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국민 멘토’로 불렸던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Bjorn Natthiko Lindeblad가
2022년 1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톡홀름 경제대학을 졸업하고,
다국적 석유회사의
최연소 CFO에 오른
수재로 주목받은 인물이었다.
26살의 나이에.
나티코가
주목받은 이유는 따로 있다.
잘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태국의 승려가 되었다.
무려 17년 동안.
46살이 되던 해
스웨덴에 돌아왔다.
강연 무대에서
자신이 깨달은 인생 담론을 전했다.
I May Be Wrong :
And Other Wisdoms From Life as a Forest Monk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
숲속의 현자가 전하는
마지막 인생 수업.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Bjorn Natthiko Lindeblad)
What I value most from my seventeen years of full-time spiritual training is that I no longer believe my every thought.
That’s my superpower.
17년 동안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에 매진한 결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다 믿지는 않게 되었다.
그게 내가 얻은 초능력이다.
I have never felt completely comfortable with the term mindfulness.
My mind doesn’t feel full when I’m truly in moment.
More like a big, empty, welcoming space, with plenty of room for everyone and everything.
Conscious presence.
나는 마음 챙김이라는
용어가 편하지 않다.
한 순간도 마음이 진정으로
충만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늘 허전해서 누군가가
또는 무언가로
채워졌으면 하는
공간이 남아돌고 있다.
내가 추구하는 건
의식적인 현존생태,
즉 지금을 온전히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I like to use a different word; awareness.
We become aware, we remain aware, we are aware.
나는 알아차림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점차 알아차리며,
그리고 알아차린 채로 머무르며,
알아차림과 하나가 된다.
I think almost everyone who has ever appeared outwardly successful has also eventually realized that’s no guarantee of happiness. Success and happiness are two different things. 겉보기에 성공한 사람 대부분이 결국엔 깨닫게 된다. 성공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성공과 행복은 서로 다른 것이다. You can get away with that for so long. But we all know there comes a day when discipline alone is no longer enough. A job, what we spend our days doing, has to nourish and stimulate some deeper part of our being. That type of nourishment is rarely derived from success. 우리는 무언가에 진심이 아니더라도 열심히 흉내를 내면 생각보다 무척 오래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자제력만으로 더는 해낼 수 없는 날이 온다. 한 사람의 일상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은 우리 존재의 더 깊은 부분에 자양분과 활력을 공급해야 한다. 그런 유형의 자양분은 흔히 성공에서 얻을 수 없다. “That which is peaceful inside us humans, that which is still and calm, that isn’t ruffled by thoughts that are always present in the background- that is valuable, that is worth taking note of. That has rewards.” <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 “인간 내변의 평화로운 것, 고요하고 차분한 것, 자꾸 떠오르는 갖가지 생각으로 말미암아 흐트러지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소중하며,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와 같은 것들에는 보상이 따른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It’s not that I had some sort of grand awakening the moment I thought about starting to listen to my inner voice, or that I achieved some unique mental state. But the brief reprieve from my wildly spinning thoughts gave me a wonderful sense of freedom. They weren’t gone, but they weren’t quite so hypnotic any more. It was as though I’d taken a step back mentally and stared to realise that while I have thoughts, I am not my thoughts.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해서 무슨 엄청난 각성을 했다거나 특별한 정신 상태에 도달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정신 없이 돌아가는 나의 생각으로부터 잠시의 유예는 나에게 놀라운 해방감을 주었다. 생각이 온전히 사라지진 않지만 더는 그 속에 매몰되진 않게 된다. 그것은 마치 내가 정신적으로 한 발짝 물러서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 지켜보는 것 같았다. Thoughts are not a problem in and of themselves, of course. But automatically, uncritically identifying with every passing thought – that’s a huge problem. The untrained mind often does this. We feel that our identity and our thoughts are inextricably linked. 생각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무비판적으로 자신과 동일시한다면 심각한 문제다. 훈련되지 않은 마음은 종종 이렇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과 생각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느낀다. Our brain is unable to comprehend the word ‘not’. But learning how to let go a thought – that can be endlessly helpful. So how do you let go of a thought that’s dragging you along with it? You turn your attention elsewhere. The only fuelling your thoughts is your attention. 