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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鼓文 길라잡이.

작성자友石|작성시간06.11.10|조회수299 목록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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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鼓文 길라잡이.

 

 

 

붓을 잡기 前에 무엇으로 글씨를 썼을까,

목각에다가 쓸수도 있고,종이가 나오지 않았으니.흔한 돌에다가 새겼을 것이다,

특히 새기기좋은 평평한 암각이나,원추형비석을 만들어 그곳에 새겼을 것이다,

붓을 드는 모든 서예가들은, 한글을 쓰고, 행서를 쓰고,예서를 쓰기 전에.

무엇이 그 原力이 되었을 까를 생각하게 된다,

 

中國에서 가장 오래된 刻石으로된 것으로, 칭한다면, 아마도 단연, 석고문을

들을 것이고, 초학자에게 권고 했을것이기 때문이다,

석고문에 대해 적어놓는 이유는 붓을 잡는이들이.

무슨 체부터  글을쓰는것이 옳은가? 하고 묻는이들을 많이 보았다,

왜, 써야하는지. 잘못 배우고 있는지는 아닌지..가볍게 적어보자,,

 

석고문은  그 새겨진 비문의 모양 또한  60㎝ 정도 높이의 돌에
" 북 (鼓 )같이 생겼다 "하여,명칭이 되었고, 10개의 북 같이 생긴
이 돌의 내용은 사냥에 대한 것을 노래 형식으로 칭송한
四言詩辭 로 보통 獵碣文字(렵갈문자)라고도 한다,

碣(갈)이라고 하는 이 圓柱形 비석들은,
漢代에 이르기前까지의 비문들을 稱하는데.
이후에 長方形으로 바뀌었지요 .

 

석고문은 당초 협서성의 서쪽 서봉상(西鳳翔)에서 출토 되었습니다

봉상부자묘(鳳翔夫子廟)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오대(五代)의 난리에 한 번 잃어버렸고, 송(宋)대에 들어와 다시 이것을 수집하여 봉상부학(鳳傷府學)의 서쪽 방에다 보관하였다는기록이있습니다,

 송(宋) 휘종(徽宗) 대관(大觀,1107~1110) 년간에 봉상(鳳翔)으로부터 개봉(開封)으로 옮겨 보화전(保和殿)에 보관하였고, 그러다가 금(金)나라가 송(宋)을 물리친 후에 이것을 다시 북경으로 옮겼으며, 청(淸)나라에 와서는 국자감(國子監)에 보관시켰다. (정태수교수 서예사 기록 참조)

 

석고문의 탁본은 당나라 때 이미 존재하였는데 현재는 전하지 않고 있으며, 북송시대의 탁본이 소장되어 있는데 청대에 불타고 송나라 탁본인 先鋒本, 中權本, 後勁本 등 세 종류가 일본에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석고문에 字形과 碑形과의 공통점을 든다면,
모두 圓形 의 형태를 따른것에 개인적으로 주목하고 싶습니다
시대적으로는 언제 만들었고 새겼을까? 하는것에 대해
많은 분들이 연구하고 알아내려하고 있으나,

 

장회관(張懷瓘)은 주선왕(周宣王)이라고 하였으며,
한유(韓兪)는 <석고가(石鼓歌)>를 지어 주선왕 때의 작품이라고 하였다.
위응물(韋應物)도 <석고가>를 지어 이것은 주문왕(周文王)때 짓고 주선왕(周宣王) 때 제작한 것이라고 하였다.

당란은 헌공 (獻公) 11년 기원전 374년 이라고 주장한 기록도 있습니다,

내용면으로 보나,시대적인 것을 추정해 보는것으로
春秋 秦 나라 때 것으로 추정하는것으로 보편화 되고 있는듯합니다 

곽말약(1)이 주장했던 先秦 시대의 것이라는데
무게가 있으며  석고문은 진양공(秦襄公) 8년(BC 763)의 작품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되어 있고, 자세한 것은 곽말약(郭沫若)의 <석고문 연구(石鼓文硏究)>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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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沫若곽말약) (1892∼1978)

중국의 문학가·역사학자·정치가.

