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의 방법
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당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중생의 마음은 머물게 된다.
먼저 마음이 머무는 곳을
알아야 한다.
마음이 머무는 곳은
색성향미촉법이다.
이것은 '육경'을 의미한다.
감각기관인 '육근',
즉 안이비설신의가
감각대상인 육경,
즉 색성향미촉법을 접촉했을 때
'육식'이 발생하면서
머물게 된다.
머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게 중요하다.
머무는 이유는
색성향미촉법에 "실체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즉, 내가 보는
모든 형체에
실체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마음이 거기에 머문다.
그래서
온갖 감정이 생기고,
분별이 생기고,
미움과 기쁨이 생기게된다.
마음이 머문바 없이
마음을 내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위와는 반대로 하면 된다.
즉 색성향미촉법에
실체가 없다는 걸 알면 된다.
내가 보는 모든 것에
실체가 없다면,
마음은
형상에 머물지 않는다.
보되
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허상일뿐,
실체가 없다고 알면
나머지 성향미촉법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마음이 머물지 않는다.
마음이 머문다는 것은
곧 실체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실체가 없다는 걸 알면
마음은 머물지 않는다.
실체가 없다는 것이
바로 무아(無我)다. 무자성을 의미한다.
無我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첫째,
나 자신의 실체가 없다는
'人無我'다.
둘째,
나 이외의 모든 대상(색성향미촉법)에
실체가 없다는 '法無我'다.
내 안에
뭔가가
실체가 있다라고 여기고,
바깥에도
뭔가
실체가 있다고 여긴다.
이게 근본적인
고통과 윤회의 원인이다.
이게 무명이고,
이게 전도몽상이다.
없는데
있다고 여기니까...
내 마음 스스로
없는데
있다라고 착각한다.
이 금강경에서
색성향미촉법에
마음이 머물지 말라는 의미는
法無我에 해당된다.
하지만,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바로 人無我다.
人無我는
오온을 분석해야만
알아낼 수 있다.
즉 '조견오온개공'이다.
통상 인무아는 쉽고,
법무아는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둘 다 깨달아야만
마음에 동요가 사라진다.
나의 내면이 텅 비었으나,
바깥 사물이 실체가 있다고 여긴다면
마음은 바깥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선은
인무아를 먼저 깨닫고나서
법무아를 깨닫는게 순서다.
無我라는 의미는
실체가 없다라는 뜻이다.
색성향미촉법에
실체가 없다.
즉 허상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금강경 맨 마지막 편에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아무것도 없다고
관하는게 아니라,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이 말씀처럼
허상이라고 관해야한다.
이것은 곧 空性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무아'가 핵심이 아니라,
불법의 핵심은 '공성'이다.
색성향미촉법에서
色을 예로 든다면...
학교 건물 위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태극기가 色이다.
태극기는
과연 실체가 있을까?
실체라는 것은
혼자 독립적으로 뭘 할 수 있는
그 주체를 말한다.
즉 자성이다.
태극기가 혼자 펄럭거릴까?
절대 그렇지 않다.
태극기를 매달은
국기 봉이 있어야 하고,
또 바람도 있어야만 펄럭거린다.
태극기 혼자서는
절대 펄럭거리지 못한다.
국기봉이 없다면
거기에 태극기는 존재하지도 못한다.
국기봉에 의지해야만 한다.
국기봉 역시 건물에 박혀 있어야 한다.
국기봉 역시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못한다.
건물 역시 땅위에 의지해서 존재한다.
이 땅이라는 것은
지구라는 한 덩어리의 한 부분이다.
이 지구라는 것은
매 순간순간마다 빙빙 돌며,
매 순간순간마다 이동한다.
즉, 자전과 공전을 한다.
한 위치에 고정되어져 있지 않다.
또 이 지구라는 것은 공간에 의지해 있다.
우주공간이라는 허공에 붕 떠 있다.
이와 같이 색이라는 것은
서로 의지해서만이 존재할 수 있다.
나머지 성향미촉법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색성향미촉법에는
실체가 없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상호 의존적으로써만이
존재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실체가 없다.
독립적으로
혼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문제는,
내 마음만 실체가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이란
우리의 몸과 마음이 접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색성향미촉법에
실체가 없음을 안다면,
마음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는 어차피
감각기관, 즉 안이비설신의가 있다.
그러니 바깥 경계인
색성향미촉법을 대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여기서 색성향미촉법에
실체가 있다고 믿으면
마음이 거기에 가 있을 수 밖에 없어,
탐심과 진심이 나오고..
색성향미촉법에 실체가 없다는 걸
안다면
마음은 거기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應無所住 而生其心
이 말씀은
색성향미촉법을
空性으로 알라는 말씀이다.
空性이란
'완전히 없다'
라는 뜻이 아니다.
'실체가 없이 텅 비어 있다'
라는 뜻이다.
또 空性에
뭔가 실체가 있다라고 여기면
안된다.
이것만큼 큰 병은 없다고 한다.
空性이라는 것도
역시 연기법으로 존재하는지라
실체가 없다.
'연기법'과 '공성'은 한 몸이다.
이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색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어, 즉 '무아'이고
실체가 없어, 텅비어 있으므로 '空'이다.
색의 특징ᆞ성품이 空이다.
그래서 空性이다.
空이라는 것도
역시 색에 의지해있다.
이것이 공즉시색이다.
연기, 무아, 공성!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금강경에는 무아ᆞ공성을
어떻게 직접 깨닫는가에 대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다.
그 내용은
수능엄경에 자세히 나와 있다.
개운조사께서 번역하신 수능엄경이
주석이 매우 상세히 나와 있어서,
무아ᆞ공성을 직접 체득할 수 있다.
연기법은
이론적으로 유추해보면
알 수 있지만,
공성은
직접 체득하는 수 밖에
방법이 없다.
무아ᆞ공성을 체득함에
가장 중요한 것은 '계율'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계율을 지키는 것...
그리고 수능엄경에 나온
방법을 쓰면
쉽게 되리라 믿는다.
수능엄경에서도
역시 분명하게 나와 있지만,
말세의 중생일지라도
그 방법을 쓰면
누구나 쉽게
무아ᆞ공성을 깨달을 수 있다
라고 하셨다.
하근기일지라도
쉽게 깨달을 수 있다고
나와 있다.
어려운 것은
바로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
계율을 지키지 못해서 못 깨닫는다.