우리의 뇌는 '생각 없다'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없다.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해도 생각을 내려놓는 법을 배운다면 앞으로의 삶에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유익할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생각을 내려놓으려면 일단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한다. 생각일 일어나도록 부추기는 유일한 요소는 바로 우리의 관심이다. Deliberately and consciously directing our attention towards something less complicated, such as a physical experience like breathing, can constitute a healing, soothing break from our inner chaos. 고의적이고 의식적으로 우리의 관심을 '호흡'처럼 덜 복잡한 신체 활동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내면의 혼돈으로부터 치유되고 달래는 휴식이 될 수 있다. You’re taking a break from everything else. Your frontal lobe has switched off. In this moment, you have no responsibilities. In this moment, there’s no plan to formulate, no opinion to give, nothing to remember. The only thing you need to do is breathe. Stay with it for as long as you feel like it. 호흡만 하면 된다. 다른 일은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휴가를 떠난 셈이다. 신경 쓸 일은 오로지 호흡뿐이다. “There are people who are born and die and never once are aware of their breath going in and out of their body. That’s how far from themselves they live.” “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자기 몸을 드나드는 호흡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다.” When we first start to try to focus on our breathing, most of our minds behave like frantic yo-yos. You follow along for a handful of breaths, then your attention wanders off to something trivial and you patiently have to reel it back in. Again and again and again. Our minds are virtually inexhaustible when it comes to darting off in the most unexpected directions. 처음 호흡에 집중하려고 시도할 때 우리 마음은 요요처럼 정신 없이 움직인다. 따라서 한 줌의 호흡을 하고 나면, 주의는 사소한 것으로 옮겨지므로, 참을성 있게 관심의 끈을 다시 당겨야 한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가장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돌진하는 것에 관한 한 우리의 마음은 사실상 지칠 줄 모른다. But every time our focus slips, we eventually notice. All we can do then is to note that it happened (again) without scolding ourselves or assessing our level of success, let go of those thoughts and calmly steer our attention back to the intended object.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마다 흐름을 놓쳤다는 것에 주목한 뒤 자신을 꾸짖거나 우리의 성공 정도를 평가하지 않고 원래 집중하려던 대상으로 차분히 관심을 돌려야 한다. It’s tempting to quit. But it’s worth hanging in there. Because even though this is just a small, unspectacular gesture in your own individual life, it’s also an entirely necessary and invaluable step in the evolution of our collective human awareness. 그만두는 것이 솔깃하다. 그래도 버틸 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이것은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단지 작고, 화려하지 않은 몸짓일 뿐이지만, 그것은 또한 집단적 인간 인식의 진화에 전적으로 필요하고 매우 귀중한 단계이기 때문이다. The value of stillness and of inward listening has been emphasized and underscored in all religious since time immemorial. It has to do with being human. We all have the ability to let go of our thoughts, to choose where we direct our attention, how long we allow our attention to linger on things that cause us harm. You do, too. 고요함과 내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태곳적부터 모든 종교에서 강조되고 강조되어 왔다. 인간답게 존재하기 위한 일이다. 우리는 누구나 생각을 내려놓을 능력이 있다. 관심을 어디로 돌릴지, 또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일에 얼마 동안 관심을 기울일지 선택할 능력도 있다. Sometimes, you just need a bit of practice. Because when we ignore or completely lose interest in that ability, we end at the mercy of ingrained, automated behaviours, views and patterns. They have us on a lead, so to speak. And so we keep trudging round and round the same track. That’s not freedom. That’s not dignity. 때때로, 약간의 수련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잠재된 그 능력을 무시하거나 완전히 흥미를 잃었을 때, 우리는 뿌리 깊고 자동화된 행동, 관점, 패턴에 의해 끝나기 때문이다. 모든 결정을 습관적으로 내리게 되면 과거의 목줄에 묶여 끌려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는 같은 트랙을 계속해서 돌고, 또 돌게 된다. 그런 삶은 자유롭지 않다. 존엄도 품위도 없다. 