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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족의 유래 - 영월 엄씨에 대해서...

작성자희재파파|작성시간08.05.13|조회수808 목록 댓글 2
엄 [嚴, 영월엄씨]

본관은 영월(寧越) 단본이다. 문헌에는 그밖에도 상주(尙州) ·하음(河陰) ·광주(廣州) ·파주(坡州) 등 60여 본이 전하나, 모두가 영월엄씨의 분파이며 세거지(世居地)를 나타내는 데 불과하다.

시조는 당나라의 파악사(坡樂使)로 한국에 들어온 임의(林義)이다.
‘이미보(己未譜)’ 씨족략사(氏族略史)편에 보면, 시조 엄임의(嚴林義)는 본래 중국 한(漢)나라 엄자릉(嚴子陵)의 후손으로 당(唐)의 현종(玄宗)이 새로운 악장(樂章)을 만들어 여러 나라에 전파할 때 엄임의(嚴林義)를 정사(正使)로, 영월신씨(寧越辛氏)의 시조인 신시랑(辛侍郞)을 부사(副使)로 파견, 우리 나라에 왔다고 한다. (영월엄씨랑 영월신씨랑은 동성동본처럼 결혼을 안한다는 설도 있음)

문헌에 의하면 그는 당나라 현종이 새로운 악장(樂章)을 만들어 이를 인근의 여러 나라에 전파하기 위해 보낸 파락사(波樂使)로, 신라에 동래 하였다가 본국에서 정변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의 영월땅인 내성군에 안주한 것이 우리나라 엄씨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고려시대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이 되었으며, 엄임의(嚴林義)에게 세 아들이 있어 큰 아들 엄태인(嚴太仁)은 고려조에 검교 군기감윤(檢校 軍器監尹)을 지내 군기감공파(軍器監公派)의 파조(派組)가 되었고, 둘째 아들 엄덕인(嚴德仁)은 복사공파(僕射公派)의 파조(派組), 세째 아들 엄처인(嚴處仁)은 문과에 올라 문과공파(文科公派)의 파조(派組)가 되어 세 갈래의 계통을 이루게 되었다.

엄태인의 7세손 용도(用度)가 조선에서 봉상시정(奉常寺正)을 지내고, 아우 이도(以度) ·안도(安度)가 군기시정(軍器寺正)을 지냈다. 용도의 6세손 흥도(興道)는 영월의 호장이었는데, 단종이 영월에서 죽자 아무도 돌보지 않는 왕의 시신(屍身)을 모시고 장례를 치른 뒤 몸을 숨겼다. 현종 때 송시열(宋時烈)의 주청으로 그의 후손이 등용되고 영조 때 정문이 세워졌다.

<위선피화 오소감심(爲善被禍 吾所甘心)>. 좋은 일을 하고도 화를 당한다면 달게 받겠다는 절규에 찬 경귀가 바로 엄문(嚴門)의 가헌(家憲)이다.

어린 왕 단종(端宗)에 바친 충절로 보복의 칼날 앞에 서더라도 결코 두려워 않겠다던 엄가(嚴家)의 12세손 엄흥도(嚴興道)의 유훈(遺訓)이 그대로 문중의 정신으로 이어진 것이다. 강가에 버려진 단종(端宗)의 시신(屍身)은 까마귀 밥이 되도록 “누구든 손을 대면 3족(族)을 멸한다”는 어명이 내려져 있었다.

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 그는 영월(寧越) 땅의 호장(戶長)<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이었다. 서릿발같은 엄명이 자신은 물론 일족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줄 알면서도 그는 거적에 싸인 구왕(舊王)의 시신을 수습, 동을예산(冬乙旨山)(현재 端宗의 묘가 있는 莊陵)에 염장(殮葬)했다. 그리고 어린 핏줄 하나에 여생을 의지, 성을 갈고 영남(嶺南)지방 어디론가 훌훌 떠나버렸다.

