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성스님 수행기
매일 만이천배 25년간 수행하신 월성스님 수행
절ㆍ염불 삼매로 업장 소멸하면 화두 타파 쉬워
산문 밖에서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숨은 도인으로 존경받고 있는 월성스님(성관사 대각선원장)은 한국 염불선을 중흥시킨 청화스님의 맏상좌이다. 40여년을 장좌불와(長坐不臥: 밤에도 눕지 않고 앉아서 참선하는 수행)하며 용맹정진한 스승에 못지 않게 엄청난 고행으로 염불삼매를 성취한 후 다시 ‘이뭣고’ 화두를 타파한 선지식으로 알려져 있다. 청화스님이 오로지 ‘나무아미타불’ 자성염불(自性念佛)만을 강조한 반면, 월성 스님은 염불과 화두 공부를 병행해야 한다는데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계행을 철저히 지키고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철저히 수행해야 함을 역설한 것은 두 선지식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반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월성 스님의 구도의 역정과 그 수행의 성과는 어떤 것일까.
월성 스님은 21세부터 25년간, 초인과도 같은 원력으로 매일 1만 2천배 기도를 성취했다. 염불삼매를 체험한 뒤 49세에 본격적으로 참선을 시작해 통도사 극락암 경봉 스님 회상에서 한 달 하루 만에 ‘이뭣고’ 화두를 타파했다고 한다.
월성스님이 계행을 철저히 하며 절과 염불수행에 매진하게 된 기연은 이렇다. 스님이 21세 때 해인사에 놀러 갔을 적 이야기다. 그 곳 원주 스님이 자꾸만 계를 받으라고 하는 바람에 60여 신도와 함께 얼떨결에 계를 받았는데 ‘계를 지키겠느냐’ ‘예!’하는 문답이 그 뒤로도 귓가에 쟁쟁했고, 그 때 절하는 것을 배운 후로 계속 절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18세에 입대해서는 93일간 졸음을 참는 심한 극기훈련을 받은 덕분에 그 후로는 잠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1만 2천배 기도를 할 때에는 하루에 보릿가루 1컵만을 물에 타서 마시면서 『천수경』 121편, 『반야심경』 221편, 자신을 위한 참회의 절 3천 배, 신도를 위한 4천 배기도 등을 하셨는데 24시간 중 1분도 남는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31세에 전강 선사로부터 ‘이뭣고’ 화두를 받았지만 본격적인 화두참구는 36세에 성륜사 조실 청화 스님을 은사로 모신 뒤 염불삼매를 얻어 득력한 후에 비로소 본격화되었다. 그동안 잠도 안자고 용맹정진한 덕분에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 힘도 들이지 않고 화두가 24시간 여여하게 들렸다. 한소식 ‘쿵’하고 열리기를 세 번 경험하고 그 많은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세계가 한 생각에 열리고 나니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망상 피우는 인간의 삶이 너무나 가식적이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고 한다. 삼천대천(三千大天) 세계가 하나라는 자체도 없이 다 공함을 체득해 더불어 사는 세계가 열리게 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데, 그 맛도 못 보고 서로 막행막식하며 사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는 것이다.
월성스님은 보릿가루 한 컵만으로 24시간 염불 및 절수행을 할 때는 불ㆍ보살과 조사ㆍ신장들의 가피력으로 한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며 겸손해 하신다. 그리고 스님이 만약 막행막식(莫行莫食) 했더라면 그 분들이 외호(外護)해 주지 않았을 것이라며, 견성 전이나 깨달은 뒤의 보임(保任)과정에서도 청정한 계행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월성 스님은 젊을 때는 몸을 조복받고 업장을 소멸하며 중생제도에 나설 수 있는 여러 가지 방편을 두루 섭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망상과 분별심이 쉬어진 후에 마지막으로 화두를 들면 금방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화두를 타파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학인 때는 경을 부지런히 보고 여러 수행을 열심히 하더라도 참선에 들어갈 때에는 티끌도 남기지 말고 모두 버려야 한다고 법문한다. ‘배울 때는 열심히 하되 비울 때는 비울 줄만 알면 된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다. 다음은 월성 스님과 산길을 포행하며 나눈 일문일답이다.
- 참선하기 전에 보조수행으로 절ㆍ염불 수행을 하면 어떤 점이 유익한지요.
망상 덩어리를 없애는 데는 절만큼 좋은 게 없어요. 한창 1만 2천 배 정진을 할 때는 절하는 도중에 용광로 같은 불덩이가 세 번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어요. 엄청난 불덩이에 내 몸이 온데 간데 없이 다 타버리겠다고 한 생각 일으킨 사이에 어느새 그것이 지나가 버리고 나니, 몸뚱이만 사람이지 용심(用心)도 끊어지고 진심(嗔心)ㆍ음심(淫心)ㆍ사심(邪心)이 모두 끊어졌습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심해져서 늘 있는 그 자리, 생활 자체가 바로 공부가 되더군요. 절 하기와 염불을 통해 스스로 망상을 정리한 후 화두를 잡으면 7일이면 화두가 타파된다고 확신합니다. 만약 스스로 준비 되어 있지 않다면 세월만 낭비할 뿐 화두 타파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절 하기와 염불 정진을 잡초, 즉 번뇌와 업장을 녹이는 김 매기에 비유할 수 있겠군요.