머릿속에서 전혀 검열되지 않은 채 불쑥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직면하면 당황해서 겁을 먹거나 실망하기 쉽다. 남들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은 생각일 뿐 진실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내면에서 벌어지는 생각의 곡예에 주목할 줄 아는 것은 유용한 기술이다. 생각을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라. 자신의 사고 과정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줄 알게 되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를 갈라놓는 것보다 우리가 공유하는 것을 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파악한 양 시늉하느라 기진맥진하지 않아도 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 배우며 살아갈 수 있다. 남들의 아름답고 뛰어난 점을 발견하고 자신이 그들만 못하다는 내면의 속삭임에 더는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떠오르는 생각을 다 믿지는 말라. 살면서 이보다 더 도움이 됐던 말은 별로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타고난 초능력을 간과한 채로 살아간다. 자기 생각에 의심을 품으며 조금은 거리를 두거나 우스개 거리 삼아 가볍게 접근한다면 자기답게 살아가기가 무한히 쉬워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음속에 떠오르는 온갖 생각을 무조건적으로 믿지 않을 때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곧 자기 내면에 참된 친구이자 소중한 동반자를 두게 되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대와 함께하며 절대적으로 그대의 편이다. 떠오르는 생각을 거르지 못하고 다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가 되어 수시로 상처받는다. 인생의 어떤 영역에서든 마찬가지이다. 제 상처에 신경 쓰느라 지혜로운 선택도 내리지 못하게 된다. 자기 생각을 모두 믿어버린다면 우리 삶에서 가장 암울한 순간에 바닥이 없는 심연으로 빠져들게 된다. 말 그대로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떠오르는 생각을 다 믿는 삶에서 존엄은 어디에 있을까? 자유는 또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할 때 그 생각은 대부분 의도하지 않게 생긴다. 그런데 우리는 망망대해에 홀로 떠있는 섬이 아니다. 우리는 그간의 길러진 방식, 그 동안 경험한 것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타고난 것들, 우리가 속한 문화와 환경 그리고 인생여정에서 마주치는 메시지들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 생각 또한 그 산물일 뿐이다. 우리는 생각을 선택하지 못한다. 그 생각이 어떤 양상을 취할지도 통제하지 못한다. 다만 어떤 생각은 더 오래 품으며 고취할 수 있고 어떤 생각에는 최대한 작은 공간만을 내줄 수도 있다. 마음속에 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막을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 생각을 믿을지 말지는 선택할 수 있다. 우리 머릿속에 한계가 없는 지성이 존재하며 우리는 거기 더 깊이 의지할수록 더욱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 인생에서 정작 중요한 건 현재 하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기, 진실을 말하기, 서로 돕기, 쉼 없이 떠오르는 생각보다 침묵을 신뢰하기. 제 정신을 온전하고 바르게 유지하려면 날카롭고 효과적으로 발휘하려면 때로 쉬게 놔둬야 한다. 때때로 내면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문득 주위가 분명해진다. 인간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지만 많은 사람이 지혜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정신을 쉬게 하고 내부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행복은 외부 요인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행복이 바깥에서 온다고 믿고 싶은 본능은 강력하다. 우리는 누구나 순간의 지성을 끌어낼 수 있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정교하게 연마된 자기만의 조용한 나침반이 있다. 그 지혜는 요란스러운 자아와는 달리 노력해서 일부러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따금 주파수를 바꾸는 것은 중요하다. 일상생활에서도 틈을 내어 멈추고 고요를 느끼는 것이다. 정적의 순간을 찾는 것이다. 어떤 삶을 살든 자기 안의 평화를 발견하려면 우리에게 내재한 소중한 능력을 돌보고 키워나가야 한다. 그러지 못할 때 우리의 관심은 언제 어디서나 요란한 소리에 쏠리게 되고 삶이 막장 드라마가 되어버린다. 갈등에 끌리고, 불안과 불행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하고 집중하게 된다. 항시 현실과 투쟁하게 된다. 자기 내면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 동안 억눌렸던 생각이 좀 더 자유롭게 흐르게 하면 진심이 운신할 여지가 생긴다. “이성적인 마음은 하인이다. 반면에 직관적인 마음은 신성한 선물이다. 우리가 창조한 사회는 하인을 섬기느라 선물을 잊어버렸다.” 아인슈타인 우리는 해변에 쓸려온 자갈과 같다. 처음엔 거칠고 들쭉날쭉하다. 그런데 삶의 파도가 쉼 없이 온다. 우리가 그것에 머물며 다른 자갈들 사이에서 거칠게 밀치고 비비다 보면, 날카로운 모서리가 서서히, 확실히 닳게 되어 결국 둥글고 매끄러워진다. 그러면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게 된다. 인간은 자신과 맞지 않는 다른 존재를 성가시다고 여긴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불편하게 여길 때 우리는 엄청난 기운을 소모하게 된다. 우리의 힘이 줄줄 흘러나갈 구멍이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누군가와 좀 더 편하게 지내고 싶고 그 사람이 자기 입맛에 맞게 행동했으면 한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그들을 그 모습 그대로 좋아하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남들을 판단하고 우리 뜻대로 바꾸려 한다. 떼쓰는 어린아이 같은 집요함으로 그 방식을 고집한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굳건하게 믿기 때문에 좌절하거나 폭발하고 우울해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대단하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모두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할 때 인생은 크게 달라진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매달리면 어떤 경험이나 배움도 우리에게 스며들 수 없게 되어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더 높은 지혜에 도달하고 싶다면 신념과 확신을 살짝 내려놓고 우리가 실은 그다지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좀 더 익숙해져야 한다. 