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의 시간
카를로 로벨리 Carlo Rovelli
"다른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개개인에 맞는 고유한 시간의 리듬이 있다"
들어가는 말: 이 세상의 가장 거대한 신비는 시간
물고기가 물속에서 사는 것처럼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우리 존재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시간의 哀歌는 우리의 영양분이 되고, 우리에게 세상을 열어주며,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한편, 편안한 요람이 되어주기도 한다.
세상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시가인 이끌어가는 일들을 펼쳐나간다. 시간의 특성은 세상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신비일 것 같다.
게다가 사물의 본성이나 우주의 기원, 블랙홀들의 운명, 생명의
작용처럼 이 세상에 펼쳐져 있는 또 다른 거대한 신비들은 묘하게 시간의 신비와 엮여 있다. 본질적인 무엇인가가 우리를 계속해서 시간의 본성으로 이끌고 있다.
시간의 경이로움은 ‘알고자 하는’ 우리 욕구의 원천이 되었다.
1부 시간 파헤치기
우리는 보통 시간이 단순하게, 기본적으로 어디서든 동일하게,
세상 모든 사람의 무관심 속에 과거에서 미래로, 시계가 측정한
대로 똑같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주의 사건들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순서대로 벌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과거는 정해졌고, 미래는 열려 있고…….
하지만 이 모두가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시간에 특징적인 양상들 하나하나가 우리의 시각이 만든 오류와 근사치들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이 성장하면서 시간에 대한 개념은 서서히
베일을 벗게 되었다.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구조들,
즉 층들이 복잡하게 모인 것이다.
점점 더 깊이 연구가 진행되면서,
시간은 이 층을 하나둘씩 한 조각, 한 조각 잃어왔다.
광활한 우주에 우리가 합리적으로 ‘현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간의 간격을 결정하는 토대는 세상을 이루는
다른 실체들과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역동적인 장의 한 양상이다. 이 역동적인 장은 도약하고
요동치며 상호 작용할 때만 구체화되며, 최소 크기 아래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01 유일함의 상실
시간 늦추기:
시간은 산에서 더 빨리, 평지에서는 더 느리게 흐른다.
어떤 곳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어떤 곳에서는 빨리 흐른다.
이처럼 시간이 지연된다는 사실을, 미세한 시간의 차이를 측정할 수 있는 시계가 나오지 전에 시간이 균일하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아낸 사람이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연구할 때, 자신에게 던진 질문
태양과 지구가 서로 접촉을 하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아무것도 없는데 서로 중력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태양과 지구가 직접 서로 끌어당기지는 않지만, 양쪽 모두 둘 사이에 있는 그 무엇인가에 서서히 반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공간과 시간만 있으므로 태양과 지구가 각자 주위의 공간과 시간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했다.
마치 어떤 물체가 물속에 잠기면 주변의 물이 흐트려지듯이,
시간의 구조가 변경되면 모든 물체의 운동에 영향을 끼치고,
그들이 서로를 향해 '떨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시간의 구조를 변경한다’는 것은 바로 시간의 지연을 뜻한다.
모든 물체는 자기 주위의 시간을 더디게 한다.
지구도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주위의 시간을 늦춘다.
산에서 시간이 덜 지연되는 것은 산이 지구의 중심과 좀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체가 떨어지는 것도 이런 시간의 지연 때문이다.
행성 사이의 공간처럼 시간이 동일하게 흐르는 곳에서는 물체가
추락하지 않고 떠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지구 표면에서는 사물이 자연스럽게 시간이 더 느리게 흐르는 쪽으로 향한다.
두 발이 바닥에 붙어 있다면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으로 온몸이 이동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때 발 쪽의 시간은 머리 쪽의 시간보다 더 천천히 흐른다.
이상한가? 우리 인간은 석양이 질 무렵 태양이 황홀한 모습으로 가라앉기 시작해 저 먼 구름 뒤로 서서히 사라지는 광경을 보면서 움직이는 것은 태양이 아니라 지구라는 것을 알아냈다.
춤추는 만 명의 여신:
사물은 필요에 따라
이것에서 저것으로 변화하고,
그것들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정당화된다.
- 아낙시만드로스
천문학과 물리학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들을 이해하라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지침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고대 천문학은 ‘시간 속;에서의 별들의 움직임에 대해 설명했고,
물리학 방정식들은 사물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바뀌는지를 설명한다. 방정식들은 시계로 측정된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사물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설명해 준다.
하지만 여러 다른 시계가 다른 시간을 가리킨다면 어느 시간이 t를 가리킬까?
화폐의 경우, 정확한 가치란 없다. 두 화폐는 서로 상대에게 비교되는 가치를 지닐뿐이다. 마찬가지로 더 진짜에 가까운 시간도 없다. 서로에 대해 상대적으로 변화하는 시간들일 뿐이다.
두 개의 시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시간이 존재한다. 공간 속의 모든 지점마다 다른 시간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모든 시계에는 각자의 ‘고유 시간’이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도 고유한 시간, 고유의 리듬이 있다.
이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 그려진 시간의 모습이다.
물리학은 사물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이 각자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진화하는지,
‘시간들’이 어떻게 서로 다르게 진화하는지를 설명한다.
즉, 시간은 첫 번째 층인 유일함을 상실했다.
모든 장소의 시간은 다른 리듬과 속도를 갖는다.
다양한 리듬의 춤 속에서 세계의 사건들이 얽힌다.
세상이 춤추는 생명의 여신으로부터 지배를 받는다면 최소한 만 명의 여신이 있어야 할 테고, 그 여신들의 춤은 마티스의 그림처럼 거대한 군무로 펼쳐질 것이다.
Henry Matisse 1869-1954(Dance II)
02 방향의 상실
시간은 모두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
릴케는 “영원한 흐름은 언제나 양쪽 영역을 통해
그 안에서 모두를 압도하면서 모든 시대를 이끌고 간다"라고 읊었다.
과거는 미래와 다르다. 원인은 결과에 선행한다.
과거는 우리가 바꿀 수 없다.
후회와 회한, 행복한 기억 같은 것만 간직할 수 있다.