현종(顯宗)에 이르러 단종(端宗)의 무덤이 봉릉(封陵)되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단종(端宗)의 주검을 수습했던 옛사람을 찾았으나 엄씨(嚴氏)들은 무슨 재난이 닥칠까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가문의 족적을 적어돈 문적(門籍)까지 없애고 자꾸만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더구나 단종(端宗)묘에 선영이 있던 엄(嚴)씨들은 묘가 능으로 추봉(追封)되면서 사방 5리 안에 있는 개인묘를 모두 옮기라는 어명에 따라 선영까지 포기하는 운명을 맞았다. 이 난리로 인해, 오늘에 이르러서도 후손들은 10세조까지의 묘를 무두 실전(失傳)한 아픔을 겪게 되었다.

엄흥도(嚴興道)의 충절과 인륜의 도가 알려진 것은 영조(英祖)때이며, 순조(純祖)에 이르러서야 충의공(忠毅公)이란 호와 함께 사육신과 더불어 영월(寧越)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여조(麗朝)에서 수많은 명신현관(名臣顯官)을 배출한 엄(嚴)씨는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11세손인 유온(有溫)이 개국공신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도총제부동지총제(都總制府同知總制)를 지내는 등 대대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연산군(燕山君)에 이르러 엄씨가(嚴氏家)는 호된 시련을 겪는다.

연산군(燕山君)의 어머니 윤(尹)씨의 죽음이 유온(有溫)의 4대 손녀이자 성종(成宗)궁의 귀인(貴人)이었던 엄(嚴)씨 등을 비롯하여 윤필상(尹弼商) 등 12대신의 간계라는 임사홍(任士洪)의 모함으로 이들 대신들과 함께 엄(嚴)귀인의 아버지 사직공(司直公)과 오빠 회(誨)ㆍ계(誡) 등 3부자가 참살을 당한다.

어제의 충신이 오늘은 역적으로 몰려 단죄를 받게 되는 이른바 갑자사화(甲子士禍)다. 이로 인해 엄씨가(嚴氏家)는 한동안 빛을 잃는 듯하다. 중종(中宗)에 이르러 누명을 벗고 16세손 흔(昕) 이 대제학(大提學)으로 우뚝 솟아오르면서 선조들의 맥을 다시 이어 내려간다. - 선(善)으로 패(敗)한 일 보며 악(堊)으로 이긴 일 본가. 이두 즈음에 취사(取捨)아니 명백한가. 평생에 악(堊)한 일 아니하면 자연유성(自然有成)하리라 - 그의 시조 한 수가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실려 후세에 전한다.

영조(英祖)때 서예가로 이름을 떨친 엄한명(嚴漢明)과, 정조(正祖)때 서화가로 이름 높던 엄계응(嚴啓膺)은 부자간. 특히 한명(漢明)은 초서와 예서에 뛰어나 한석봉(漢石峰)이후의 제일가는 명필로 고금의 서법(書法)을 집대성한 ‘집고첩(集古帖)’과 ‘만향제시초(晩香齊詩抄)’등의 저서를 남겼다.

엄(嚴)씨는 근세에 이르러 선지자의 집안으로 신문물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다.

이조말의 개화파 인물인 엄세영(嚴世永)은 국제 정세에 밝았던 초기 외교가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으로 일본을 다녀왔고 고종(高宗) 23년(1885) 영국(英國)군함이 거문도(巨文島)를 점령했을 때는 일본 나가사까로 건너가 그곳에 머물고 있던 도웰 함대사령관과 담판을 하기도 했다.

 

 

 



엄(嚴)씨가 낳은 유일한 왕비인 (고종의 계비 - 엄비) 고종비(高宗妃)(영친왕의 생모이자 '이방자(李方子)'여사의 시어머니)는 우리나라 개화의 여명기에 양정(養正)ㆍ진명(進明)ㆍ숙명(淑明) 등의 학교설립, 오늘날 사학의 요람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현재도 엄규백(嚴圭白)씨가 양정(養正)고교장으로.,, 엄정섭(嚴貞燮)씨가 진명(進明)학원이사장으로 이를 지키고 있다.

