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소야小野의 옹달샘

현실

작성자소야(小野)|작성시간26.06.12|조회수38 목록 댓글 6

옹달샘:
현실은
허상이기에 아름답습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생명이
담겼습니다.

인간에게 현실은
존재의 기준점으로
거부하기엔 너무 명확히 각인되어
있지요.

언제나 접하기에 너무 당연하고
보편의 마당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각자에게
동일하지 않다고 생각해보았거나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요.

그럼에도 일상은
이런 생각들을 강하게 무시합니다.

하나의 운동장,
같은 트랙에서
동료와 경쟁하고 있는 것이
자신의 모습이지요.

단일 플랫폼에 대한 인식은
의식의 발달 과정에서
특정 지점을
지나야만 가능합니다.

우리 측정 능력의 제한으로
어느 지점이라
명시할 수 없지만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고
외부 대상들의 관계성이
일정 수준 형성되어야
가능한 것으로 유추됩니다.

단순한 단세포 쪽으로 갈수록
자기 중심성이 강하기에

외부 세계는 모두
자신의 감각에 종속되지요.

이러한
단일 꼭지점으로 형성된 세계도
단일 플랫폼의
한 형태라 할 수 있으나

이것은
지금 논제가 되고 있는 것과는
다른 형태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세계는
하나의 꼭지점

단일 주관으로만 닫혀있는 차원이
아니지요.

우리의 것은
무수한 꼭지점이
하나의 마당에 흩어져있는 형상입니다.

무수한 개별 주관들이
세상이라는 단일 마당에서 놀고 있으며

주관은 여러 개가 허용되어도
그 마당은
한 개로 인식되고 있지요.

이것을
'객관의 세계'라 명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현대 인간 의식은
세상이 객관의 단일 플랫폼이 아님을
알고 있지요.

'상호 주관성'에 의한
교집합을 통해
소통이 형성되는 통로가 있을 뿐입니다.

24시간 붙어 생활하는 부부라도
단일 플랫폼의 세상이
존재하지 않음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같은 꽃을 보고
서로 환하게 마주보며 웃어도

두 사람이 인식하는
그 꽃의 빛깔은
정확히 동일하지 않습니다.

감각질qualia이
동일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인간에게 있어 감각 정보는
세상을 구성하는
재료입니다.

소통을 위한 동일성의 영역은
존재하지만

감각질이라는 재료는
원천적으로 동일하지 않지요.

그러므로
각자가 보고 느끼는 세상은
현상계에
모두 유일한 차원이며 영역입니다.

우리가 아는 세상을
은유하자면

허공에 수 십억 개의 거품 방울이
떠 있는 것과 같지요.

소통은 되지만
각기 독립된 차원들입니다.

다차원의 개념은
여러 측면을 지녔으나

이 요소 또한
현상을 다차원이라 하는 이유이지요.

전통적으로 이해하듯
단일 플랫폼 안에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 있습니다.

인류는
이미 수 십만 년 그렇게 살아왔지요.

그러나
현상의 미세한 특성을 느끼거나
영성 훈련을 하는 이들은

단일 플랫폼의 세상을
깨고나오지 못하면

더 이상의 진전이나
모호함의 출구를 찾을 수 없습니다.

허공에 떠 있는 거품 방울의 은유에서
허공은
배경의식에 해당합니다.

배경이
이제 단일 플랫폼으로 역할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아메바 수준의 단일 주관성을
꼭지점으로 하는
단일 플랫폼과는 다릅니다.

배경이라는 마당에는
절대 권력을 지닌
유일한 주관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아메바의 주관성은
그 영역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배경은
모든 난립하는 주관성을
그저 허용할 뿐이지요.

우주 공간은
다양한 별들을 그저 허용합니다.

영성에서
닦음이 지향하는 것은

거품 방울을 허상으로 규정하고
바늘로
터뜨려 없앤 뒤

무색무취의 배경만을
남기려는 결벽주의가 아닙니다.

과거
왜곡된 불교의 지향점 중에는

무색무취
곧 현상을 배제하고
비현상만을 쫓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무욕無慾 혹은
더 이상 거품으로 발현하지 않는
윤회의 단절을
갈망하는 경향이었지요.

생체를 가진 인간현상 안에서
이미
무아無我에 이르렀다면

굳이
윤회를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윤회를 걱정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이
무아無我일까요?

윤회를 걱정하는 이에게
'제법무아'는
영원히 구현되지 않습니다.

왜곡의 출발은
생체 속에 자신을 가두었기 때문이지요.

터뜨려 단절해야 할 것은
생체가 아니라

고정된 '나'가 존재한다는
생각의 거품입니다.

마음이 지옥이기에
생체의 윤회를 단절하고자 하지요.

무능과 열등 의식이 가득하기에
신통이라는 능력을
갈망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아는 붓다는
신통을 하고
윤회하지 않는 결벽주의자이지요.

신통을 갈구하는 차원과
무아無我의 차원은
이미
비교의 수준이 아닙니다.

닦음의 관점에서
주관이라는 거품 방울은
부정적 의미로 평가되는 허상이 아닙니다.

단지
고정된 불변이 아니기에
허상이라고
또는 현장의 발현이라고 할 뿐이지요.

모든 현상은
원래 일회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닦음에선
허상은
창조로 치환될 수 있지요.

없던 것이
생겨났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변화하고 사라집니다.

왜 이런 아름다움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일까요?

왜 윤회를
없애고, 지워버려야 할 무엇으로
여길까요?

부분적이긴 하지만
불교 내에서 윤회는
기독교의 '원죄'와 같은
지위나 위치를 지녔습니다.

인간에게 낙인된 오염의 근원,
신이 만든 실패작이나
현상의 배설물 같은 것이지요.

바라보는 그의 눈이
부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고통의 색안경으로 보면
모든 것이 고통이지요.

그에게
고통 외에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지옥이지요.

지옥은
그것을 창조한 자에겐 현실입니다.

끊임없는 변화의 현상은
아름답습니다.

어느 교단의 경전엔
창조된 세상이 아름답다 기록되어
있지요.

거품의 현실은
단일하지 않습니다.

현실의 아름다움은
볼 눈이 있는 자에게만 보입니다.


한적한 광장 청량한 음률
관객의 세상 저만치 있고
이만치 있는 달리는 악보
바닥 드리운 혼란만 짙네.
               ..260612小野

AI 이미지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瑞彌(오혜식) | 작성시간 26.06.12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 작성자보명화 | 작성시간 26.06.12 감사합니다. _()_ 아미타불
  • 작성자유현식 | 작성시간 26.06.12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 작성자향림(세화) | 작성시간 26.06.12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 작성자하얀그림자 | 작성시간 26.06.13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