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o Bang은
하노이 북동쪽으로 273 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중국 국경과 접해있는 시골 성으로 인구는 약 5만정도라 한다.
하노이에서 접근하는 길은 타이 응웬에서 오는길과
랑선을 통해서 오는 길이있고 하노이에서 시간은 8시간이상 걸린다.
카오방은 해발고도가 높아서 날씨가 시원하고
라오까이 보다 안개와 비가 적어 쾌적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 카오방의 감자 시험포장>
카오방에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우리는 감자사업을 하는데 우기에는 감자를 재배할 수 없는 기후적 특성과
우기가 시작되면 모든 농사는 논농사 위주로 전환하기 때문에
감자의 연중 공급에 문제가 있어 보다 수확시기를 늦추어 보려고
자료를 수집하고 지역을 찾다보니 카오방이 그래도 기후적으로 안정한 것을 알게되어
감자 시험재배에 들어가게 되었다.
몇번 찾아가 공을 드리고 현 정부 농업국장을 만나
사업설명회를 열고 감자 농사를 짖기로 하여
시험에 들어가게 되었다.
마침 시험이 위 사진과 같이 성공적으로 잘되어
현정부에서도 좋아하면서 내년에는 면적을 많이 늘려줄것을 요구하였다.
몇 군데 애끓는 시험재배 지역을 개발하고
시도하여 겨우 이 한 지역이 성공적으로 열매를 맺는 순간이어서
감개가 무량하고 그동안의 힘듬이 사라지고
앞으로의 희망을 설계할 수 있어 속으로 하늘님께 감사드리고 고마워 했다.
마침 한구절의 농부의 마음을 노래한 글귀가 떠올라 적어본다.
"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는 것은
가을에 풍년을 확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가뭄과 흉년 따위를 걱정해서
마땅히 할 일을 미루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농부의 할일을 잘 표현한 말인가.
농부는 하늘과 교감하여 일하는 천직이어야한다고 다시한번 생각하면서
자연과 천재 지변과 싸워 고난을 이겨내고
생명의 먹거리를 생산해 내어 생명을 살리는 이직업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가?
농부의 끈질긴 정신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농부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해줄 수 있는지 고민을 많이해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기분이 좋고
성 정부의 농업관계자를 만나 이야기 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해서 약속시간이 4시간 가량 미루어져서
주위의 관광지를 보기로하여 결정한 곳이 이곳 Pac Bo 호치민 동굴이었다.
<팍보 동굴 입구 저자거리>
카오 방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반 약 60킬로미터 떨어져있다.
이곳은 호치민께서 프랑스와 러시아와 중국 유학을 마치고
1941년~ 1943년까지 3년간 머문곳으로
베트남 공산당 인민위원회를 창립할 수 있는
사상을 정립한 곳이라한다.
< 동굴 주차장 앞 가기전 맑은 냇물>
이곳에 올려면 약 3킬로 정도 떨어진 호치민 박물관에서 1만동 입장료를 지불하고 와야한다.
< 동굴 가기전의 맑은 시냇물>
주위에 조그만 밭들이 있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 호치민 낙시터>
동굴앞에 있는 개울로 물이 맑고 이곳에서 호아저씨는 낚시를하면서
세상을 낚을 생각을 하게 되고 자기의 철학을 담금질 하던 곳이었나 보다.
< 동굴내부>
동굴은 약 2평정도 공간이 있었으며
천장위로는 다른 동굴이 있어 유사시에 중국으로 도피할 수 있는 연결로가 있다고 한다.
이때는 프랑스 지배를 받고 있었던 시기이며
일본의 동남아 점령시기였었다.
<동굴 내부 탁자>
돌 위에 판자하나 언져 놓은 검소한 탁자에서
동굴 속에 움거하면서 자신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조국 사랑에 대한 시를 쓰고
어떻게 하나의 베트남을 만들 수 있는지 통일 조국을 꿈꾸고 설계했으리라.