잘 모른다는 점을 알면 심각한 문제로 이어지는 일이 좀체 없다. 자기 생각의 안개에 갇힌 사람들은 현재에 관심을 온전히 쏟지 못한다. 내려놓기의 지혜는 참으로 심오하다.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얻는 것은 끝이 없다. 우리를 쓸모 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하고 외로움과 두려움을 부르는 생각들은 내려놓는 순간 힘을 잃는다. 가장 내려놓기 어려운 생각이 결국엔 우리에게 가장 해로울 수 있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마음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라. 어떤 언어로든 진심으로 세 번만 되뇐다면 당신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다. '내가 틀릴 수 있다' '내가 틀릴 수 있다' '내가 틀릴 수 있다' “악행과 선행이라는 개념 너머에 너른 들판이 있다. 그곳에서 당신을 만날 것이다.” - 루미 누구나 시행착오를 거칠 권리가 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 더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살아가려는 습성이 있다. 내가 틀릴 수 있고, 내가 다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 익숙해지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확실하게 행복해질 방법은 흔치 않다.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직감을 현실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막연한 관념과 의지대로 삶이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하지 안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우리가 극히 무지하다는 것을 이해할 때 지혜가 싹튼다. 일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수행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일을 끝내고 우리가 어떻게 느끼느냐 그 점이 중요하다. 늘 내려놓으려 애써야 하지만 열에 아홉은 실패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인간이 겪는 심리적 고통 대부분은 자발적인 것이며 스스로 초래한 고통이다. 우리가 반드시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발달단계인 동시에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고통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생각을 굳게 믿는다. 우리 마음의 고통은 대부분 외부의 사건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이는, 즉 우리가 믿거나 믿지 않는 생각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의 마음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고통이 움을 틔우는 곳이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곳이다. 마음의 고통이 내 안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이해하면 고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고통이 나 자신에게서 출발한다고 받아들여 버리면 이제 상황이나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없다. 불쾌하고 불편하더라도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다. '현재 상황에서 나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 바로 지금, 바로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지?' 세상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변화하지만 변화의 방향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대체로 무관하다. 우리가 집착하며 놓지 못하는 어떤 '생각'이 불행감을 초래한다. 그런 생각은 그 자체로 보면 합리적이고 그럴싸하다. '그랬어야 했다, 달라져야 했다, 더 현명했어야 했다, 더 열심히 일 했어야 했다, 더 돈이 많았어야 했다, 더 성숙해야 했다' 이런 생각들이 마구 날뛸 때 조심스럽게 한 발짝 멀어진다. 그러고는 말하는 것이다. '그래 알았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것까지 불안해 하는 대신 결국 모든 것이 순리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사는 데 익숙해 진다면, 더 높은 차원의 자유와 지혜에 도 달할 수 있다. '세상이 이렇게 했어야 한다'는 생각은 늘 나를 작고 외롭게 만든다. 그런 기분을 잘 안다면 다음의 손동작을 연습해 보라.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힘을 빼고 활짝 편다. 유난히 집착하는 것을 내려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보여준다. 당신이 손을 조금 덜 세게 쥐고 더 활짝 편 상태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조금 덜 통제하고 더 신뢰하길 바란다. 뭐든 다 알아야 한다는 압박을 조금 덜 느끼고 삶을 있는 그대로 더 받아들이길 바란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돌아가지 않는 일을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 자신을 원래보다 더 작고 초라하게 만들 필요도 없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다. 목을 옥죄며 살 것인가 아니면 넓은 마음으로 인생을 포용하며 살 것인가?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쳐보길 바란다. 인간의 정신적 초월적 성장은 심리적인 대응전략을 익힌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정 성장하려면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 번뇌에서 멀어지고 설사 번뇌에 빠지더라도 금세 거기서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 물론 살아가며 고민과 갈등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번뇌를 완전히 내려 놓는 것은 적절한 목표가 아니다. 번뇌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죽은 사람 뿐이다. 성장 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고민이 서서히 줄어든다면,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건전한 거리를 두고서 자기 자신을, 자신의 성격과 결점에 대해 품었을 지도 모르는 온갖 의견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결점 너머에 존재하는 나를 바라본 순간 나는 짜릿한 기분을 느꼈다. 