반면 미래는 불확실하고 욕망과 불안이 교차하며,
어쩌면 미래 자체를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미래를 살 수 있고,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다. 미래에는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다....
시간은 양쪽영역으로 똑같이 뻗은 선이 아니다.
끝부분이 서로 다른 화살표이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보다 이 점이 더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핵심이다.
열:
모든 아담의 후예는 한 몸을 형성하며
동일한 존재다.
시간이 고통으로 그 몸의 일부를
괴롭게 할 때
다른 부분들도 고통스러워한다.
그대가 다른 이들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인간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 카르노
물체는 반동으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도 있지만,
열은 그 차가운 물체에서 뜨거운 물체로 이동할 수 없다.
그런데 시간의 화살표는 열이 있을 때만 나타난다.
이처럼 시간과 열은 아주 깊은 관계에 있는데, 과거와 미래 사이에 차이가 나타날 때마다 열이 관여한다. 만일 거꾸로 진행한다면
터무니 없어지는 모든 현상에는 열과 관련된 것이 있다.
열은 뒤섞음에 의해 뜨거운 쪽에서 차가운 쪽으로 이동할 뿐
그 반대로 이동하지 않는다. 자연의 무질서가 증가한다는 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으로, 언제 어디서나 친숙하게 일어난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자연스럽게 무질서해져서 특수하거나
특별한 상황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다.
질서정연한 상태는 ‘엔트로피가 낮은’ 구성이다.
그런데 ‘특수성’의 개념은 세상을 대략적으로,
희미하게 바라볼 때만 만들어진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이 희미함과 깊이 연결돼 있다.
사물의 미시적인 상태를 관찰하면, 과거와 미래의 차이가 사라진다. 사물의 기본 문법에서는 ‘원인’과 ‘결과’의 구분이 없다.
대신 서로 다른 시간에서의 사건들을 연결하는, 물리 법칙들에
의해 표현되는 규칙성이 있는데, 여기서 미래와 과거는 서로 대칭적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거와 미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시간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약화시킨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을 특징짓는 모든 현상은 이 세상의 과거에서 ‘특정한’ 상태로 환원되며, 그 ‘특정성’은 우리의 희미한 시각에서 기인한다는 증거가 있다. 볼츠만이 알아낸 엔트로피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희미한 시각이 식별하지 못한 미시적인 상태들의 수일뿐이다. 볼츠만은 시간의 흐름에는 본질적인 어떤 것도 없으며, 과거의 한 시점에서 우주의 불가사의한 불가능성이 희미하게 반영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위에 인용한 릴케의 《비가》에 나오는 영원한 흐름의 원천이다.
영원한 흐름은 언제나
양쪽 영역을 통해
그 안에서 모두를 압도하면서
모든 시대를 이끌고 간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나의 느낌이 이렇게 생생하고 명확하고 실존적인데,
내가 이 세상을 상세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시간의 흐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인가? 나의 근시안 때문에 오류 같은 것이 생긴다는 것인가?
내가 정말 수십억 분자들이 어떻게 춤을 추는지 정확하게 관찰하고 이것을 염두해 둔다면, 미래가 과거와 '똑같이' 펼쳐지는 것인가?
과거의 지식을 미래의 지시고가 똑같이 소유할 수 있을까?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직관이 틀릴 때가 많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세상이 우리의 직관과 그토록 크게 다를 수 있을까? p43
03 현재의 끝
아인슈타인은 시간이 질량에 의해 늦춰진다는 것을 깨닫기 10년 전에, 시간이 속도 때문에 늦춰진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다. 현재로서 ‘지금’을 따지기는 불가능하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여기서 현재와 지금이라 여기는 것에
대응되는 특별한 순간이 없다.
우리의 ‘현재’는 우주 전체에 적용되지 않는다.
현재는 우리와 가까이 있는 거품과 같다.
이 거품의 적용 범위는 얼마나 정확하게 시간을 규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은 고작해야 10분의 1초 정도를 간신히 구분할 수 있으므로 지구라는 행성 전체를 하나의 거품에 비유하고, 그 속에서의 현재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가장 먼 거리의 범위다.
그곳엔 우리가 볼 수 있는 사건 이전에 일어난 일들인 과거와 지금 여기서 불 수 있는 순간 이후에 일어나게 될 일들인 미래도 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시간의 간격이 존재한다. 이 간격은 화성은 15분, 프록시마b는 8년, 안드로메다 은하는 수백만 년에 이른다. 이 간격은 현재의 확장이다.
우주 곳곳에 잘 정의된 ‘지금’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환상이자
우리 경험의 부적절한 外揷이다. 우주에는 같은 순간이라고 규정된 시간이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른 두 행성에서 벌어진 사건이 ‘같은 순간’에 발생했는지 묻는 질문은 잘못된 것이다. ‘우주의 현재’는 의미가 없다.
현재가 없는 시간 구조:
친자 관계로 설정된 순서와 같은 ‘부분 순서’는 몇 가지 요소들
간의 선후 관계는 정할 수 있지만, 모든 서열을 정리할 수는 없다.
이는 우주의 시간 구조와 흡사하다.
‘시간적인 선행’ 관계도 원뿔형으로 이루어진 부분의 순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완전’하지 않고 ‘부분’적인 우주의 사건들 간의 순서를 정의하는 특수상대성 이론이 우주의 시간 구조가 조상도 자손도 아닌 사람들이 존재하는 친척 관계와 같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확장된 현재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사건들 전체를 뜻한다.
우주의 모든 사건과 그 사건들의 시간 관계에 대한 표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구분하는 단 하나의 보편적 기준으로는 불가능하다. 공통적인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장소에 따라 달라 시공간의 구조는 정리된 상태가 아니라 혼란스러울 수 있다.
블랙홀에서 벗어나려면 현재로 이동해야 하는 데 이는 불가능하다. 블랙홀은 주위의 모든 것을 미래 속의 공간 영역에 가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04 독립성의 상실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에서도 시간을 탄력적이다.
인간은 수 세기 전에 시간을 하루 단위로 ‘나누었다’.
또한 인간은 수 세기 전에 하루를 시간 단위로 나누었다.