또한 이곳에서 정약용선생이 지은 목민 심서를 정독하면서
목민관으로서의 검소한 생활관과 목민관을 읽히고 배웠으리라
< 샘 솟는 개울물>
이곳은 동굴앞에 있는 개울로 물길이 끊어진 상태에서 땅속에서 물이 솟아나며
개울의 시초가 되고 있었다.
이곳 암석들은 석회암지대로 수많은 동굴이있고
물이 갑자기 사라졌다 솟구치는 곳이기도 하였다.
솟아나는 물을 바라보며 베트남의 조국사랑이 솟아나고 있었으리라.
솟아난 다는 것은 새로움이며 맑고 깨끗하고 신성한 것일 것이다.
이곳에서 베트남의 새로운 시작이 솟는 물과 같이 되었음을 알수 있었다.
< 옹이진 나무>
무릇 나무들이 모두다 옹이을 가지고 있다.
옹이는 그 세월만큼의 아픔이고 시련이지 않는가.
보다 큰 재목이 되기위해서는 가지를 치고 위로 뻗어나가야 한다.
그만큼 옹이가 많을 수록 높이 뻗는 나무가 된다.
옹이는 아픔이기 이전에 삶의 정수요 나무의 사리라 생각해본다.
<나무밑의 돌책상>
하나 꾸미지않는 자연그대로를 이용해서 책을 읽고 시를쓰고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셨으리라. 그의 검소하고 소박함이 묻어나 있었다.
< 중국과 국경 표시판>
이길이 중국과 베트남의 국경이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같이 철조망으로 쳐있지않고 자연 그대로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양쪽 국가 모두 지키는 병사도 없이 평화로운 국경을 보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서로 묵시하고 지키지 않는 곳에서 자연적인 국경이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였다.
<칼 마르크스 산>
동굴앞 개울을 레린계곡 뒷 산을 칼 마르크스 봉우리라 한다.
사회주의 사상을 집대성한 레린과 마르크스가 이곳에서도 살아잇음을 느꼈다.
레린 개울을 따라 떠내려 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솟구쳐 오르는 물이 솟구쳐 오른 사상이 흘러흘러 대지를 누비고 옥토를 가꾸었으리라.
혼자 흘러가는 나뭇잎은 외로울 지라도 그 외로움이 지독한 검소한 생활과
인민을 잘살게 하려는 조국에대한 뜨거운 사랑을 담고 잇다면
절대 외롭지 않았으리라.. 그 외로움은 사람을 살리는 자신을 버리는 텅빈마음, 무심이었으며
무심이 흘러 통일베트남을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한사람의 알찬 생애가 얼마나 귀중한지를 알수있을 것 같았다.
소용돌이 치는 개울물도
소용돌이 쳐야만이 물속에 산소가 녹아나서 생명을 살리는 생명ㄱ수사 될 수 있으니
어찌 소용돌이라고 마다할 수 잇으랴.
부디끼고 같이 나눔은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 존재하니 같이 아픔을 느낄때 만이 진정으로 하나됨을 느낄 것이다.
< 개울 옆에 핀 베트남 찔레꽃>
관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개울가에 찔레꽃 한송이가 피어있었다.
찔레꽃...
어렸을때 초등학교 가는 길 담장에 찔레꽃 나무가 있었다.
봄이되면 새 순이 돋아나고
돋아난 어린 싹을 잘라 먹었던 기억이 생각난다.
단맛도 없이 씀쓰레한 맛이
그래도 군것질 할 것도 없었던 어린시절의 군것질이었으니
정감이 가며 찔레꽃 같이 살가가신
호아저씨를 생각하며 이글을 정리해본다.
참고로 이곳에서 부터 호치민 루트길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경란(耿蘭) 작성시간 12.09.28 호 아저씨!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
작성자보강 작성시간 12.09.28 사진 감사합니다. 늘 건강 가득하소서. 아미타불 _()_
-
작성자瑞彌(오혜식) 작성시간 12.09.29 베트남 구경할 수 있게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굽신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
작성자寂滅 작성시간 12.10.02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
작성자도안 작성시간 14.07.31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과 관련된 다양한 유적지를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