 

◆ 순헌귀비 엄씨

고종과 함께 했던 여인으로는 당연히 명성황후가 제일이지만, 또 한사람 엄귀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 이후 고종은 더 이상 경복궁에 머물 수가 없었고 결국 러시아공사관으로 피해가는 ‘아관파천’ 사건이 일어난다. 그 아관파천의 주역이 바로 엄귀비였다. 러시아공사관에 1년간 머무는 동안 고종을 모신 것이 그녀였고, 덕분에 아들 이은(영친왕)을 낳을 수 있었다.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기울어가는 국운을 회복해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대한제국 시절 고종 옆에서 실질적인 왕후의 역할을 하며 내조한 여인이 바로 엄귀비이다.

명성황후의 상궁으로 있던 여인이지만 후에 황귀비에까지 올랐고 신교육에 관심이 많아 진명, 숙명 등 근대여성교육 기관의 설립을 후원하였다. 그동안 명성황후에 가려져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여성인물이기도 하다. 영친왕의 어머니이면서 대한제국 시기를 살았던 중요한 여성 인물이다.


▷ 출처 : 순헌귀비 엄씨를 찾아서 (블로그)


↑ 영휘원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사적 제361호. 조선시대 고종의 계비(繼妃)인 순헌귀비(純獻貴妃) 엄씨(嚴氏)의 묘소.

한말(韓末) 엄(嚴)씨 가문은 맵고 곧은 가풍을 이어 숱한 독립투사를 배출했다.

안중근(安重根)의사와 함께 1908년 노영(露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모아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함북 경흥(咸北 慶興)의 일본 군경에 큰 피해를 입혔던 의병장 엄인섭(嚴仁燮)은 무력항쟁이 여의치 못하자 연해주(沿海州)에 정착, 농업에 종사하며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엄순봉(嚴舜奉)은 만주(滿洲)로 건너가 1933년 북만주 일대의 동지들과 함께 한족(韓族)총연합회를 편성, 청년부장에 취임했다. 만주(滿洲)일대 동포들을 상대로 항일투쟁의식고취, 군자금모집 등 활동을 벌이다가 일제(日帝)의 압박이 심해지자 백정기(白正基)의사 등 동지들과 함께 상해(上海)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상해(上海) 조선인(朝鮮人)거류민회를 조직, 일제(日帝)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이영로(李榮魯)를 추적 끝에 응징 살해하고 체포되 순국(殉國)한 열사(烈士).

엄정섭(嚴正燮)은 1916년 대구에서 박상종(朴尙鍾) 등 동지들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군자금 모금, 항일 유격활동을 했는데 친일(親日)부호 장승원(張承遠)의 암살모의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이클 선수로, 일제하(日帝下) 우리 국민들에게 비행사 안창남(安昌男)과 함께 신문명의 총아였던 엄복동(嚴福童)도 근대 엄(嚴)씨 인물.

영월엄씨가 배출한 인물로는 유일한 왕비인 엄비(嚴妃) 이외에도 한말의 인물로는 개화당내각의 농상공부대신을 지낸 세영(世永), 의병장 인섭(仁燮)이 알려져 있다. 엄씨는 조선에서 문과급제자 30명을 배출하였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1만 2926가구에 인구 7만 3989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50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2만 7557가구에 인구 11만 6002명으로 성별순위는 274성 중 여전히 50위였다

◆ 주요 세거지

강원도(江原道) 영월군(寧越郡) 영성읍(寧越邑) 하송리(下松里).

오대산(五臺山)에서 양갈래로 떨어진 물길이 동강(東江)ㆍ서강(西江)을 이루며 남으로 뻗다가 손을 맞잡고 남한강(南漢江)으로 흘러드는 지점에 영월 엄씨(寧越 嚴氏) 가족들이 옹기종기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산다. 마을 안쪽 달무리처럼 집들로 둘러싸인 중앙광장에 천골만장(千骨萬狀)의 노은행목(老銀杏木)이 수천 가지의 팔을 뻗쳐 하늘을 떠받들고 있다. 엄씨(嚴氏) 시조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린 바로 그곳이다.

역사의 명암 속을 드나들며 대대를 이어 가히 1천여년에 30세손.

한 마을에 25세손부터 30세손에 이르기까지 6대가 함께 산다.