고대 세계에도 해시계나 모래시계, 물시계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일상생활을 계획할 때 사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13세기가 되어서야 유럽에서 사람들의 일상이 기계식 시계를 통해 조율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간은 서서히 수학자들의 손으로 옮겨간다.
시계의 유용함은 모두에게 같은 시간을 표시해 준다는 것이다.
전신이 나오고 이동 수단이 발달하면서,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할 때 시계를 맞추는 일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런 불편의 해소를 위해 시간을 표준화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해, 1883년에 전 세계에 ‘시간대’를 설정하고 각 시간대 내에서만 동일한 시간을 표준화하기로 타협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시계의 동기화를 받아들인 지 몇 해 되지 않았을 때, 특허사무소에서 기차역들의 시계 조율과 관련한 특허 업무를 담당했던 아인슈타인은 시간의 정확한 동기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시간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문제 삼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이
변화의 척도라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그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이고, 시간은 변화의 척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우리 내면에서 흐른다고 인지한 시간도 움직임의 척도라고 하였다. 하지만 뉴턴은 이와 정반대로 상대적이고 명백하며 통속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뿐 아니라 사물이나 사물의 변화와 상관없이 ‘진짜’ 시간은 흐르고, 모든 사물이 멈추고 우리 영혼의 움직임마저 얼어붙어도 ‘진짜’ 시간은 냉정하고 동일하게 계속 흐른다고 보았다.
시간뿐 아니라 공간에서도 뉴턴은 다른 방식의 개념을 제안했다. 뉴턴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위에 있는 것들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정의한 공간이 “상대적이고 겉보기이며 통속적이다”라고 주장하고, 공간 그 자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존재하는 공간이 “절대적이고 참되며 수학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공기와
양자와 같은 물리적 존재자의 존재는 헤아리지 않고 자신들이 믿음대로 공간을 정의해버렸다.
세 거인의 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과 뉴턴의 시간은 아인슈타인의 연구로
통합되었다. 뉴턴의 시간과 공간이 실재하지만, 뉴턴의 생각과는 달리 모든 사물을 이루고 있는 물질들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중력의 근원인 중력장과 같이 모든 장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시공간은 이러한 장들 중 하나인 것이다.
뉴턴은 완벽한 평면인 중력장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유클리드 기하학이 적용되는데, 중력장은 탄력성이 뛰어난 거대한 종이와 같다. 이 중력장 캔버스가 펼쳐지거나 굽는 것은 중력의 기원이자 사물 낙하의 원인이 되는데, 이는 뉴턴의 고전 중력 이론에 비해 중력과 낙하 현상을 훨씬 더 잘 설명해 준다.
이를 확장하면 시공간이 뒤틀린 ‘휜’ 시공간이라 부를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시간은 공간 기하학과 함께 구성된 복합적인 기하학의 일부가 된다.
이 세 거인들 덕분에 우리는 중력장이라는 실제적인 구조가 존재하고 이것이 다른 물리학과 동떨어지지 않으며, 세상이 그냥 한번
흘러 지나가는 무대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중력장은 다른 것들과 상호 작용을 하면서, 우리가 미터기나
시계라 부르는 것들의 리듬과 모든 물리적 현상의 리듬을 정하는, 이 세상을 구성하는 역동적인 요소다. 그런데 한 가지 남은 문제가 있었으니, 중력장도 다른 모든 사물들처럼 양자적 특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05 시간의 양자
여러 이론들이 있지만, 확실해진 것은 일반상대성 이론의 나머지 시간 구조도 양자를 개입시키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양자역학 덕분에 얻은 발견은 물리적 변수의 입자성과 미결정성, 관계적 양상이다. 이 세 가지 모두 우리에게 남아 있던 시간에 대한 개념을 최종적으로 무너뜨렸다.
입자성:
시계로 측정한 시간은 ‘양자화’ 되어, 특정한 값만 취하고 다른 값들은 없는 것이다. 모든 현상에는 최소 규모가 존재하는데, 중력장에서는 이 규모를 ‘플랑크 규모’라고 부르고, 최소 시간은 ‘플랑크 시간’라 한다. 10-44초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 시간의 양자 효과가 나타난다. 시간의 ‘양자화’는 시간 t의 거의 모든 값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시간의 ‘최소’ 간격이 존재하는데 이 간격 이하로 내려가면,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보더라도 시간으로서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입자성은 자연에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플랑크 시간’의 공간적 자매는 ‘프랑크 길이’로 약 10-33센티미터이고, 이 최소 한계 이하의 길이는 의미가 없다.
시간의 양자중첩:
양자역학의 두 번째 발견은 불확정성이다. 이는 전문 용어로 위치의 ‘중첩’이다. 시공간은 전자와 같은 물리적 물체다.
시공간도 파동처럼 흔들리며 다양한 형태로 ‘중첩’될 수 있다.
시공간이 중첩되면 한 입자가 공간에서 널리 퍼질 수 있듯이,
과거와 미래의 차이도 흔들릴 수 있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의 전과 후 모두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관계들:
‘요동’이란 아무것도 결코 결정되지 않는다는 의미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특정한 순간에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결정된다는 의미다. 이런 미결정성은 하나의 양이 다른 양과 상호 작용할 때는 해소된다.
2부 시간이 없는 세상
바람이 부는 텅 빈, 속세의 흔적은 거의 사라진 듯한 풍경,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다.
이상하고 멀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우리 세상이다.
이 세상을 보면 마치 눈과 바위, 하늘만 있는 높은 산을 오르는
느낌일 것이다.
달에서 움직임이 전혀 없는 모래를 체험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어쨌든 마지막에 남은 세상은 무미건조하고 황량한 불모지가 오히려 아름답게 빛나는, 원초적인 곳이다.
양자중력을 연구하는 물리학은 이 극단적이지만 너무 아름다운
풍경, 즉 시간이 없는 세상을 파악하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
06. 사물이 아닌 사건으로 이루어진 세상
- 세상을 사건과 과정의 총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가장 잘 포착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 :
상대성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이다(p.105)
사물과 사건의 차이는, 사물은 시간 속에서 계속 존재하고,
사건은 한정된 지속 기간을 갖는다.
예컨대 사물의 전형은 '돌' 이다.