왜 타고난 성격은 일관성 없고 과민하며 지 나치게 충동적이고 불안정한가. 그런데도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자 주변의 빛이 어슴푸레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를 언제까지나 비춰 줄 것 같은 빛, 내 행복을 비춰줄 빛이 이제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걸 통제하려 들수록 삶은 외롭고 고달프며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삶을 좀 더 믿고 맡겨야 한다. 삶에서 가장 좋았던 일들은 대부분이 나의 계획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지시하고 예측하려 들수록 즐거움은 사라지고 더 괴로워진다. 인정할수록 지성의 일부가 사그러질 뿐이다.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무작정 믿지 않아야 합니다. 주위가 흐트러지지 않아야 합니다. 현재 상황을 온전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온 우주가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라 운행 된다는 근본적 진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진실이 뭐냐구요? 당신이 알아야 할 때,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디아 산티 그 말이 옳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할 순 없겠지만 계획하는 데 저는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쓸데없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말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라 생각합니다. 이 가르침을 들은 이래 저는 그대로 살고자 애써 왔고 시간이 갈수록 그 깊이를 느낍니다. 그렇게 살고자 노력할 때 제 삶은 항상 더 나아졌고 때로는 훨씬 더 나아졌습니다. 아무렇게나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적절한 계획을 반드시 세워야 할 때조차 아무 계획도 세우지 말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지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까지 불안해 하는 대신 결국 모든 것이 순리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사는데 익숙해 진다면, 더 높은 차원의 자유와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래를 통제하고 예견하려는 헛된 시도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럴 용기가 있다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약간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거의 모든 인간을 지배하는 생각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과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생각과 미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생각이죠. 이 두 가지는 대단히 매혹적이며 결국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바로 내 인생이라는 이름이죠. 이는 살아가는 내내 크고 무겁고 중요한 짐 두 개를 이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에는 과거에 관한 생각이 들어있고, 다른 하나에는 미래 관한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둘 다 멋지고 소중한 것들이 가득 든 짐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잠시 그 짐을 내려 놓는다면 어떨까요? 인생에서 좀 더 가까이 당면한 순간,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을 반갑게 맞아 보는 겁니다. 짐은 어디 가지 않습니다. 언제든 원할 때 다시 집어 들면 됩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따금 그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짐을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편히 쉬세요. 푹 쉬고 나면 짐을 더 쉽게 들 수 있어요. 생각과 통제력을 내려놓기, 내면을 돌아보고 경청하기, 현재 집중하기, 정기적으로 편안하게 쉬기, 신뢰하며 살기, 이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두 생각에 휘둘리는 대신, 우리의 현실에 더 깊이 뿌리내릴 소중한 것들을 탐지하는 일이죠. 생각이 거품처럼 이는 곳에서 등을 돌리는 일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우리의 생각은 더 가치를 띠게 되죠. 우리 안에 현명한 직관이 더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생각의 질의 개선 됩니다. 이번에는 미래라는 흥미로운 단어를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할까요. 그리고 미래의 일어나리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합시다. 미래에 관한 생각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머리가 미래에 대해서 들려주는 내용은 실제 미래가 아닙니다. 기억과 경험에 기반을 둔 단편적인 그림이요, 스케치일 뿐이죠. 우리는 살아오면서 실제로 벌어진 일에 극히 일부분만 기억합니다. 게다가 그 기억은 격한 감정에 따라 형성되고 결정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감정적으로 두드러졌던 일, 특히 어렵고 고통스러웠던 일을 기억하도록 프로그램이 짜여 있습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 선조는 사바나 초원에서 살아남고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 아닙니다. 흔히 감정적으로 격양된 상황에서 선별한 단편적 조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그 조각들은 우리가 투영하는 미래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고,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를 위한 토대가 됩니다. 그것은 미래가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이고 추측일 뿐이죠. 확실히 무슨 일이 벌어질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누구도. 죽음 뒤에 사라질 그 모든 것을 내려 놓거나, 적어도 살짝만 지고 살아가세요. 영원히 남을 것은 우리의 업이지요. 세상을 살아가기에도, 떠나기에도 좋은 업보만 남기길 바랍니다. 저는 이제 축복 받는 자의 기쁨을 느끼며, 어떤 예측도 불허하는 모험을 떠납니다. 걱정도 의심도 더 이상 없습니다. 당신의 존재가 햇볕처럼 따뜻했습니다. 온 마음으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