“원래 이 마을의 이름은 杏亭이었지요. 시조공(始組公)께서 이곳에 정착하신 후 손수 은행나무를 심고 마을 이름을 杏亭이라고 지어 불러오던 것을 일제 때 행정구역 정리 작업을 하면서 솔숲이 우거진 곳의 아랫 마을이라고 해서 하송리(下松里)라고 고쳤는데 지금은 솔숲이 없어졌어요.”

마을 촌장격인 엄병언(嚴秉彦)옹(73ㆍ25세손)의 설명이다. 그래서 이 은행나무는 엄(嚴)씨 가문의 상징이기도 하다. 수령 1천년에 높이 36미터, 둘레 18미터로 천연기념물 76호로 지정돼 있다.

또 이 은행나무는 엄(嚴)씨들 뿐만 아니라 영월(寧越)사람들 모두가 <신수(神樹)>라 부른다.

 

천연기념물  제76호

영월하송리은행나무 (寧越 下松里)


엄씨의 관적지(貫籍地)인 영월읍 하송리(寧越邑下松里)에는 처음 엄시랑(嚴侍郞)이 정착 하면서 손수 심었던 은행나무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수령(樹齡)을 자랑하는 보수(寶樹)로 천연기념물 제76호로 지정

경술국치(庚戌國恥)였던 한일합방 때는 동편 큰 가지가 부러져 떨어졌고 해방 바로 전에는 동쪽 가지가, 그리고 6ㆍ25동란 때는 북쪽 가지가 부러져 나라가 튼 재앙을 맞을 때마다 스스로 가지를 부러뜨려 이를 알려주는 것으로 믿고 있다.


또 엄씨가(嚴氏家) 자손 번성의 힘이 노거수(老巨樹)에 있는 듯 천년이 지난 지금도 고사한 가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밑둥치에서 새순이 끊임없이 돋아나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엄씨일가(嚴氏一家)는 바로 이 은행나무마을에서 40여 가구가 한 줄기를 이루어 살고 있다.

이 밖에도 영월(寧越) 군내에 사는 엄씨(嚴氏)일가는 읍내에 전체 5백여 가구에 달한다. 남면(南面)에 2백, 북면(北面)ㆍ주천면(酒泉面) 2백여 호 등 모두 1천여 호가 넘게 살아, 옆집 건너 한 집에 엄씨(嚴氏)문패가 걸린 셈. 뿐만 아니라 지방 유림(儒林)으로 매년 봄ㆍ가을 석존제(釋尊祭)에는 엄씨(嚴氏) 집안사람끼리 전교(典校자)리를 터물림하듯 이어가며 배정(配亭)한다.

그리고 선조들의 묘를 실전(失傳)한 후손들은 지난 65년 은행나무마을에서 북쪽으로 2km 남짓, 봉래산(蓬萊山) 줄기 동산(東山)에 시조의 제단을 봉축(奉築), 혼백을 모시고 매년 10월 1일 전국의 문중이 모여 제정(祭亭)을 받들며 장릉(莊陵)ㆍ창절사(彰節祠)ㆍ충의공(忠毅公)묘소ㆍ은행나무가 있는 마을을 두루 돌며 선조들의 얼을 되새긴다.

◆ 주요 집성촌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능리
강원도 영월군 남면 북상리,조전리

겅원도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 팔괴리
함남 함주군 지곡면 흥서리

강원도 영월군 북면 문곡리

◆ 영월 엄씨(寧越 嚴氏)의 항렬(行列)

 



* 항렬(行列)은 위와같이 세(世)에 따라 다르므로, 정해진 대로 이름을 지을 경우에는 이름만 보아도 시조로부터 몇 세손(世孫)인지 알 수가 있으며,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에도 같은 성씨(姓氏)이면이 항렬을 따져보아 손 위 아래를 알 수 있다.

* 항렬(行列)자는 세(世)가 바뀔 때마다 이름의 앞 또는 뒤에 번갈아 쓰는 것이 보통입니다만, 이름의 앞 뒤를 가리지 않고 이름의 한곳이라도 항렬자가 들어 가도록 쓰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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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은하수 | 작성시간 08.05.14 아주 좋은 자료 올렸구나..둘째 고맙다.
  • 작성자희재파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5.31 이쪽 저쪽 검색해서,, 자료를 모아서,, 새롭게 편집한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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