내일 돌이 어디 있을 것인지 궁금해 할 수 있다.
반면 입맞춤은 사건이다.
내일 입맞춤이라는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날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상은 돌이 아닌 이런 입맞춤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다 (p.106)
세상이 사건의 네트워크라고 생각하면 작동한다.
아주 간단한 사건이든 복잡한 사건이든 더 단순한 사건들의 조합으로 분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쟁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들의 총체이다.
폭풍우도 사물이 아니라 돌발적인 사건들의 집합이다.
산 위의 구름도 사물이 아니다.
공기 중의 습기가 응결된 것을 바람이 산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파도도 사물이 아니라 물이 움직이는 것이고,
이 물은 언제나 다른 모양을 만든다.
가족도 사물이 아니라 관계와 사건, 느낌의 총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당연히 사물이 아니다.
산 위에 걸린 구름처럼 음식, 정보, 빛, 언어를 비롯한 수많은 것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복잡한 프로세스다.
사회적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 화학적 프로세스의 네트워크 속에, 자신과 비슷한 타인들과 교환한 감정의 네트워크 속에 있는 수많은 매듭들이 인간 안에 존재한다. 사물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연구하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p.107-108)
- 물리학과 천문학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사물이 아니라 사건을 다루고 있다. 원자의 형태는 결국 전자들이 원자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설명하는 슈뢰딩거의 방정식에서 나온 답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방정식 역시 사물이 아닌 사건을 다루는 것이다(p.110)
뉴턴 역학과 맥스웰 방정식, 양자역학 등도 사물이 어떠한지가
아니라 사건이 어떻게 벌어지는가를 설명한다.
우리는 생명체가 어떻게 진화하고 살아가는지 연구하면서 생물학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서로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연구하면서 심리학을 이해하고, 세상의 존재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세상을 이해한다. 이렇듯 사물 자체도 잠깐 동안 변함이 없는 사건일 뿐이다. 이후에는 먼지로 돌아간다(p.111)
- 시간이 그저 사건을 뜻하는 것뿐이라면, 모든 사물은 시간이다. 시간 속에 있는 것만 존재한다.(p.112)
07 문법의 부적당함
20세기 물리학은 우리 세상이 ‘현재주의’라는 방식으로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객관적이고 범세계적인 현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대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움직이는 관찰자의 관점에서 보는 현재다.
그런데 이 경우 나에게 실제인 것과 다른 사람에게 실제인 것이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을 믿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이 집요하게 계속되는 착시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라는 말은, 우주의 역사는 모두 다 똑같이 실재하는 하나의 블록처럼
생각될 필요가 있고, 한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의 흐름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의 ‘블록 우주’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우주를 통일된 단 하나의 시간 순으로 정리할 수
없다고 해서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여러 변화들이 단일한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정리되지 않을 뿐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은 허상이 아니라 이 세상의 일시적 시간 구조다. 그렇다고 현재주의의 시간 구조는 아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
- 현재 언어의 문법은 대부분 동사를 현재와 과거, 미래 시제 형태로 변화시킨다 :
이는 매우 복잡한 세상의 실제 시간 구조에 대해 말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문법은 우리의 한정된 경험에 의해 만들어졌고,
점점 거대한 이 세상의 풍부한 구조를 포착하면서 이러한 문법은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의 혼란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현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오는데, 이는 우리 언어 문법이 부분적으로만 적절한 ‘과거-현재-미래’의 절대적 구분으로 조직되는 데서 기인한다.
현실의 구조는 이러한 문법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 ‘있다’ 라거나 ‘있었다’, 혹은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건이 나와 관련돼 ‘있었지만’ 지금은 너와 관련돼 ‘있다’ 라고 말하기에 적합한 문법을 갖고 있지 않다.
문법이 부적절하다고 해서 혼란에 빠지면 안 된다.
위에 언급한 아인슈타인의 말은 세상의 구조에 대한 위엄을 보여주려 쓴 게 아니라, 형제를 잃고 슬픔에 빠진 마켈레의 누이를 위로하려는 것이었다. 깊은 정이 담긴 편지는 환상과 무상함을 암시하고 있지만 물리학자들의 시간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 편지의 내용은 삶을 그대로 닮고 있다. 약하고 짧고, 환상으로 가득 찬 인생, 그 구절은 시간의 물리적 본질보다 더 깊은 것을 말하고 있다.
08 관계의 동역학
세상을 설명할 대 시간 변수는 없이 우리가 인지하고 관찰하여
결국에는 측정할 수도 있는 양이다. 하지만 사물의 양과 특성은
계속 ‘변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는 규칙이 있다.
따라서 상당한 변수들이 서로서로 충분히 동기화돼 있다면,
‘언제’를 표현할 때 사용하면 편리하다. 양자중력의 기본 방정식들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휘러-다윗 방정식’으로 공식화가 잘 되어 있다. 즉, 시간 변수 없이 변량들 간에 성립하는 가능한 관계들을 나타내면서 세상을 설명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에 대한 설명 없이, 사물들이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서로 어떻게 변화하는지, 세상의 사물들이 서로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기초 양자 사건과 스핀 네트워크:
저자의 루프 양자중력 방정식에도 시간 변수가 없다.
이 이론의 변수들은 물질, 광자, 전자, 원자의 기타 구성 요소들을 형성하는 장들과 중력장을 모두 같은 수준으로 기술한다.
‘그저’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세상에 대한 ‘일관성 있는’ 설명일 뿐이다.
- 세상의 공간성은 입자들 간에 성립하는 상호 작용들의 네트워크 그 자체이다 :
장(fields) 들은 소립자와 광자, 중력 양자와 같은 입자 형태로 나타난다. 이 입자들은 공간 속에 담겨 있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공간을 형성한다. 세상에 공간성은 입자들 간에 성립하는 네트워크에 다름없다. 입자들은 시간 속에 살지 않는다.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며 그런 상호 작용에 의거해서만 입자들은 진실로 존재한다.
이 상호 작용이 세상의 사건이고, 방향도 없고 선형적이지도 않은 시간의 최고 기본 형태다.
