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 것도 하지 않기
그 때,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정도로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순간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미지의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자신은
전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것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단지 '일어나는' 일만
있을 뿐이었고,
사람이
거기로 향해 가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지향하는 일을 그만두었을 때에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대오(大悟)의 동기,
그 순간, 그 후,
거기에
만약 결정적이고 보편적인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심신이 다함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노력하여' 무위가 되는 것은,
그 자체 가운데에
이미 '기대'가 있다.
이미 '동기'가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기대를 가진 상태로서의
무위는
소용이 없다.
좌선이나 명상이란
본질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철저하게
아무 것도 하지 말 것.
대오(大悟)는
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자체 외에는 없다."
철저하게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앉아 있든지
잠들라.
의식에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주의도 하지 않기.
있는 그대로
있으려고도 하지 말것.
아무것도
절대 하지 않을 것.
움직이지 않고,
거기서
죽을 각오로 있으라.
조금이라도
마음이나 의식이나 주의를
자신으로부터
움직이지 말 것.
과연 이것은
'자기 의식'의 움직임인가,
'자연적 의식'의 움직임인가?
와 같이
헤매서는 안 된다.
만약 혼돈스러우면
그대로 내버려 두라.
그 사이에
그것들은 사라질테니.
어찌되었건
당신이 아둥바둥하는 것이,
가장 결과가 나쁘다.
당신이 만약 무엇인가로
아둥바둥하면,
그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그때 당신은 반드시
무언가를 이상적인 목표로
삼고 있을 것이다.
그 이상적인 당신과
현상의 당신 사이에
거리가 있기 때문에,
당신은
어떻게든 하려고 덤벼든다.
그렇게 하는 수행에는
끝이 없다.
그것은
끝없는 헛수고일 뿐.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자신을
죽여버리는 것이,
바로 나의 방법이다.
일체의 작위적(作爲的) 좌선도
소용없다.
그 어떤 방편도 소용없다.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된다.
앉을 때는
좌선조차 해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
무엇인가를 <자신이 행한다>라고 하는 마음가짐을
약간이라도 가지고 앉아서는 안 된다.
단지
'잠시 휴식'한다고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앉아라.
그래!
그 느슨한 자세,
그것이야말로
정말 필요한 좌법이다.
그것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좌법이다.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뭔가
<저지르려고> 하는 마음이
사라진,
그 흐리멍덩하게
앉는 방법이야말로,
내가
당신에게 필요하다고 하는 것.
왜냐하면
그 느슨함 가운데에는,
'뭔가를 위하여 앉아 주자'라고 하는
당신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나 인류의 목표,
달성되어야 할 이상이며,
깨달음을 위한
좌선이라는 등,
그러한 것들(즉 일체의 사고)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면,
대오(大悟)가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좌선자들이
이후로, 앉게 되면
그것은
정말 깊이,
구하지 않고,
단지 '쉬는 일'이라고
마음 먹도록.
좌선이 즐겁고,
앉는 일이 빙긋이 웃을 정도로
즐겁지 않으면 소용없다.
그것은 편안해야 하고,
거기에는 어떤 터득도 필요 없다.
쓸데없는 일을
첨가해서는 안 된다.
호흡에 주의하지 말고,
지금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는
기백이나 주의도 필요없다.
그런 것은 하지말라고
내가 말하는 것은
당신의 내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의미가 없다.
단순한 허망함이다.
그러면
그 단순히 꾸밈없는
허망한 상태로
왜 있을 수 없는 것일까?
그건 모두
당신이 목적을 달성하고픈
욕구로 인해
차분히 가라앉지 못한 까닭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고
편안히 앉는 것에
당신이 지겨움을 느낀다면,
당신은
전혀 <의식이 앉아 있지 않다>는
뜻이 된다.
깨달음이란,
그것은
'존재'나 '무'로부터
당신에게 보내지는 선물이다.
그것은
당신의 창작물(創作物)이 아니다.
당신이 주의를 기울인
노력의 결정이 아니다.
당신이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고,
일체의 선(禪)의 목표도,
그리고 세속의 목표도,
모두 무시하고,
무위 가운데 안착하는 것.
그것을
심리적인 차원에 한정시킨다면,
실질적으로는
당신의 전면적인 죽음이다.
우리들은
세상에서 달성하거나,
희망을 가질 것을
주입받아 왔다.
하지만,
그것들을
전부 떨쳐내지 않는다면,
무욕(無慾)의
"진공(眞空)의 정지점"은
실현되지 않는다.
따라서, 마음으로부터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정적 속에 앉아,
단지 편안히 앉아서,
기다림 없이,
기대하지 않고,
편안히 느슨해져,
유유자적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경우뿐이다.
그것은
거의 당신이 죽어있는 것과 같은 것.
공포나, 아픔,
위험이나 병환 속에서의
죽음이 아니라,
정적과 무위 가운데서의
죽음과 같은
편안한 좌선(坐禪)이 필요하다.
이러한 철저히
'무의미한 좌선'이야말로,
완전히
'무의미한 깨달음'을 가능하게 한다.
만약 깨달음에
의미나 의의가 있다면,
반드시 그것은
또 다른 고뇌나 혼란을
당신에게 만들고,
세상에 만들어낸다.
완전히
'아무것도 아닌 것'이
깨달음의
꾸밈없는 아름다움이다.
거기에는
불법이다 따위의
지저분한 말은 필요 없다.
ㅡ 무묘앙 에오 <폐허의 붓다> 중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