배추 씨앗을 밭에 뿌려 놓되 김을 매주지 않으면 잡초만이 무성하고 배추가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반면, 배추 밭에 잡초가 없다면 배추는 잘 자라게 됩니다. 이 때 배추 씨앗은 자성불(自性佛)에 해당됩니다. 다생의 윤회를 통해 자란 잡초들을 정리하지 못한다면 용맹정진을 해도 어렵습니다.
수많은 전생의 수행을 통해 득력(得力)한 상태가 아니라면, 몸과 마음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득력해야 합니다. 득력이 되면 자성불은 저절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 때 화두는 자연스럽게 타파됩니다. 참선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하는 것이죠. 그렇지 않을 경우 스스로 지치고, 가르침도 받기 힘듭니다.
-절ㆍ염불ㆍ참선과 같은 구체적인 공부에 앞서 계행(戒行)을 비롯한 올바른 행을 중요시 한 까닭이 무엇인지요.
젊을 때는 인간 몸뚱이가 소중하다고 여기지만 행을 하면서 공부를 해 보니 우리 몸뚱이가 결코 소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육신을 갖고 있어서 탐욕, 성냄, 어리석은 마음을 내기 때문에 병이 생기는 것이지 한 생각에 삼독심(三毒心)을 버리기만 하면 불ㆍ보살도 곁에서 옹호하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 불ㆍ보살의 외호 역시 살불살조(殺佛殺祖) 하는 선 공부의 입장에서는 장애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나도 서너 번 보살님들이 주는 약과 감로수와 법공양도 받았지만 거기에 계속 집착하여 당연하게 받아먹으면 외도로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적당히 절제할 줄 알아야 해요. 어느 땐가 한 번은 내가 먹고 두 번은 옆의 스님을 주라고 동자에게 말했더니 ‘그 스님은 평소에 행을 안하면서 밥도 많이 먹고 수마(水魔)에 빠져 있는지라 못 먹습니다.’ 하는 거예요. ‘불성(佛性)이 없는 사람이 없는데 왜 못 먹느냐’고 주라고 하니 관세음보살님이 동자를 인솔하여 그 스님한테 갖다 주었지요. 그런데 그 스님은 그게 있는지도 모르는 겁니다.
법에 눈을 못 뜨니까 밥을 가져 왔는지 공양을 가져 왔는지 전혀 모르는거죠. 그래서 호흡할 때 들어가도록 입에다 갖다 대주라고 했는데 입에 대자마자 재채기를 해서 밥을 다 흩어 버리고 두서너 알만 들어가는 게 보이더군요. 그러고 나니 그 수좌가 공부를 그렇게 잘할 수가 없었는데, 해제할 무렵 산에 올라가 비린 것을 먹고 나더니 도로 제자리로 돌아가더군요. 그 때 알게 되었지요. 행이 올바르지 않으면 공부가 제대로 될 수 없다고. 요즘 수좌들은 법문해 줘도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취해서 자기 유리한 대로 해석하고 방일(放逸)하게 살아가는 이가 적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 계행 가운데서도 음식을 가리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행이 없으면 법이 없고, 법을 지키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 없어요. 누린 것, 비린 것, 계란 등의 음식물이 들어가면 그것이 망상으로 변하거든요. 서로 싸우고 원한 맺으며 죽은 짐승들의 고기가 우리 몸에 와서 칼로리로 변해서 영양분은 될지 몰라도, 그 수행자가 어찌 인욕바라밀을 행하며 평등한 삶을 살겠어요. 상추나 오이, 쌀이 성내는 것을 보셨어요? 그런 음식을 먹으면 성질도 안 나고 자연적으로 육바라밀이 행해져요.
청정한 공양이 저절로 되니까 싫은 사람도 없고 좋은 사람도 없고 늘 너그러운 마음으로 웃으면서 상대방을 대하게 돼요. 세상이 살기 좋고 시대가 변한다고 해서 공부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요. 편하게 살려고만 하면 공부는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수좌들에게 오신채는 물론 초콜릿, 우유, 빵 같은 음식들을 절대 못 먹게 하는 거죠. 이렇게 3년만 음식을 절제하면 많은 악습이 떨어지고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몸과 마음을 조복받아 업장을 소멸하면,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라는 아집과 소유욕도 동시에 소멸되는 것입니까.