그것은 양자들이 다른 양자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호혜적 상호 작용이다. 이러한 상호 작용의 동역학은 확률적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시간의 경과는 언제나 상호 작용하는 그리고 상호 작용과 관련된 물리적 체계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사건들에 대한 완벽한 지도를 그릴 수도, 완벽한 기하학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세상은 서로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관점들의 총체와 같다.
‘외부에서 본 세상’은 난센스다. 세상에서 ‘벗어난’ 것이란 없기
때문이다. 루프 양자중력은 기본적인 공간과 시간 없이 일관성 있는 이론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종류의 이론에서 이제 공간과 시간은 세상을 담는 틀이나 용기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한 형태는 양자 동역학의 근사치일 뿐이며, 그 자체만으로는 공간도 시간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오직 사건들과 관계들만이 존재한다. 기초 물리학의 시간은 세상에 없다.
3부 시간의 원천
시간이 없는 세상에는 시간의 순서, 미래와 다른 과거, 유연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여전히 우리에게 익숙했던 시간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분명 존재한다. 우리의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를 위해, 우리 주위에, 우리의 척도에 맞게 나타나야 한다.
세상의 기본적인 문법에 따라, 1부에서 언급한 잃어버린 시간을
향하는 회귀 여행이다. 이제 우리는 시간을 발생시키는 용의자와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을 구성하는 조각들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 조각들은 실재하는 구조물이 아니며 어설프고 서투른, 그리고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이 관점이나 양상에 따라 근사적으로
만든 것들이다. 왜냐하면 결국, 시간의 미스터리는 우주보다는
우리와 더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발생시킬 범인은 결국
수사관인 우리 인간일지 모른다.
09 시간은 무지
이 세상의 기본 동역학에서 모든 변수가 동등하다면 ‘시간’이러고 부르는 것은 무엇일까? 시간은 시간이 없는 세상에서 등장한다.
- 가까이서, 미시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뿌연 안개와 같다 :
‘위’ 와 ‘아래’ 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지만 세상의 기본 방정식에는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 온 걸까? 우리 주위에서 끌어당기는
땅에서 오는 것이다. '위' 와 '아래' 는 우주의 어떤 상황에서,
예를 들어 근처에 질량이 큰 무엇인가 있을 때 등장한다(p.140)
높은 산에 오르면 흰 구름에 덮인 계곡이 보인다. 구름 표면은 하얗게 빛이 난다. 계곡 쪽으로 걸어가 보자. 공기가 점점 습해지고 뿌옇게 흐려진다. 하늘은 이제 더 이상 푸르지 않고 어느새 구름이
듬성듬성 낀 곳에 다다른다. 선명한 구름 표면은 어디로 간 걸까? 사라졌다. 사라지는 과정은 점진적으로 나타나고, 안개와 고지대의 깨끗한 공기를 구분하는 표면 따위는 없다.
아까 본 것은 환영인가? 아니다. 멀리서 보았던 광경이다.
잘 생각해보면 모든 표면이 그렇다. 단단한 대리석 탁자는 내가
원자 정도의 작은 크기가 된다면, 안개처럼 보일 것이다.
가까이 가서 보면 세상 사물들이 모두 뿌옇게 보일 것이다.
산이 사라지고 평원이 시작되는 곳은 어디일까?
어디서 사막이 끝나고 사바나가 시작될까?
우리는 세상을 커다란 조각으로 잘라놓았다.
우리는 세상이, 중요한 개념들이 상당한 규모로 등장한 곳이라고 생각한다(p.141)
열적 시간:
열 분자들의 격렬한 혼합 과정에서 변화할 수 있는 모든 변수가
실제로 계속해서 달라지지만, 고립계 자체의 총 에너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에너지와 시간은 ‘켤레’라 부르는 독특한 물리량의 쌍을
형성한다. 따라서 어떤 계의 에너지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아는 것과 같고, 에너지가 시간의 흐흠 속에
보관되기 대문에 다른 모든 것이 변화할 때조차 에너지는 변화할 수 없다. 계가 열교란 상태에 있을 때, 그 계는 동일한 에너지를 갖는 모든 배역을 거쳐 지나가고, 그 배열들의 집합은 ‘거시적 평형 상태’다. 시간과 평형 상태의 관계를 해석하는 보통의 방법은 시간을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고, 에너지는 계의 시간에 따른 변화를 관장하고, 평형 상태에 있는 계는 동일한 에너지를 가진 모든 배열을 혼합하게 된다.
거시적 상태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알아야 하고,
에너지를 정의하려면 시간이 무엇인지 먼저 알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관계를 해석하는 다른 방법은 세상에 대한 흐릿한 시각을 말할 뿐인 거시적 상태가, 에너지는 보존하면서 이 에너지가
결국에는 시간을 생성하는 하나의 혼합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은 특권을 갖는 변수가 전혀 없는 기본 물리계에서는 하나의 거시적인 일반 상태가 하나의 시간을 ‘결정’하는 것이다. 상대론적 물리학에서는 그 어떤 변수도 ‘선험적으로’ 시간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거시적 상태와 시간의 흐름의 관계를 뒤바꿀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이 거시적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흐릿한 거시적 상태가 시간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거시적 상태에 의해 결정된 시간을 ‘열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이 열적 시간은 미시적 관점에서는 특별할 것 없이 그저 하나의 변수일 뿐이지만, 거시적 관점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시간’이라 부르는 변수와 가장 유사한 행동 방식을 지닌 시간이다.
왜냐하면 열적 시간과 거시적 상태의 관계는 우리가 아는 열역학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열적 시간이 보편적인 시간은 아니다.
양자 시간:
로저 펜로즈는 상대성에 간한 물리학이 시간의 ‘흐름’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양립 가능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를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아 보인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양자 상호 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우리가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물리적 변수를 측정하는 일은 고립된 행동이 아니며 상호 작용을 포함한다. 이 상호 작용의 영향은 측정 순서에 따라 달라지며,
이 순서는 시간 순서의 기본 형태다. 알랭 콘은 시간의 흐름과 같은 것은 물리적 변수들의 비가환성에 의해 암묵적으로 정의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비가환성으로 인해 한 계에서 물리적 변수들의 집합은 ‘폰 노이만 비가환 대수’라는 수학적 구조를 보인다.
