 돋아나거나, 책 읽는 모습을 흉내 낼 때, 젖니를 갈 때 등, 이문건은 각 시기별로 나타나는 손자의 특징적인 성장 모습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손자가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늙음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그 즐거움을 어찌 모르겠는가!
돌이 된 손자가 아장아장 첫 걸음마를 떼었을 때의 기쁨이 표현된 다음의 시가 있다.


나를 향해 두 손 들고,
웃으며 다가오는데 미끄러질까 겁내는 듯도 하구나.
등을 어루만지고 다시 뺨을 비벼주며
우리 숙길이 하며 끌어안고 환호하네.
向我擧兩手 笑投如畏跌
撫背更摩腮 携弄呼吾吉

 

어린 손자가 세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는 모습을 보는 할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흐뭇하겠는가. 얼른 달려들어 어린 손자를 안고 등을 어루만지고 뺨을 부비면서 ‘아이구! 장하다, 내 새끼’ 하였을 것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조부의 내리사랑이리라.

육아의 과정이 언제나 기쁨과 흐뭇함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어린 손자가 이질을 앓자 “살이 빠지고 안색은 창백해져, 바라보는 내 마음 절로 슬퍼지도다. 다른 아이라 해서 어찌 이질을 앓지 않으리오마는 우리 가문이 박복해서 두렵기 때문이라.”라고 하면서 의원조차 불러보지 못하는 외진 곳에 있어서 달리 방법이 없자 두렵고 초조하여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여 위안을 받기도 하였다. 도학자지만 손자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못할 게 없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육아일기에 담겨 있다. “손자가 일 푼 놀라면 할아버지는 십 푼 놀란다”는 표현이나, 벌레에 물린 손자를 보고 “이, 벼룩을 차라리 내게 오게 하라. 애련타, 젖먹이 물어뜯지 말아라.”등의 표현에 손자를 애지중지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손자가 5살 때까지 젖을 먹자 할아버지의 방에서 자게 하여 젖을 떼게 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손자 수봉이 가문을 이어갈 유일한 계승자였기 때문에 애정을 넘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관심을 두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문건은 손자를 교육하는데 손자의 자품을 파악하여 거기에 맞게 교육하려고 했음을 다음의 시를 통해 알 수가 있다.

 

아이의 지각이 날로 깨여,
시험 삼아 글자를 쓰게 하고 읽게 했다.
혀가 짧아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고,
심란하여 잘 잊어버리고 제대로 외지 못한다.
아이의 자품이 중간 정도이기에,
책망하는 것은 오히려 너무 급하다.
그래서 권장하고 깨우쳐줄 때에는,
능하지 못하더라도 성내가면서 지도하지 말아야 한다.
응당 상세하고 천천히 깨우쳐주어야 할 것이니,
조급하게 윽박지른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兒性日有覺 試敎書字讀 舌短韻未諧 心擾莫難憶 兒稟足中人 責望猶太急
因之勸誨際 不能無怒勑 應須諭詳緩 躁迫有何益

6세 된 손자 수봉은 혀가 짧아 발음이 부정확하고, 심란하여 잘 외우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교육자인 이문건이 보기에 손자의 자품은 특출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모자라지도 않은 중간 정도인 보통의 인지능력을 가진 아이로 파악되고 있다. 그래서 못한다고 책망하거나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자세하게 천천히 깨우쳐 주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육아의 과정에 기쁨과 흐뭇함과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자신의 바람대로 성장해 주지 않는 손자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기대에 어긋날까하는 두려움도 함께 있게 마련이다. 할아버지 이문건은 손자의 조급해 하는 성품과 음주벽에 상당한 불만과 우려를 표하였다. 더구나 애지중지 키운 손자가 고분고분하지 않고 조부에게 반항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뜻을 거역하는 모습을 보이자 손자에 대하여 분노하고 실망하였다. 다음의 시에 그러한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금년 숙길의 나이 14세, 시골 사람들이 술 권하니 부끄럼 없이 마시네.
손자 하나 이 지경으로 무심하게 행동해, 할아비 오히려 근심하고 걱정하네.
늙은이 자식 잃고 손자에게 의지하는데 손자는 지나치게 술을 탐해 자주 취하네.
빈번히 취하고 토하는 걸 한탄할 수도 없으니 기박한 운명이 얼마나 한스러운가.
吉也今年年十四 村人勸酒不知羞 一孫至此無心行 老物猶懷得疾憂
老翁無子仗孫男 兒性偏貪麴蘖酣 莫恨頻頻長醉吐 數奇命薄恨何堪