문학작품으로는 시집 《여신(女神, 1921)》, 역사극 《왕소군(王昭君, 1925)》 《굴원(屈原, 1942)》 《채문회(蔡文姬, 1959)》 《측천무후(則天武后, 1960)》, 자서전 《유년시대(1928)》 《창조 10년(1931)》, 번역작품인 《파우스트》 등이 있다. 고고·역사학 저서로는 유물사관에 의한 중국초기 고대연구의 역작(力作) 《중국고대사회연구(1931)》와 30년대의 갑골금문연구서 《십비판서(十批判書)》 등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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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는 古朴하면서도 精妙함을 최고로 쳤음에.
수많은 서예가들이 석고문을 推崇(추숭) 하는 詩를 남겼음은 두말할나이도 없다,

특히 圓筆法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사해야하는 이 석고문의 轉筆法은

이후에 초학자들에  많은  도움을 줄수있다고, 아직도 저는 믿고 있습니다,


현재 이 原碑는 북경고궁박물원(北京,古宮博物院)에 소장되어있습니다,
찻잎이 석고문을 추천하는 까닭은
서예를 입문하는 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으나,

한가지로 통일한다면, 글씨를 잘쓰려는 것으로 단촐하게
국한할수있는데. 그 잘쓰기의 가장 기본이 되는 필법이 이미 이 시대부터 시작 되어있었으며,
현재까지 우리나라 서예 대가들이 숭상하는 필법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石鼓文은
모든 각체의 기본입니다,
逆入하는 붓의 특성과 그 탄력있는 행필에서의 묘한 운치,.
중봉(中鋒)을 써야하는 모든 글씨체의 가장 독보적인
위치에있는 전서의 기본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다른 서체를 臨한다는것은 매우 위험하기도 하며,
많은 제약이 따르게 되는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한글 궁체를 써도 .古體를 써도,隸書를 써도,
簡體를 써도, 行書를 써도,초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시대적으로 서체의 발달 과정을 보아도,
고문 → 대전 → 소전 → 예서 → 초서 → 해서 → 행서
이렇게 이어져 왔음에 서체 발달과정을 답습하는 이유가 그렇고,
서예를 배우는 기본적인것을 임하는 자세에 적합한것으로 사료 됩니다,

 

처음부터 북위 남북조의 강한 필법을 구사하려 한다면, 나중에. 원필형태의

초서나 행초서,를 구사하고 臨하는데.상당히 어려움이 따를것으로 보여집니다,

 

 대개의 경우 전서는 자형은 縱長(종장)이고 거의가 같은 굵기의 획으로 쓰여지며,

굴곡부에는 곡선이 많이 사용된다. 특히 오창석 석고문을 보면그러한것을  눈에 띄게 확인할수있다,

 

해서나 예서에서 볼 수 있는 삐침<적>이나, 갈고리<鉤>, 파임<찍을 책> 등의 필획은 사용하지 않는다. 필법에서 방필(方筆)이나, 삼절법을 구사하는것은 찾아볼수없다,

석고문은 자형이 方整(방정)하고, 각자의 크기가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또 중봉에 의한 藏鋒(장봉)같은 용필(用筆)을 배우는 데는  석고문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석고문을  임서할때 주의할점은  빠르게 글씨를 쓰는것을 금한다,

바른자세와  팔뚝전체를  回腕하는것을 기준으로 하는데. 정성을 다해 임하다보면,

마음은 이미   다른 어느 서체보다도, 신중한 자세와 마음을 요하게 되는것을 느끼게한다,

◈석고문을 쓰는 用筆방법.

1. 起筆하는 곳에서는 藏鋒(장봉)을 우선하며, 行筆시에는 언제나,중봉으로 나아가야한다, 획이 편편한것이 아닌, 옹골지게 써 내려가는것이 좋다,

2.꺽이거나,붓을 거두는 시점 收筆하는 곳에서는  다시 비행기가 떠오르듯,

  筆鋒을 일으켜 모아내며 끝내야한다,

3.특히 석고문은  탄력있는 붓의 힘을 느낄수있는데. 장필을 한 상태로 끌고 가듯

내려쓰는 것은 또다른 신비하고 묘한 붓감을 느낄수있다,

 

4. 張長史가 말하는 "절차고(折차股)"의 원리가  위와 같다,

 

◈석고문의 특징적 필획.

