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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금

작성자물푸레|작성시간14.09.30|조회수126 목록 댓글 0

 

 

 

 

 

손금

 

 

 

1.

손은 징후다 사람들은 내 손에서 게으름을 읽는다

터무니없는 추측일지라도 반복되는 말은 강한 믿음을 준다

나는 반복해서 되뇌곤 한다 나는 게으르다 게으르게 살아갈 것이다

 

 

2.

나에겐 삶은 시간이 아니라 걸음걸이다 내가 떡갈나무 숲 속에서 햇살의 간지러움으로 잠에서 깨어났을 때 머리맡엔 아침밥상과 일 나가고 없는 엄마의 메모 밥 먹고 학교 가거라 아무도 깨우는 사람이 없는 방을 빠져 나와 학교 뒷담을 천천히 따라 걸어가면 수업은 2교시나 3교시를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매번 머리를 쥐어 박히거나 손바닥 몇 대 맞았지만 하나도 부끄럽거나 아프지 않았다 나는 손바닥으로 난 길을 따라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 커다란 바위 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급할 것이 없었다 나는 귀를 열고 골짜기를 울리는 온갖 소리를 꿈꾸었다 딱따구리가 파놓은 나무 구멍 속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하였다 해거름 땅 속의 벌레들은 온갖 냄새를 피워 길을 알려주었다 학교에서 돌아와도 방은 늘 비어 있었다 나는 비어있는 방에 불을 켜고 계곡을 따라 바위를 건너뛰며 걸어왔던 걸음과 새들의 소리, 빛에 반사되던 나무껍질이 등 돌리던 표정과 수맥의 길을 기록한다 계곡은 가끔 폭우로 폐허가 되기도 하므로 나는 모든 소리들을 기억하려고 애쓰다 잠이 들면 일 끝나고 돌아온 엄마가 내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엄마 괜찮아요 오늘도 조금밖에 걷질 않았는걸요 그러면 엄마는 잘 자라지 않는 나무를 보듯 나를 바라보다 뒤돌아서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엄마의 그 표정이 섭섭하지 않았다 급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1.

손은 무질서다 그 숲 속엔 아직 가보지 못한 길들이 숨겨져 있다 나는 길을 짐작하거나 앞질러가지 않겠다고 마음 먹는다 그것은 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다 길은 애절한 눈길만으로도 스스로 자신의 몸을 드러낼 것이다 나는 길을 사색하듯 무의미하게 아무 기대 없이 내 몸에 새겨 넣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이테처럼 둥글게 퍼져나간 그 길을 사람들이 산책하며 둘러볼 수 있도록 마치 떡갈나무의 숲길을 돌아 나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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