그리고 이런 구조 자체에 어떤 흐름이 암묵적으로 정의돼 있다는 것이다. 알랭 콘이 정의한 양자계에서의 흐름과 앞서 논의한 열적 시간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거시적 상태에 의해 결정된 시간과 양자의 비가환성에 의해 결정된 시간은 동일한 현상의 양상들인 것이다. 근본 수준에서 시간 변수가 존재하지 않는 실제 우주에서 이 열적 시간(혹은 양자 시간)이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변수가 된다. 측정 가능한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다고 해도 사물 속 양자의 본질적인 비결정성이 볼츠만의 희미함처럼 이 세상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은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희미함을 만든다.
- 시간성은 희미함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희미함은 우리가 세상의 미시적인 세부 사항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결국 물리학의 시간은 세상에 대한 우리 무지의 표현이다. 시간은 무지인 것이다(p.148-149)
10 관점
- 우리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한다 :
공간과 시간, 주체의 관점을 무시하고 순전히 ‘외부로부터’ 세상을 설명한다면, 수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겠지만 세상의 중요한 어떤 측면들은 간과하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은 외부에서 본 세상이 아니라 내부에서 본 세상이기 때문이다.
관점의 역할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볼 수많은 것들은 이해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남는다.
어떤 경험을 하든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마음과 뇌, 공간의 어느 지점, 시간의 어느 순간 안에 있다.
세상 속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시간에 관한 우리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이다.
우리는 ‘외부에서 본’ 세계의 시간 구조와 우리가 보는 세상의
측면, 즉 우리가 세상 안에 세상의 일부로 존재함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의 측면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지도를 사용하려면 외부에서 그것을 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지도에 나타난 공간 중 나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
공간적 경험을 파악할 때도 뉴턴의 공간만 생각해선 안 된다.
우리는 그 공간을 우리가 위치한 공간의 내부에서 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시간도 외부에서만 시간을 생각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경험하는 매 순간 우리가 시간 내부에 위치해 있었음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p.161-162)
과거와 미래의 전반적 차이는 세상의 엔트로피가 과거에 낮았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기인할 수 있다.
돌고 있는 것은 우리다!:
인간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자연의 조각들이고,
우주라는 거대한 프레스코화를 채우는 일부분이며, 수많은 것들 중 아주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와 세상의 나머지 사이에는 물리적 상호 작용이 있지만, 그 변수들 중 극히 ‘일부’만 상호 작용을 한다. 세상의 배열이 분명 다른 배열들임에도 우리에게는 동등하게 보이는 이유가 이것이다. 너무 작은 대상이나 너무 거대한 대상과의 물리적 상호 작용은 무시한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희미하다. 이러한 희미함이 볼츠만 이론의 핵심이다.
이 희미함에서 열과 엔트로피의 개념들이 탄생되고, 이 개념들을 시간의 흐름을 규정하는 현상들과 연결되어 있다.
희미함은 전신적이 구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상호 작용의 영향을 받고, 엔트로피는 임의의 주관적인
양이 아니라 속도처럼 ‘상대적인’ 양이다.
세상의 엔트로피는 세상에서 우리가 속한 부분과 상호 작용하는
변수들의 영향을 받는다. 우주 초기의 낮은 엔트로피, 즉 시간의 화살은 우주보다는 ‘우리’로 인한 것일 수 있다. 회전하는 것이 우주가 아니라 우리이듯 시간의 화살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우주 초기의 낮은 엔트로피는 우리가 우주와 상호 작용을 하는
특별한 방식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우주 전체가 과거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의 ‘특별한’ 배열 상태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지만, 우주에 ‘특별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만약 우주의 어느 부분이 특별하다면, 이 부분의 관점에서 과거에 우주의 엔트로피는 낮고 열역학 제2법칙이 성립하게 된다.
기억이 존재하고 흔적이 남으며, 삶과 사고의 진화가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은 우주의 특징이 아닐 수 있다.
하늘의 회전처럼, 우주의 한 모퉁이에 박혀 있는 우리가 갖고 있는 특별한 관점에 기인하는 것이다. 사과가 나는 곳의 사람들은 사과주를 마시고 포도가 나는 곳의 사람들은 포도주를 마시듯,
우주의 방대한 다양성 속에는 낮은 엔트로피를 정의하는 특별한
변수들을 통해 세상과 상호 작용하는 물리계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계들과 관련하여 엔트로피는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시간의 흐름과 관계있는 전형적인 현상들은 아무 곳이나가 아니라 바로 이런 곳에 있다. 진화와 더불어 시간의 흐름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자각, 그리고 삶이 있을 수 있다.
지표성:
과학은 객관성을 추구하며 동의할 수 있는 관점을 공유하지만,
관찰자의 관점을 무시함으로써 잃게 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지표성은 사용할 때마다 다른 의미를 갖는 단어들의 특성을 일컫는다. 지표적 문장들은 관점이 존재하고, 관찰 가능한 세계에 대한
모든 설명에 이러한 관점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은 외부에서 본 세상이 아니라 내부에서 본 세상이다. 우리는 ‘외부에서 본’ 세계의 시간 구조와 우리가 보는 세상의 측면, 즉 우리가 세상 안에 세상의 일부로 존재함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의 측면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세상은 시간과 질서를 갖지 않은 사건들의 집합이다.
이 사건들은 ‘선험적으로’ 동일한 수준에 있는 물리적 변수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세상의 각 부분은 모든 변수들 가운데 일부만으로 서로 상호 작용을 하는데, 이 변수들의 값이 ‘특별한 부분 계와 관련하여 세상의 상태’를 결정한다.
11 특수성에서 나오는 것
- 에너지가 아닌 엔트로피가 세상을 이끈다 :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에너지원이 아니라 낮은 엔트로피의
근원들이다. 낮은 엔트로피가 없으면 에너지는 균일한 열로 약해지고, 세상은 열평형 상태에서 잠들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구분도 사라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구는 가까이에 태양이 있어서 낮은 엔트로피의 원천이 풍부하다. 태양이 따뜻한 광자를 보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구는 아주 차가운 광자들을 방출하면서, 어두운 하늘에 열을 발산한다.