그렇지요. 나는 아집과 교만을 부리다 비구니로 아홉 생, 비구로 아홉 생, 모두 18생을 출가자로 태어났습니다. 아홉 번 비구 몸을 받았을 때 의상 대사로 태어난 적도 있지만, 교만한 마음이 있어 퇴보한 것입니다. 3생을 출가자로 태어나기가 어렵지만 비구니로 아홉 생을 사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못난 사람, 못 배운 사람, 키 작은 사람을 무시하다가 그런 과보를 받은 것입니다.
내가 있다는 아상(我相), 내가 잘 났다는 교만, 즉 한 생각이 이런 결과를 불러오곤 합니다. 아상과 아집이 강한 사람은 심지어 바위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돌부리 하나도 인연 없이 생긴 것이 없어요. 이런 일을 안다면 교만을 부릴 사람이 없지요.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차별하는 일없이 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 염불수행과 참선은 가장 중요한 양대 수행법인데, 이 두 방편의 장ㆍ단점을 말씀해 주십시오.
절과 염불로 삼매를 얻어 무아의 경지를 체득하고 망상을 조복 받으면 화두는 저절로 타파되지요. 절삼매로는 무아(無我)의 세계를, 염불삼매로는 『화엄경』과 『법화경』에 나오는 불ㆍ보살의 세계와 33대천세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두가 타파되고 나면 필설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우주와 하나 되는 절대세계를 경험하게 되지요. 염불삼매의 경지도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탐ㆍ진ㆍ치가 멸한 화두삼매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지요.
- 염불과 참선의 차이점을 공부 경험담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염불삼매로 가피를 입고 업장소멸을 이룬다면 화두참선은 단박에 공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물론 염불삼매로 몸을 조복받아 중생제도의 길을 열 수도 있어요. 염불삼매에 들면 온 세상이 부처로 꽉 차게 되며, 세상 일을 다 알게 됩니다. 염불은 반야용선에 해당되는데, 극락에 들어가면 거기서 끝까지 공부하며 회향해야 합니다. 수천만 번을 점검받으며 공부하는 곳이 극락입니다.
내가 염불삼매를 체험한 뒤 선방에 앉아서 화두를 들기 시작하니 곁에서 외호해 주던 조사ㆍ국사ㆍ신장님들이 자연스럽게 물러나며 도와주던 수천만의 금강역사들이 떠나더군요. 그때부터는 자연스럽게 타력(他力)은 떠나고 자력(自力)만으로 공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염불 및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간화선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요.
100일 동안 염불삼매에 들어 있었다 해도 깨달음은 아닙니다. 고요적적하고 법열이 있기에, 그 상태가 최고라고 생각하기 쉽지요. 하지만 역대의 선사들이 일념에 든 상태에서 화두를 든 까닭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모두 바보가 아니지요. 자나 깨나 화두가 한결같이 들리는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된 상태에서 화두를 챙기면 금방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의정에 들어 주ㆍ객이 멸한 오매일여가 되면 1주일이면 깨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화두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공안 참구가 불교 공부가 아니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도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이 바로 ??이뭣고?? 화두였습니다. 1700공안이 모두 ??이뭣고??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연기실상의 근원을 참구하여 견명성(見明星) 오도(悟道)하게 된 것은 조사선의 관점과 다를 바 없습니다.
- 견성 이후의 보임공부 과정에서는 어떻게 지어가야 합니까.
견성 후에도 업장소멸이 안 되면 보임을 잘 할 수 없습니다. 육신을 조복하지 못하면 경계를 대함에 여여부동(如如不動)하지 못해서 음심을 일으켜 음행을 하기도 합니다. 도인들은 보임을 하면서 경계에 끄달리는 지의 여부를 막행막식을 통해 점검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업장소멸이 잘 되지 않았을 경우, 식(識)이 혼탁해져 퇴전(退轉)하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공부할 때나 대상에 작용할 때나 성성적적(惺惺寂寂)해야 하는데, 끄달리고 마는 것이죠. 계행을 철저히 하지 않는 것은 마치 비단 천에 똥칠, 먹칠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견성 이후에도 계행을 철저히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유도 하나의 본보기를 보여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후학들이 대도인과 같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서 막행막식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지요. 마음과 행이 경계에 끄달린 모습은 아무리 숨겨도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거짓말로는 안 되는 거죠. 그릇이 안 되면 거기에 무엇을 담을 수 없는 이치지요. 부처님께서 500생 동안 보살로 거듭 나고 죽으며 보살행을 닦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성문ㆍ연각 역시 전생의 공부가 바탕이 되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한번 열면(견성하면) 깨지는 일은 없습니다. 우주가 깨질 때는 너도 나도 없습니다. 깨침의 상태에서는 먼지 하나도 없습니다. 말을 갖다 붙일 곳이 없지요.
ㅡ 월간 <선문화> 6월호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