필획은 금문과 소전의 중간에 속하며 금문보다 잘 정돈되어 있고 금문에서 소전으로 옮겨가는 과정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① 점(點) : 중심에서 붓을 대고 우로 돌려서 활같이 굽혔다가 중심에 이른 뒤에
수필(收筆)한다.
② 직(直) : 가로 및 세로로 긋는 획으로 장두호미(藏頭護尾)하여야 한다.
③ 호(弧) : 상호(上弧), 하호(下弧), 원호(圓弧), 전절(轉折)

(나) 전서의 특징 : 원시성[상형성], 평행성, 대칭성, 정형성



장회관(張懷瓘)은 <서단(書斷)>에서 '자체의 형상이 뛰어나 옛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주옥 같으며 맥락이 통하고 있어 소전의 조종이 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또한 구슬과 같은 둥근 획이 많고 생동감이 넘치는 획으로 점철되어 있어 ,
갑골문(甲骨文)과 종정문(鐘鼎文)의 뒤를 잇고 이사(李斯)의 소전에게는 종주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대의 서예가인 구양순(毆陽詢), 우세남(虞世南), 저수량(楮遂良)등은 물론이고 송(宋) 이후의 여대 서예가들이 모두 이것을 추종하여 전서의 모범으로 삼고 있다.

석고문 자형연구


필획이 굳건하고 묵직하며 짜임새도 매우 엄밀하면서 변화가 있다.
소전은 또한 상당히 규범적이고, 부수(部首)의 변과 방이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필·획의 둥근 것이나 직선이 모두 단선으로 되어 있고, 굵고 가늘음이 변하지 않으며, 비교적 둥근 획으로 간격들이 고르고, 조금 길쭉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글자의 상반부는 비교적 빽빽하고 하반부는 늘씬하고 여유가 있어 부드러운 가운데도 강함을 볼 수 있어 상쾌하고 굳건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평을 참고로 하면 석고문의 글씨체와 형상이 매우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또한 구슬과 같은 둥근 획이 많고 생동감이 넘치는 획으로 점철되어 있어 , 갑골문(甲骨文)과 종정문(鐘鼎文)의 뒤를 잇고 이사(李斯)의 소전에게는 종주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대의 서예가인 구양순(毆陽詢), 우세남(虞世南), 저수량(楮遂良)등은 물론이고 송(宋) 이후의 여대 서예가들이 모두 이것을 추종하여 전서의 모범으로 삼고 있다.

오창석은
서예도 전각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당시의 명가를 따랐으나 30대 이후 <석고문(石鼓文)>에서 필의(筆意)를 터득하여 전서는 물론 행서와 초서에 응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려집>에 의하면 그는 65세 때 새긴 <석고문>의 발문(跋文)에서

予學篆, 臨石鼓數十載, 從此一日有一之境界. 惟其中古茂雄秀之氣, 今尙不能窺其一二.

(내가 전서를 배움에 <석고문>을 수십 번 임서한 이후부터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경지에 올랐다.

 오직 그 가운데 예스럽고 웅장하며 빼어난 기운 가운데 한두 가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다 볼 수가 없다.)

라 하여 <석고문>에 심취한 이후 나날이 새롭게 발전하였으나 만년에 이르렀어도 필획과 결구의 정신을 다 찾아내지는 못하였다고 하였다.

 

<처악루필담(嶽樓筆談)>에서

 缶廬寫石鼓, 以其畵梅之法爲之, 縱挻橫張, 了無含畜. 村氣滿紙, 篆法掃地盡矣.

(오창석은 <석고문>을 쓸 때 매화를 그리는 법으로 하였기 때문에 가로와 세로로 늘어져 함축미가 없다. 촌스러운 기운이 가득하며 전서의 법칙을 싹 쓸어버린 것과 같다.)라 하여 전서의 필획이 가지는 함축성이 부족하고 전서의 법칙이 없어졌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평가도 역설적으로 보면 오창석의 서예는 필법은 물론 결구에서도 고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출처:찻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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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담원 | 작성시간 06.11.21 공부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김도원 | 작성시간 07.06.06 공부가 되었습니다.
  • 작성자탐라 | 작성시간 08.07.09 심오한 깊은 뜻을 이렇게 일목 요원하게 정리 해 주세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 큰 뜻을 잘새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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