유입되는 에너지의 양은 방출되는 에너지양과 거의 같아,
결과적으로 이 교환에서는 에너지를 얻지 못한다.
그런데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도착한 뜨거운 광자 하나당 차가운
광자 10개를 방출한다. 뜨거운 광자 하나의 에너지가 지구에서
방출된 차가운 광자 10개의 에너지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뜨거운 광자 하나는 차가운 광자 10개보다 엔트로피가 적다.
뜨거운 광자 하나의 배열의 수가 차가운 광자 10개의 배열의 수보다 훨씬 적기 때문이다. 태양이 우리에게는 낮은 엔트로피를 꾸준히 공급하는 최고의 후원자인 것이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낮은 엔트로피가 풍부하고, 그 덕분에 식물과 동물이 성장하고 우리가 모터와 도시를 만들고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주의 거대한 역사를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우주의 엔트로피
성장이다. 이 성장은 급속도로 진행되지 않고 점진적으로 시간을 두고 이루어진다. 세상에 사건들을 일어나게 하고 그 역사를 쓰는 것은, 몇 안 되는 정리된 배열에서 무질서한 무수한 배열까지 모든 사물들의 불가항력적인 혼합이다. 우주 전체는 매우 서서히 붕괴되는 산과 같다.
오랫동안 방치해둔 나무 더미를 예로 들어보자. 이런 나무더미는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가 아니다. 왜냐면 탄소나 수소 같은 구성
성분들이 아주 특별하고 질서 있는 방식으로 결합하여 나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는 이 특별한 조합이 깨져야 성장한다.
나무가 불에 타면 이 결합이 깨지는데, 나무를 형성한 특별한 구조에서 나무의 구성 요소들이 분열하고 엔트로피가 맹렬하게 증가한다
- 살아 있는 모든 세포 내부는 복잡한 화학 공정들의 네트워크로서 낮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문을 여닫는 구조물이다.
분자들은 촉매처럼 공정들의 얽힘을 촉진하거나, 반대로 억제하기도 한다. 각각의 모든 공정에서 엔트로피의 증가는 모든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생명은 서로 촉매작용을 하는,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과정들의 네트워크다.(p.171)
-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에너지가 아니라 '엔트로피' 다 :
아주 일상적인 형상들도 '열역학 제2법칙' 의 지배를 받는다.
돌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왜 그럴까? 돌이 바닥에 떨어지면 에너지가 적은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면 돌은 왜 에너지가 적은 상태에 놓여야 했을까? 에너지는 보존된다고 했는데 왜 에너지를 잃은 걸까? 답은, 돌이 바닥에 부딪힐 때 바닥을 가열하기 때문이다.
돌의 역학적 에너지가 일단 열로 전환이 되면, 이전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 열역학 제2법칙이 없고, 열이 없고, 미세한 무리들이
없다면 돌은 계속 다시 튕겨 올라 땅에 떨어지지도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돌을 바닥에 멈추게 하고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에너지가 아니라 '엔트로피' 다(p.172)
흔적과 원인: 과거의 낮은 엔트로피는 이후 매우 중요한 결과로
이어졌다. 이 결과는 언제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고, 또한 과거와 미래의 차이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그것은 과거가 현재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미래가 아닌 ‘과거의 흔적만’ 있는
이유는 과거에 엔트로피가 낮았기 때문이다. 흔적이 남으려면 무엇인가 정지해서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은 되돌릴 수 없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열이 없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탄력적으로 튕기고 그 어떤 것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사물의 배열은 하나의 물리계가 나머지 세상과 상호 작용할 때,
그 상호 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인과, 기억, 흔적, 세상의 발생 자체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관점의 효과일 수 있다. 이렇듯 시간에 대한 연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12 마들렌의 향기
이 세상이 실체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서로 결합하는 사건들로
이루어진다면, ‘나’는 무엇인가? 우리는 과정이자, 사건들이며,
구성물이고 공간과 시간 안에서 제한적이다. 우리 자아를 형성하는 요소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세 가지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첫 번째는 우리 각자를 세상에 대한 ‘하나의 관점’으로 동일시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상을 성찰하면서 그것을 실체들로 조직화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기억이다. 우리는 연속되는 순간들 속의 독립된 프로세스들의 집합이 아니다. 구리가 존재하는 매 순간은 기억을 통해
특별한 끈으로 우리의 과거와 단단히 엮인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를 형성한 프로세스들은 도처에 깔려
있고, 기억은 이 프로세스들을 함께 단단히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같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이해한다고 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앞날을 예측하려는 우리의 연속적인 과정과 결합된 기억이 시간을 시간으로, 우리를 우리로 느끼게 하는 원천이다.
우리가 내적 성찰을 통해 공간이나 물질이 없는 곳에서 존재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상을 할 없는 것은 우리가 속한 물리계가 나머지 세상과 특별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을 하고 흔적을 남기며, 물리적 실체인 우리가 기억과 예측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예측은 사소하지만 귀중한 시간에 대한 관점을 갖게 해준다. 그러니까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 작용을 하는 형식이며, 우리 정체성의 원천이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의
원천이기도 하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과거나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우리의 기억 속에, 우리의 예측 속에 있다. 우리는 영원불멸을 갈망하고 시간의 흐름에 고통스러워하므로, 시간은 고통이다. 시간의 이런 특성이 우리를 매혹시키며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시간은 일시적인 구조이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일시적인 변동일 뿐이면서도, 우리를 어떤 존재로 생기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즉, 우리는 시간으로 만들어진 존재다. 그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라는 소중한 존재를 선물하고, 모든 고통의 근원인 영원에 대한 허무한 환상을 만들게 한다.
13 시간의 원천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의 틀은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시간은 아주 복잡한 현실의 근사치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온 우주에 공통의 현재는 존재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과거-현대-미래 순으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부분적'으로만 순서가 있을 뿐이다.
우리 주위에는 현재가 있지만 멀리 있는 은하에서는 그것이 '현재'가 아니다. 현재는 세계적이 아니라 지역적이다.