 

십대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손자 수봉은 시골 사람들이 권하는 술을 거절하지 못해 받아 마시고 취하고 토하는 등 바르지 못한 모습을 자주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도 없이 오로지 손자만 바라보고 기대하는 기구한 운명의 할아버지에게 어린 손자의 술 취한 모습은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손자의 나쁜 성격과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때로는 체벌을 가하기도 하였다.

 

아이의 종아리를 때리는 것은 내가 악독해서가 아니라, 아이의 나쁜 습관을 금지시키기 위해서라네. 만약 악습을 금지시키지 않으면 고질이 되어 끝내 금지시키기 어려우리. 악습의 기미는 초창기에 바로 꾸짖고 금지해야 하는 법. (중략) 손자를 불러 혹독하게 꾸짖고, 손들고 있으라 준엄하게 꾸짖었네. 회초리로 종아리를 세차게 때리니, 외마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네. 10여 대를 때리고 차마 더 때리지 못하고, 나중에 봐가면서 더 때린다고 타일렀네. 그만 때리자 한참을 엎드려 우는데 늙은이 마음 또한 울고 싶을 뿐이네.
撻兒我非惡 冀禁我習惡 惡習如不禁 癖痼終難禁 習氣初起時 正是訶禁時
招我詰責峻 懸手示嚴峻 取條撾腿疾 痛號聲發疾 十餘不忍加 勅言視後加
解之後伏泣 翁心亦思泣

 

아마도 전후의 내용으로 보아, 손자가 단오에 놀았던 그네타기에 푹 빠져 독서와 글짓기를 게을리하여 할아버지를 화나게 한 모양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뜻대로 공부에 매진하지 않는 손자에게 급기야 회초리를 든 것이다. 회초리는 전통적인 훈육 방법 중의 하나, 그러나 맞는 이보다 때리는 사람이 더 가슴 아픈 법. 더욱이 아비도 없이 홀로 자라는 안쓰러운 손자에게 매를 대는 할아버지의 심정은 더할 것이다. 손들고 벌서는 모양, 회초리를 치자 아프다고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오는 상황, 그만 때리자 방바닥에 엎드려 훌쩍훌쩍 우는 손자의 모습, 그런 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처연함은 4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바로 내 아들에게 회초리를 쳤던 그때처럼 선명하게 다가온다. 시의 내용도 그러하지만 이렇듯 소소한 일상을 담아낼 수 있는 한시라는 장르가 새삼스럽다.


묵재 이문건은 23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다가 74세에 타계하였다. 그가 타계하자 나머지 가족들은 충북 괴산으로 이거하였고, 손자 수봉은 괴산군 문광면 전법리에서 살았다. 할아버지의 지극정성과 관심 속에서 자란 손자 수봉은 할아버지의 기대에 미치게 성장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크게 벼슬을 하지는 못했으나 임진왜란 때 윤우尹佑, 조복趙服 등과 함께 창의하고 격문을 초하는 활동을 하였다고 하며, 후에 논공행상을 하려 하였으나 사양하여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지난달 10월에 괴산군 문광면에 성주이씨 종친회 주관으로 ‘묵재 이문건 신도비’ 제막식이 있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육아기록을 남긴 묵재 이문건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기록의 위대함은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증명되었다. 증명되지 않은 것이라도 기록 그 자체는 위대하다. 기록은 기록할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동반되지 않으면 안 되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출생과 성장 과정을 담은 육아일기는 개인사에 있어서 더없이 귀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세상의 모든 부모가 바라는 대로 성장해 주지 않더라도 먼 훗날 부모가, 혹은 조부모가 혹은 타인이 자신의 존재를 한없이 신뢰하고 자신을 위해 밤을 밝히며 기도했다는 기록을 접하게 된다면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묵재 이문건의 기록이 가치로운 것은 기록화되는 것이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이 시대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기록은 그 자체로 소중한 인류의 유산遺産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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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인복 | 작성시간 19.07.10 목재 이문건 이아니고 묵재 이문건으로 정정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묵재공 종회장 이인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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