세상의 사건을 지배하는 기본 방정식에는 과거와 미래의 차이가
없다. 그 차이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희미한 생각과 함께, 과거에 세상이 우리에게 특별한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문제가 될 뿐이다. 지역적으로, 시간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에 따라 다른 속도로 흐른다.
두 사건 사이의 기간은 단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많을 수 있다.
시간이 흐르는 리듬은 자체의 동역학을 지니고, 아인슈타인의 중력 방정식에 의해 기술되는 실체인 중력장에 의해 결정된다.
양자 효과를 무시하면, 시간과 공간은 우리를 담고 있는 거대한
젤리의 양상이다. 하지만 세상은 양자적이고, 젤리 같은 시공간
역시 근사치다. 세상의 기본 문법에는 공간도, 시간도 없고, 오직 물리량을 변화시키는 과정만 있을 뿐이며, 이로부터 우리는 확률과 관계를 산출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시간이 없는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 여행이었고, 그 우주에서 둘아오는 여행은 시간이 없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에게 시간 감각이 생길 수 있었는지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다.
아마 우리는 나머지 세상과 상호 작용하면서 열적 시간의 한 방향으로 엔트로피가 낮아지는 특별한 부분 계에 속하는 것 같다.
따라서 시간의 방향성은 실제적이지만 관점적이다.
세상의 엔트로피는 '우리와 관련되어' 있고, 우리의 열적 시간과
함께 증가한다. 우리는 이 열적 시간을 간단히 '시간'이라 부르는데, 이 변수 안에서 사물들이 순서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시간들이 아닌, 우리가 경험한 균등하고 범세계적이고 순서가 있는 시간, 이 단일한 시간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이 시간은 엔트로피의 성장에 의존하여
시간의 흐름에 정착한 우리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특별한 관점에서 기술한, 세상에 대한 근사치의 근사치의 근사치다.
서로 다양한 근사치들에서 파생된 확연히 구분되는 수많은 특성들이 겹겹이 쌓인 다층 구조의 복잡한 개념, 이것이 우리의 시간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 이미지는 우리의 일상생활에는 적응되어 있지만, 미세한 굴곡 속의 세상이나 광대한 세상을 파악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시간의 신비가 우리 개인의 자아의 신비나 의식의 신비와 교차하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을 다 동원해도 우리 본성을 파악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시간의 미스터리는 언제나 우리를 괴롭히고 감정까지 움직인다. 심지어 철학과 종교까지 성장하게 만든다. 이러한 불안에서 탈출하기 위해 우리는 '영원'의 존재를 상상했고, 다수의 신이나 하느님 혹은 불멸의 영혼들이 거주하기를 바라는 시간을 초월한 이상한 세상을 상상했다.
물리학은 우리가 미스터리의 층들을 관통하도록 도와준다. 세상의 시간 구조가 우리의 지각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가 감정 때문에 생긴 안개를 걷고 시간의 본성을 연구할 수 있도록 희망을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과 점점 더 멀어지는 시간에 관한 연구는 우리가 스스로에 관한 무언가를 발견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다. 결국 시간에 대한 감정은 시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는 안개막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정확히 시간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앞으로 우리는 시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기억이고 추억이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갈망이다. 기억과 예측을 통해 이런 식으로 펼쳐진 공간이 시간이다.
때로는 고뇌의 근원이지만, 결국은 엄청난 선물이다.
끝없는 결합의 놀이가 우리에게 귀한 기적을 열어주고,
우리를 존재하게 해준다.
14 이것이 시간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진화의 오류다. 두려움은 포식자의 위험에서 도망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잠깐 동안의 두려움일 뿐 계속되지는 않는다. 이 두려움 덕분에 미래를 예상하는 능력이 지나친, 전두엽이 비대한 털 없는 유인원이 탄생했다.
미래를 예상하는 능력은 분명 도움이 되는 특권이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진화의 압박에 의한 우발적이고 어리석은 간섭이자, 우리 뇌 속에서 발생한 잘못된 자동 회로 연결의 산물일 뿐 특별히 유용하다거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세월의 흐름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을 두려워하고 태양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삶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이성적인 논제가 아니다.
이성은 두려움들이 연결되는 사실을 밝히기만 할 뿐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두 번째 요건으로 이성적 존재가 될 가능성은 있지만 애초에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우리의 첫 번째 요건은 본능을 충족하는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요건은 첫 번째 요건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삶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삶 그 자체다.
우리는 원래 욕구가 필요하도록 만들어졌고 지금도 필요하다.
우리가 내면의 성찰과 거울에 비치 모습을 보면서 깨닫는 것은
사소한 것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우리는 세상을 보고 설명하고 정리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세상과 실제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는 온전히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세상에는 우리가 아는 바와 아주 거리가 먼 것들이 많은데, 우리는 그런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조차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의 생각이 나약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범위보다는 더 발전한 상태다.
현실에 대한 시각은 우리가 조작한 집단 망상으로, 진화를 통해
적어도 우리를 지금 여기까지는 성공적으로 이끌어왔다.
우리가 세상을 관리하고 돌보기 위해 찾은 수단들은 많았고,
그중 최고는 이성이다.
하지만 이성은 그저 도구로 우리가 생생하게 불타는 감정처럼
인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들이 우리의 실체다.
이 감정들은 우리를 행동하게 만든다. 그런데 정확한 순서를 지키려다 보면 결국 무엇인가 빠트린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감정들을 말하려고 하면 항상 순서가 꼬이고 만다.
이 짧은 삶은 감정들의 끊임없는 외침에 불과하다.
이 외침은 우리를 이끌어 하느님의 이름 안에, 정치적 신념에,
우리를 안심시키는 의식 안에 가두어 결국 정리된 상태로 아주
거대한 사랑 안에 머물게 한다. 결론적으로 아름답고 찬란한 외침인 것이다. 이 외침은 때로는 고통이 되고 때로는 노래가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 노래는 시간에 대한 인지다.
이 노래는 시간이고, 그 자체가 시간의 시작인 베다의 찬가다.
잠시 후 곡이 잦아들면서 멈출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두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달콤하고 아름답다. 이것이 시간이다.
THE ORDER OF THE TIME CARLO ROVEL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